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의 어느 블로그에서 아래와 같은 글을 블로그 쥔장이 포스팅하자 이전부터 이 블로그에 출입하며 쥔장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던 夏と松と海라는 닉을 쓰는 일본인 하나가 들러 붙어서 태클을 겁니다. 일본인 특유의 왜곡된 역사관으로 무장한 채 이 일본인은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대며 블로그 쥔장과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게 된 제가 끼어 들며 올해 2월 11일부터 2월 12일까지 논쟁한 경과입니다.
야요이시대 유적(고대 변한인들이 만든)인 요시노가리를 주제로 하여 시작된 논쟁은 청동투겁창 논쟁까지 번지고 이후 '죠몽토기 논쟁' '광개토대왕비'까지 3차에 걸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결국 3차 논쟁이후 이 일본인을 이 블로그에서 다시는 보지 못 하게됩니다. 왜 일본인이 다시는 이 블로그에 오지 못하게 됐는지는 논쟁경과의 추이를 좇아가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먼저 그 1편인 '요시노가리 유적과 청동투겁창에 관한 일본인과의 논쟁 경과'입니다.
참고로 이 ' 夏と松と海(나츠토마츠토우미)'라는 닉을 쓰는 일본인은 그 블로그 쥔장의 말로 한국에 유학을 온 자칭 구다라의 후손으로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한국말이 유창해서 거의 한국인 버금가는 언어구사를 하며 보시면 아시겠지만 교묘하고 집요하게 블로그 쥔장의 속을 뒤틀리게 합니다.
따라서 논쟁 중 철저하게 논리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일본인들이 엔조이 재팬등에서 처음 들어오는 한국인에게(소위 초심자) 자주 사용하는 조롱과 경멸조 방식을 제가 거꾸로 의도적으로 채택하여 일본인의 논지를철저하게 유린하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자 보시지요.
이 유적은 大야마토 제국의 국력을 상징하는 가장 큰 황국신민들의 도시인 요시노가리 유적 입니다..
이 유적이 발견될 당시 일본의 역사 학자들은 드디어 야마토 제국의 힘을 보여주는 유적이 나왔다고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는 뒷얘기까지 있습니다..
참고로 왜국은 죠몽부터 변한인들인 야요이인들이 건너가기 전까지 인 BC3세기까지 청동기문화도 철기문화도 없는 말 그대로 석기시대였습니다. BC3세기부터 AD3세기까지의 야요이 시대는 고대한국인들이 가져 온 문화이지 소위 일본식의 고유한 청동기나 철기문화는 독자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한반도人들이 야요이시대를 거쳐 고분시대 등에 왜국을 정복하게 되면서 원일본의 정체성을 형성해가기 시작합니다.
카큐슈우인 대학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
"고대 한국인은 왜인들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
(‘日本語の 世界’, 1980)
-이상 블로그 쥔장의 포스팅입니다-
[댓글]
夏と松と海 (쪽바리입니다)
2008.02.10 13:21
내가 당신한테 뭘 기대할 수 있을지.. 그저 일본을 폄하하고 깎아내리는데에만 목적이 있을 뿐인것 같군요. 님은 이 글이 제대로 된 글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렇게 연대를 따지는 분이 이런 쓰레기 글을 올립니까? 그럼 야요이시대의 개막은 기원후 300년이란 입장이 님의 공식입장이신지 궁금하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님이 자료를 모으는 방식은 일단 일본보다 한국이 우월했으며 고대의 일본은 형편없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면 무조건 끌어모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국기원론이며 님의 삐뚤어진 의식이죠. 일본에 대한 뿌리깊은 열등감을 고대사를 통해서나마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말이죠. 불쌍하네요.
Mim(다음 블로그 주인장입니다)
2008.02.10 14:33
그저 폄하하고 깍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님이라고 여러번 지적하지 않았나요.
고조선의 존재가 없었다면 중국의 사서들은 다 뭐가 되는 겁니까.
그리고 가야왕국에 대한 연구도 옛날 식민사학자들 주장 그대로 발전못했다라는 단정을 너무도 철칙처럼 믿고
그 후론 다르다 얘길해도 않듣는 님이야말로 한가지 목적하에 다른 모든 것을 꿰어맞추고 있질 않습니까.
