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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전고(官職典故) 승정원(承政院) 대언사(代言司)ㆍ은대(銀臺)
백제 때는 내신좌평(內臣佐平), 고려 때는 중추원(中樞院), 일직원(日直員)을 좌우승선(左右承宣)이라 했는데, 승선은 각각 부관을 두었다. 또 한림원(翰林院)에 학사(學士)ㆍ승지(承旨)를 두었고 승지방(承旨房)도 두었는데 뒤에 인신사(印信司)로 고쳤다.
○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서 중추원(中樞院)에 도승지ㆍ좌우승지ㆍ부승지를 두었다. 중추원(中樞院)조에 상세하다.
세조가 중추원의 지신사(知申事) 이하의 벼슬을 나누어서 승정원을 두고 왕명의 출납을 맡게 하였다. 도승지는 이방(吏房)이요, 좌승지는 호방(戶房)이요, 이하는 동벽(東壁)이라 일컬음. 우승지는 예방(禮房)이요, 좌부승지는 병방(兵房)이요, 이하는 서벽(西壁)이라 일컬음. 우부승지는 형방(刑房)이요, 동부승지는 공방(工房)이라 하였다. 주서(注書)가 2명인데 연고가 있으면 가관(假官)으로 임명했다. 선조조에 사변가주서(事變假注書) 1명을 더 두어서 오로지 비변사와 국옥(鞫獄)의 문서를 관장하게 하였다. 《문헌비고》
연산이 주서(注書) 2명을 더 두었는데, 중종조에 도로 없앴다.
○ 고려 때에는 당직(當直) 승선(承宣)이 오경에 자문(紫門)에 나가면 중관(中官)이 나오는데, 승선이 임금의 문안을 하고 나서 열쇠를 청하여 자성(紫城)과 나성(羅城)의 여러 문을 모두 열게 했다. 조선도 역시 그대로 좇아 승지는 사경에 누각(漏刻)을 기다리려고 들어갔다가 누각이 파하면 나왔다.
○ 승정원은 목구멍과 혀 같은 직책으로 임금의 명을 출납(出納)하기 때문에, 그 책임이 가장 중하였다. 예전에는 성문과 궁문(宮門)은 모두 파루(罷漏)가 된 뒤에 열고 인정(人定)이 된 뒤에 닫았는데, 승지들이 사경이면 대궐에 나가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들어갔다가 밤이 깊은 뒤에야 집에 돌아왔다. 남이(南怡)의 난리 때부터 예종이 명하여 날이 환히 밝은 뒤에 궁문을 열고 날이 어두우면 닫게 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편해 하였다.
○ 생각건대, 옛날 순(舜) 임금이 용(龍)에게 명하기를, “아침저녁으로 나의 명(命)을 출납하되 오직 성실히 하라.” 하였고, 상(商)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아침저녁으로 착한 말을 들려주어 내 덕(德)을 보조하고, 네 마음에 열어서 내 마음을 물을 대듯 하여다오.” 하였다. 명을 출납하고 계옥(啓沃 너의 마음을 열어 [啓乃心] 짐의 마음을 적셔다오 [沃朕心]의 준말)하는 사이에 신하의 마음이 충(忠)인가 아첨인가, 임금의 덕이 닦이는가 그렇지 않은가 달려 있는 것이니, 참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유의손(柳義孫)의 〈제명기(題名記)〉
○ 지금의 승지는 즉 옛날의 시중(侍中)과 상서령(尙書令)으로, 중국의 내각(內閣)이다. 크든 작든 문서는 다 경유하지 않는 것이 없다. 모든 정령(政令)이 이로우냐 해로우냐 임금의 덕에 득이냐 실이냐를 대신이나 대간(臺諫)들은 들을 길이 없어도 승지만은 알게 되니, 그 소임의 중대함이 어느 정도인가. 그러한데 지금 승지의 물망(物望)이 도리어 삼사(三司)의 밑에 있고 문서를 받들어 행할 뿐, 고집스레 논란하는 일은 별로 없으니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마땅히 물망이 있는 사람을 힘껏 골라서 선임에 충당하고 자주 임금의 하문(下問)에 응함으로써 그 권한을 무겁게 하고, 일에 따라서 상소하고 반박함으로써 직접 왕의 국정을 도와 정부와 더불어 표리(表裏)의 관계가 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지천집》
○ 전에는 승지 한 사람이 입직하였다. 세조 때 승지 이호연(李浩然)이 입직했으나 술에 취해 누워 있어 공사(公事)에 대한 왕의 물음에 호연(浩然)이 일어나 대답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이 입직하게 되었다. 《용재총화》
○ 전에는 정원(政院)의 조례(早隷 관아에서 부리는 하인)엔 은패(銀牌)를 차고, 붉은 옷을 입은 별초(別抄)가 따랐는데, 세조가 별초(別抄)를 없애고 다만 몇 사람만 두어 사옹원에 소속시켜 두고, 여러 곳에 어온(御醞 임금이 먹는 술)을 내릴 때만 붉은 옷을 입고 가서 참예할 뿐이었다. 《용재총화》
○ 성종(成宗) 15년에 손수 왕우칭(王禹偁)의 〈대루원기(待漏院記)〉를 써서 승정원에 하사하고 승지 등에게 이르기를, “우칭(禹偁)의 기(記)가 비록 집정(執政)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나, 벼슬에 있는 여러 관원들은 모두 좌우명으로 대신할 만한 것이다. 더욱이 승정원은 추기(樞機)의 자리가 아니냐.” 하였다.
