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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산에서 발원(發源)하여 경중( 中)을 거치고 경해(海)
에서 여분수(黎盆水)와 만나 칠주양(七州洋)으로 빠져나가
는 삼백육십여 리의 기나긴 강이 만천강[萬泉河]이다.
꾸르르릉……!
하얀 포말을 흩어내며 어지러이 비산하는 물방울이 뿌연 안
개를 만들어낸다.
이십여 장에 달하는 커다란 폭포.
개울물이 흘러서 만들어낸 폭포가 아니라 강물이 떨어져 내
리며 만들어낸 폭포.
절경이었다.
강물의 좌우로는 조그만 야산 두 개가 반으로 뚝 쪼개놓은
듯 한 쪽 면을 잃은 채 서 있고, 억겁(億劫)을 버텨온 암석들
이 하얗게 불그스름하게도 보이는 속 색깔을 드러내고 있
다.
포말은 산 중턱 어림까지 가려버렸고, 천 년을 두고 아무에
게도 보이지 않은 포말 안의 세계를 오늘도 내비치지 않는다.
적엽명은 눈을 들어 폭포 너머를 올려다봤다.
폭풍을 예고하는 먹구름이 하늘 가득히 깔려 있다.
바람도 제법 거세다.
폭포 위로는 또 다른 작은 포말, 그리고 여인의 흑단 같은
머리칼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작은 폭포가 있으리라. 그
위로는 급하게 퉁겨 오르는 강이 조금 보일 뿐 짙게 녹음이
우거진 수림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고.
강은 계속 흐른다.
폭이 좁아지기는 하지만 바위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
지는 오지산 발원지까지 가려면 백여 리를 더 가야 한다.
적엽명은 하얀 포말을 옆으로 하고 산등성이를 타기 시작했
다.
절벽에 가까운 산등성이다.
눈앞에 보이는 나무뿌리나 돌부리를 짚지 않고는 한 걸음도
올라설 수 없는 급경사.
그러나 그렇게 급한 사면(斜面)도 평지처럼 오가는 동물들
이 있다.
산양(山羊)이란 놈들은 다른 동물들이 오가지 않는 기암절
벽이나 험준한 산림에서 서식한다. 놈들은 유가(劉家)처럼 폐
쇄적인지 한 번 선택한 지역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적엽명은 산양들이 오가며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갔다.
까아악! 까악……!
까치울음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상당한 산양의 울음소리다. 놈들은 염소와 비슷한 소리를
내지만 부상을 당하면 성깔 사나운 여자가 악다구니 쓰는 듯
한 앙칼진 소리로 울어댄다.
산양의 울음소리는 워낙 째지는 듯 날카로워 둔중하면서도
우렁찬 폭포소리의 틈바귀를 헤집고 멀리 퍼져나갔다.
부상당한 산양을 찾는 것은 쉬웠다.
놈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올가미에 걸려 나무 한 가운데 대
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놈은 적엽명을 보자 더욱 공포에 질려 발버둥쳤다.
째지는 듯한 울음소리도 더욱 커졌다.
적엽명은 산양이 매달려 있는 나무 밑동에 털썩 주저앉았
다.
놈의 울음소리가 신경에 거슬릴 만큼 날카로웠지만 그의 안
면(顔面)은 귀머거리라도 된 듯 무덤덤했다.
적엽명은 태연하게 행낭(行囊)을 풀었다.
호로병을 꺼내 입에다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을 들
이키고 난 다음 마른 육포를 찢어 잘근잘근 씹었다.
향긋한 주향(酒香)이 상큼한 풀잎 냄새에 섞여든다.
입안에 넣었던 육포를 다 씹어 삼킨 적엽명은 호로병을 다
시 들고 술을 들이켰다. 그 다음,
"딱 절반 먹었다. 지금 나오지 않으면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할 거야."
지나가는 바람에게 하는 소리처럼 나직했고, 방향도 없었
다.
"한 병뿐이냐?"
어디선가 부상당한 산양처럼 째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응."
"향기가 역겨워. 무슨 술이지?"
"금존청(金尊淸)."
"그래서 역겨웠군. 우리 같은 놈에게는 마유주가 적격이야.
"
수림이 흔들리며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탄의 목소리는 째지는 듯 날카롭다. 목소리와 더불어 뜬 듯
감은 듯한 실눈에서 매섭게 뻗쳐 나오는 안광(眼光), 하관이
빠르게 돌아간 뾰족한 턱은 무척 신경질적인 사람이라는 인상
을 풍긴다.
