다시찿는 몽골(2차)
세상사 거리낌없이 괴나리 봇짐에 꿈을 담고 발길 닿는데로 갈수만 있으면 그 얼마나 좋을까 마는 지갑 속 손님이 크지 못해 갈길 또한 짧을 수 밖에 없는데 그레도 내 발길이 닿은 몇 안되는 나라중에 거듭 밟은곳이 몽골이라면 이는 분명 적잖은 인연임에는 틀림이 없으리라
2004년 활을 메고 4박5일(8,19 - 8,23)동안, 1990년 사회주의 체제에서 아직 자본주의의 걸음마를 걷고 있는 이 땅을 찾았을 때는 거리에 한글 이정표를 그대로 붙인 차량들이 자랑스럽게 질주했고 운행되는 자동차의 7할은 한국 자동차 였으며 한국인에
대한 호감 또한 세상에서 가장 우호 적이었다 그러던 몽골이 어떻게 변하였는지 가슴에 의문표를 안고 몽골을 향해 짐을 꾸렸다,
출발 몽골을 향해
2011년 8월3일 새벽 02시에 잠을 깨어 부랴 부랴 세수를 하고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 경주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02시 30분, 경주에서 동행할 전사두 고창룡, 서포 서원석 예본 윤태경 향원 김해규, 호림정 사우들께서 다나와 있어 반갑게 인사 하고 03시30분에 출발하는 인천 공항행 리무진에 올라 5박 6일의 여정에 올랐다
계절이 그런지 2004년 출발 때에도 태풍 매미가 남부에 상륙 한다는 예보를 뒤로 한체
인천 공항으로 향했는데 이번 여행도 태풍 소식을 듣고 12시에 출발하는 몽골행 항공기가 비행에 지장이 없을까 걱정을 하면서 06시50분 인천공항에 닿아 09시에 만나기로 한 서울팀 들을 기다리다가 약속시간을 전후해서 화랑정 유해경 유충상 자매와 최진희 박사 김기훈 교수 김병태 선생, 여주 안양정 마지막으로 우리의 리더 황학정 한창희 국문연 회장을 만나 순조롭게 수속을 밟아 12시 05분 출발 하는 항공기를 기다렸으나 우리를 싣고갈 미아트 항공기는 몽골에 출발 자체를 하지 않다가 무려 여섯시간을 기다린 끝에 오후 06시15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해서 03시간02분을 항해한 끝에 오후09시17분에 몽골 울란바타르 징기스칸 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입국 수속을 받던 중 경주에서 가지고간 소주 42병과 안주는 무사 했으나 서울에서 가져간 소주 35병과 육포들 중 소주 10병 외에는 검색대 주변 쓰레기통에 압수되는 안타까움을 격으면서 당초 개별 분산 휴대를 간과한 것이 역시 문제가 되었음을 교훈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에서 하루
징기스칸 공항에서 작은 문제가 있었으나 무사히 몽골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입구에서 현지 여행사 사장 박녕희45세정도 와 현지 가이드 가나(복잡한 본명을 줄여 부른이름)28세를 만나 첫인사를 하고 비행기의 연착으로 당일 일정은 모두 접고 여행사에서 준비한 미니 버스에 올라 숙소를 이동하였다
그리고 시내로 향하는 도로는 변화가 없었으나 도로가에 한국기업의 전시장 같던 7년전의 우리 기업 간판들은 몇 안되고 일본기업 간판과 몽골 기업들의 간판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과 운행되는 차량들 중 일본 도요다 차량이 주류를 이루는것을 보고 일본의 몽골 진출이 심상치 않음을 피부로 느끼며 시가지 도로 또한 변화가 거의 없었으나 도심지에서 지어진 고충건물이 수없이 늘었고
지어지는 건물의 타워 크레인들이 옛 건물 숫자 만큼이나 많은것을 보면 도심의 개발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고 시가지는 벌써
그 범위를 산중턱을 넘어 길게 외곽지로 뻣어 나가 도심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으나 산중턱의 게르와 소형가옥들은 우리나라의 빈민촌을 연상하게 하였고 그 옆에 자가용 차량이 머물러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대조가 되지 않는 해석하기 힘든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공항을 떠나 숙소까지의 변화된 모습을 느끼며 8월3일 우리보다 시차가 한시간 늧은 현지시간 오후 10시경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리치필드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모두 샤워를 하고는, 예본과 내가 묵을 방에 모두 모여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나누며 그 귀하게 가져간 이슬주를 거하게 마신 후 잠자리에 들었다
몽골 이틀째
몽골의 밤은 짧아 아침05시만 되면 사방이 모두 밝았지만 우리들은 전날 기다림과 이동에 지쳐 아침 9시경 일어나 식당이 없는 호텔이라 로비 쇼파와 테이불에서 도시락에 담은 한국식 식사를 하고 10시경 대성 그룹에서 운영하는 사이트를 향해 길을 나섰다
사이트를 가는 길이 테널지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과 일부 중복되어 7년전 모습과 비교 할때 도시는 10여리를 넘게 팽창했고 간간이 게르가 있던 초원에는 우리의 팬션 형태의 건물들이 무수히 지어졌고 또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가다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였으며 기름값은 우리나라 가격의 5분의 4정도 였고 경유가 휘발유 보다 비싼 것이 특징 이었다
주유를 마치고 부근의 마트에서 당일 소요될 물품을 구입하면서 내부에 진열 된 것을 보니
그 또한 7년 전 소비재의 반 이상이 한국 제품 이던 것이 이제 1할 정도가 한국제품이었으며 진로소주는 3천500원으로 우리나라 식당가격보다 500원정도 비싸다고 하면
애써 몽골행 비행기에 주류를 실어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물건을 구입 하고 용변을 보기 위해 마트에서 20여 미터 떨어진 초원의 간이 화장실로 가다보니 우리나라의 들깨를 축소 시킨 듯한 들꽃에서 그윽한 향기가 코를 자극해 몽골의 맑은 공기와
우리 일행은 마트를 떠나 대성사이트를 향하면서 간간이 면단위 형태의 집단 거주 도시형 촌락 들이 생겨난 것을 보며 7년전 울란바타르 인구가 70만명 이었던 것이 그새 150만명으로 팽창한 모습을 실감하며 목적지를 향했으나 사이트를 찿지 못해 많은 시간을 허비 할 수밖에 없는 이외의 현실 즉 초원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우리의 리더 대성 한창희 상무도 2회에 걸쳐 방문을 했고 더욱이 현지 관광회사 박사장도 2회에 걸쳐 가보았고 현지 가이드 가나도 가본 곳을 몰라 지나가는 현지인에게도 물어보아도 잘못 알으켜 줘 찿지 못하는 초원의 길 찿기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새롭게 느끼며 나름데로 이유를 알았다면 끝없는 초원에 특별한 랜드마크가 될만한 지형 지물이 없고 비슷한 능선이 거기가 거기 인것 같으니 초원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희한한 경험을 하면서 본래 잡은 시간보다 최소한 30분을 더 해매서 대성 사이트를 찿았다
대성그룹은 오래전부터 몽골진출을 계획하고 그 전초 기지로 울란바타르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날라이 지역에 100만평의 땅을 30년간 임차해 GEEP(Green Echo Energy Park) 를 세우고 풍력과 태양광 발전시설 그리고 해바라기등 농업적 실험을 하고 있었으며 현지 김종철 지사장(35세)은 벽에 걸어둔 몽골의 자원지도를 활용 몽골의 자원 , 경제의 변화 세계 여러 국가의 몽골