○ 채수(蔡壽)는 체직(遞職)이 마땅하고 강등은 부당하다. 성종조 채수(蔡壽) 조에 있다.
○ 연산조 때 강혼(姜渾)
○ 중종 3년에 임금이 손수 글씨를 써서 정원(政院)에 내려주고 붓 40자루와 먹 20개를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이제 붓과 먹을 내려주니 나의 과실을 거리낌 없이 쓰라.” 하였다.
○ 중종 기묘년 6월에 승지로 하여금 직접 들어와서 일을 아뢰게 하였다. 임금이 평상복으로 편전(便殿)에 앉아 있으면 승지ㆍ주서(注書)와 사관 2명이 들어가서 아뢰고 물러났다 작은 일은 승전색(承傳色)이 출납하게 하였다. 《동각잡기》
승지가 직접 아뢰는 것은 조종조의 구례로 조광조(趙光祖) 등도 이 법을 따라 썼는데, 광조 등이 화를 입은 뒤로 드디어 시행되지 않았다 《해동야언(海東野言)》
선조조 때,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승지가 직접 들어가서 아뢰는 일은 까마득한 옛 법이 아니고 중종조 때 행한 바이다. 이 예는 회복할 만하다.” 하였다.
조종조의 크고 작은 공사(公事)를 모든 관리가 반드시 직접 탑전에 아뢰었는데, 중세(中世) 이후로 이 법이 폐지되고 모든 계사(啓事)를 승지에게 말로 전하면 주서(注書)가 글로 써서 아뢰었다. 그 뒤에 비로소 초기(草記)를 써서 대략 소(疏)나 차자(箚子)처럼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니, 지금 정원일기(政院日記)에 “어느 승지가 어느 관원의 말로써 임금께 아뢰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옛 법에 있던 것인 것 같다. 《지봉유설》
○ 권벌(權橃)이 박영(朴英)에게 내의제조(內醫提調)를 사양하였다. 중종조 박영(朴英)조에 있다.
○ 좀 전엔 비밀에 속하는 공사(公事)는 정원(政院)에서 열어볼 수 없었다. 명종조 때 황해도의 도둑 임꺽정[林巨正]이 자기 패거리를 시켜 한 통의 문서를 가지고 마치 반란을 고발하는 것처럼 한 것을 승지가 살피지 못하고 임금께 아뢰었고 화가 난 임금은 승지를 갈았다. 이 뒤로부터 정원이 비밀에 관한 일도 모두 먼저 뜯어본 뒤에 올림을 얻었으니 지금도 상소의 피봉에 쓰기를, “임금 앞에서 뜯어보라[上前開抄]”라고 하는 것은 옛날 예(例)에 따른 것이다. 《지봉유설》
○ 고사(故事)에 오직 직제학이라야 승지에 의망(擬望)되고, 종부시 정(宗簿寺正)은 종사(宗師)로, 보덕(輔德)은 시강원(侍講院)의 장관으로 함께 의망할 수 있을 뿐이었다. 명종이 이량(李樑) 이때 이량(李樑)은 계급을 뛰어서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을 쓰려고 옥당의 동벽(東壁)과 양사(兩司)의 아장(亞長)을 모두 승지에 의망하게 명하여 드디어 양(樑)을 뽑아 승지로 삼았다. 이것이 한 예가 되어 지금까지 준행하고 있으나 종부시 정과 보덕을 의망하는 일은 마침내 폐하였다. 《정암집(靜庵集)》
○ 명종조 때 승지 경혼(慶渾)이 나이가 많아 잘 잊어버리므로, 임금이 은대(銀臺)에 늙은 사람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시제(詩題)로 삼아 유신(儒臣) 등으로 하여금 글을 지어 올리라 하였다. 대개 혼(渾)을 지목해서 한 일이었다. 승지 유승선(柳承善)의 시 끝귀에,
다만 근력이 해마다 감손함을 불쌍히 여김이요/兄憐筋力隨年減
소리개 어깨 관상법에 소리개 어깨는 젊어서 현달한다 함 를 좋아했고 옛 사람 사람 늙은 을 싫어함은 아닐세 / 非喜鳶肩厭舊人
라 하였는데 임금이 기뻐하여 상을 주고 특별히 경혼(慶渾)은 가선(嘉善)으로 승진시켰다. 《지봉유설》
○ 정원(政院)의 고사(故事)에 여러 승지들은 도승지를 공경하고 감히 농담을 하지 못하며, 불경(不敬)한 자는 벌연(罰宴)을 베풀게 되어 있었다. 홍섬(洪暹)이 기생[妓] 유희(兪姬)를 가까이 했었는데, 유생(儒生) 송강(宋康)도 또한 정을 맺어 매우 가까이 지냈다. 홍섬이 도승지가 되고 이준경(李浚慶)이 동부승지가 되었을 때이다. 송강이 죽자, 섬(暹)이 탄식하기를, “나와 더불어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시에 났는데 이제 먼저 죽고, 궁(窮)하고 달(達)한 것이 같지 않으니 어찌 이상하지 않으냐.” 하였다.