생김새만큼이나 그는 신경이 날카롭다.
다른 사람이 그 정도는 하며 가볍게 넘어갈 일도 탄은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고, 싸움이 벌어지
고, 사람을 상하게 한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고 난 후 탄은 그를 아는 사람들로
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가족형제들은 뒤치다꺼리에 늘 골머리를 앓았고, 이웃사람
들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하는 심정으
로 그와 상종하기를 꺼려했다.
열 아홉 살 되던 해, 그는 '더러워.'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만천강 강가에 움막을 짓고 세상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어부(漁父)가 되었다.
어부라고 해서 고기를 잡아 파는 전문적인 어부가 된 것은
아니다. 그 날 먹을 만큼의 고기만 잡으면 일손을 놓았다.
사람들과도 왕래하지 않았다.
그가 기거하는 움막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 이십 리나 떨
어져 있는 탓도 있지만, 기꺼이 반겨줄 사람이 없는 바에야.
그는 무엇을 하며 긴긴 날을 보내고 있을까? 놀고 먹는 것
도 하루 이틀이지 우선 사람과 이야기하고 싶어서라도 그렇게
살 수 없을 텐데. 결혼을 한 것도 아니고, 흔하디 흔한 애완
동물 하나 없으면서.
대답은 오직 수귀만이 안다.
탄은 소도를 들어 산양의 목젖을 따고 입을 갖다 댔다. 그
리고 솟구쳐 나오는 선지피를 사뭇 맛있다는 듯 빨아먹었다.
그릇이 깨지는 듯한 비명을 연신 토해내던 산양은 이내 축
늘어졌다. 입을 벌리고 순박하게만 보이는 눈을 부릅뜬 채.
"좋군."
탄의 입술에는 붉은 피가 묻어났다.
그는 적엽명의 손에서 호로병을 빼앗듯 받아들고는 남아있
는 술을 단번에 들이켰다.
"크……! 입맛만 버렸군. 오늘은 본격적으로 술이나 먹을
일진(日辰)인가."
꾸르르르릉……!
하늘에서 마른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우중충하던 날씨는 금방이라도 소나기를 퍼부을 듯 세상을
검게 물들였다.
"빌어먹을! 날씨마저…… 찬에게서 연락을 받았어. 네 놈이
나타났다고. 조만간 찾아오겠지 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왔
군."
"네 말대로 오늘은 하루 종일 술이나 마시자. 거지소굴만도
못한 살림살이도 보고."
말은 적엽명이 했지만 먼저 몸을 일으킨 사람은 탄이었다.
그는 올가미를 다시 설치하고 산양을 어깨에 짊어진 후 아
무 소리도 하지 않고 앞서서 길을 열었다.
꾸르릉……! 꽈앙……!
검은 하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번갯불이 시리도록 아름
다웠다.
해남도와 대륙의 여름은 판이하게 다르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뇌주반도와도 비길 수 없다.
칠월부터 시월까지 작게는 대여섯 번, 많게는 열 번이 넘
게 몰아치는 폭풍우.
그 중에서도 칠 월에 들이닥치는 태풍은 피해가 극심하다.
해남도 주민들은 칠 월의 폭풍을 '풍귀(風鬼)가 걸신(乞神)
들렸다'는 말로 표현한다. 바람이 나선형(螺旋形)으로 빙글빙
글 돌면서 바위며 나무며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날려버리
기 때문이다.
바람은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오른쪽으로 돌 때는 성난 호랑이처럼 으르렁거리고, 왼쪽으
로 돌 때는 순한 양처럼 얌전해진다. 그러다가 오른쪽으로 다
시 돌 때는 어김없이 강해지고…… 그러면서 해남도 중심을
강타한 후 점차 서쪽으로 빠져나간다.
태풍이 시작되는 중심, 바람이 시작되는 중심은 무풍지대
(無風地帶)다. 두껍고 높은 먹장구름이 하늘을 가득 뒤덮고
있지만 대체로 맑게 개인 날씨다.
폭풍의 핵(核).
위험한 순간이다.
강한 폭풍우가 산천초목(山川草木)을 뒤흔들고 지나간 순간,
하늘은 언제 폭풍우가 있었냐는 듯이 쾌청해진다. 그리고
다가오는 불청객(不請客).
미조(迷鳥)와 미충(迷蟲).