자원 확보경쟁. 금융시스템(금리 년12%)등과 몽골에서 그리 좋지 않게 달라진 한국의 위상 몽골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감한 도전 정신, 기다릴줄아는 인내 , 자존심이 강한 몽골인을 존중해줘야 하는 자세 등을 설명하면서 불모의 땅에 개척정신으로 진출한 대성의 첨병답게 해박한 지식과 자신감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였으며 그의 브리핑을 듣고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하면서 끝없이 펼쳐진 이곳의 풍광을 보면 광활한초원, 약5키로미터 떨어진 톨강과 더멀리 테널지국립공원의 산맥을 바라보며 가슴을 펼쳐 대륙의 일부가 되어 보았다
대성사이트에서 톨강을 배경으로 저 멀리 보이는 것이 대성 사이트 건물 브리핑을 하는 대성의 첨병 김종철지사장 新地征服 男兒魂 새로운땅을 정복하는것은 남자의 혼이요
望望大地 丈夫家 넓고 넓은 대지는 장부의 집일지니 萬里飛越 得以地 만리를 날아가 얻은 땅은 韓國男兒 氣蓋世 한국 남아의 세상을 덮는 기운 일세 (대성사이트) 대성사이트를 떠나 다음 행선지는 가이드에게 맞긴 체로 그야말로 제데로 된 초원을 달려 보았다 차를 타고 가로 질러 가는 초원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초원, 어쩌다 보이는 산들은 초원에서 약100미터높이가 안 되는 산들로서 초원과 완만한 능선을 이루고 그 겨드랑이에 양이나 염소때 말이나 소때등이 보이고 그보다 더 드물게 하얀 게르가 낯 달처럼 나타 나곤 했으니 끝없는 초원!! 저언덕을 넘으면 또다른 초원이 초원을 달리고 또 달리다 마주친 회색일변도의 건물 집합채가 보여 군사 시설인 것이 직감 되어 가이드에게 물어 본봐 1993년까지 소련군이 주둔했던 병영으로 지금 몽골군이 인수해서 일부 사용하고 있는 군사 시설이었고 대성사이트를 출발한지 초원을 한시간 여 달린 뒤 초원의 도시 존모드란 도시에 다다랐고 존모드란 나무가 많다는 뜻이고 이 도시는 곧 징기스칸 공항이 옮겨와 그야말로 국제적인 공항이 건설될 희망의 도시 였으며 우리 일행은 이도시의 재래시장을 보려 했으나 시간이 없어 지나쳐 약30분후 만치르사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한때 20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 했을 만큼 대사원 이었으나 소련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다만 대형 청동 솥만이 그 옛날 역사를 증명 해 주는 것 같았고 작은 박물관에는 소녀의 종아리뼈로 만든 피리와 두개골로 만든 밥그릇이 있었으며 스님들이 인두골에 밥을 먹으며 신라승려 원효가 밤중에 달게 마신물이 깨어나 해골에 담긴 물이였다는 것을 알고 일체 유심조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과 같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한 것이라 나름데로 짐작을 하였으며 이 사찰 유적지에는 작은 자연사 박물관이 따로 있는데 몽골에 사는 여러 짐승들과 조류 식물들이 전시 되고 있었으며 특히 산닭이라는 맛있게 생긴 조류는 상처나 병이 난 사람이 이 고기를 먹으면 일주일만에 상처가 나을 만큼 신묘한 조류라고 하며 이 산닭이 없으면 이를 먹은 사람을 잡아 먹었다고 할 만큼 약효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수렵이 금지 되어 있어 이를 맛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으며 박물관을 지키고 않아있는 직원의 책상다리는 사슴의 뿔로 만들어져 있어 모두 신기해 했으나 몽골의 유적지는 어딜 가나 경제적인 이유에서 인지 잘 관리 보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었다 사찰의 허물어진 터에 자라는 많은 잡초들 가운데 몽골인 들이 삶아 그물로 머리는 감으면 머리가 검어지고 대머리가 없어진다는 “하드가”는 우리나라 쑥과 비슷한 약 1미터 정도까지 자라는 식물로 몽골 어디에서나 널려 있었으며 이풀은 스치기만 해도 심한 통증과 동시에 살이 도틀도틀 붓는 현상으로 나도 여기에 스쳐 통증을 경험한 바가 있고 이풀을 이용해 대머리 예방 비누가 개발 되어 있다고 하니 머리카락이 귀한 사람으로서 관심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스치면 쏘고 바르면 발모를 촉진한다는 “하드가” 만치르 사원 관광을 마치고 울란바타르 로 돌아와 저녁을 먹기 위해 한 식당을 들었는데 식당의 전시물이 박물관을 방불케 하였으며 그중 긴 거치대가 있는 화승총들은 정말 신기했고 육사 김교수께서는 크게 관심을 갖고 관찰과 사진을 촬영하였으며 이곳 상부벽면에 걸린 1950년대 사진중에는 후로치초프, 모택동 , 김일성, 호지명등 공산국가 최고 위정자들이 함께한 보기 드문 기록 사진 등이 있어 일행 중에는 한결같이 사람을 많이 죽인 자들을 모아 놓았다는 비난을 하였으나 접하기 힘든 자료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몽골에서3일째
호텔로비에서 전날과 같이 도시락식 한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첫날 일정이었던 자이슨 승전기념비에 오르면서 주변을 관찰한바 예전에 계단에서 마두금을 연주하면서 흐미로 아리랑을 부르던 그 모습들은 간곳없고 주변은 국립공원임에도 불구하고 권력 있는 자 들에 의해 새로운 건물들이 자연을 파괴하면서 건설 되고 있어 법위에 군림하는 자들의 횡패가 몽골에서도 자행되고 있음에 서글픈 마음을 금할 수 없었으며 승전 탑에 올라 울란바타르 시가지를 조망한바 급속도로 팽창하고 변하는 모습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승전탑을 내려와 근처에 있는 이태준 의사 추모 공원을 찿았다 이의사께서는 일제치하에서 조국독립을 위해 고국을 떠났고 이 먼 나라 몽골에서 당시 화류 병이라고 하던 매독을 몽골 땅에서 몰아내어 몽골에 박애정신을 실현한 분이었으나 몽골의 번영과 회생을 멀리 할려던 백러시아계 마피아로부터 목숨을 잃어 이곳에 초라하게 묻혔으나 1991년 한,몽 외교관계 수립후 국내 연세대학교 동문회와 뜻있는 기업인들에 의해 공원이 그 규묘를 갗추었으며 7년 전 보다 정자가 건립 되는 등 관리가 비교적 잘 되고 있어 고맙게 생각되었다,
이의사의 추모 공원을 나와 최후의 왕 벅드칸의 겨울궁전을 관람하였으나 몽골의 관광자원 관리가 허술해 정원의 잡초는 무성하고 나무는 삭아 도색이 벗겨져 외관이 초라하고 외세에 의해 명맥을 유지 해 갔던 힘없는 왕조의 몰락을 보는 것 같은 전시품에도 관광객을 맞이하는 안내원도 역시 피동적이라 별 흥미가 없는 관광을 뒤로하고 가장 기대되는 활쏘기 말타기 아름다운 별을 관찰 할 수 있는 초원의 게르 체험을 위해 테널지 국립 공원으로 향했다
그 길은 이미 한번 가본 곳이라 눈에 익은 풍광들이 있기는 하나 그새 톨 강 언저리와 경관이 좋은 초원 언덕 아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캠프들이 들어 서 있는 것이 큰 변화가 아닐수 없었고 톨강을 건너던 다리는 나무다리에서 콘크리트다리로 건설해서 금년에 개통을 했다고 하며 그 옆에 나무다리도 그대로 서 있었고 먼 길을 가다보니 생리적 현상을 해결해야 하나 초원에 마땅한 자리가 없어 남자들은 바위언덕을 향해 도를 닦고 여자들은 물이 흘러간 고랑을 찿아 행복을 꾸었으니 이도 또한 광야의 추억이었으며 최박사가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않았으리라 믿으며.
