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중국 상하이)
김익현, 36세 . 김영두, 37세. 김희인, 36세. 김 수, 36세.
김석룡, 38세. 김헌수, 38세. 김철수, 38세. 김창수, 38세.
김남수, 38세. 김상한, 34세.
김제증, 40세. 김용필, 39세. 김응현, 36세.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민족의 독립운동과 연결되지 못하였다.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더욱 굳건해지자,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위해
국내 외에서 여러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들 임시정부들은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 정부로서,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도를 비릇한 노령, 중국, 미국 등
해외 각처에 한민족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민족의 활동 무대가 확대되었다.
만주 지방은 독립운동의 기지로 발전되어
독립군이 항일 독립운동을 추진하는데 토대가 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3.1운동으로 일제가 식민 통치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일제는 무단정책으로 한국을 복종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소위 문화 통치를 내걸고 보다
악랄한 민족 분열정책과 경제적 착취를 강화 하였다.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활동과 경제 자립운동이 추진되었다.
학생들이 주도한 6.10만세 운동과 광주학생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국내 지식층 인사들은 여러 갈래의 민족운동으로 분열 되었지만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은 다를바없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어
그 방법과 주장이 다르게 나타났다.
신간회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으나 항일운동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었다.
김익현(益鉉 36세)과
김영두(永斗,37세)는
두 사람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한을 품고 망명하였다가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김희인(凞仁, 36세)은
3.1만세운동 때 임시정부에 가담하려고
상하이로 밀항하다가 일경에 최포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 수( 銖, 36)는
파리 강회회의에 우리의 독립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137명의 유림들이 서명한 독립청원서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하였다..
김석룡(碩龍, 38세)은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명대학을 졸업하였다.
임시정부의 병인의용단 단장의 요직을 맞고
일제의 요인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순종의 인산 때 국내에 잠입하려다
황포강 입구에서 일경에 체포 옥고를 치루었다.
석방후 망명을 했다가 광복 후 해공 신익희, 성재 이시영등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환국 하였다.
건국준비 요원으로 활약한 요인이었다.
김현수(玄洙, 38세)는
중국에 있는 황포군관 학교를 졸업 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지휘를 받았다.
왜군 헌병과 밀정을 저격하였으며 광복 후 환국하였다.
광복군 국내지대를 조직하여 부사령관을 엮임한 독립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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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錣洙, 38세)는
전북 부안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중,
한국 유학생들은 물론 중국, 인도, 대만에서 온
유학생들과 뜻을 모아 반일 독립운동을 쟁취하기 위하여
신아동맹을 결성하여 투쟁하였다.
귀국후에 국내에서 3.1운동을 맞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강력한 독립운운은 사회주의적인 방법만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사회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21년에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 중심의
연해주 한인 사회당과 협력하여 고려 공산당을 창립하였다.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집행기구로 개조하여
도산 안창호, 김동삼, 해공 신익희 등 좌우익 애국지사를 총 막라하는
국민대표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성공을 하지못 하였다.
단독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해방이 되어 출옥하였다.
남북 또는 좌우의 분열이 심해지자 실망하여 정치활동을 멀리하였다.
김창수(昌洙, 38세)는
철수의 동생으로 항일운동을 하던중 M.L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나해방후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정치가다.
김남수(南洙, 38세)은
경술국치 후 동산 유인식 선생이 주재한 협동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혔다.
3.1운동 후 신민회에 참여하고
소작조합과 노동조합 조직에도 참여하여 경성고무공장의
파업을 주도 하다가 투옥 되었다.
김준연과 손잡고 일제 타도를 위해 투쟁하였다.
형평사라는 단체를 결성하여 양반 출신이 면서도
천민들의 권익 옹호에 힘을 섰다.
김상한(相漢, 34세, 일명 인근)는
10대 후반부터 일제에 항거하였다.
안동 예안의 청년동맹과 신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7월, 그의 나이 20세가 되던 때
7월에 이 조직으로는 진전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안상윤과 함께 <안동콤크럽>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산하 조직으로 예안노동 직접행동대를
낙동강변에 있는 석빙고와 영낙정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김제중(濟中, 40세)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3.1운동을 계기로 상경하여
남부 5도(경기,충청, 강원, 경상) 대표단 5인중의 한 사람이 되어,
남부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하였다.
대동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전남지구를 담당하여
군자금을 모으다 체포되어 투옥를 겪은 투사였다.
김용필(容弼, 39세)은
고종말기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일제하에서 선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호적에도 들지 않고 세금도 내지않았다.
3.1운동 후 1924년에 왜인이 동국 18성현이 모셔진
사당에 치레를 하려하자, 엄중히 꾸짖어 못하게 하였다.
왜인들은 그를 불경죄로 서울에 압송하여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3천리 강산에 둘도 없는 선비이며 18가문 중
제 1인자로 백세의 표준이라.” 극찬하였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의 장례일에(1926) 6.10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규모는 3.1운동보다 적었으나,
3.1운동 이후 침체되었던
국내 민족운동에 커다란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김응현(應鉉, 36세)은,
3.1운동사 자료에 의하면 3.1만세운동 때 종형인
김구현(九鉉, 36세)과
의령 만세운동을 주도 하였다가 복역하였다.
6.10만세운동 때 동지를 규합하여
거사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것으로 밝혀져다.
광산김씨약사,
2023년 7월. 편집,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