폭풍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하고 폭풍과 함께 이동해 온 새
와 벌레들은 해남도 곳곳에 알지 못할 질병을 퍼트린다.
의원을 찾을 틈도 없이 숨을 거두고 마는 치명적인 질병.
그렇게 폭풍의 핵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밀려오는 비바람.
뒤에 몰아치는 비바람은 특히 비를 많이 뿌린다. 풍귀는 꼬
리를 달고 있다고 한다. 고리는 바로 비구름이 뭉친 것. 그래
서인지 폭풍의 마지막은 항상 많은 비로 장식된다.
해남도를 쑥대밭으로 휘저어놓은 칠 월의 폭풍은 얄밉게도
뇌주반도를 건드리지 않는다.
북부만(北部灣)을 거쳐 광동(廣東)으로 빠져나가는 듯 하다
가는 스르르 소멸되어 버린다.
모두 풍귀가 마음껏 배를 채웠기 때문이란다.
해남도에서 배불리 포식했기 때문에 움직이기조차 귀찮아졌
단다.
팔월의 폭풍은 서쪽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북동으로 진군
한다.
해남도나 뇌주반도나 사정이 똑같아진다.
팔월의 폭풍은 여간해서는 사그러 들지 않는다. 광동(廣
東), 광서(廣西), 절강( 江), 복건(福建) 등 대륙 남쪽을 조
각 내는 것은 보통이고 큰놈은 대륙 전체를 휩쓸기도 한다.
풍귀가 자식을 잃었기 때문에 미친 듯이 발광하는 거란다.
그러면서 여족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죽음과 고난과 비참함
을 담담히 받아넘긴다.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걸신들린 풍귀가 하얀 미소를 짓고 다가온다.
적엽명은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주먹만 한 빗방울이 대지를 두들겨 패듯이 떨어지고 있다.
땅에는 벌써 도랑이 생겨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만천강 역
시 덩달아 굉음을 토해내고 있다.
"닷새는 움직이지 못할 텐데…… 먹을 만한 것은 있나?"
"이 놈이면 닷새는 충분히 먹지."
탄은 머리에 베고 있는 산양을 툭툭 건드렸다.
"제 때에 잡혀주었군."
"굶으면 돼."
수귀 탄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평소 말투가 그랬다.
"술, 더 없어?"
"……"
취기(醉氣)가 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술은 정신을 잃고
비몽사몽(非夢似夢) 헤맬 만큼 많이 마셨다. 발밑에 뒹굴고
있는 술독 네 단지가 그 증거였다.
반나절 동안 술독 네 단지를 비우면서 적엽명과 탄이 나눈
대화는 '술은 어디서 났어?''담갔어.'가 고작이었다.
탄은 어른 팔뚝만한 소도(小刀)를 허리춤에 꼽고 다녔다.
그리고 하루에도 서너 번씩 꺼냈다 집어넣곤 했다. 집어넣을
때는 항시 피가 묻어 있었지만. 그래서 그의 허리춤은 항시
진득한 피가 묻어있기 일쑤였다.
여족 중에서 가장 무섭고 사나운 성격을 지닌 사람이 바로
탄이었다. 그는 증오와 아집(我執)으로 똘똘 뭉쳤고, 폭력을
가장 사랑했다.
한마디로 그는 두 번 다시 상종하기 싫은 무서운 사람이다.
싸움꾼으로 정평이 나서 황유귀라는 별호까지 챙긴 술조차
탄 앞에서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탄은 성정이 날카로웠다. 탄은 날카로운 성정을 겉으로 드
러낼만한 힘을 가졌다. 세상 모두가 적이다.
그런 그가 말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늘 탄은 말
이 많다. 묻는 말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은 평소 탄의 행동
방침과 어긋난 행동이다.
"움막은 어쩌고……"
오래 전에 물었어야 할 말을 늦게 물었다.
탄은 강가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지만 지금 탄이 머무는
곳은 만천강이 폭포로 변하는 곳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산 속
동굴이다.
오래 머무른 모양이다.
불을 피우기 위해 받침돌로 사용한 바위가 시커멓게 그을렸
다. 침상 대용으로 사용하는 널찍한 바위나 촛불 대용으로 어
둠을 밝히는 송진 같은 것을 굳이 찾지 않더라도 동굴에 들어
서기만 하면 사람 손이 많이 묻은 동굴이란 것을 느낌과 냄새
로 알 수 있다.
"손질하기가 귀찮아서."