준경(浚慶)이 말하기를, “도승지 영감께서도 유희(兪姬)를 사랑하시고 송강(宋康)도 역시 유희를 사랑했으니 명(命)만 같을 뿐만 아니라, 행한 일까지 같습니다.” 하니, 여러 승지들이 서로 돌아보며 아연실색했고, 여러 서리[吏]들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래지며 처음 겪는 큰 변고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준경(浚慶)의 집에서 벌 잔치를 무릇 일곱 번이나 차린 뒤에야 끝이 났다. 중고(中古) 이래로 기강이 차차 무너져서 정원(政院) 안 옛 풍도가 날로 퇴패하여, 다시 옛날 같은 일이 있을 수 없게 되었으니, 역시 세상이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야담(于野談)》
○ 선조조에 영상 이준경(李浚慶)이 말하기를, “조정에서는 마땅히 체통을 지켜야 할 것이니, 요전날 승지가 면대(面對)하기를 청한 일은 근래의 규례가 아니요, 체통을 무너뜨릴 우려가 있다. 가령 두려운 일이 생겼더라도 대간(臺諫)과 논사(論思)의 신하가 있으니, 하필 승지가 청대(請對)할 게 있습니까.” 하였다. 이이(李珥)가 말하기를, “이 말은 그렇지 않다. 다만 그 한 말이 무엇인가에 있는 것이다. 만일 말한 것이 옳다면 무엇이 체통에 해롭겠는가. 승지도 또한 경연(經筵)의 참찬관(參贊官)이니 임금께 입대(入對)를 청하여 일을 말하는 것은 또한 그의 직책이다.” 하였다. 《석담일기》
○ 선조 계미년에 임금이 이르기를, “박근원(朴謹元)이 막고 가리기를 마치 조고(趙高)와 같이 한다.” 하니, 병조 판서 이이(李珥)가 아뢰기를, “정원(政院)에서 전하의 허락을 받는다 칭탁하고 바로 소장(疏章)을 드리지 않는 것은 역시 옛 예(例)요, 근원이 처음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만일 옛 예를 깨쳐버리지 않는다면 뒤에 반드시 또 근원이 한일과 같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조 참의 성혼(成渾)이 정원이 임금의 승낙을 받은 뒤에 소장(疏章)을 드리는 예를 없애어 군신(君臣)간의 막고 가리는 폐단을 막자고 청하였는데, 대신들에게 논의케 하여 이로써 정례(定例)를 삼았다. 《일월록》
○ 승정원은 임금을 대변하는 곳이므로 그 직책이 극히 중요하고 임금에게 가까운 자이리다. 국조(國朝)에서 이를 중시하여 이조나 대사간으로서도 겨우 이 자리를 얻어 했으니, 박원종(朴元宗) 같은 사람은 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나이 젊다고 해서 그 자리를 바꿔서 병조 참의를 삼은 것이 그 예다. 근세에는 명망이 삼사의 아래로 떨어졌다. 또 조종(祖宗) 이래로 반드시 무신 한 사람을 여기에 참여시켰던 까닭은 아마도 그 인망(人望)을 길러 후일에 큰 자리에 쓰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북(西北)의 장수가 모두 여기에서 나왔던 것인데, 근세(近世)엔 선조조 때 남언순(南彦純)ㆍ양사영(梁思瑩)의 뒤로는 한 사람도 없다 한다. 《지소록》
○ 왕의 전지를 도로 봉해서 반환하는 법[封還之法]이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인조조에 호조에 명하여 이백 칸 집을 짓는 데 드는 재목과 기와를 공주의 집에 주라는 전지를 승지 김덕함(金德諴)이 봉한 채로 두 번이나 도로 바치고 아뢰었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또 김공량(金公諒)의 당상(堂上) 특진과 관련하여 덕함(德諴)이 또 봉환(封還)의 타당성을 극력 주장하였으나, 좌중이 서로 미루자 덕함이 상소의 초(草)를 잡아 도로 바쳤다. 《성옹행장》
○ 선조 기축년에 윤국형(尹國馨)이 특명에 의해 승정원으로부터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좌천되어 나가게 되었다. 삼사(三司)가 차자(箚子)를 올려 만류하려 하자 국형이 낭패라 여겨 즉시 떠나 남벌원(南伐院)에 이르렀을 때, 승정원의 서리[吏] 수십 명이 그의 말머리에서 일제히 절하면서 말하기를, “원컨대 전송하는 술잔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였다. 국형이, “너희들이 왜 이러느냐.” 하고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승정원으로부터 수령(守令)이 되어 나가는 것은 본 적이 없는 까닭에 마음에 진정 한탄스러워서 굳이 이런 일을 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말 위에서 두어 잔을 돌린 뒤에 파하였다. 사림(士林)들이 듣고 서로 전하면서 아름다운 일로 삼았다. 《문소만록(聞韶漫錄)》
