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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제1장, 가반(加飯)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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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초저녁인데 구랑 골 산봉우리에 홀로 서 있는 벼락 바위 위에서 우는 건지
아니면 큰 소나무에 앉아 우는 건지 부엉이가 부엉부엉 처량하게 울고 있다.
김정원의 아내 서울댁이 정성 들여 담아 준 가반(加飯) 소쿠리를 강 덕형이 들고 오면서
발걸음이 빨라진다.
어린 삼 남매와 함께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자식들이
차례로 눈앞에 어른거린다.
광산 김씨 제 각에 집사로 사는 돌이네 에서 강아지 티를 이제 막 벗은 메리가
덕형이 내딛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크게 짖어대고 있다.
연륜이 오래된 어미 개라면 아침저녁 지나다니는 덕형을 벌써 인지하고
짖지 않을 테지만, 아직은 중 개가 되지 않은 강아지치고는 짖는 소리가 매우 우렁차다.
덕형은 같은 동네에 사는 친구인 김정원의 집에 지붕을 새 옷으로 갈아입히기 위해
볏짚으로 이엉을 엮는 작업을 하러 갔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집주인은 그날 일을 했던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질 않는다.
밥을 한 그릇 눌러 담아 들려 보내 집에 있는 다른 가족이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발산마을에서는 오랜 관례가 되어왔었다.
삼 남매의 어머니 조영순은 남편 덕형이 친구인 정원의 집에 일하러 갔기 때문에
으레 가반(加飯)을 갖고 오겠지 하고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저녁밥을 짓지 않고 부엌에
가마솥에는 물만 따뜻하게 끓여 놓고 남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에헴, 에헴! 마른기침과 함께 사립문을 들어서면서 덕형이 인기척 소리를 냈다.
아내 영순과 명희, 명순, 명구 3남매가 방문을 열고 마루까지 뛰나가 반갑게 마중을 했다.
“아부지, 이제 오십니까 예.”
“아부지. 어서 오이소! 예.”
“아부지 예!”
3남매는 아버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가 오래다.
뱃속에서는 주인님 배 속이 비었습니다. 라고 꼬르륵꼬르륵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삼 남매가 아버지를 부르며 뛰어나오며 매달리자 덕형은 하루의 고단했던 하루 피곤함이
눈 녹듯 깨끗이 사라진다.
강 덕형이 받아온 가반(加飯) 소쿠리를 아내 조영순이 받아 들고는 안도의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리 쉬면서 입속말을 했다.
“서울떡은 가반을 보낼 때마다, 큰 양판에다 담아 준단 말이여!” 라 하며 고마워했다.
삼 남매와 덕형의 아내 산동 댁이 먹기에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오늘 저녁에도 만찬을 즐길 수 있는 양이 된다.
김정원의 아내 서울댁이 밥뿐 아니라 갈치 볶음과 햇김치와 다른 나물 반찬도 곁들여서
가반을 보냈기 때문이다.
덕형이 다른 사람들의 집에 일하러 갈 때도 가반(加頒)을 받아오지만,
양푼이나 큰 그릇이 아니고 밥그릇에 달랑 한 그릇만 품에 안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
이런 날은 무채를 썰어 넣고 무시래기 된장국을 첨가해 비빔밥을 만들어
삼 남매를 먹이고 나면 자신은 그냥 굶는 날이 많았다.
“서울떡이 고맙게끔 오늘도 밥을 양판에다 담고 반찬들도 골고루 보냈고 만요.”
남편 덕형에게 가반(加頒)을 정성 들여 담아 바구니에 보내준 서울댁에게
영순이 고마워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서울떡이 참말로 정이 많은 사람이라니까.”
서울댁이 손 크게 가반을 담아 준 정성을 덕형도 고마워했다.
그리고 가장인 자신이 아내와 자식들에게 배불리 먹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미안하기만 했는데 오늘처럼 배불리 먹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해했다.
“애들 배고팠겠네. 자네도 배고플 거 그만, 얼른 묵으소.”
“명구 아부지는 잡쉈소?”
“어이! 나 걱정은 말소,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하지감자를 삐져 여코 갈치를 볶았더라니까,
얼마나 맛이 있든지 겁나게 묵어 뿌럿네.”
동부 전남 지방인 곡성, 구례, 광양, 여수, 순천, 그리고 보성, 고흥지방 사람들은
지금도 결혼한 사람들을 부를 때는 댁 대신 떡이라는 택호를 넣어 부른다.
가령 아내가 살았던 동네가, 구례라면 구례 떡(구례 댁), 순천이라면
순천 떡(순천댁)이라는 택호를 붙여 부른다.
김정원의 아내는 서울에 살다 온 사람이라 발산마을 사람들은 부르기를
서울떡이라고 부쳐 부르고 있다.
그러면 남편을 부를 때는 뭐라고 부를까?
가령 남편 성씨가 박 씨라면 아내의 택호가 앞쪽에 성(姓)인 박이 다음에 붙어
구례 박샌(생원)이라고 부른다. 택호를 떼어 버리고 성씨만 붙여 박샌, 이샌,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성(姓)이 김씨인 사람을 김샌 이러고 부르면 자연스럽지 못해 짐샌 이러고 부르고 있다.
영순이 태어나 살던 곳은 구례 산동면 산수유 꽃이 피는 곳이다.