"내려가자."
"……"
탄의 몸이 굳어졌다.
"평소 입버릇처럼 말했지. 암습(暗襲)을 가한다면 삼십육검
이라도 승산 있다고."
"……"
피가 빠르게 흐르고 있다. 적엽명은 느꼈다. 탄은 자신을
만나는 순간부터 탄 자신도 겉잡을 수 없을 만큼 피가 빠르게
흘렀다.
탄은 힘이 있다. 그러나 펼치지 못한다.
탄은 싸움을 원한다. 그러나 싸울 수 없다.
탄은 세상을 증오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감쳐두어야만 한다.
해남파가 있는 한.
"정말인지 보고 싶다."
"……"
"내일? 모레? 아니면 일 년? 이 년? 언제 죽을지 모를 길이
다."
적엽명은 빗방울에 두들겨 맞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말했다.
피곤해 보였다. 나뭇잎은 금방이라도 땅으로 떨어져 흙탕물
에 뒹굴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는
길이니까.
"해남파?"
"일단은 가문을 일으킬 작정이다. 해남파와 부딪치는 것은
불문가지고…… 어쩌면 우화와도 부딪칠지 모르지."
"우화와…… 도?"
"일이 그렇게 됐어."
"선상에서 있었던 일 말이군. 한광과 부딪쳤다고? 쓸데없는
일을 했어. 네가 흑월이 아니라면."
"……"
묵직하면서도 어두운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내가 할 일은 뭐지? 그냥 싸우기만 하면 되는 건가?"
"그렇겠지."
"좋아. 그럼 가지."
탄은 몸을 일으켰다.
"지금?"
탄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후드득……!
거친 비가 사정없이 쏟아 부었다.
탄은 촌각만에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고 말았다.
"만천강을 잘 모르는군. 물이 불어나면 오고가지도 못하는
신세가 돼. 닷새는 움직이지 못한다고? 후후후……! 물이 빠
지기를 기다리려면 족히 보름은 움직이지 못하지."
"그렇군. 네 말이 맞아. 잠시 잊었지."
적엽명도 몸을 일으켜 동굴 밖으로 나왔다.
예상외로 시원했다. 겉옷을 적시고, 속옷을 적시고, 살갗을
흐르는 빗물이 정겹게 느껴졌다.
적엽명은 탄을 보고 웃었다. 탄은 웃지 않았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팔 년 만에 만난 회포(懷抱)가 줄줄이 풀려 나왔다.
* * *
"썩을……!"
얼굴에 개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중년인이 노노가( 街)에
위치한 주루(酒樓)를 빠져나오며 중얼거렸다.
그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해남도 주민들에게는 흔치 않는 지
산(紙傘)을 펼쳤지만 폭우를 감당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피부는 까무잡잡한 년이 뭐라고? 팔찌를 사달라고? 돈이
썩어 문드러졌다. 퇘엣!"
보통사람보다 배는 몸집이 큰 중년인이 힘껏 가래침을 내뱉
었다.
"나나(那那)를 안으려면 팔찌정도는 사줘야지. 너무 짰어."
중년인보다 몸집이 훨씬 왜소한 중년인이 지산을 펼치며 말
했다.
"뭐라고? 이봐, 여긴 노노가야. 노노가! 기껏해야 동전 열
문이면 할아버지 하는 계집들이라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야."
"내 참 더러워서…… 다섯 문이나 더 얹어줬는데 입술도 못
빨아봐! 내 이런 빌어먹을 곳을 다신 오나 봐라."
몸집이 거대한 중년인은 연신 눈을 부라리며 투덜거렸다.
"되지 않을 소리는 하지도 마. 그런데 이놈의 마차는 오는
거야, 안 오는 거야?"
왜소한 중년인은 주루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점소이가 달려갔으니 조만간 오겠지만 벌써 정강이 아랫부
분은 흙탕물에 흥건히 젖은 상태였다.
"했어?"
"응?"
"문언(紋焉)이 깨물어 봤냐고?"
"흐흐흐……"
"이런 빌어먹을! 나만 공쳤군."
"이봐. 여기 있는 계집들은 아랫도리가 튼튼한 사내를 좋아
한다고. 괜히 헛돈 쓰지 말고 구렁이나 잡아먹어."
두 중년인이 음담(淫談)을 늘어놓고 있을 때, 길 건너편에
서 마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하마가 이끄는 평범한 마차였다. 하지만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만큼 폭우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에는 없어서는
안될 발이었다.