그것이 순수한 학문 태도입니까. 다 본인의 연구인양 하는 것이 기본태도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님의 삐뚤어진 의식과 논리는 현재까지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반도의 영향만 벗어날 수 있는 조각이라면 전후 관계의 파악도 않고 끌어모아 이어대고 있는 것이 님의 글들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님이 쓰레기라고 하는 윗 글에 대해 정확히 근거를 대는 사람은 저역시 못봤습니다.
다른 견해로 논의를 하려면 하나하나 근거를 비교해야지요.
서기 연도가 일이년 틀려도 아 그것은 당시 대세가 이거니까...역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무슨 헛짓거리들입니까. 그게. 그것이 일본 역사학계의 실상이고 그것에 올려져 있는 의견 하나가 님은 정설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고 있는 사실을 알고는 있습니까.
정신 차라라고 몇 번을 멀해야 본인이 삐뚤어짐을 깨닫는 겁니까.
http://blog.daum.net/innomy/14324473 이런 글도 있고, http://blog.daum.net/innomy/14324481 http://blog.daum.net/innomy/14324493 http://blog.daum.net/innomy/14324510 http://blog.daum.net/innomy/14324553 이런 지적들이 있습니다.
사실입니까? 아니면 사실이 아닙니까? 사실이 아니라면 쓰레기라고 치부하며 말돌리지기 전에 아니라는 근거를 적시한다면 경청하겠습니다.
님이야말로 뿌리깊은 열등감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우치지 못하겠다면, 정확히 알려드리죠. 더이상은 말돌리고 회피하고나서 딴소리하지 말고 윗 글에 대한 반론의 근거를 제시하세요.
그것을 못한다면...그리고 뒤에 가서 딴소리하는 것이 바로 역사적 열등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다른 헛소리는 다 필요없는 상황이고 근거를 회피말고 정확히 제시하기 바랍니다. 더이상 회피한다면 인간 축에도 못끼는 것으로 취급하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습니까
夏と松と海
2008.02.10 19:32
제시하신 글들을 한번 관심있게 보려고 했는데, 보다가 이내 포기했습니다. 님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그 글들이 어떤 관점에서 쓰여져 있는지는 불보듯 뻔하니까 말이죠. 님같으면 누가봐도 일본깔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논조가 가득한 그 그글들의 내용에 대해 신빙성을 부여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의 혐한주의자들이 한국인을 비하하기 위해서, 선전했던 글들과 사진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네요. 누누히 말씀드리죠. 자료를 가지고 오려면, 적어도 제대로 된 글들을 가져오십시요. 인터넷에서 떠도는 혐일론자들의 쓰레기 글들같은 것을 잔뜩 퍼와서는 이렇지 않냐고 말하는 님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혹시 대평유적에 대해서 신뢰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료가 있으면 부탁드리고 싶네요. 한국측 소스중에는 워낙 혐일론자들의 쓰레기 같은 글들이 많아서 참조할만한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제대로 된 글이 있으면 하나 소개해 주세요. 한국의 무문토시 시대의 유적들을 살펴보니, 변한지역에 집중되어 있더군요.
그중 대평유적이 규모도 크고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기원전 400년경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요시노가리 유적간의 비교를 나름대로 해보고 싶군요. 변한지역에 살고 있던 무문토기인들이 부큐슈로 이주해왔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요시노가리의 기원연대인 기원전 400년경과 비슷한 시기에 대평등에 유적을 남긴 조선반도 무문토기인들의 인구가 급감했다고 해서요. 공신력 있는 자료를 소개해주시면 나름대로 감사하겠네요. 정말 제대로 된것으로요.
Mim(다음 블로그 주인입니다)
2008.02.11 02:09
뻔하다면서 또 회피한다면 더이상 인간 취급할 수없다는 말이 않들렸습니까. 분명한 내용이 있는 것에 대해 그렇게 할 말이 없는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기에 근거를 못대는 겁니다. 그러고서도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제대로 된 근거 하나 제사 못하면서 제대로된 글을 가져오라는 비양심적인 ㅈ짓거리는 추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거짓으로 역사를 대합니까. 말장난은 그만 하세요. 다시 한번 말합니다. 윗글들에서 지적한 내용이 맞습니까 아닙니까.
