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벌초세대
김만년
“아부지 어무이 놀라지 마이소. 이발 시작합니더!”
붕붕, 예초기를 돌린다. 한낮의 졸음에 빠져있던 산마을이 화들짝 놀란다. 장탄식으로 울던 앞산 장끼도 소리를 뚝 멈춘다. 어머니는 모처럼 찾아 온 자식들이 반가운지 풀잎치맛자락을 들썩이며 허공으로 흰 풀씨들을 자꾸자꾸 날린다. 그새 쑥새풀 엉컹퀴 박주가리 싸리꽃, 참 많이도 키워놓으셨다. 이렇게 잡초라도 부지런히 키워 놓아야 그나마 일 년에 한번이라도 자식들을 볼 수 있다는 어머니의 그 속내일까. 봉분 앞에는 어머니 생전에 좋아하시던 보라구절초 몇 대궁이 구월소슬바람에 흔들린다. 몇 해 전에 심은 산수유 박티꽃도 가지치기를 해 주고 쓰지 않는 CD로 예쁜 명찰을 달아준다. 멀리서 보니 이발한 자리가 훤하다.
아버지 무덤은 군데군데 버짐자국 같은 흉터가 나 있다. 멧돼지들이 파헤친 곳을 작년 한식 때 매운 자리다. 잔디를 이식했지만 잘 아물지 못한 듯하다. 흉터자리를 보노라니 피식, 웃음이 난다. 하필이면 상처 난 자리가 무덤 뒷꽁지 쪽이라니, 생전의 아버지는 거동이 불편해서 이발소 가실 형편이 못되었다. 부득이 이발 기계를 사다가 손수 이발을 해 드렸다. 그런데 머리 뒤쪽이 문제였다. 뒤쪽에 작은 혹 한 개가 불룩 나와 있어서 그 부분이 너무 많이 깎여 늘 상처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도무지 내 실력으론 무리였다. 아이들은 할아버지 주위를 빙빙 돌며 웃음보를 터트렸지만 다행히 뒤쪽이라 아버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저 무덤의 상처 난 자리가 생전의 아버지 이발 후의 모습 같다. 슬쩍 죄송한 마음이 든다.
“니가 장손이니 내 죽은 뒤에는 문중산소는 니가 관리해라.”
땀을 식히고 있는데 소나무아래 엉거주춤 앉아있던 작은아버지가 한 말씀 하신다. 토를 달려다가 그만 두었다. 병약하신 팔순 노인에게 괜히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리고 싶지 않았다. 또 토를 달아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작은아버지가 이승을 관장할 일도 아니지 않은가. 죽음 후는 다 산자의 몫 일진데,
작은아버지는 풍습을 지키는 일에는 고집불통이셨다. 작은어머니의 이장을 온 식구들이 반대했지만 수맥이 집히고 개발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기어이 이장을 결행하셨다. ‘처음 육신이 내려앉은 곳이 천년의 안식처 아니던가. 이미 백골이 되어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는 중인데 그깟 뼛조각 몇 개 수습해서 다른 곳에 꽃단장을 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말씀을 완곡하게 드렸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작은아버지는 개발이 범접할 수 없는 높은 산에 쌍봉을 올리고 당신 가묘(假墓)까지 만들고서야 흡족해 하셨다. 생전에 부부금실이 좋았으니 그렇게라도 애정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한 여인을 위해 궁전무덤을 축조한 저 유명한 ‘타지마할’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생전에 못 다한 정을 기리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을 성 싶다.
새파랗던 땡감이 가을볕에 연지 볼을 붉힌다. 번성하던 마을은 폐촌이 되고 겨우 두세 가구만이 허물어진 세월을 붙들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논두렁 끝에 우람한 느티나무가 보인다. 연분홍치마자락 펄럭이며 그네를 타던 어머니도, 설탕막걸리 한 사발에 고래고래 설운 울음 토해내던 점촌당숙모도 어느새 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어머니는 사촌동서 간 봉긋봉긋 다시 산중일가를 이루며 한 세월 또 푸르게 사신다. 아직은 찾아오는 자식들이 있어 봉분은 두텁고 잔디들은 파릇하다. ‘장차 저 산소를 어쩌지?’ 불현 듯 산소의 앞날이 걱정된다. 부모를 모신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 공양을 받지 못하는 첫 세대가 베이비부머세대라고 한다. 역시 내가 벌초의 마지막 세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탯줄이 묻힌 고향이고 부모님과 산정(情)이 애틋해서 사는 날까지는 벌초를 오겠지만 아이들이 천리 길을 달려 조부모님 벌초를 하러 오리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조상이나 산소에 대한 생각이 나와 같지 않을 테고 또 그런 숙제를 아이들에게 남겨서는 안 될 것 같다.