"이거 정말 기분 더럽네. 이봐, 한 잔 더 걸치는 것이 어
때?"
"난 집에 갈래."
"한 잔 더 하자. 이번에는 내가 살게."
"싫어."
"정화방(情火房). 어때? 그래도 싫어?"
"정화방?"
왜소한 중년인의 눈이 반짝였다.
노노가가 시궁창이라면 정화방은 천상(天上)이다.
동전은 구경할 수 없고 은자만 돌아다니는 곳. 값싼 화주
(火酒)에 야채 두어 그릇이 고작인 노노가와 술은 죽엽청(竹
葉淸) 이상이고 안주만 사십 가지가 나온다는 정화방을 비교
한다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계집을 비교해도 그렇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내가
뒹굴었을 침상에서 역시 다른 사내와 살을 섞었을 계집을 품
는 노노가, 비단금침(緋緞衾枕)에 목욕을 정갈히 하고 하루에
한 사내만 받는다는 정화방.
돈이 많이 드는 만큼 대우는 확실히 달랐다.
그러나 대우가 좋다고 해서 재미마저 좋은 것은 아니다. 정
화방은 정화방대로 노노가는 노노가대로 독특한 맛이 있다.
특히 정상대면위(正常對面位) 밖에 모르는 정화방 기녀(妓
女)들보다 호보(虎步), 원박(猿搏), 어접린(魚接鱗) 등 원하
는 체위(體位)를 마음껏 할 수 있는 노노가의 맛은 말로 형용
할 수 없다.
"흐흐흐! 몸이 바짝 달아오른 모양이군. 좋아, 가주지."
왜소한 중년인의 머릿속에는 벌써 한 기녀의 영상이 그려졌
다.
그 때였다.
"어머! 문언이 이 년이 손님을 잘못 모셨나봐. 도대체 어떻
게 모셨기에 정화방으로 가신다고 하실까? 아이, 속상해."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간드러진 교성(嬌聲)이 중년인들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목석도 마음이 흔들릴 만큼 욕념(欲念)을
자극하는 음성이었다.
"흐흐! 그럼 네가 다시 한 번……"
"군침 흘리지 마! 너는 했잖……"
음흉한 생각을 하면서 뒤를 돌아본 두 사람은 돌이라도 된
듯 몸이 굳어졌다. 두 눈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부릅
떠졌고, 벌어진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호호호! 왜 그러세요? 어머! 그렇게 쳐다보니 이상해."
목소리의 주인은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사뿐사뿐 걸어
왔다.
"저, 저희들이 그만 실례를……"
몸집이 비대한 중년인은 고양이를 만난 생쥐처럼 몸이 굳어
진 채 벌벌 떨었다.
실수했다.
노노가에서는 노노가 계집들의 말만 해야 된다는 사실을 깜
빡 잊어버렸다. 그리고 재수 없게, 정말 재수 없게 호귀(狐
鬼) 류( )를 만나고 말았다.
"어멋! 섭섭해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희 노노가
에 오신 손님이 언짢게 돌아가시면…… 아이, 암만 생각해도
속상하네. 많이 속상하시죠? 호호호! 들어가세요. 제가 예쁜
계집을 붙여드릴 게요."
"저, 저……"
왜소한 중년인을 말을 더듬거릴 뿐 하고자 하는 목안에서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 이것 얼마 되지 않지만…… "
비대한 중년인이 황급히 품안에서 전낭(錢囊)을 꺼내 통째
로 내밀었다.
전낭을 내미는 자의 바지는 축축이 젖어 들었다. 비 때문
에? 왜소한 중년인이 정강이 아래만 젖은 데 반해 그의 바지
는 허벅지 부근에서부터 살갗에 찰싹 달라붙었다.
"어머머! 이를 어째? 내가 실수했나봐? 왜 전낭을 꺼내세
요."
호귀 류는 사양하는 말과는 달리 전낭을 받아들었다. 그리
고 손대중으로 무게를 가늠해보기까지 했다.
"어머! 소비(小費:팁)치고는 너무 많은 것 같애."
적다는 소리다.
왜소한 중년인이 황급히 품속을 뒤져 비대한 중년인보다 좀
더 묵직해 보이는 전낭을 꺼내 내밀었다. 그의 손 역시 사시
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었다.
"호호호! 너무너무 고마워요. 제가 아이들을 잘 교육시켜
놓을게요. 어르신들이 오시면 잘 모시라고요. 아이, 속상해.