거북바위를 멀리 돌아 톨 강 상류에 있는 한 골프장에 이르니 골프장의 잔디는 볼 수가 없고 필드는 몽골의 초원 그대로이고 그린은 인조잔디로 되어 있어 많은 공을 가지고 게임을 해야 할 것 같았으며 우리는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 먹을 점심을 기다리며 근처 톨 강 상류에 이르니 차가운 물이 하늘같이 맑고 주먹이나 메주 크기만 한 돌들이 바닥에 펼쳐져 있는데 돌을 건드리니 버들치 같은 고기들이 더러 있어 매운탕 거리로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물수제비를 뜨면서 물장난도 하고 근처 청년들에게 말을 빌려 타기도 했는데 이들은 사전에 요금을 정하지 않으면 나중에 엄청난 요금을 요구하기도 해서 곤란을 겪기도 했으며 그 중에는 한국에서 공부를 한 청년도 있어 대화가 일부 통해서 몽골은 어디가나 한국을 다녀간 사람들이 많아 다행이기도 하나 그중에는 좋지 않은 감정이 있는 사람도 많아 마냥 좋아 할 수만 없는 일이었다
그곳 식사는 주 메뉴가 소고기였으며 누린내가 좀 나기는 했어도 먹을만 했는데 우리 호림정의 서포는 식성에 맞지 않아 가져간 컵라면 신세를 지고 말았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가 묵을 캠프촌으로 가면서 산계곡과 산비탈에 피어 있는 야생화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그 향기 또한 은은해서 들뜬 기분을 더욱 상쾌하게 하여 주었고 가는 길에 거북바위를 들렀는데 예년에 자주 없던 비가 금년에 유난히 만다는 그 비가 내려 간단히 사진만 찍고 돌아 나왔으며 확장 공사를 하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려 부자바위 밑에 한국사람이 운영하는 캠프에 도착 하였으며 캠프에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장애자 복지 사업으로 여행을 보낸 장애 학생들과 보조자 그리고 인솔자들이 말을 타고 있어 우리는 그들이 초원을 한 바퀴 돌고 올때까지 기다리다 그들이 도착한 후에 말을 타게 되었는데 우리 경주에서 간 5명중 4명은 미리 승마복을 입고 타려고 하니 마주 소년들이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우리만 유달스럽게 탈수가 없어 일행과 평보로 타기로 하고 말에 올랐는데 화랑정의 유자매 께서는 처음에 말에 겁을 먹었으나 점점 대담해저서 나중에는 콧노래를 부르는 것같이 신이나 보였다
평보로 초원을 한 바퀴 돈후에 예본, 향원, 장천과 같이 아무래도 아쉬어 마주들에게 사정을 해서 말을 빌려 거침없이 달렸다
비록 말은 적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에 말을 체찍질 하며 달리는 기분은 내가 그렇게 갈구 하던 것이었기에 그 통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 이었다
한참 신나게 말을 달리는데 마주 소년이 그만 달리라고 해서 아쉽지만 승마를 그만 하고 말을 몰아 일행이 있는 캠프에 도착해서 게르를 배정받아 짐을 풀고 간간히 물이 나오는 샤워장에서 말 타면서 흘린 땀을 씻고 한국식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밤 열시 경에 별자리를 관찰하기로 했는데 이는 국내 어느 천문연구팀의 일원인 송일석 약 35세 되는 청년이 별을 관찰하기 위해서 이 캠프에 와 머물면서 오는 관광객에게 천체 망원경으로 맑은 몽골하늘의 별을 관찰토록 한 것으로 우리는
초저녁에 비가 계속 와서 보지 못하다가 잠이 들었고 인내롭게 밤 두시 까지 기다리던 사람들은 아름다운 밤하늘의 천문학적 관찰을 하고 그 증거 사진을 최박사가 남겨 두어 아쉽지는 않았다
잠이깬 이튼날 우리 게르에 같이 잔 예본 서포와 같이 캠프 뒤 부자 바위에 올라 산 넘어 초원의 다른 캠프들을 바라보며 테널지의 산과 초원을 가슴에 안아 보았다
우리가 뒷산을 오르는 동안 김교수 한회장 향원등은 앞산을올라 캠프를 둘러산 산정을 돌아내려와 아침을 먹고 테러지정 공사를 진행하기 전에 현지 청년들의 양 잡는 모습을 보았는데 생명을 죽인다는 점에서는 잔인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들은 이초원의 상식적 일반 행위라서 자연스럽게 진행을 했고 그 과정을 보면 필요한 양을 선택해서 전날 잡아 묶어 두었다가 아침에 양의 앞발은
앞발끼리 뒷발은 뒷발끼리 묶은 다음에 양의 배가 하늘을 보게 잡고 명치 보다 약간 아랫 부위에 약15센티 정도 칼질을 한 다음
그곳으로 손을 넣어 횡경막을 넘어 심장에서 나가는 동맥을 끊어 피가 횡경막 상부에 고이도록 하고 배를 자른 그곳으로 내장을 일부 노출시켜 공기가 들어가게 하여 죽게 한 다음 양다리로부터 가죽을 벗기기 지작 해서 가죽을 다 벗기고 배를 갈라서 횡경막 윗부분에 고인 피를 준비해간 그릇에 퍼 담은 후 내장을 터트리지 않은 체 제거하고 몸체를 해체 하는 방법으로 약 40분간 진행된 작업 이었으며 이 양고기는 당일 우리가 먹을 허럭의 재료 고기가 되었다
양의 해체 하는것을 본후 캠프 아래에 있는 배구 네트기둥을 뽑아 현지가이드와 청년의 도움을 받아 김교수께서 중국 일본등 해외 원정때마다 가져다닌 솔포를 설치 했드니 근사하게 테널지 정의 과녁이 준비 되었고
이어 도착한 몽골 궁사들과 상견인사를 가이드 가나의 통역을 통해 거창하게 하고 캠프에서 허럭으로 점심을 먹었는데 허럭은 양고기를 스텐우유통에 양고기와 달군 돌을 물없이 켜켜히 넣고 뚜꼉을 닫은 후 약 3시간 후에 먹는 것으로 고기맛은 연하고 국물은 물을 붓지 않아서 진한 맛 그대로 인데 가능한 현지식을 하는 입장에서는 괜찮은 맛이었고 우리는 몽골 팀에게 좋은 점심을 대접 한 후 활터로 옮겨서 몽골팀은 자신들의 타켓을 만들기 시작 했는데 내가 보던 종전의 몽골 타겟과 달라 가나에게 물어보니 가나는 이번에 온팀이 자신의 고향 에서 온 사람들이라 이 방식과 다른 방식도 모두 알고 있어 대충의 설명을 들으니 몽골은 부족 마다 활 쏘는 방식이 다르고 크게 나담 축제때 경기되는 방식을 보면 우리 민족과 뿌리가 같은 브리야트식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관혁을 걸어놓고 활을 쏘고 그전에 많이 보았던 하락솔(흐럭슬?)방식은 사거리 40,60,또는 70미터에 횡으로 약30센티(?)정도 높이로 줄을 치고 그 아래에 나무로 만든 벽돌같은 것을 늘어세우고 그것을 직접 맞추거나 화살이 슬라이딩으로 벽돌을 맞추어도 득점하는 방식이고
이번의 방식은 토와(톨?)방식으로 40또는70미터의 거리에 치코라는 가죽띠를 감아 만든 주먹크기의 공을 한 사람당 2개식을 늘어놓고 거기에서 약 3미터 앞과 뒤에 우트무크(으트므크?)라는 흙담을 만들어 사선에서 쏜 살이 앞의 우트므크를 건드리지 않고 넘어 치코를 맞추어 맞은 공이 뒤의 우트므크를 넘어야 득점을 하는 방식 이었어 몽골의 새로운 활쏘기를 또하나 보았고 뒤편 우트므크의양귀는 구부려 반원을 만들고 좌측팀원이 맞춘 공은 좌측귀에 일시 보관하고 우측팀원이 맞춘 공은 우측에 일시 보관하였다가 그 보관 장소보다 약 1미터 앞쪽에 좀 더 큰 보관 장소를 만들어 한 팀이 맞춘 모든 공을 거기에 보관 했다가 경기가 종료 하면 보관된 공을 확인 하는 방식을 취했으며 마지막에 공이 2개가 남으면 20미터에서 쏘고 1개가 남으면 10미터 거리에서 쏜다고 하는 것도 알고 화살 또한 하락솔 방식과 다른 굵은 머리의 화살을 사용했다
모든 활쏘기 준비를 마치고 우리도 몽골 활로 몽골 표적을 쏘아 보았고 몽골팀도 우리활로우리 표적을 쏘아보는 경험을 한 후 한몽 혼성팀을 구성했는데 팀명은 소주를 먹는 팀은 소주 팀 과자를 먹는 팀은 과자 팀으로 해서 경기를 한 결과 과자 팀이 승리를 했고 해가 대낯이나 몽골사람들은 일찍이 보내기로 결정을 했으며 이들을 일찍이 보내기로 한것은 몽골에서 250키로미터는 포장도로와 달라 많은 시간이 소요 되기 때문이고 밤이 되면 초원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어 그들을 보내기로 하면서 고맙고 아쉬운 김에 내가 가지고간 죽시와 장천께서 가지고간 카본시를 선물 하였드니 그들도 그들의 화살과 표적공인 치코를 주어 감사히 받고 아쉬운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 나의 제안으로 무제한 거리 활을 쏘기로 하고 경기를 했는데 거리낌 없는 초원에 마음껏 활을 당겨 활을 낸다는 것은 활을 쏘는 사람들의 로망이 아닐수 없었으며 무제한 거리 활 경기는 김기훈 교수가 300미터가까이 날려 1등을 하였고 화살이 떨어진
장소에 이정표가 활에 화살을 메운 형태라 테널지 정이라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얘기 하였으며 우리가 보이지 않은 화살도 가나는 능히 보고 있어 몽골인의 시력의 우수함을 증명 하였고 이날 경기 성적은 예본이 정사 1등을 여자 1등은 VIP가아닌 MVP는 유충강씨가 하여 길이길이 기념이 될 사건이었다
