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63, 스불론의 추억
나와 같은 고등학교의 동창인 그의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은 스불론이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에 들어 가면서 세칭 동방교의 내 친구 스불론이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집에서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도저히 알길이 없으니
학교에서도 난감했고 친구들간에도 소문이 분분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동기생들 중에서 단 한사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로 들어 간 것을.
스불론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에서 유일하게 세칭 동방교 친구였다. 고등학교 한 학년 후배중에 교하노씨 성을 가진 후배가 하나 있었는데 세칭 동방교의 교주 노광공이 바로 그 교하노씨다. 우리는 그 후배를 불러놓고 귀여워 해 주면서 너 참 좋은 성씨를 타고 났다, 훌륭한 조상을 두었다고 하면서 군기(?)가 세던 고등학교 시절에 그 후배를 많이 보살펴 주었던 기억도 있다.
일찍 모친을 여의고 계모와 같이 생활하던 친구 스불론은 어떤 연유로 세칭 동방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상세한 내역은 알 수 없으나 '초량12교회'에서 만나 같은 고등학교 같은 학년의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되어 세칭 동방교내에서 자연히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반은 달랐지만 학년은 같아서 학교내에서도 더욱 친근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가 학교를 중단하고 믿음이 솟아나서(특출하다는 세칭 동방교식 표현, 지나친 열심을 그렇게 표현했다) 대기처로 올라가 연단선님이 된 것이다. 그때 나는 무척 그를 부러워했다. 대기처로 부름을 받아 올라간다는 것은 그만큼 선망의 대상이었다.
스불론은 대기처에서 연단(일종의 행상으로 돈을 벌어 바치는 일)을 받으면서 온갖 고생을 다 했으리라,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그곳을 빠져나와 늦은 나이에 해병대로 지원입대해서 병역을 필하고 결혼해서 전주에서 그릇장사를 해서 어느정도 기반을 잡아 도매상을 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마도 부산의 자갈치 시장통에서 대형 그릇점포를 운영하던 그의 부친의 연줄로 그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나 여기고 있었다. 나도 군복무를 마친후 생활전선에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가다 보니 옛날 친구들 찾아 연락해서 지낼만큼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날, 문득 옛날 친구 스불론이 그리워졌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고등학교 시절에 유일한 세칭 동방교 친구였는데. . . 항상 우수에 젖어있던 그의 모습을 늘 잊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찾을 길이 없었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그가 전주에 살았었다는 끄나풀 하나를 부여잡고 수소문 해 보기로 했다. 우선 114 전화번호부의 전주시내 친구의 이름을 발췌해서 일일이 하나 하나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50여명에 달하는 동명이인 친구 이름에 전화했으나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막막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전주시청 인터넷 홈페이지에 들어가 게시판에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라고 사연을 올리고 친구를 찾는다고 올려놓았다. 얼마 안있어 전주시청 민원실 여직원에게서 힘을 다하여 찾아보겠노라는 친절한 공무원의 전화를 받았다.
과연 며칠 뒤, 친구는 전주에서 계속 살다가 작년에 제주로 이사갔다는 연락과 함께 스불론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주시청의 어느 관련업무중에 친구의 휴대폰 번호기록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시청에서는 어떤 사유로 사람을 찾는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친구에게 먼저 내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친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부산에서 상봉하기로 전화로 약속이 되었다. 스불론이 부산 온다는 날, 김해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비행기 탑승객이 빠져나오는 출입문이 열리고 스불론이 저만치 나타났다. 30여년만에 만났지만 서로를 잘 알아보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영락없는 그 얼굴이었다.
고등학교 동기회장과 연락해서 ‘나루터 횟집’에서 같이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도중에 스불론이 동기생중 한 친구를 기억하고 있어서 전화연락을 했더니 바로 달려와서 자리를 같이 해 주었다. 스불론은 그날밤 우리집에서 자면서 지나간 옛 이야기를 나누고 흘러간 시절의 고달팠던 상처들을 어루만졌다.
그후 전주시청의 여직원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전주시청에 근무하시는 최OO씨!