잘 가르친다고 가르쳤는데…… 정말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을
래요? 어머! 이것 진짜 진주인가 봐?"
호귀 류는 비대한 중년인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중년인은 황급히 목걸이를 벗었다. 목걸이뿐만 아니라 팔
지, 반지 할 것 없이 몸에 걸친 보옥(寶玉)은 모조리 빼냈다.
왜소한 중년인도 뒤질세라 보옥을 뺐다.
주술(呪術)에 걸린 사람? 그들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실혼
인(失魂人) 같았다.
"호호! 고마워요. 고마워요. 어젯밤 꿈자리가 좋더라니 횡
재하려고 그런 꿈을 꿨나봐."
호귀는 보옥을 주섬주섬 챙겨 넣었고, 두 중년인은 황급히
마차에 올라탔다.
"빠, 빨리……"
중년인이 채근할 필요도 없었다.
시종(侍從)인 듯한 마부는 중년인들이 올라타자마자 부리나
케 마차를 움직여 폭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호호호! 이건 정말 알이 크네. 아이, 좋아."
호귀는 그들이 사라지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비대한 중년
인이 남겨놓고 간 목걸이 진주를 입에 물고 깨물어보았다.
흠집하나 나지 않는다. 이빨이 들어갈 틈도 없이 단단하다.
색깔은 뿌여면서도 은은한 광택이 난다. 최상급의 진주가 틀
림없다.
"호호……?"
만족스런 웃음을 흘리던 호귀는 문득 이상한 예감에 낯빛을
굳혔다.
퍼붓는 비로 인해 한 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건너편.
무엇인가가 있다.
무엇일까? 손님들이 타고 온 마차가 세워진 곳에 무엇이 있
기에 마음이 심란한 걸까?
머리 뒤끝을 잡아끄는 듯한 느낌.
호귀는 자신의 예감을 믿었다. 불길한 예감이든 좋은 예감
이든 머릿속을 스쳐간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틀림
없이 마차가 가득한 건너편 마방(馬房)에 심상치 않은 무엇인
가가 있다.
호귀는 보옥을 떨구어 버리고,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의 의복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어느새 어디서 나
타났는지 지분(脂粉)을 천박하게 바른 여인 두 명이 나타나
폭이 넓은 지산을 받쳐주었다.
처벅! 처벅……!
호귀는 흙탕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보지 못하고 걸음을 내
딛었다.
어느 때 같으면 어림없는 일. 의복을 정결히 하고, 얼굴을
아름답게 가꾸고, 인간이 발산할 수 있는 매력을 다듬는 일이
그의 소일거리였다. 그런 그가 흙탕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밟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호귀는 한 걸음씩 다가설수록 더욱 강렬하게 저며오는 살기
를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정말로 외모에 신경을 쓸 만한
정신적인 여유가 없었다.
강렬한 살기, 강렬한 살기…… 불길한 예감.
파앗!
갑자기 마방 한 구석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아니, 번뜩였
다 싶은 순간 일 장 거리를 순식간에 압박해 온 푸른빛은 눈
앞에서 현란하게 흔들렸다.
호귀의 신형도 빨랐다.
그의 몸은 원을 그리듯이 빙그르 돌면서 푸른빛의 공세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허리를 감고 있던 채대(彩帶)가 풀리며 너
울너울 허공을 날았다.
푸른빛은 땅바닥에 엎어지듯이 바짝 엎드렸다. 꼭 그렇게
보였다. 낮게 허리를 숙인 것에 불과한데도 푸른빛은 난쟁이
보다 더욱 작게 줄어든 듯 했다.
쉬우웅……!
푸른빛은 채법의 투로(鬪路)를 상세히 알고 있는 듯 했다.
밑에서 위로 쓸어 올린 다음 다시 밑으로 떨구어 몸통을 감
싸버리는 동동망(動動網).
푸른빛은 동동망 초식이 채 절반도 펼쳐지지 전에 진흙탕을
굴러 발목을 베어왔다.
동동망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펼칠 수 있는 공격법이다.
"헉!"
호귀의 입에서 단발마가 새어나왔다.
살아생전 네 번째 발하는 단발마다.
첫 번째는 적엽명.
그와 비무를 하면서 어설프게 배운 싸움질과 무공은 너무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배웠다.
두 번째는 수귀 탄.