夏と松と海
2008.02.10 19:53
http://blog.daum.net/mallbest/13141654 나름대로 찾아보다가, 한겨례신문에서 보도했던 내용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위에 적어놓은 주소가 그것인데요. 님의 해석은 어떠실지 궁금하군요
Mim
2008.02.11 02:57
...... 요시노가리 유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들은 반도로부터 급격히 전래된 농경문화가 규슈 북부에서 세토나이카이와 기내, 동북지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며, 죠몬에서 야요이로의 변화는 이민족의 이입으로 이루어진 급격한 변화라는 것이다.
또한 600년경 맷돌이 전해지기 이전에는 벼이삭 분리가 힘들어 껍질째 먹었다는 지적이 있고, 주거문화도 요시노가리 유적 복원에는 망루등 많은 것들을 재현해 놓았지만 6세기 열도는 대부분 땅을 판 움집으로 타무라 엔초田村圓澄는 기술하고 있다. ..... 이런 내용도 같이 검토되어야 종합적으로 역사를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겠지요.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러번 물어서 식상해지는군요. 반박 근거가 없으면 없다고 하시던가, 아니면 최소한 알아보겠다하고 찾아보던가 ... 근거 제시는 없이 이리저리 당면할 때만 모면하면 되는 일입니까.
夏と松と海
2008.02.11 10:16
요시노가리 유적은 전형적인 환호취락이고, 나중에 이르게 되면 도시를 이중의 환호가 둘러싼 400헥타르 정도의 도시로 성장하게 됩니다. 환호가 무엇인지는 알고 계시죠? 후대의 일본의 성에도 보이지만 성주변을 둘러싼 해자와 같은 것입니다. 요시노가리 유적에는 전한시대의 청동거울, 중국 신나라시대의 동전, 그리고 일본에서 만들어진 동경등도 발견됩니다.
중국왕조와의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는 증거죠. 초기 요시노가리를 건설했던 사람들은 조선반도의 대평등으로부터의 이주민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중심지는 조선반도가 아닌 큐슈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이는 기원후가 되면 양유적간의 규모에서 역전이 이루어지고, 일본고유의 유물로 인정되는 청동투겁창이 조선반도의 대평에서 발견됩니다. 청동투겁창은 종교의식에 사용되던 신물이었습니다. 고대는 제정일치의 사회이므로 일본의 청동투겁창이 대평유적에서 발견된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요시노가리인들이 대평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웃기는 쪽바리네 아주 전형적인 견강부회를 하는구먼 요시노가리에서 지나식 청동거울과 동전만 발견되면 그게 당시 실체도 없는 겨우 1000명 내외의 사람이 모여 살던 자칭 왜 최대의 촌락이 지나와 교역이 활발한게 되나? 일개 촌락도 나라와 무역하나 ㅋ 그것도 본국인 가야 허락도 없이..쯧쯧..
참고로 한국의 고대 취락지역의 인구의 예를 들면 풍납토성의 경우 연대(年代) 측정한 결과 기원전 199년까지 나왔지. 아직 일부만 측정했기 때문에 기원전 3세기 정도까지는 올라갈 것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주변 인프라를 조사한 결과 풍납토성은 최소한 1만명이 넘는 인구가 살 수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기원전 3세기에 그러한 도시가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고대 한국과 왜의 국력을 이야기 해주는 거란다.
물론 풍납토성조차도 한국의 중심지는 아니라는 게야 한국의 중심지는 당시 북방이었으니까 고고학적으로 더욱 인구분포나 기본 인프라가 풍납정도는 비교조차 안될 정도라는 이야기야. 고대에서 도시를 이야기하려면 인구 1만은 적어도 되어야 한다는 소리지 그런데 인구 1000명의 일개 부락정도의 요시노가리가 도시? 뻥두 작작 쳐라 쪽바라~
풍납토성 유적지는 조금 크니까 비교 대상이 안된다구? ㅎ 그럼 요시노가리정도의 유적지의 예를 들어 줄까 그런건 널려 있어 한국 남부에.. 전라남도 담양의 태목리유적에선 말이다 마한(馬韓) 유적으로 고속도로를 공사할 때에 발견된 것인데 특별하게 이곳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집중발굴한 것이 아니라 공사중에 일부분만 발굴했는데도 주거지의 숫자가 435개나 발견된단다.