삼십년 나는 동안 한해도 거르지 않고 한식과 벌초를 다녀왔다. 애틋하게 절명하신 어머니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전에 불효한 죄 갚음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살아 계실 때 인절미 한 조각이라도 당신 잎에 넣어 주지 못한 것을, 잡초를 뽑듯이 해마다 성근 후회들을 뽑아내었다. 산 효자가 되지 못하고 죽은 효자가 된 것이다. 살아오면서 나는 산소에서 참 많은 위안을 얻었다. 어머니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당신 발치에 제비꽃 진달래꽃지짐 한상 가득 차려놓고 늦철 든 장남을 반기셨다. 땀을 흘리며 꽃나무를 심고 잡풀을 캐다보면 달그락달그락, 무덤 속 어머니의 전언(傳言)이 들리는 것만 같다. 봄볕에 자주 앓던 관절소리, 나막김치 씹던 틀니소리도 들린다. 그럴 때면 나는 산수유나무 아래 앉아서 어머니 말씀을 또박또박 받아 적곤 한다.
당신 누운 발치에/올해도 산수유 꽃 피었습니다/노란 수다가 쟁글쟁글 가지마다 벙글었습니다/곤줄박이 한 마리/보풀한 꽃숭어리에 앉아 금분을 찍습니다
환한 꽃가지 한 구절/어쩌면 당신 알뜰한 소식일까/어느새 입 안 가득 노란 물이 배어옵니다/저렇게 또 가을까지 붉어지면/참하고 영근 말씀 몇 됫박은 얻을 수 있겠습니다
애련애련/옛 생각 한자락/오늘도 당신 발치에 앉아 저물고 있습니다/어린 바람 다독여 맨 먼저 보내온/당신의 꽃 편지를 읽습니다 (산수유 편지 전문)
어머니가 불러주신 노란 쪽지편지 한 구절 받아들고 산소를 내려올 때면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삶의 격랑에 떠밀릴 때 그나마 기댈 수 있는 곳이 나의 경우 어머니 산소였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한 평 무덤마저도 자식에게 내어 준 셈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한 인간이 생의 여정을 마치고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리라. 있던 곳은 땅이고 하늘이다. 육신은 자연으로 회귀하고 영혼은 하늘로 돌아간다. 그래서 영혼의 오름을 천도(薦度)나 귀천(歸天)으로 상징했다. 불가에서는 49제라는 전이기(轉移期)를 두어 망자의 극락왕생을 소원한다. 유가에서도 49제를 치루며 영(靈)을 중시했지만 육신에 대한 예도 엄격하고 극진했다. 효를 근간으로 한 매장풍습이 선대(先代)까지 불문율처럼 확고했다. 시체를 새의 먹이로 내어주는 히말라야 부족들의 조장(鳥葬)풍습은 석삼년 시묘(侍墓)살이까지 마다하지 않던 우리의 매장풍습에 비교해 볼 때 놀랍다. ‘생전에 짐승들 덕분에 몸을 부지했으니 사후에는 짐승들에게 이 몸을 돌려준다.’는 자연합일의 선행자들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죽으면 동물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유물론적 가치관을 일찌감치 체득한 것일까. 육신을 중시하는 우리의 지엄한 매장풍습에 견주어 볼 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부족들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매장풍습도 쇠퇴해간다. 화장(火葬)이 대세이고 숲이나 잔디에 산골(散骨)하는 장례방식들도 많이 선호한다. 시대는 변했고 사람들은 합리란 명분을 앞세워 속속 편리성에 동승한다. 어험, 하며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들먹이면 구태나 ‘꼰대’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어쩌겠는가. 씁쓸하지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순류(順流)처럼, 그렇게 부모님 산소도 흙이 되고 숲이 되고 마침내 고요한 풍진(風塵)에 들 것이다.
‘작은아버지, 아이들에게 묵뫼를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죽기 전에 제 손으로 평장(平葬)을 해서 자연으로 귀속시킬랍니다. 죄송합니다.’
속말을 삼키며 돌아서는데, 산수유나무가 살랑살랑 고개를 흔든다.
‘글쎄, 그때 가봐야 알지.’
첫댓글 그래요.
그말이 맞을지도~~~~~~~
그때 가봐야 알지.
그럴 것 같아요. 우리 세대가 끝나면 누가 산소에 가고 제사를 지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