이날의 활쏘기와 전날의 말 타기는 초원에 한몸이 된 잊지 못할 낭만이었지만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한 체 숙소로 돌아와 피곤함에 모두 쓰러졌다가 그레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우리방에 모여 소주 파티를 한 후 늧은 잠을 청하였다
넷쨋날
아침은 역시 로비에서 전날과 같이 하고 수와바타르 광장에 들러 몽골의 중심부인 정부청사와 그 주변을 본봐 정부청사도 보수를 많이 해서 그 위엄이 더 하였고 시청 건물을 포함해서 많은 고층 건물들이 세워졌거나 세워 지고있고 한국인이 건설했다는 아랍에미레이트의 버즈듀바이를 담은 고층건물은 아직 개관을 하지 않은 상태이나 그 부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으며 시청건물은 검은 색으로 독수리 마크 비슷한 마크가 있어 경찰청 건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어 내기를 하기도 했다
몽골의 중심부를 보고 근처에 있는 국립 박문관과 자연사 박물관을 보았는데 전시품이 그리 많지 않았고 특히 자연사 박물관은 몽골 자연과 관계없는 동식물이 많았고 더욱이 조류 전시장의 한공간은 내용과 제목을 한글로 표기 한 것을 그대로 갔다두어 반갑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였다
양쪽 박물관을 다보고 몽골에 와서 말고기를 먹어봐야 된다고 하여 말고기 전문 식당에 들러 말고기 탕과 수육을 먹었는데 기름기가 적은 소고기 맛이었고 그런 데로 먹을만 했으나 서포는 밥을 한 그릇 부탁해서 가져간 고추장으로 식사를 할 수 박에 없었다
말고기점심 식사 후 케시미어 전문매장을 가기로 했다
나는 지난번 방문 했을때 일행에게 무식하게도 케시미어가 무언냐고 물었드니 양모 제품이라고 해서 양모는 울인데 하면서도 무식의 소치로 그런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실제는 몽골 염소의 겨울 솜털로 만든 것이라 하며 인도북부 케시미르 지방에서 유래한 것인데 몽골의 겨울은 영하 40도까지 춥기 때문에 염소의 털이 가장 우수 하고 몽골의 제품생산력도 우수 하다고 하며 우리는 몽골과 일본이 합작하여 그 디자인과 품질이 우수하다는 “고비” 라는 판매장을 방문해 상술로 수시 진행되는 듯한 패션쇼를 보면서 제품을 골랐으니 케시미어로는 지구상 제일 좋은 제품을 고른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만족해 했다
케시미어 매장을 나와 국립극장에서 몽골전통 공연을 보았는데 극장안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고 캠프촌에서 만남 장애 학생들도 다시 만났고 내부에서는 맥주와 감자튀김도 팔았으며 공연 장면을 동영상 촬영 하는 데는 20달러를 받고 순간 촬영은 5달러를 받았는데 최박사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5달러를 지불하고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촬영을 하였고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보는 불평등한 시간을 가졌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몽골 복장을 한 무희들이 몽골 전통춤과 기예를 보였고 흐미 가수가 나와 흐미를 하였으나 관광객을 위한 설명은 일체 없었고 그들이 자랑하는 흐미 또한 훌륭하지를 못해서 아마 흐미의 고수들이 외국으로 모두 나갔다고 들은 것이 실제적 영향 인 것 같았고 전체적인 느낌은 그저 시간이 남으면 한번 보는 정도의 수준 이었다
국립극장을 나와 마지막 만찬을 위해 중국식 음식점에 들렀고 이 만찬에는 몽골에서 양돈을 하는 정사장 이라는 사람과 대성사이트 김지사장이 참석 하였으며 정사장은 한창희 회장의 학사 장교 후배로 막역한 사이라서 이날 한회장 일행인 우리에게 저녁을 대접하기 위해 같이 한 사람으로 몽골에서 양돈의 입지 적인 인물로 약10년전 까지 한국에서 양돈을 하다가 우연히 몽골에 왔어 돼지 고기 값이 비싼것을 알고 이곳에 양돈을 하기로 하고 지금은 약 5000두의 돼지를 기르고 울란바타르의 돼지고기 70%를 공급하고 부산물로도 소세지등을 만들어 공급하는 개척과 도전으로 성공한 인사이며 식사중 몽골에서 격은 만은 일화를 들여 주었고 그중 몽골인 들이 한국을 무지개 나라(솔롱거스)라고 한다는 좋은 평과 근간 몰지각한 한국인들의 잘못된 비행으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해 오히려 한국인이라 하면 싸움을 걸어오는 수도 있으니 조심을 해야 한다는 주의도 일러 주었다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그동안의 소감을 한마디식 하던중 서포는 즉석 한시 한편을 읊어 좌중을 빛내 주었고 그 구절들을 김 교수가 옮긴바 있어 여기서 소개하면
觀欲大自然 대자연을 보고픈 마음에
抱弓三萬里 활을 끌어안고 삼만리를 날아왔네
乘車疾走陵 차를 타고 질주하는 언덕은
去去靑靑草 가도가도 푸른 초원이로구나
즐거운 만찬을 하고 다음날 여섯시 출국 수속을 받기 위해서는 새벽 두시에 일어나야 하였으나 그래도 마지막 한잔은 해야 한다고 하며 본부가 된 우리방에서 또 한잔 한 후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
귀국길
8월 8일 03:00부산하게 일어나 정시 귀국을 염려하며 고락을 함께한 여행사 박사장 현지 가이드 가나 가 이미 와 있어 전용 미니버스를 타고 징기스칸 공항에 도착해 보니 우리와 같이 입국한 장애자 학생들 일행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수속을 밟고 있었다
전날 출국 대비를 하면서 정시 출발이 어려울 것 같으니 라면등을 그데로 가져 가기로 했으나 설마 괜찮치 하고 남은 식음료를 몽땅 가나에게 주고 공항에 들었다
공항 대기실 텔레 비전은 호텔에서와 같이 한국방송 YTN 이 태풍 무이파이의 행로를 속보로 내고 있고 중국행과 일본행은 2시간여 만에 이륙을 하였으나 우리의 비행기는 소식이 없고 더군다나 공항의 안내 방송은 아예 없는 터라 방송으로 태풍 진로를 보고 이륙계산을 하면서 무려 일곱 시간을 기다린 끝에 출발하였고 출발 2시간 50분 만에 구름과 안계가 가득한 인천 공항에 어렵게 착륙하여 귀국 만찬을 하려고 계획 했으나 경주행 리무진이 30분후인 21시 45분에 있어 짧은 인사를 하고 당일 도착 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경주행 버스에 올라 여행의 피로로 잠이 든 체로 경주에 도착해서 바쁜 인사를 한후 해어져 각자 귀가하여 즐겁고 아쉽고 불편하고 지루 했던 몽골 여행을 마쳤다
몽골의 변화
몽골은 이제 많은 변화를 가져와 물리적으로 수도의 과밀현상이 주택난, 교통난, 환경문제 등을 예고 하고 있으나 2015년까지 2만달러 국민 소득을 목표로 하는 희망를 갖고 있으며 세계 8대 자원 부국이고 인구가 적어 가능 할 것으로 보이며 외국자본에 대해 자신들의 이익에 맞으면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취사선택하는 경제 정책도 취하는듯 하고 정치 또한 정경유착을 넘어 정경일체의 악습이 있기는 하나 20여년 자유민주주의 정체를 도입한 후 몇 년 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는 등 정치적 발전도 진보되어 희망의 나라로 변모 해 나가고 있으나 워낙 인구가 적고 기후가 열악해서 그 발전을 한계가 있을 듯 하고 외국인에 대한 경계는 중국을
가장 싫어하고 러시아는 한때 지배 하기는 했어도 그 관계가 좋은 편이며 한국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고 원망의 대상이기도 하여 몽골 한인들의 고민이 있다고 했다
몽골의 현실을 잘 나타 내는 것이 게르 주변에 울타리와 담장을 치고 그 안에 자가용 차를 세워 둔것이 지금의 변화를 대변 하는 것 같았다
초원의 중심되어
수천년 이은몸이
세파에 길을잃어
도회에 갇쳤는가
너른땅 언덕아래
마소때 어디두고
담안에 묶여진자유
푸른초원 그린다
담장 안에 갇힌 게르
여행후기
금번 여행은 양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기는 했어도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일정에 자연의 일부가 되어 생활의 찌든때를 모두 벗거낸것 같은 상쾌함이 있어 좋았고 언젠가는 다시 한번 몽골을 찿아 아쉬운 말타기를 3박4일정도로 초원을 누비며 이번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다
몽골초원에서
가슴에 부르지 못한 노래 하나 있었다
하늘이 모자라 이어붙인 한자락 초원에
바람의 말발굽으로 전설이 되기를 !
