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 동 민
일어나니 창 밖이 희뿌연 했다. 밤 사이 소리도 없이 비가 뿌렸지만 눈치를 전혀 채지 못했다. 실실이 오는 봄비가 소리를 남길 리가 없지만 아파트 위충에 살고부터는 봄비 오는 소리를 잊은지 오래다. 비가 내리는 날의 분위기는 소리마저 가라앉아 버린 듯이 느껴진다. 조용하고, 눅진하고, 그러면서 마음은 무거워지는 것이 비오는 날의 기분이다.
그러나 시골집에서 살 때는 마당에 안개처럼 뿌리는 빗물은 연한 꽃잎에도 초록의 잎에도 대롱대롱 매달린 채 생기를 돋우고 있어 마음의 귀로는 환성의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따라서 온갖 생각들을 일어나게 해주고, 그 생각은 상상의 나래를 펄럭이면서 이 세상 어디에고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엔젠가 읽었던 시 한 구절도 떠올려 주고 달콤하였던 영화의 장면들도 문득문득 생각나게 해준다. rf서 봄비는 한껏 서정을 머금고 우리의 마음을 젖게 하는가 보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비오는 날을 싫어하는 것 같다. 활기가 넘치고 생동하는 젊은이들의 봄날이란 햇살을 흠뻑 뒤집어 쓰고 마음껏 뛰어다니는 것이 즐거운 일이리라. 그러나 젊은 날의 나는 어인일인지 비오는 날이 싫지 않았다. 주룩주룩 제법 소리까지 내지르는 장마철이라도 어둡고 적막한 시골집의 사랑채에 누워서 소설책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비오는 날의 착 가라앉은 분위기와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상상의 세계는 기막히게도 잘 어울렸다. 지루해지면 책으로 얼굴을 가리고 스르르 오수에 젖어들던 한가로움도 이제는 맛보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종일토록 비오는 날의 일요일이면 할 일이 없어 시간을 겨워한다. 델레비젼이라도 틀어서 나른함을 달래보려 하지만, 우선은 잠시도 쉬지 않고 떠들어 대는 음향이라는 금속성 소리가 딱 질색이고, 영화라도 보고 있을라치면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 앉아도 책처럼 덮어버릴 수 없는 불편함이 옛 그때 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
누구는 옷이 젖을 듯 말 듯 촉촉이 내리는 봄비 속을 우산도 없이 걸어보는 것이 무척 멋있어 보이더라 했다. 이때의 멋이란 밝은 햇살 아래 화사하게 웃으면 손을 맞잡고 뛰어보는 멋 하고는 좀 다르다. 조용하고, 무겁고, 약간은 쓸쓸하고, 그래서 가슴 짜릿한 우수에 젖어보는 그런 멋이다. 그 우울한 모습일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멋일 수 없는 환상일 뿐이지만 이렇게 봄비오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날은 우리 사는 세상을 멀리멀리 벗어나서 환상 속에 잠겨 볼 수 있기 때문에 싫지만은 않다.
나이 먹은 지금도 실실이 비가 내리면 공연히 마음이 휑그레 빈 듯 해진다. 그렇다고 어깨에 비를 맞으면서 찾아가 볼 만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작해야 구석 방에 가서 조용하고 침침한 방 분위기에 잠겨 낮잠이나 청해보는 것이 비오는 날의 오늘의 내 모습이다.
아파트 위층에 살다 보니 도무지 시골집의 정취가 느껴지지 않는다.그냥 어둑어둑한 날씨와 우중충한 구름빛이 어울려져서 기분마저 칙칙하게 해줄 뿐이다. 출근길도 온통 아스팔트 포장길이고, 시멘트 건물이니까 꽃잎에 방울되어 구르고, 흙속에 가만히 가만히 스며들기만 하던 정감의 기분을 찾아 볼 수 없다. 어깨가 빗물에 젖어서 집에 들어가면 ’산성비라면서 질겁을 하는 아내의 호들갑이 있을 뿐이다.
그래도 비는 풀들과 나무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앞산 봉우리들에까지 생명을 주어 봄의 계절을 성숙시켜 준다. 구름이 걷히면서 날이 갤 때 훨씬 더 푸르러져 있는 산의 색깔은 내 마음마저 푸르게 해준다. 나도 따라 메말라진 마음에 젊은이 마냥 꿈도, 소망도, 정취도 빗물에 젖은 풀잎처럼 생기를 얻어 소생하고 있다.
추녀를 타고 마당에 떨어지는낙숫물 소리가 창호지를 통하여 부드럽게 들려오면 그것은 어느 누구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아름다운 음악이고 시이다. 먼 산 아래 가물가물 하던 초가집들이 안개 같은 봄비 속에 잠겨 보일 듯 말 듯한 졍경은 정녕 내가 닿을 수 없는 저쪽의 피안처럼 느껴진다. 설령 그 촌가가 지닌 현실은 어렵고 힘든 가난에 찌들어 있더라도 봄비를 통해 바라보면 그 모든 것들이 정화되어 깨끗함만 남겨준다. 시나 음악의 역할이 우리를 환영의 세계로 데리고 가서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것이라니까 봄비가 바로 시이고 음악이다.
의원이 조용해진지도 꽤나 오래 되었지만 오늘처럼 비라도 오는 둥 마는 둥 하면 더 더욱 조용해진다. 소파에 기대어 지그시 눈을 감고 혹시나 창으로 비소리가 들릴까 귀 기울여 보았지만 온통 자동차가 달리면서 내지르는 소음 뿐이다. 비는 역시 시골에 어울리는 것 같다. 봄비가 데려다 주는 환상의 세계는 아무래도 이 도회지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
언젠가 나이가 더 들어 마당이 넓고, 꽃들이 자라는 시골의 집에서 봄비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 볼 수 있을까.
첫댓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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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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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빗소리는 마음을 태초의 근원과 만나게
해주는 듯 아늑하고 포근합니다.
식물은 비를 맞고 환희의 노래를 부르고요~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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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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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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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