한 집안 당 보수적으로 잡아서 4명이라구 해도 거의 2000명에 육박하지 ㅋ 그건 일부니까 나머지 다 발견하면 모 얼마가 더 늘어 날진 모르지 ㅎㅎ 그런 기본적인 촌락이 한국에는 널려있다는 거야..니들처럼 기를 쓰고 발굴해서 고작 1000명이 아니라..이칭구야..고인돌분포도나 고인돌 숫자만 봐도 그건 거의 상식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거지 한국이 세계에서 고인돌이 제일 많은 나라라는 건 알쥐이~쪽바뤼 ㅋ
그리고 요시노가리 유적의 환호취락이라는 게 그보다 년대기적으로 500년이상이나 앞선 진주 대평리 유적이나 그보다 훨씬 상한인 부여 송국리 것을 그대로 빼다 박아 놓은 듯 한게 무슨 대수라고 환호가 무엇인지 아시냐는 둥 설레발을 펼치시나. 짝퉁 대평리나 짝퉁 송국리가 요시노가리인 것은 아시나 크기도 송국리는 발견된 곳만 0.61평방킬로미터, 진주 남강유역은 3.6평방킬로미터
울산 신화리 유적은 3.1평방킬로미터 요시노가리보다는 모두 한참 위야 모 그 조그만 0.4평방킬로미터의 요시노가리를 자랑하구 쥐랄이냐
그런 요시노가리 후기 유적지에서(서기 1내지 3세기) 발견되는 지나식 동경 몇점과 동전이 나왔다는 것을 침소봉대해서 당시 실체도 불분명한 즉 1000명정도 모여 사는 곳이 고작이었던 당시 왜에서 뗏목타고 지나와 교역하나
정신 좀 챙기시게 쪽바리씨 서기 1내지 3세기면 왜는 이미 서기전 3세기부터 건너가기 시작했던 가야인(변한인)들이 완벽하게 왜를 장악하던 시기야 '요시노가리= 짝퉁 진주 대평리'라는 의미는 한국식 청동기 기술과 한국식 자루달린 세형동검, 간석기, 유리대롱옥 경북 영천 어은리에서 출토된 한국식 동경과 판박이인 동경, 옹관묘, 아가리에 점토 두른 덧띠문늬 토기 , 무문토기 등등 모두 한국 그 자체의 복사판이라는 소리지
즉 그곳을 건설한 사람들은 가야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고 전기 야요이를 거쳐 후기 야요이 시대인 서기 1내지 3세기경이 되면 모국인 가야를 통해서 수입된 지나식 동경이나 지나동전같은 거야 얼마든지 들어 올 수 있는건 역사가 아니라 상식이야 그걸 부풀려서 겨우 1000명정도가 모여 사는게 최대였던 당시 가야식민지 왜의 역량으로 지나와 교통을 해 푸하하하 犬笑
역사에 기본지식은 있는 쪽바리인가 이 친구는..ㅋ 야요이로부터도 훨씬 후인 삼국시대에조차도 백제와 신라에 얹혀서 지나에 사신을 파견했던 왜의 천박한 국력으로 그보다 훨씬 고대인 서기 1세기와 3세기경에 지나와 직접 교통했다고? ㅋ
귀 씻고 잘 듣게나 쪽바라 AD. 1세기면 이미 전기 야요이를 거쳐서 왜를 완벽하게 장악했던 모국 가야가 왜 그 자체였기 때문에 당연히 가야를 통해서 왜가야 즉 식민지 왜가야 또는 가야의 지방에 불과한 요시노가리에서 생산된 여러 문물들을 징발하여 지나와의 교역에 본국 가야가 사용했을 터이고 그때 교역의 댓가나 교역상품의 일부가 식민지이거나 가야의 지방에 불과한 요시노가리에 흘러 들어 오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이 멍청한 쪽바리는 청동투겁창이 왜 고유의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네 이 대목에서 한참 웃었어 ㅋㅋ 그리고 기원 후가 되면 양유적 간에 역전이 이루어진다고 소설쓰고 자빠져서 다시 한번 기암을 하고 웃었어요 덱끼 아무리 쪽바리라고 해도 그렇지 fact도 없이 우기면 되나 ㅋ 한국식 원형 청동기 투겁창을 제사용으로 길게 조금 倭式으로 변형시키면 그게 한국과 倭의 문화가 역전되는 건가 ㅋㅋ 달랑 그거 한점가지고..아놔~ 이거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여행보낸 쪽바린지 참..어이상실이네..