가슴에 풀어주지 못한 매듭하나 있었다
길이 모자라 재어보지 못한 살촉의 자유를 !
가슴에 나누지 못한 정하나 있었다
초원의 꽃보다 더 많은 하늘 밤꽃들과 지치지 않는 대화를 !
이제 - 나-
하늘이 다 덥지 못한 초원에 자유의 화살을 보내고
꽃보다 더 맑은 초원의 별들과 바닥이 비도록 정을 나누었다
그리고
전설처럼 바람으로 말을 달렸으니 !
독수리 앉은 몽골의산정 바위위에
내 그리운 넑을 얹어두고
또다른 초원의 전설을 지켜 보리라.......
2011, 8, 5 테널지
몽골에서 궁도대회를 마치고 2004.08.19~8.23(1차)
◆ 미지의 땅 몽골을 향해
창밖엔 어느 항구엔가 가 닿고 싶은 돗대가 펄럭이고 뜰앞엔 대륙을 가로질러 달리려는 말 갈퀴가 꿈틀대는 나의 의식 속에는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방랑의 욕구가 있었으니 이는 어쩔 수 없이 유목민의 피를 받은 몽골족의 후예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욕구를 채워줄 절호의 기회가 온것은 한.몽 친선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에너지 개발그룹 대성 그룹에서 한.몽 전통 궁도인 들의 친선 궁도대회 “초원의 궁사“ 대회를 기획, 몽골에서 그 첫 대회를 개최하여 전국의 국궁인 다수가 참석하게 되었고 경주에서는 협회장인 박동섭 사두를 포함해서6명의 사우가 4박5일(8.19-8.23)간 일정으로 몽골을 향했다.
떠나던 날은 마침 태풍 메기가 상륙해서 세찬 바람을 등지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출발했으나 인천 공항에서 활을 든 전국 각지의 안면 있는 궁도인 들을 만나니 반가움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걱정을 잊을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8.19일 인천공항에서 대한항공기에 올라 오후 7시40분 몽골로 향했다. 야간 비행이라 대륙을 횡단하면서 펼쳐지는 광활한 자연 경관을 보지 못해 아쉬웠으나 발아래 미지의 땅들을 상상으로 그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 몽골에서 첫밤
비행기는 3시간 반을 날아 8.19.11:10분 해발 1500미터의 몽골수도 울란바트로 상공에 도착했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불빛은 상상했던 것 보다 넓고 화려했다. 이어 착륙 기내방송이 있은 후에 비행기는 착륙했고 활주로 사정이 좋지 않은 듯 기체의 심한 진동이 있었으며 불빛에 비치는 공항의 모습은 프로펠러기가 드문드문 서 있는 것 외에는 우리의 중소도시의 버스 터미널과 같은 작고 단조 로운 풍경이었다. 비행기가 멈춘 후 단 한 개뿐인 보딩브릿지를 이용해 입국 심사대로 향하였고 일행6명은 교민 친구들이 보낸 사람들이 나와 피켇을 들고 우리를 귀빈실로 안내해 입국 심사를 형식적으로 하였으나 다른 탑승객들은 2시간 가까이 지루한 입국절차에 시달리고 있어 미안하기도 하였다. 입국 심사가 끝나고 수화물을 찾아 버스로 울란바트로에 있는 호텔로 향하였고 공항에서 시내까지 약 3키로 미터 도로변에는 세계 각 국 기업의 거대한 광고탑들이 전시장을 방불케 했으며 그중 우리나라의 삼성 현대 기아등 유수의 기업들이 다른 나라 보다 더 많이 진출해 있었고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의 로또 복권 광고탑이 그곳에 있는 것이 이채롭고 신기했다. 공항을 떠나 약20분소요 거리의 시가지에 있는 1급 호텔 바양골 호텔에 투숙했는데 말이 1급 호텔이지 우리나라 장급 여관 정도였고 서비스는 오랜 사회주의 시대의 습성이 그 시대를 살지 않은 젊은 종업원들에게까지 전수되어 나그네의 첫인상은 그리 밝게 하지 못했다. 호텔 투숙 전 한국인 현지 가이드는 밤10시면 모든 접객업소가 문을 닫았으니 숙소를 떠나지 말라고 하였으나, 우리를 안내한 현지 자동차정비공장 이 사장은 우리를 한.몽 교류진흥원 건물 지하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 주점으로 안내해 주어 그곳에서 우리 일행은 온종일 여행의 피로도 잊은 체 모처럼의 해방감과 이국의 특이한 분위기에 젖어 즐겁게 한잔 한 후 호텔로 돌아가 몽골의 첫 밤을 맞았다.
◆ 몽골 관광
1.초원관광
징기스칸, 국토: 남북한 합친 것의 6.8배, 인구: 약 300만 명, 끝없는 초원, 일년 중 8개월이 어름으로 덥인 유목민의 나라, 이것이 우리가 몽골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지식인데 이러한 것 외에 어떠한 것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전날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이상한 기대감에 모두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고 몽골의 아침풍경을 관찰했다. 이날 몽골의 아침은 한국의 쾌청한 가을 날씨와 거의 비슷했으나 습도가 적어 더 상쾌한 기분을 갖게 했고 호텔에서 내려다본 울란바트로 거리 풍경은 70만이 사는 수도라고 하기에는 의심이 갈 정도로 70년대 후반 우리의 지방 중소 도시와 같았고, 짧은 가을로 접어든 도시는, 가로의 풀들이 누른색을 띄고 8월 중순에 벌써 겨울 채비에 들어가고 있는 듯 했다. 전날 늦게 먹은 술 탓에 아침을 먹지 않으려고 했으나 막내 두암이 방방이 다니면서 방문을 차는 판에 모두 호텔식당에 아침을 먹으러 들였고 아침밥은 타원형의 평 식기에 스프와 야채, 소세지, 쌀밥이 나왔으나 쌀은 끈기가 없는 알남미 계통이라서 입맛이 동하지 않아, 가져간 고추장과 김치를 더해 아쉬운 식사를 할 수 있었고 마침 그곳에 온 우리 국회의원 6명과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면서 그들에게 관광이냐고 물었더니 업무 조사차 왔다고 하여 우리는 서로 마주보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10시쯤 이 나라 유일의 여행사(줄친)의 관광버스를 타고 경북 영천 출신으로 몽골여인과 결혼하여 아들을 하나둔 현지 가이드 한 성호 과장의 안내를 받아 본격적인 관광에 나섰다. 버스가 도심을 통과하자 어제 밤에 크게 보였던 도시 변두리는 완만한 언덕배기에 유목민들의 주거인 게르와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이 도시의 낯 풍경 이였다. 버스가 도시의 외곽을 벗어나자 낮은 구릉과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고 풀을 뜯는 소 말 양 염소 떼들, 그 속에 간간이 나타나는 하얀색의 게르, 말을 타고 가축 떼를 모는 유목민, 그들 머리위로 푸르다 못해 푸른 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하늘, 그 하늘을 헤엄처 가듯 흘러가는 희디흰 뭉게구름, 몽골의 짧은 가을 풍경은 어떤 화가가 혼신을 다해 그려도 그 아름다움을 다 묘사하지 못하리라! 처음 대하는 초원풍경에 넔을 잃는 중에 차는 한 능선 위에 멈추어 섰다. 일행은 차에 내려 그곳에 있는 한국의 서낭당과 비슷한 오보를 보았고 오보의 모양은 돌무더기를 쌓고 그 위에 나무를 꽂고 줄을 쳐 그 사이사이에 천 조각을 꽂아둔 형태인데 몽골인 들은 산꼭대기마다에 이러한 오보를 만든다고 하며 이들은 이 오보를 이정표로 삼기도 하고 그들이 혹독한 자연 환경에서 무사하도록 소원을 비는 기원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하며 살아간다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안내인의 가르침에 따라 시계방향으로 3번을 돌며 아래에 있는 돌을 위로 올리면서 나름의 소원을 빌었다.