무식하고 거칠며, 성깔이 못돼먹은 줄로만 알았더니 제법
한 가닥 하는 힘이 있는 자. 탄과 같이 무식하게 빠른 공격만
일삼는 놈을 제압하려면 채법에도 강맹한 힘이 깃들어야 한다
는 사실을 일깨워준 자.
하지만 채법의 요체(要諦)는 부드러움. 부드러움과 강맹함
을 어떻게 섞어야 하느냐가 최대 난제(難題)로 남았다.
세 번째는 팔 년 전.
적엽명이 해남도를 도주하면서 해남파가 보여준 힘.
곱게 잠을 자다가도 가위에 눌려 잠을 깰 만큼 공포로 다가
왔던 힘.
이번이 네 번째다.
푸른빛은 가히 탄성을 발할 만큼 빠른 속도로 허리 아랫부
분을 노리고 다가왔다.
피윳!
호귀는 채대 손잡이를 푸른빛에게 내던졌다. 동시에 다른
손은 풀려나가는 채대의 반대편을 움켜잡았다. 한쪽은 풀리고
한쪽은 감기고.
"흥! 제법이군."
그릇이 깨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또한 그 순
간 푸른빛과 채대 손잡이가 어우러지며 쇠와 쇠가 부딪치는
듯한 소성(小聲)을 토해냈다.
"탄!"
호귀가 놀라서 소리쳤다.
"계집애가 약아졌군. 채대 속에 가죽을 받치고, 손잡이는
쇠로 만들었어."
"호호! 목숨을 보전한 줄 알아. 조금만 늦었으면 철편(鐵
片) 오십 개가 몸을 어루만졌을 거야."
"그 전에 네 머리가 땅에 떨어지겠지."
탄은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류는 이상한 예감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세상에 하늘과 땅이 있고, 음과 양이 있고, 어둠과 밝음이
있다면 인간 중에는 탄과 류가 있다. 둘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터 숙명적으로 이어진 상극(相剋)이지 않은가.
워낙 말이 없는 탄이지만 어쩌다 입을 열 경우에도 자신에
게 던지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류는 탄을 징그러운 벌레 보듯이, 탄은 류를 희한하게 생긴
동물을 감상하듯이 쳐다보곤 했다.
오늘처럼 말이 많은 경우는 처음이다.
"웬일이야? 여길 다 오고?"
"낯짝 좀 지우지 그래? 지분이라니. 허참!"
"어멋! 무슨 상관이야?"
"내 인생도 더럽지만 네 인생도 참 더럽구나."
"어머머! 점점 실례의 말씀을…… 그렇구나! 적엽명! 건이
가 왔지? 그렇지?"
류는 황급히 마방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있었다. 마차 문짝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서있는 사내.
틀림없이 적엽명촌경 비건이다.
"어서…… 와. 어머, 내 꼴 좀 봐. 오랜만에 만났는데 몰골
이 말이 아니네. 화장도 다 지워지고……"
"물 섞은 술 말고, 진짜 술도 있나?"
적엽명의 말 한마디는 팔 년이란 공백을 일순간에 메워버렸
다.
"호호호! 섭섭하게 무슨 실례의 말을 하는 거야? 노노가에
서는 물 탄 술을 안 팔아. 참! 아직도 동정(童貞)이지? 호호
호! 나나라는 애가 아주 예뻐. 오늘…… 자고 가."
"자고 가려고 왔어."
적엽명은 천천히 다가와 류의 손을 잡았다.
"소식 한 장 전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너는…… 나쁜 놈이야."
호귀 류의 간드러진 음성을 들으면 울적하던 기분이 말끔히
가신다. 토라진 음성을 들으면 보듬어 안아주고 싶고, 슬픈
일을 말할 때면 같이 울어주고 싶다.
키는 오척 육촌 정도로 평범했지만, 잘록한 허리와 상체보
다 하체가 긴 늘씬한 몸은 뭇 여인들 속에 섞여 있어도 단연
돋보인다. 얼굴도 아름답다. 초승달을 오려붙인 듯한 눈썹,
오뚝한 코 등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도 류의 아름다움을
옳게 표현할 수 없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들은 류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할 수가 없다.
사내.
류는 사내다.
정말 사내일까? 혹, 양물(陽物)이 비정상적인 것은 아닐까?
그건 아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망나니짓을 하고 다닐
적에 심심파적으로 류의 아랫도리를 벗겨 본 적이 있다. 바
지를 벗겨본 결과, 그의 양물은…… 아! 뜻밖에도 보통사람보
다 훨씬 컸다. 한 배 반에서 두 배쯤.