夏と松と海 (계속 침묵모드 돌입)
antijap (다시 줄 바꿔서 계속 댓글)
그리고 두번째 거짓말은 말이다 진주 대평리의 고대 한국인들이 뭐가 아쉽다고 대평리로부터 유래한 수백년 후의 왜식 청동투겁창을 왜로부터 왜 다시 가져다 쓰니 ㅋ 자기 머릿속의 상상과 역사적 팩트를 완전히 혼동해요 이 쪽바리 이런 정도의 역사지식을 가지고 주제넘게 무신 오지랍을 떨고 있는지 기가 차지도 않아서 원 ㅋ
먼저 첫번째 거짓말인 원청동투겁창과 왜식청동투겁창조차 구별 못하여 개념정의도 못한 채 원청동투겁창과 왜식청동투겁창을 같은 것인양 혼동하는 개념착시를 니가 보이고 있고 니말의 뉴앙스로는 원청동투겁창을 지칭하며 그것을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 그건 쌩구라를 철면피하게 반론이랍시고 내놓는거냐 누가 그런 엉터리 역사를 가르쳐 주대? 쪽바리 우익이? 아니면 아키히토가? 아니면 니 소설?
니가 원청동투겁창인양 호도하며 말하고 있는 청동투겁창은 실제는 '왜식 청동 투겁창'으로서 그것은 후기 야요이시대에 왜가야에서 모국인 고대 한국의 실전용 원청동투겁창을 과장되게 길게 개조하여 장식용이나 제사용으로 개작한 것이란다 앞으론 확실히 인지하고 실수하지 말거라 이 쪽바라.. 단순히 두루뭉술하게 청동투겁창이 '왜고유의 유물로 인정되는..'이라고 뻥을 치면 되겠니 그리고 또한 길게 개작된 청동투겁창 모델조차 '왜 고유의 것'이라는 것도 아직 추정일 뿐이란다. 쪽바라. 거기에 대한 서술은 요 밑에 나오니 참고하거라..
자 니가 헛갈리고 있는 짝퉁 '倭式 제사용 청동투겁창' 말고 원 청동투겁창은 말이다. BC10세기경부터 요녕일대 서북한일대를 거쳐서 BC 3세기경 대전 괴정동, 화순 대곡리의 돌널무덤 등 주로 무덤유적에서 출토되고 이어서 기원 전 1세기경 경주 안계리일대 영천 용전리 고분에서도 출토되는 길이 20센티 이하의 원 청동투겁창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후기 요시노가리 유적으로서 AD1내지 3세기에 개조된 니가 말하는 길이가 지나치게 길어져서 변형된 倭式 제사용 청동투겁창보다) 년대기적으로 훨씬 이른 시기에 한국에서 발견되는데 무슨 얼어죽을 왜 고유의 양식 운운하면서 개가 풀뜯어 먹는 소리를 찍찍 해대는가 !!
요시노가리보다 적어도 500년은 빠른 진주 대평리에서 좃빨랐다고 수백년후에나 나오는 제사용으로 용도가 변형된 제사용 청동투겁창을 왜 수입해다 쓰겠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게 니 두번째 거짓말이란다. 타임머신있냐 진주 대평리에서 타임머신타고 수백년 후의 야요이 후기로 돌아 가서 왜식 청동투겁창을 가져다 쓰게 ㅋㅋ
니가 무식한 것 같으니 또 본좌가 정확하게 fact를 말해주마. 요시노가리에서 발견되는 倭式제사용 청동투겁창이 출토 되는 곳은 진주 대평리가 아니라 요시노가리의 모국인 금관가야의 양동리 고분 출토유물이란다. 그리고 AD. 4세기경에 발견되는 역시 가야계 유적인 고성의 송학동 고분군에서 왜식 청동투겁창이 출토된단다. 이 양동리와 송학동에서 출토되는 제사용 청동투겁창은 AD. 1세기에서 AD. 4세기 것이란다 쪽바라.