(전화로만 통화했기 때문에 이름이 정확하게 표기되었는지? 혹시 제가 잘 모르고 잘못 표기되었다면 용서 바랍니다)
지난 4월경이던가, 인터넷 전주시청 홈페이지에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라고 사연을 올리고 친구를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때 큰 도움을 받아 마침내 친구를 찾았는데 그는 전주에서 살다가 제주로 이사해서 사업을 하고 있었고 드디어 저하고 연락이 닿았지요. 만일 친구를 찾게된다면 제가 친구 만나러 전주로가서 최OO씨를 찾아 뵙고 점심한그릇 따뜻하게 대접해 올리겠다고 약속했었지요. 그러나 친구가 전주에 살지않고 제주에 가서 살고있는 바람에 제가 전주를 갈 기회가 아직은 없어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감사의 뜻으로 제가 감명깊게 읽었던 책 한권을 보내드립니다(혹시 벌써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인간이 어떤 극한상황에 처할지라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이야기하고있는 책이지요. 자그마한 성의로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동기생 친구를 찾게되자 주위의 친구들이 더 기뻐하면서 찾게된 경위를 기록해 달라고 해서 동기회보에 실렸던 글을 참고로 보내드립니다.
언제 전주를 방문하는 기회가 생기고 그때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 주셨던 공무원을 만나 점심한그릇 따뜻하게 대접해 올릴 수 있는 인연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앞날의 행운을 빌겠습니다.
그리고 동기회보에 글을 올렸다.
<30년만에 찾은 동기생>
서로를 알아볼수 있을까?
까까머리에 검은 교복, 초롱초롱한 눈망울만 떠오르는데 이제 나이 50대, 머리는 반백이다못해 햐얀 속살이 다 들어나 있는데, 강산이 몇번이나 변했던가, 30여년만에 만나는 친구인데. . .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7월5일, 그 뜨거운 남도의 여름 햇살을 안고 제주에서 김해공항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마중을 나가 탑승객들이 나오는 출입문을 바라보고 있다가 전혀 낯설지 않은 얼굴하나를 발견하고 서로가 두손을 마주잡고 야! 너! 하면서 이름을 불렀는데 30년이란 시간과 공간의 격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사와 직장이동, 젊은날의 심란함등으로 동문수학했던 내 친구와 어찌하다 서로 연락이 끊긴채 30여년. . .. 참으로 만나고 싶은 친구였다. 유안진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처럼 말이다. 젊은시절 전주에 살고있었다는 풍문하나만 의지하고 전주시의 전화번호를 입수하여 친구이름 50여명을 일일이 전화로 확인해봐도 친구는 없었다.
경찰전산망을 통하여 찾아보려해도 주민등록번호를 모르니 불가지사, 학교다닐때 딱 한번 가본적이 있는 그의 전포동집을 찾으려해도 온통 변해버린 시가지라 방향조차 도통 기억이 나지를 않고, 모교 서무과에 학적부를 조회하여 주소며 생년월일 출신중학교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알려고해도 개인정보유출 운운하며 거부하는 행정사무의 벽은 높기만 하고(모교라는 곳의 서무과에 당한 딱딱함과 서운함이란!)
동문회 홈페이지에 친구찾는 글도 올리고, 천리안이며 하이텔등 PC통신에 “누가 이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놓고 혹시나 E-Mail에 답신이 오려나, 남겨놓은 휴대폰 번호로 연락이 오려나 기다리기를 수년...
어떻게하면 이 친구를 찾을수 있을까 계속하여 고심을 거듭하던차, 한번은 혹시나 하고 인터넷상의 전주시청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또 한번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하고 사연을 올린즉, 민원실 여직원에게서 힘을 다하여 찾아보겠노라는 친절한 공무원(전주시청 민원제도팀 최OO씨,
이분에게는 친구를 찾으면 점심 한그릇 따뜻하게 대접하겠노라는 전화약속의 빚이 있음)의 전화를 받았는데, 과연 며칠 뒤, 전주에서 계속 살다가 몇년전에 제주로 이사갔다는 연락과 함께 친구에게서 전화가 올 줄이야, 인터넷의 위력이 이렇게 크고 대단할 줄은 정말 몰랐다. 인터넷이여 영광있으라. . .
우리가 30여년만에 만났던 그날, 생선회 한접시와 얼큰한 매운탕을 가운데 놓고 맥주잔을 기울이며 동기회장과 기억을 공유하고있는 친구, 만남의 주인공, 그리고 나와 넷이서 오붓하게 참으로 오랫만에 추억어린 옛 이야기들을 나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