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천하쟁패(天下爭覇)
3절. 선성탈인(先聲奪人)
- 홍엽여화(紅葉如花), 칠지삼편(七之三篇)
음력 4월에 접어들자 상황은 극도로 위태롭게 되었다.
여름 절기인 입하(立夏, 양력 5월 1일)와 소만(小滿, 양력 5월 17일)으로 넘어가면서 시작된 더위는 온난화의 가중으로 인해 매우 견디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백제군의 공세도 이 무렵 다소 잠잠해지기 시작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숭선성은 예외였다.
사실상 외원(外援)이 차단된 가운데, 신라군은 3,000여 명의 백제군에 맞서 2달 이상 버티고 있었다. 성을 지키는 군사 뿐만 아니라 백성까지 참여한, 그야말로 공방전이었다. 한문도 성수(城帥) 김체의를 포함, 500여 명의 정규군과 약 1만 여명의 백성들의 결사항전에 매우 고전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한문의 작전이 바뀌었다.
"고사(枯死)가 아니라 섬멸이다."
당초 부저추신(釜底抽薪)의 전술로 성을 깨려던 전술은 숭선성의 항전으로 인해 크게 차질을 빚고 있었다. 남쪽 금오성(金烏城)에 잔존한 김훤술의 정규군 역시 험지를 배경으로 버티고 있는 데다, 이 두 곳의 항전으로 인해 이미 항복했던 토호들까지 다시 동요했기 때문이었다. 본성(숭선성)이 깨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백제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제군은 설유(說諭)를 중단하고 병력의 8할을 숭선성에 결진시켜 총공세에 나섰다.
"계림 측에서 기어이 원병(援兵)을 만든 듯 합니다."
여기에 왕경(王京, 서라벌)에 심어놓은 세작들이 김부(金傅)의 출격을 알리자, 백제 측도 시시각각 주변 정세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공세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비록 그 규모가 크지 않다 하더라도, 조정 측에서 반응한 이상 재기(再起)할 전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김부가 일단 합주(陜州, 대야성)를 지나 금오성 쪽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백제 내부에서도 다시 갈등이 재점화될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호지세(騎虎之勢)라더니 고작 숭선성 하나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림에서 전열을 가다듬게 되면 전세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병부(兵部)를 중심으로 회의론이 슬며시 고개를 들면서, 병세 강화와 철군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다. 지난 해 거둔 풍년은 그야말로 적은 규모였으므로, 전역(戰域)을 확장하거나 추가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국내 예비 전량(錢糧)도 한계가 있었기에 단기적으로 승부를 내야 할 상황이기도 하였다.
"어찌 합니까?"
이제 모든 눈과 귀는 총지휘를 담당한 정승 최승우에게 쏠리고 있었다.
휘암을 포함, 동주당(東州黨)으로 분류된 인사들은 매일같이 찾아와 염려하였다. 그들은 정승의 오랜 침묵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무엇보다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해지는 것을 더 염려한다고 봐야 할 것이었다. 어떤 명분으로든 그들이 동일한 '당'으로 묶인 이상, 정승의 건재함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인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최승우는 쉽게 입을 열거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 김체의, 이 자가 변수라니.
역시 화랑(花郞)인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비록 무너지고 있었지만, 역시 화랑은 신라의 기둥이었다. 당나라 영륭(永隆) 2년(혹은 개요(開耀) 원년)인 서기 681년, 당나라 고종 32년 이후 주맥(主脈)이 끊어지고 크게 쇠락하였지만, 김효종까지 면면하게 이어지며 주로 무신(武臣) 계통에서 살아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마지막 풍월주였던 김효종의 가문은 이들 중 최고 명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아들 김부와 더불어 삼종질(三從姪) 김체의까지, 이들 가문의 일원들이 신라를 유지하는 힘이 되고 있었다는 게 그 증좌였다.
- 결국, 숭선성이 방점이겠군.