여성적인 음성과 태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질도 아니다.
류의 아버지는 대장장이로 평생을 쇠망치만 두들기며 살아
왔고, 그런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거칠고 걸걸했다. 류의
어머니도 다소곳하지 않았다. 처녀 적부터 포구에서 선원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해온 탓인지 농이라도 건네는 사내가 있으면
가차 없이 욕지거리를 퍼부어 댔다.
여덟이나 되는 형제들도 류처럼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그것이 류를 울타리 밖으로 내쫓았고, 그 후부터 류는 여우
에게 홀려서 병신이 됐다는 말과 함께 호귀라는 작호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세상에 죽으란 법은 없는가?
류는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그와 하룻밤이라도
같이 보낸 기녀는 전혀 사내답지 못한 류에게 사랑을 구걸하
곤 했다.
류는 청루를 가지고 있지 않다. 청루를 차릴만한 돈도 없을
뿐 아니라, 한 곳에 정착하여 은자나 세고 있을 성격도 못된
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은성의 밤을 휘어잡는다. 술이든 밥이
든 기녀든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손에 넣는다. 청루의 주인
들도, 주루의 주인도, 객사의 주인도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
려 하지 않는다.
적엽명이 해남도를 떠난 후, 류는 버림받은 퇴기(退妓)들을
모아 해남도에서 가장 값싼 기루촌(妓樓村)을 만들었다.
'시끄럽다'는 뜻으로 붙여진 노노가.
호귀는 육백여 명에 이르는 퇴기들의 주인이 되었다.
호귀 류와 황함사귀 찬은 사람들이 만나기를 꺼려하는 귀자
가 붙었으면서도 사람들 틈에 묻혀서 사는 귀신인 것이다.
"호호호! 황함사귀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긴가민가
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니 정말 살아있었네."
호귀는 적엽명과 만난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듯 했
다.
"고생이 심했던 것 같다. 어머, 이 얼굴 좀 봐. 얼굴이 많
이 상했네? 정말 속상해 죽겠어."
"정말 구역질나서 같이 술 못 먹겠네."
탄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 왜 난리야? 너한테 한 말도 아닌데?"
탄은 대꾸도 하지 않고 입안으로 술잔을 털어 넣었다.
"알다시피…… 나는 친척도 없고 친구도 없어."
묵직하게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탄과 류는 으르렁거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사귀…… 너희들이 전부다. 너희가…… 비가보의 발판을
만들어 줬으면 한다. 대가는 아무 것도 없어. 가급적이면 충
돌을 피해보겠지만 어쩌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이제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말로 들리네?"
"그럴 경우, 너희들이 위험해진다."
"호호호!"
류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탄은 묵묵히 술잔만 기울였다.
"가자. 황유귀 술이 도착해 있을 거야. 장마가 끝나면 황함
사귀가 올 테고…… 그 전에 마방(馬房)을 개축(改築)해 놓아
야 돼. 할 일이 많아. 후후! 지금 비가보에는 마당을 쓸 사람
도 없거든."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을 간다는데……
류와 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가보가 얼마나 철저하게 무너졌는지는 누구보다도 그들이
더 잘 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도 아니지만. 비가보는
도움을 줄 시간의 여지조차 없이 일순간에 폭삭 무너져버렸다.
몰락이 아니라 멸망(滅亡)이다.
천여 두에 이르던 말들이 하루아침에 꼬꾸라졌고, 이백여
명에 이르던 목부들조차 칠 할 가량이 병사(病死)하고 말았
다.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밤낮을 이어가며 타올랐다.
매캐한 내음이 삼십 리 밖에까지 전해졌다.
백사구는 죽음의 땅, 비가보는 접근해서는 안 되는 절대금
지(絶大禁地)가 되었다.
그렇게 비가보는 몰락했다.
아무도……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서로를 진심으로 아꼈던 세 사람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비가보의 재건은 사귀에게도 희망의 빛이다.
여족인이기에, 사생아(私生兒)이기에 커다란 뜻과 힘을 가
지고도 한 뼘의 땅조차 마음껏 소유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 비
가보를 재건한다는 것은 일 문의 부흥(復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삶.
희망(希望).
탄은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었고, 류는 옷매무시를 만지
작거렸다.
<제 일권 끝. 귀향(歸鄕)>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