뭔가가 그려지지 않아? 아무리 무식한 쪽바리지만..니가 워낙 무식하니까 본좌가 다시 정리해주지 제사용으로 변형된 倭式 긴 청동투겁창은 倭의 본국이던 금관가야나 가야제국에서 의례용으로 식민지이던 倭가야에게 주조를 명하여 생산된 것을 본국에서 가져다 쓴 개념이거나 잘 봐줘야 같은 국내간의 물물교환 형식이라는 게 합리적이지, 실체도 불분명한 AD1세기 무렵 야요이시대의 倭가 자생적으로 문화를 발전시켜서 지나와 교통하고 본국인 한반도에 영향을 끼쳤다는게 말이 되냐 ㅋ 에라이 이런 후로꾸(니들말이지 이거 후로꾸-영어 倭에 가서 참 고생한다 ㅋㅋ)같은게 아직도 설치고 다니나 정신챙겨라 쪽바라..ㅋ
Mim(블로그 쥔장님 그래도 오랫동안 드나들던 일본인이 조금 측은했던지..슬쩍 끼어 들며 립서비스)
antijap님...상당히 깊은 지식을 갖추고 계시군요. 제가 조리있게 정리못한 부분, 또 정확히 모르던 부분 일러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어쨋든 표현은 조금...따지고 보면 저역시 좋은 표현은 않 쓴 셈이지만 그래도 조금 표현이 쎄시네요^^
antijap
그리구 tip 하나 더 이 무식한 원숭아 요시노가리 유적이 400ha라고라고라..? ㅋ 공식적으로 알려진 요시노가리 유적지 크기가 40ha인데 그거 하나 구분 못 하고 400ha라고 뻥을 튀겨? 40만평방미터가 400ha인거야? 그런거야 ? ㅋㅋ
이거 산수도 못하는 원숭이네 1ha는? 몇미터 곱하기 몇미터? 내가 니네 역사나 산수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나 이거 원 ~ ㅎ
1ha는 100미터 곱하기 100미터=10,000M2 여기 까진 알겠지 그럼 40ha는 10000M2 곱하기 40=40만M2, 이 40만평방미터를 평으로 환산하면 대략 12만평, 왜 12만 평 나오는 지는 알지? ㅎ 100만평방미터가 1km2니까 40만 평방미터면 대략 한변이 600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의 사각형정도 크기네 그런데 그걸 뻥 튀겨서 400ha라고 10배를 튀기나 이 화상아 ㅋㅋ 기본도 안되어 있는 쪽바리와 무신 역사를 논하나 shiba神이시여 ㅋㅋ(참고-吉野ケ里遺蹟-發掘調査槪報Ⅱ(佐賀縣敎育委員會, 1994), 吉野ケ里遺蹟展(佐賀縣敎育委員會, 1989)
아 그리고 기원전 7-8세기경의 청동기 유적지로서 한국의 송국리 유적지는 약 80만평방미터로 니들이 자랑하는 요시노가리같은 건 껨두 안되지 그것두 일부분만이야 아직 10분지 1도 다 발굴 안했거든 요시노가리에서 발견된 청동기들보다 훨씬 오래된 고형식이 발견되는 송국리 적과 유물은 요시노가리보다 500년이나 년대가 위란다. ㅋ 좀 공부나 하구 씨부려라 쪽바라..[끝]
※이후 기본적인 요시노가리 면적 계산에서부터 오류가 나고 청동투겁창의 출토유적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 부끄러웠는지
아..네 언젠가 곡옥에 대해서도 포스팅하려구 했는데..^^ 우선 간략하게 우리나라의 곡옥문화나 옥문화는 그 역사가 니뽕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유구한 것입니다. 엇그제 올린 우실하교수 강의나 경향신문의 한민족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르포에서도 보여지지만 현재 지나의 요녕(발해만)이나 내몽골의 적봉지역은 한민족의 원류인 고대 동이족이 홍산문명을 찬연하게 구축한 지역입니다. 이 시기의 시대적 구분은 별도로 '옥기시대'라는 고고학적 용어를 도입할 정도로 옥의 채굴과 주조 그리고 예술적 가치가 세계문명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빛을 발하던 시기입니다.
바로 이러한 홍산문명이 고고학적으로 한국의 원류이기때문에 일본인들은 거의 패닉스럽게 홍산문명과 한국역사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며 필사적으로 한반도라는 범주에만 묶어두려합니다. 실제 야요이시대의 곡옥은 송국리에서 발견되는 곡옥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만 일본인들은 6000년전쯤 죠몽 즉 아이누들이 만든 곡옥유사한 것을 가지고 기원을 주장했지요, 하지만 대개는 짐승의 이빨이거나 또는 아이누들이 고대에
홋카이도 쪽을 따라 니뽕 동북쪽으로 내려 오기 전 경로인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만주로부터 이동하면서 취득한 원시적 모형의 노천 취득 옥부스러기의 원시적 타제형식일 뿐입니다. 이 고몽골리안들인 아이누가 일본에만 산 것도 아니고 원래 대륙에 흩어져 살다가 일부가 일본열도에 들어 간 것 뿐이고 그들이 가지고 간 곡옥은 실제 원일본을 형성하는 고대한국인이 개척한 야요이시대의 곡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지요. 야요이시대의 곡옥들은 홍산문명의 맥을 이은것이니까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죠몽의 곡옥보다 년대가 훨씬 오래입니다.