오보에서 기념 촬영과 낙타 말 등을 타보고 버스가 떠나려 하는데 덕부 이 항목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인즉 출발 후 속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하더니 볼 일을 보러 간 것이다. 그를 기다리면서 회헌이 덕부의 덕에 대한민국의 영토가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었다고 하여 크게 웃고 겨울철 땔감용으로 소똥을 주울 초원의 주인들이 이 이방인의 영역 표시물을 줍지 않기를 기원하며 고개를 넘었다.
울란바트로에서 동남쪽으로 30분을 달려온 언덕아래엔 700키로 미터가 넘는 몽골의 젖줄중 하나인 톨 강이 하늘을 닮은 물빛으로 흐르고 그 강가엔 그림 같은 방갈로들이 요정의 나라처럼 펼쳐저 있는데 유독 한곳만이 그 바랜 빛이 눈에 거슬려 안내인에게 물었더니 그 방갈로 촌은 한국인이 3억을 들여 야심 차게 시작했으나 몽골 정부가 허가를 내줄 듯 말 듯한 애매하고 무책임한 행정행위로 차일피일 하는 터에 그 모습이 퇴락하고 있다고 하여 안타까움과 함께 이 나라의 행정행위가 후진성을 면치못해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신중한 준비 후에 세심한 주의를 더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30분을 더 달린 후에 케럴지 국립 공원 내에 있는 미라지 캠프에 도착했다.
도착 후 대형 게르 내에서 한국식 불고기를 흉내 낸 점심 식사를 하였으나 몽골 특유의 냄새로 상쾌한 식사가 되지 못해 한국에서 준비해간 고추장과 김치를 곁들여 2개국의 퓨전 식사를 하였다. 점심을 마친 후 안내인의 지도로 말타기를 하기로 하고 각자 배정된 말에 올라 승마에 열중하였는데 말은 한국에서 보는 큰 말이 아니라 제주도의 조랑말과 같은 몽골말로 순하고 길이 잘 들어 초보자도 쉽게 다룰 수 있었다. 더욱이 한국 사람들은 유목민의 후예라서 그런지 다른 민족보다 훨씬 빨리 승마 기술을 익힌다고 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서행에서 속보로 또 달리기로 발전해 본격적으로 초원에서 난생 처음 말을 달려 보았다.
비록 말 크기는 작으나 달리는 코스는 한국의 어느 곳, 아니 세계의 어느 곳이 그보다 좋을 수 가 있겠는가! 끝없이 펼쳐진 초원에는 에델바이스, 부용, 구절초등이 융단 위에 수처럼 초원을 꾸미고 초원에 맞닿은 하늘빛은 쪽 빛 그 자체이며 습기가 적은 산들바람은 상쾌하기 그지없어 몽골 초원에서 승마는 해보지 않고는 그 낭만을 이해하기 어려 우리라! 승마에 미련을 남기고, 같은 공원 내에 있는 거북바위로 가는 길에 가이드에게 유목민들의 삶이 참 행복할 것 같다고 했더니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고 하면서 그들은 겨울이 너무 추워도 가축이 얼어 죽어 살아가기가 힘들고 봄이 너무 일찍 와도 풀이 제대로 자라지 않으며 가축들의 질병이 너무 많아 곤란을 겪고, 일상생활에서도 잠시 한눈을 팔면 늑대가 가축을 해쳐서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니 유목 생활이 우리가 잠시 보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쉬이 알 수 있었으며 한가로이 풀을 뜯는 가축들 역시 끝없는 생존경쟁에 직면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잠시 잠겨 있는 사이에 차는 초원의 구릉지대 입구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마주 보이는 언덕에 거대한 거북이 어딘가를 향해 도약하는 모습이 다가와 그 기괴한 장관에 넋을 놓을 지경 이었다. 이 바위 거북은 그 지역 바위들과 같은 사암으로 높이가 10층 아파트만하고 몸길이 또한 그 크기에 딱 맞게 조화로운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금방이라도 발을 움직여 떠날 것 같은 역동성을 보여 자연의 신비함에 극치를 더했다. 바위의 신비함에 감탄하면서 여인의 속살 같은 자작나무의 수피를 어루만지며 잠시 그늘에 쉬고 있는 중에 우리들의 대화를 들은 현지인이 다가와 제법 정확한 발음으로 한국에서 왔느냐고 하여 그렇다고 하니 뛸 듯이 반가워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우면서 한국, 훌륭한 나라, 한국사람 좋은 사람들이라고 기뻐하기에 그 이유를 물어본즉 그는 몇 년 전 한국에서 3년 간 살았으며 한국에서 돈을 벌어 거북 바위 뒤에 있는 드넓은 초원에 수많은 방갈로를 지어 어린이 캠프를 세웠노라고 하여 그가 우리를 반기는 이유를 알았고 수많은 외국 근로자들이 꿈을 갖고 한국 땅을 밟았다가 노임 착취와 모진 고통을 받고 한국과 한국인을 원망하면서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이 얼마인가 생각하니 그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느끼게 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이 몽꾸스라는 것을 안 뒤 언제 다시 만날 것을 약속 한 후 아쉬운 작별을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그곳에서 구한 아이락(마유주)을 나눠 마시며 우리가 묵을 징기스 후레로 향했다.
오는 길에 골프장 그린 같은 것이 있어 알아 봤더니 일본 사람이 골프장을 만들려고 했는데 일년 중 8개월이 얼음에 덥혀 있으니 잔디도 자라지 않을뿐더러 그이용 가치가 없어 방치해 두고 있다고 했으며 이곳에 온 골퍼들이 공을 치고는 싶은데 공을 잃어 버려 곤란해 하다가 현지 소년들에게 용돈을 주면서 공을 주워 오라고 시키면 그들이 말을 타고 공을 주워 오는데 그 모습이 공치는 재미 보다 더하다고 해서 모두 웃었다.
차창에 비치는 해 질 역 무렵 풍경은 초원의 능선을 휘감아 도는 서늘한 바람이 대지의 고독을 나그네에게 나누어주는 것 같았으며 우리는 이러한 느낌에 빠져 말없이 창 밖을 내다보다 목적지에 오후 5시경 도착했다. 이곳 징기스 후레는 드넓은 초원 위에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징기스칸 당시 칸의 게르(집)와 왕비의 게르를 복원해 둔 것으로 그 내부가 호화롭고 특히 칸의 게르 내부는 설범(흰표범)모피 270장으로 장식해 그 희소가치를 따지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부부 게르 각 각 대형 마차 위에 실려진 상태였고 주변은 소형 게르와 간이 샤워장과 화장실을 만들어 최소한의 관광지의 편이 시설을 갗 춘 걸음마 단계의 몽골 관광시설 이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 일행5명은 한 시간에 5달러씩을 주고 말을 빌려 타고 자작나무 숲을 지나 초원을 달리며 대륙의 석양을 말 위에서 감상하고 밤을 맞았다. 이 날 밤은 3명이 한 게르를 배정 받아 이용하기로 하고 겔에 들어가니 중앙에는 난로가 있고 그 뒤에 탁자를 두고 탁자 위에 큰 보온 물병이 있으며 가장자리에 침대 3개가 놓여 있는 형태로 텔레비전에서 많이 본 터라 그리 낯설지는 않았고 이는 유목민들이 살아오면서 그들에 맞게 만들어온 최선의 주거 형태로 우리 조상들이 초가집과 온돌을 개량해 온 것과 같은 발달사를 격어 왔으리라. 초원의 밤 기온은 다소 추워 게르마다 난로를 피우게 되고 게르 굴뚝마다 나오는 연기는 옛날 우리네 시골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나는 저녁밥 짓는 연기처럼 정겹고 나무 타는 내음 또한 밤 공기에 실려 묘한 정취를 불러와 모두 게르에 있지를 못하고 소주 한 병씩을 가지고 나와 별이 솟아지는 들판에서 밤이 깊은 줄을 모르고 대화의 꽃을 피우다가 구름조각이 지나가면서 잠시 이슬비 같은 것을 뿌려서야 잠을 청했다.