○ 숙종이 처음 즉위하자 홍문관에서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여러 승지들에게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여 친히 재단(裁斷)을 내리시면 전하께서 묻고 싶은 일도 직접 면대해서 물으실 수 있을 것이고, 신하들이 아뢰고 싶은 말도 직접 아뢸 수 있으므로, 전하의 총명에도 반드시 유익할 것이요, 서로 교회(敎誨)하고 서로 훈고(訓誥)하는 도리를 거의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신들의 수의(收議)에 영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홍문관에서 승지들이 공사를 가지고 전하께 입시(入侍)하게 해달라는 차자를 올렸는데 대행대왕(大行大王 현종)께서 처음 정사를 하실 때도 역시 이렇게 하였습니다. 지금 입시하도록 하시면 매우 좋겠습니다. 또 승지의 망(望)이 많은데 지금 나이 어리시고 새로 왕위에 오르신 터이라, 아마도 능히 누가 합당한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하실 터이니, 이조로 하여금 재능과 인망이 있는 자를 잘 가려서 삼망(三望)을 갖추도록 하시고, 또 삼사(三司)의 아장(亞長 집의ㆍ사간)은 으레 당상(堂上)에 승진하는 계제(階梯)를 폐할 수 없으니 삼망 이외에도 전대로 더 추천토록 하소서. 이것을 비록 영구한 정식(定式)으로 삼을 수는 없으나 우선 이렇게 변통함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좌상 김수항(金壽恒)의 말도 역시 이와 같았다. 임금이 그대로 하라고 윤허하였다.
○ 숙종조에 송준길(宋浚吉)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종이품으로 도승지가 된 자는 정이품으로 승진되면 감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은 대개 벼슬이란 차서가 있어 서로 붙들거나, 건너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외람되게 우악(優握)하신 은혜를 입어 이미 정경(正卿)의 반열에 올랐는데 이제 만일 승지와 같은 근밀(近密)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이는 참으로 좌우망(左右望)을 모두 차지하는 것이 되오니, 바라건대 해임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이품으로서 도승지가 된 것은 옛날 규례가 없지 않으니 경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문헌비고》
○ 정원의 술잔[政院銀杯]. 숙종 임신년 지월(至月 11월) 야대(夜對)에 홍문관에 와 함께 하사한 것으로서 잔 바닥에 쓰기를,
술을 굳이 많이 먹으면 덕을 손상하고 마음을 상하는 것이니 / 酒敢多又 伐德喪心
석 잔을 지나지 말라 내 가르침을 너희들은 지킬지어다 / 毋過三爵 予訓汝欽
라는 16자를 회문(回文)으로 썼고, 또 하나는 써서 승정원에 주고 하나는 써서 홍문관에 준다고 되어 있는데, 모두 품(品) 자 모양으로 새기고 도금한 것이었다. 곧 임금이 손수 짓고 쓴 것이었다. 영종 46년에 옥등고사(玉燈故事)를 묻고 은배(銀杯)를 가져다 보니 잔대에는 글자를 새긴 것이 없었다. 임금이 어필(御筆)로 쓰기를,
16자 어시를 공경히 외우고, 추모 탄식하노라 / 十六御詩 欽誦欽歎
눈물을 닦고 잔대에 쓰노니 천억 년을 전하리 / 抆涕書臺 可垂千億
하였는데, 역시 회문(回文)으로 잔 복판에 새겨서 승정원과 홍문관에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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