동시에 죠몽의 인종적 구성인 고몽골리안들은 현대 일본인에게 야요이 이후 약간의 형질적 혼혈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원일본을 형성한 것은 우리 한민족인 북방계 신몽골리안입니다. 따라서 현대 일본인들이 죠몽인들인 아이누의 동물의 이빨이나 옥부스러기 비슷한 것들을 들어 대 한반도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실제 일본의 옥가공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안입니다. 후에 기회가 되면 연혁적 계통도별로 옥에 대해서 포스팅하지요
첫댓글 재밋어요 ^^
2편은 언제 올리시나요
고맙습니다..^^; 아 2편은 좀 지금 제가 다른 일 좀 봐야해서 오늘 늦게 새벽쯤이나..내일쯤 올리겠습니다..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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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 언젠가 곡옥에 대해서도 포스팅하려구 했는데..^^ 우선 간략하게 우리나라의 곡옥문화나 옥문화는 그 역사가 니뽕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유구한 것입니다. 엇그제 올린 우실하교수 강의나 경향신문의 한민족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르포에서도 보여지지만 현재 지나의 요녕(발해만)이나 내몽골의 적봉지역은 한민족의 원류인 고대 동이족이 홍산문명을 찬연하게 구축한 지역입니다. 이 시기의 시대적 구분은 별도로 '옥기시대'라는 고고학적 용어를 도입할 정도로 옥의 채굴과 주조 그리고 예술적 가치가 세계문명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빛을 발하던 시기입니다.
바로 이러한 홍산문명이 고고학적으로 한국의 원류이기때문에 일본인들은 거의 패닉스럽게 홍산문명과 한국역사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며 필사적으로 한반도라는 범주에만 묶어두려합니다. 실제 야요이시대의 곡옥은 송국리에서 발견되는 곡옥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만 일본인들은 6000년전쯤 죠몽 즉 아이누들이 만든 곡옥유사한 것을 가지고 기원을 주장했지요, 하지만 대개는 짐승의 이빨이거나 또는 아이누들이 고대에
홋카이도 쪽을 따라 니뽕 동북쪽으로 내려 오기 전 경로인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만주로부터 이동하면서 취득한 원시적 모형의 노천 취득 옥부스러기의 원시적 타제형식일 뿐입니다. 이 고몽골리안들인 아이누가 일본에만 산 것도 아니고 원래 대륙에 흩어져 살다가 일부가 일본열도에 들어 간 것 뿐이고 그들이 가지고 간 곡옥은 실제 원일본을 형성하는 고대한국인이 개척한 야요이시대의 곡옥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지요. 야요이시대의 곡옥들은 홍산문명의 맥을 이은것이니까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죠몽의 곡옥보다 년대가 훨씬 오래입니다.
동시에 죠몽의 인종적 구성인 고몽골리안들은 현대 일본인에게 야요이 이후 약간의 형질적 혼혈을 허용하기는 했지만 원일본을 형성한 것은 우리 한민족인 북방계 신몽골리안입니다. 따라서 현대 일본인들이 죠몽인들인 아이누의 동물의 이빨이나 옥부스러기 비슷한 것들을 들어 대 한반도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실제 일본의 옥가공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안입니다. 후에 기회가 되면 연혁적 계통도별로 옥에 대해서 포스팅하지요
일본인들이 언뜻 보면 논리적인 듯하지만, 사실 논리적인 것처럼 포장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사실(fact)에다가 교묘히 픽션을 가미하죠. 데빌달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에거...^^; 그나저나 벌금문제...고생하셨습니다..어찌 위로를 드려야할지...
고생이랄 것까지 없습니다. 덕분에 난생 처음 경찰서, 검찰, 법원 골고루 다녀왔네요. 인생 경험한 셈 치고 있습니다.
2편이 기대됩니다~~~+.+
박학다식 하시네요..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