이에 발산마을 사람들은 산동 댁이라 부른다. 읍내에서
여관과 큰 음식점 영업을 하며 잘 살았다고 했다. 강 덕형의 남자다운 매력에 푹 빠져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 끼니 잇기도 어려웠지만,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덕형이 사는 발산마을은 50여 호쯤 된다. 광산 김씨와 김해김씨 집성촌 마을이다.
두 김 씨가 주를 이룬다고는 하지만, 각각 다른 성 바지인 동네 사람들은 단합도 잘되고
두 김씨 집안끼리도 크게 갈등을 일으키고 한 적은 별로 없었다.
덕형과 친구인 김정원은 아버지 김 진사가 선변리 철다리에서 미나미 총독이 탄 기차를
강물로 추락시킨 사건을 일으킨 후에 순천 경찰서유치장에서 고문 조사를 받다가
세상을 뜨고 바로 1년 후에는 김정원의 어머니인 권씨 부인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 재산은 일제에 몰수당하고 대평마을에서는 더 살 수 없음을 인지하고
광산 김씨 문중이 모여 사는 곳이며 외가가 있었던 발산마을로 이사를 와 살고 있다.
김정원은 서울에서 대학 시절 친구의 동생이었던 지금의 서울댁 정영애를 소개받아 사귀다가
결혼한 후, 줄곧 서울에 살았다.
그러다 아버지 김 진사가 일본 경찰에 고문을 받다가 숨진 후로는 줄곧 고향에 돌아와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유일하게 면 소재지에 하나뿐이었던 소학교를 다닐 때는 늘 말썽꾸러기였었다.
일본인 학생들에게는 하루가 멀다고 주먹을 휘두르기를 밥 먹듯 하다 보니
일본인 교장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정원의 아들 셋 중에 큰아들 명채와 성채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으며,
막내 종채는 형들하고 나이 차가 많아 소학교인 황전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마을에서는 부모와 아들이 대학을 다녔던 집은 김정원의 집안이 유일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전부터 김정원은 신문을 구독해 읽었다.
일본이 연합군과의 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으며 시국이 어찌 돌아가고 서울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난 일들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신세대였다.
김정원은 서울에 처가에도 아직 장모님이 살아계시고 처남들도 있으며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지만, 관직이나 직장에 나가게 되면 일본에 돕는 것이 되고
일본사람들이 주는 품삯은 받기 싫다며 조선총독부에 일자리도 거부했다.
언젠가는 고향에 내려와 살겠다고 맘에 품고 있었다.
김정원이 고향에 급하게 내려와 머무른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 김 진사가
경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숨지고 나서이었다.
조상 대대로 이 땅에서만 머물러 살아왔던 집안 내력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이 고장에서 일제와 투쟁을 하다 돌아가셨기 때문이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선산을 지켜야 했고 고향을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만약에 고향을 떠나게 되면 아버지 김 진사에게 불효가 될 것 같았고,
주변 사람들이 망해 먹고 고향을 등졌다는 이런 입방아 찧는 소리도 듣기 싫어서였다.
김정원의 윗대 할아버지 때만 해도 만석꾼의 소리를 들을 만큼 토지가 많았다.
아버지 김 진사는 상해임시정부에 독립자금으로 보내느라 야금야금 재산을 축내었지만,
인근 고을에서는 제일가는 부자였다.
일제에 전 재산을 몰수를 당하고 발산마을을 선택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외가 동네였고
광산 김씨 문중이 모여 사는 마을이어서다.
보통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 권씨 부인과 함께
외할머니댁에 와 봤던 기억 때문인가도 모른다.
어머니 권씨 부인을 따라 외갓집에 다닐 때의 기억은 외할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셨고
외삼촌 두 분은 일제의 핍박을 피해 중국으로 떠나 소식이 없고 외할머니 기억뿐이었다.
부모의 유산을 정리했을 당시에는 여기저기 자투리땅 조금뿐이었다.
헐값으로 팔고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해 부랴부랴 발산마을로 이사를 왔다.
아내 서울댁이 친정에서 얻어온 돈으로 논을 사들여 근동 마을 중에서는
두세 번째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두 아들의 학비로 토지를 팔기 시작해
지금은 열댓 마지기의 토지뿐이라지만, 동네에서는 아직도 제일 부잣집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덕형이 발산(鉢山)마을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김정원이 전적으로 주선해서다.
이사를 오기 전까지는 윗마을 황학(黃鶴)이라는 큰 마을에서 살고 있었다.
경남 산청에서 징용에 끌려가다 탈출해 전 가족이 함께 열두 내에서 숨어 살다
조국 해방을 맞게 되었다
.
열두 내는 봉두산자락에 있는 깊은 산중동네다.
조그마한 개울을 12번이나 건너야 동네가 있는 곳이라 붙여진 동네 이름으로
아내 영순이 산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해방되자마자 서울이나 도회지로 나가서 살자고 졸라댔다.
아내의 성화에 이사를 나온다는 곳이 결국은 발산마을이었으니
서울이나 도회지로는 가지 못했다. 섬진강을 향해 샛강이 흐르고 있으며
큰 들과 철길과 신작로가 있는 큰마을로 분가 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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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재소설 다시 시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잼나게 잘 읽겠습니다
수고해주셔요
열심히 구독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