2.초원에서 활을 쏘다.
광야의 아침은, 티 없이 밝은 해가 대지를 물들이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아름다움을 연출 할 수 있도록 그 막을 열게 하는 순간인 것 같았다. 대지는 대지 데로 숲은 숲 데로 땅속에 싸는 타르박(토끼 같은 초원의 짐승) 까지 조화로운 땅덩이에서 한폭의 그림이 되었다.
이날 아침식사는 허럭이라는 양고기로 만든 몽골 전통식 식사였는데 노린네가 심하기는 했어도 그런데로 먹을만했다. 아침을 먹고 말을 타는 사람, 등산을 하는 사람 등 자유시간을 갖다가 예정보다 늦게 한,몽골 친선 궁도대회를 시작하였고 , 국민의례는 가이드 한 과장이 하모니카로 반주를 해 주변분위기와 썩 잘 어울리는 오래 기억될 연주였다.
우리는 대성그룹에서 옛날 장안 편사에 대해 연구해 준비한 복장으로 황군은 황색도포와 두근을 청군은 청색도포에 두근를 쓰고 솔포를 과녁으로 해 5순 경기를 하였고
몽골궁사들 역시 남녀 전통복장에 그들의 방식 데로 경기를 진행했는데 그들은 3가지의 과녁이 있으나 현재 주로 쓰이는 과녁을 사용했고 그 과녁은 남자는 70미터 여자는 60미터 거리에 가로 10미터 정도 높이 30센치 정도의 줄을 치고 그 20센치 정도 거리에 주먹 크기의 나무 브록들을 가로로 세워 사대에서 활을 쏘아 표적 앞에 있는 줄 밑으로 화살이 통과해 과녁을 브록을 맞추는 방식이었는데 바로 맞추어도 되고 처진 줄 30센치`앞에 화살이 떨어져 미끄러져 맞추어도 득점으로 인정되었으며 이들의 활 쏘는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화살을 엄지손가락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활 뒤 주먹 위에 올리고 쏘았고 우리는 한순에 5시를 가지고 하는데 몽골은 4시를 한순으로 하는 것이 달랐고 이들도 우리 선사들이 관중하면 지화자 좋다 하는 식의 두 팔을 들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모양을 하였다. 이 경기는 각각 다른 평가 방식으로 취했기 때문에 각각의 우승자를 내었는데 우리 경기는 당일 바람이 많이 불고 쏠포가 평소 과녁 보다 작아 시 수가 나지 않았으나 초원에서 쏘는 그 맛은 한국 궁도장에서 느끼지 못한, 자연을 크게 안는 포만감을 갖게 했고 시종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어 우승은 비교까지 가는 접전 끝에 대구의 박 선배님께서 슬쩍 양보한 덕으로 부족한 사람이 우승하여 그 영광과 함께 부상으로 몽골 전통활 1장과 화살 한순(4개)를 받게 되어 기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궁도 대회 과정에서 여러 일화가 있었으나 회헌이 시합을 마치고 각궁을 세워 두었는데 몽골친구 하나가 보궁을 빼고 활을 당기다가 이를 넘겼으니 그 활이 성할리 없고 처리 또한 난감했으나 회헌은 그 활 갖기를 원하는 몽골 전통활 재작자에게 기증까지 했으니 적은 체구에 큰 아량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잠간 몽골활과 우리 활을 비교해 보면 몽골활은 우리 활에 그 성능이 모든 면에 견줄 바가 못되었다. 우선 크기와 무게는 우리 활의 3배가 넘고 탄력 또한 떨어지고 화살은 대나무가 나지 않는 지역이라 나무를 이용 해서 만들 수밖에 없지만 수렵, 전쟁용이 아닌 경기용 이라고 해도 그 투박한 무게가 우리살의 3배를 넘는 듯 하여 우리 활과 화살이 정말 우수하다고 할 수 있었고 근래 외국 다른 나라들의 전통 활을 다 보아도 몽골 활과 유사했던 것을 보며는 우리 활이 얼마나 우수했던가를 알 수 있었으며 활에 관한 한 우리가 세계에 가장우수 하다고 자부할 수 있고 이러한 활의 전통이 오늘날 양궁 선수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활의 성능은 그러한 반면 활에 관한 한국의 전통과 몽골의 전통이 오뉘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부분에서부터 유사점이 많은 것을 알고 피와 전통의 흐름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데 대해 그들과의 진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3.시내 관광
궁도 대회를 위해 하루는 초원의 겔에서 지내고 마지막 밤은 울란바트로에 있는 팔레스호텔에서 묵었는데 이틀전 바이양 호텔보다는 그 격이 다르게 깔끔했으나 서비스는 역시 피동적이었다. 날이 새고 짧은 일정이라 먼 곳을 가지 못하는 탓에 시내관광에 들어가 먼저 간등 사원에 들렸다. 몽골시내 어느 관광지에나 그렇듯이 사원 앞에서 제일 먼저 맞는 사람이 남루한 동냥 어린이 들이었고 이들을 뿌리치는데도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했다.
이 사원은 소련 70년 실질적 지배하에 있으면서 모든 불교사원이 헐리고 유일하게 남은 사원으로 국민들이 성금을 모아 7년의 공사 끝에 27미터의 대불을 완공했다고 하니 이때 이 국민들의 염원이 몽골100년 지배를 벗어나려고 8만 대장경을 제작했던 우리 선조들의 염원과 무었이 달랐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했다.
간등 사원 관광 후 시 외곽의 높이 100미터 정도 산 위에 있는 자이슨 승전 탑에 올랐고 오르는 과정에서 노점 화가를 만났는데 그는 몽골 전통의 후미(후음) 기능 보유자였다. 후미라는 것은 입을 약간 벌리고 목 속에서 피리소리 같기도 하고 새소리 같기도 하고 천상의 소리 같기도 하고 지옥의 소리 같기도 한 그야 말로 이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비교 할 수 없는 독특한 소리로서 구태여 비교한다면 스위스의 요들송에 비유 할 수 있겠으나 목의 떨림을 독특하게 하고 목축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 외에는 그도 그리 갖지 않을 것 같았다. 이 후미는 유목인 들이 산곡에서 몽골 전통 현악기를 타면서 자연 속에서 불러들 왔다고 하며 이날 이 거리의 화가는 우리를 위해 아리랑을 토해 내었으며 우리는 하도 신기해서 제창을 부탁 했드니 마음좋게 한번 더 연주를 해 주었다. 화가의 후미를 듣고
2차대전 몽.소 승전탑으로 오르니 탑의 둘래에 많은 그림을 그려 두었는데 전체적인 그림내용은 소련은 몽골을 늘 보호하고 있다는 몽골민 세뇌적 표현을 담고 있어 소련이 몽골 지배에 얼마나 철저 했는지를 느끼게 했으며 이곳에서는 울란바트로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으며 눈 앞에 펼쳐진 울란바트로는 한나라의 수도로서 그천혜의 조건으로 나지막한 산으로 둘러 쌓인 넓은 분지에 아름다운 톨강이 그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가 몽골인들의 조상들이 나라의 중심지를 이곳으로 한 이유가 충분한 듯 하였다.