최승우도 이 시점에서 한문의 공세적 전환을 매우 적절한 판단으로 보고 있었다. 신라 전역의 기온은 극심한 가뭄으로 이어지며 현지 공출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었고, 이에 신라군 역시 주력과 원군 모두 수세와 청야(淸野)를 주로 행하면서 산성에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장기화로 진행될 경우, 백제는 원정의 입장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 숭선성의 외각에서 오는 지원을 차단하고, 성을 조기에 함락시켜 끝내야 한다.
여기에 가장 큰 변수는 역시 수성(壽城)에 주둔한 신라 주둔군이었다. 유의신에서 공수로 지휘관을 교체한 이후에도 약 1,000여 명 정도의 대영(大營)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숭선성과 최단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언제든 북진하면 백제 원정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 먼저 김훤술과 김부가 공수와 연계하기 전에 끝내도록 해야 한다.
최승우는 즉시 전령을 파견하여 이 부분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그 서찰에서 그는 이르기를,
- 지금 김훤술의 중영(中營)이 수성과 황강(黃江,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연하여 있으므로, 만일 합하려 한다면 공산(公山, 팔공산)이 될 것이오. 지금 보니 김훤술은 노숙(老宿)하여 파하는 데 쉽지 않을 것이요, 공수는 젊고 갓 장군이 되었으므로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외다. 그대는 조괄(趙括)의 고사*를 쫓아 먼저 남쪽(수성)을 파하여 한 팔을 꺾어야 할 것이오. 만일 그리만 된다면 숭선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린 아이의 팔을 비트는 것처럼 쉬울 것이오.
* 조괄은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로 이론면에서 부족하지 않아 나름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사는 아들을 장수로 세우지 말도록 조언하면서 '실전에서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효성왕(孝成王)은 어리석게도 이를 무시하고 후일 장평 전투에서 염파(廉頗) 대신 기용하였다가 40만을 갱살(坑殺)당하는 참패를 당하였다.
한문도 서간을 받고 옳게 여겨 최필을 불러 이르되,
"정승께서 묘책을 주셨으니 그대로 실행하여야 할 것이오."
하고 병력 500여 명을 주어 공산 인근으로 출병하며 공수를 엿보게 하였다. 그러면서 또 호왈(號曰) 1천이라 하고 북과 징을 치며 널리 알리게 하니,
"지금 백제에서 1천 병이 남진하여 온다는 데 어찌하면 좋겠소?"
공수도 즉시 여러 제장들을 불러 들였다. 그러나 정작 똑 부러진 계책 한 마디 내놓는 이가 없자 답답한 마음에,
"적의 규모가 장(壯)하여 우리와 대등한데 한 번 출사(出師)하여 응해 봄이 어떠하오?"
라고 말하기까지 했지만, 그마저도 쉬이 가타부타 말하는 자가 없었다. 모두 백제군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하자, 공수는 벌떡 일어나 좌중에게 호령하였다.
"공들은 어찌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소? 내 부친(준흥)께 들으니, 장수는 적을 패주시키고 땅을 지켜 그 직에 맞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 하였소.* 지금 적이 우리를 바라고 오는데 그냥 바라만 보겠소?"
* < 사마법(司馬法) > 정작편(定爵篇) : "陷敵制地,以職命之,是謂戰法."
그제서야 제장들은 이르기를,
"지금 명공(明公, 공수)은 나라의 중은(重恩)을 입고 대장이 되시어 달구벌(대구)을 방비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나라의 인후(咽喉, 주요 길목)인데 자칫 나아갔다가 잃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대저 요지를 잃고 오래 간 나라가 없으니 명심하십시오."
라며 극구 말리기만 한다. 이에 공수는 더욱 노하여 영채를 뽑고 공산 아래 독물성(獨勿城)*으로 진군하니 -
* 오늘날 대구 북구 노곡동에 위치한 팔거산성(八莒山城)으로 독모성(獨母城)으로도 불렸다.
여기서 후삼국을 가르는 운명의 수레바퀴는 거칠게 구르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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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운명이 송악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천우(天祐) 3년, 서기 906년, 음력 4월 무술일(戊戌日, 16일, 양력 5월 11일).
