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은 세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다. 그러나 두 차례의 대장경은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그래서 몽골의 침입을 부처님의 힘에 의지해 막고자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만들었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6.25전쟁에서 없어질 뻔했다. 이를 구한 것이 김영환공군대령이었다.
해인사가 인근 빨치산과 북한군 패잔병에게 점령된 상태이던 1951년 8월 현지에서 전투를 치르던
경찰부대의 긴급 지원 요청을 받은 미 제5공군이 가야산으로 숨어 든 인민군 900여 명을 소탕하기 위해
해인사 타격을 지시하자 김영환은 편대장으로 출격했다.
타격지점인 해인사 상공에 이르자 김 장군(당시 계급은 대령)은 순간적으로 해인사에 보관된 팔만대장경을 떠올리고
멈추고 기지로 귀환했다.
그는 명령 거부의 질책에 당당히 대답했다.
“영국 사람들은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
팔만대장경은 한국 사람들에게 셰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 아닌가?
수백 명의 적들 때문에 한국만 아닌 인류의 유산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김 대령은 다시 무전기를 잡았다.
“전대, 해인사 뒤의 적 보급기지만 공격하고 기지로 돌아간다.”
갑작스런 귀환 지시를 모니터링하던 비행단에서 추궁이 날아왔다.
“왜 해인사를 타격하지 않는가?”
“빨치산 몇 명 죽이기 위해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불태울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귀관의 지금 행동은 항명이다.”
“제가 전적으로 책임지겠습니다.”
김영환 대령은 1921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공군 초대 총참모장(현 참모총장 격) 김정렬 장군이 형이었으며, 형을 따라 조종사의 길을 걸었다.
일본 민간비행학교를 거쳐 군사영어학교에서 영어를 배워 美 군정통위부(현 국방부) 정보국장 대리로 일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독립 후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밑거름이 됐다.
그는 공군 조종사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보급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51년 공군본부로 출장을 가는 길에 친형 김정렬 소장의 자택에 잠시 들렀다.
형수가 입고 있던 붉은색 치마를 보고 마후라를 만들어 달라고 하여 목에 두르기 시작했다.
김영환 대령은 평소 ‘붉은 남작’ 이라는 별명을 가진 1차 세계대전의 전설적인 독일 육군항공대 에이스
‘리히트 호펜’ 스타일을 좋아해 장교모와 장화를 즐겨 신었다. 빨간 마후라는 그 스타일의 마지막 완성품이었다.
후 빨간 마후라는 공군참모총장이 새내기 조종사들에게 직접 목에 걸어주는 보라매의 상징이 됐다.
휴전 이후에도 전투조종사 양성 등 공군 전력 향상을 위해 헌신했던
김 장군은 1954년 3월 5일 F-51 전투기를 조종해 사천에서 강릉기지를 향하던 중 악천후로 추락해 34세로 순직했다.
해인사에는 ‘고김영환장군 팔만대장경수호공덕비’가 있다. 지관 스님의 글로 구성된 공적비문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참으로 목숨 건 탁월한 판단과 애국심으로 이룬 불멸의 위업이 아닐 수 없다. 호국하온 민족혼인 고려 팔만대장경판/
국난 중에 호국하고 재난에도 호민했네/ 6.25의 위기 맞아 김장군이 지켰으니/ 호국 장군 아깝게도 서른 네살 젊은 나이/
순국으로 산화하니 짧은 시간 굵게 살다/ 가야산이 변함없듯 동해 바다 고갈되고/
백두산이 마멸되나 위대하신 그 이름은/ 이 나라와 함께하여 영원토록 빛나리라!”
*‘마후라’는 일본어로 ‘머플러’ ‘목도리’로 사용해야 하지만, '빨간 마후라'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첫댓글 이 시대의 영웅
요즘 문제 되는 어느 종교인이었으면,
지들이 앞장서서 불질렀을 듯.
사람을 화나게하는 두가지 방법이 있는데 첫번째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몽고놈들이 쳐들어오는데
저걸 만들고 있었다는게 일단 망조인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