승전탑을 내려와 근처에 있는 한국인 이태준 열사의 묘소가 있는 공원을 찿았다. 이 열사는 연희의전을 나온 의료인으로, 일제하 독립운동을 하다가 김구,김규식 지사의 권유로 이곳 몽골에 정착해서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를 했으며 특히 당시 몽골 망국 병으로까지 염려 할 만큼 넓게 퍼젔던 화류병(매독)을 근치해서 몽골 정부와 국민들로 부터 크나큰 사랑을 받았으나 몽골의 선지자 탄생을 견재한 소련정부 사주의 소련 마피아에 의해 3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선지자로서 이국땅 잡초 무성한 공원에 쓸쓸히 모셔져 안타까운 마음 있었으나 이곳을 관광했던 모 그룹의 남모 사장이 ` 경비실 건립 기금을 쾌척해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우리를 안내한 한 과장은 금년 추석 전에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벌초를 하겠다고 하여 한편 위안이 되었다.
이 열사 추모 공원을 떠나 마지막 황제의 여름 궁전을 관광하면서 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그의 유물들이 그의 호사를 말해 주었으나 소련의 막강한 영향력아래 자신의 제국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지 못했던 통치자의 마지막 위안품인 것 같아 화려함보다 쓸픔이 황금의 두께보다 더 두터운 듯 했으며 이를보고 가까운 곳에 있는 라마교 사원을 들어서니 라마불교 특유의 불상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으나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천국의 문이라는 건축물의 형태를 한 조각물인데 3명의 승려가 눈을 감고 천국의 모습을 심안으로 보고 동시에 각 각 그 모습을 그리기로 했는데 그렇게 하여 그린 것이 꼭 같이 일치하였고 그 모습을 조각하여 만든 것이 이 천국의 문이라고 하니 불심이 약한 신자에게는 깨우침이 아니 될 수 없었다.
라마 사원을 나와 서울의 거리를 지났는데 이 거리는 90년대 한.몽 수교기념으로 명명 하였으며 도로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표시물이 다수 있어 이 나라에서 한국의 비중과 애정이 깊음을 알 수 있었고 전날 저녁은 서울 거리에 있는 서울 레스토랑에서 순수한 한국식의 밥과 된장국, 상추쌈으로 모처럼 포식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주변에 한국 교민들이 운영하는 한국 글씨 간판의 업체가 많아 그야말로 서울의 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서울의 거리를 지나 몽골의 전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박물관을 보고 이나라 중심인 스쿠바타르 광장에서 정부 청사를 비롯한 중요 건물을 보았으나 모두 4-5층 정도이고 10층을 넘는 건물은 열을 넘지 않을 정도로 아직은 경제적으로 발전이 뒤져 있는 상황이었다. 광장을 나와 인접해 있는 백화점과 양모제품 전문매장을 들였는데 몽골 유일의 국영 백화점 앞에 수천의 인파가 몰려 있어 가 보았드니 삼성전자에서 홍보 공연을 하고 있어 국내기업의 세계 진출이 이국에서 반가움을 더했다.
백화점 내부와 진열 상품은 우리나라의 중소도시 정도이고 다만 다른 것은 세계의 유명제품들이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고 우리나라 제품은 라면에서부터 화장품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어 케시미어 전문 매장에 이르니 색상과 디자인은 좀 떨어져도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양모와 낙타모 제품들이 그리 비싸지 않은 값으로 팔리고 있었으며 그곳에서도 물건을 사는 사람은 대부분 한국 사람들 인 것 같았다.
백화점을 나와 근처에 있는 공연장을 찾았는데 공연장은 약200석 규모였는데 1층 대부분은 한국인 관광객으로 채워져 한국인들의 몽골관광이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했다. 공연은 징기스칸 일대기를 뮤지컬화 한 것이고 그 외 몽골 전통 춤과 일종의 서커스 묘기와 자이슨 전승 탑에서 본 후미 창이 그 전부로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극장 관람 후 서울의 거리 부근에 있는 북한당국이 직접 운영하는 냉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으나 냉면은 그리 맛있는 편이 못 되었고 종업원도 손님도 서로 조심하는 분위기라 좀은 어색해 하며 식당을 나와 대부분의 일정을 마치고 한국어로 송도라고 써놓은 주점앞 노천 호프집에서 몽골의 마지막 밤을 정리했다.
◆ 몽골에서 느낀 몽골인 그들의 삶과 그리고 한국
몽골민족은 한때 세계의 60%를 점령할 만큼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그 두려움은 주변 각 국 민족에 엄청난 두려움을 주어 끝없는 견제를 받아 원나라가 망하고 명에 의해 내륙으로 몰리고 청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는 직,간접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인구는 한때 감소할 만큼 핍박이 심했고 러시아의 실질적 지배를 받으면서도 그와 같은 정책이 유지되어 지도자는 암살되고 국민을 우민화되어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 것이 소련 연방이 해체된 1990년까지 계속 되었다고 하니 이 대륙의 오지국가는 은둔의 세계에서 이제 겨우 눈을 뜨고 있으나 교육수준은 낮고 자본은 거의 없으며 도로 등 국가 기간시설과 사회 간접자본은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 공무원들마저 부정이 심해 많은 지하자원과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개발하여 국부로 연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몽골을 아는 사람들의 보는 시각이라고 한다.
더욱이 주변국 중국은 몽골의 발전을 극히 싫어하고 몽골정치인의 70%가 친소 그룹이라고 하는 소련마저 몽골에 강력한 지도자가 나오면 마피아를 동원해 그를 암살하는 훼방꾼으로 존재하여 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으니 강대국 사이에 끼어 고통 받는 것은 우리와 동병상련인 것 같았다.
한편 이 나라 사람들의 삶은 울란바트로와 일부 작은 도시의 사람 150만 정도는 도시적 문화를 누리고 그 외 150만의 사람들은 유목생활을 한다니 그 생활방식에 많은 차이를 두고 있다고 보며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사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으니 생활의 변화를 추구할 욕구를 느끼지 못하고 도시민들은 생산시설이 없으니 취업 할 곳이 없고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하며 그 현상은 여자보다 남자들이 더 하다고 한 다.
그리고 일년중 8개월이 동토로 있고 영하40도에 이르는 겨울이 계속 된다면 아무리 추위에 적응된 민족이라 하더라도 활동이 둔해 지고 그것이 습관화되면 게을러지게 마련인데 더욱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70년 동안 지내 왔으니 인간의 능동성과 창의력이 마비 될 수밖에 없어 교민 사업가들이 일을 시켜 보면 생산력 떨어져 일을 시킬 수가 없다고 한다. 이러한 몽골인 들은 한국에 대해서는 형제 국으로 보고 현재까지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에게보다 우호적이다. 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중국 사람이며,그 다음으로 일본인이라고 하는데 일본인들은 한때 몽골을 침범한 적이있으나 그것만이 그 이유의 전부가 아니고 교묘한 방법으로 이용하려 하는데 불신을 갖고 있는 듯 하며 그 좋은 예로 몇 년 전 일본인들이 몽골 정부에 3년간만 기간을 주면 징기스칸의 묘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을 받아 내고는 이를 기회 삼아 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위성 등 모든 과학장비를 동원해 몽골의 모든 자원을 염탐하다 몽골 정부로부터 쫒겨갈 정도로 일본인들의 교활함이 이들로부터 미움을 싸는 듯 하고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에 대해서는 다소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듯 하며 몽골의 공식 문자는 러시아 문자를 사용하고 초등학교에서도 말은 몽골말로 글자는 역시 러시아 어를 가르키고 있다.
◆ 몽골 기행을 마치며
짧은 기간 동안 수박 겉 핥기 식 여행으로 몽골을 대충이라도 알 수가 있겠는가 다만 이 나라가 아직은 개발이 본격화되지 않아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는 매력적인 나라임에는 틀림이 없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온다면 드넓은 초원에 지치도록 말을 달리고 거울같이 맑은 흡수골 호수에서 은빛 찬란한 물고기를 낚고, 더하여 노천 카페에서 이름 모를 이국 여인을 만나 술이라도 한잔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며 아쉬운 여행에 미련이 남아 오늘도 해지는 서북쪽으로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쩐 일인지! 仁堂
첫댓글 더 넓은 초원에서의 여행은 다른 어떤 여행보다 특별한 경험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하니 실감납니다,,,감사합니다,
사진이 들어가니 보기가 한결 즐겁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