전전관의 끈질긴 요청으로, 마진은 대행수 왕평달 대신 철원경으로 갓 귀환한 왕건을 접반사(接伴使)로 교체하였다. 봉빈부(奉賓部)의 경(卿)을 통해 궁예에게 계달(啓達, 보고)된 뒤 그의 승인으로 급히 송악에 파송(派送)된 것이었다. 일각에서 청을 들어주는 것에 관해 격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진언도 있었지만,
당시 왕건의 명망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지위가 맞아떨어져 승인된 것이었다.
왕건의 방문 소식에 전전관은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되려 자국에 온 손님을 맞는 양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단 마진에 대해 자신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진 것만으로 반 성사되었다는 분위기였다. 여기에 전전관 개인의 관심까지 더해져서 더욱 그 과정이 요란하였던 것이다.
왕건도 전전관의 요청을 듣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 일단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위상을 확인받는다는 것.
즉, 마진 내의 어떤 대신들보다 자신의 위치가 높다는 것은 이 사실로 분명히 확인받은 셈이었다. 여기에 오월국 측에서 강한 요청을 한 점에 관해서도,
- 우리가 훨씬 유리하다.
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오월이 백제와 오래 전 통교한 점에 비춰봐도, 정보 취합을 비롯, 대 백제 외교에도 한층 유리하다고 본 것이다. 이 점에서 남은 문제는,
- 한 번 거절한 바 있는 궁예를 설득하는 문제.
뿐이었다. 봉작(封爵)을 수그린다고 생각하는 궁예에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더 난제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그 첫 단추는 바로 그들이 어떤 봉작을 들고 왔냐는 것에 달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왕공. 내, 매우 보고 싶었소."
"원로(遠路)셨을텐데 여독을 푸실 겨를도 없이 서두르시니 황감(惶感)합니다."
일단 시작은 괜찮았다. 왕건은 손님을 맞는 내내 당당하고 여유로웠고, 전전관은 오히려 초조한 낯빛으로 응대하는 데 여념없었다. 최대한 왕건에게 잘 보여 좋은 결론을 끌어내자는 듯한 태도였다.
왕건은 일단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그들의 전문부터 살폈다.
- 상주국, 검교태사, 고려왕, 사지절, 현도주제군사, 현도주도독(上柱國, 檢校太師, 高麗王, 使之節, 玄莵州諸軍事, 玄莵州都督)
'현도군'이 빠지지 않고 포함된 요인은 바로 예맥(濊貊) 군장인 남려(南閭)의 투항으로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한 유래 때문이었다. (기원전 128년) 게다가 그 치소가 고구려현(高句麗縣)이었으므로, 그 국왕을 대대로 그 주에 분봉해온 전례도 있었다.* 물론,
* 후일 고려 성종 역시 송나라에 의해 동일한 분봉을 받았다. (서기 985년 5월)
"우리 국명 대신 옛 것을 쓰신 연유가 무엇입니까?"
왕건의 물음처럼 '고려왕'이라는 호칭 사용이 문제로 제기되기 하였다. 자칫 이미 포기한 국명을 사용한 데 대해 궁예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전전관은 그에 대해 일단,
"옛 것이 더 익숙하여 그런 것이니 양해하시오."
라고 답하였다. 우선 북국의 호칭으로 오래 사용된 '고려'가 중원의 국가들에게 익숙하기도 하였거니와, 같은 고구려 계통인 대진(大震, 발해)과 혼동할 우려도 있었다. 현재 발해는 당나라에 대해 '발해국왕(渤海國王)'이라는 격상된 호칭을 쓰는 동시에 왜국에 대해 '고려국왕'이라고 자칭하였으며, 그 유래가 바로 대조영에게 내려진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 홀한주도독부도독(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府都督)이었다. 이처럼 필요에 의해 외교 문서 사용시 병칭의 관례도 있었기에, 왕건도,
"알겠습니다."
라며 왕건은 일단 넘어갔다. 후일 광평성과 봉빈부에서 충분히 숙의하여 아뢰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난관은 따로 있었으니,
"왕공에게도 따로 분봉을 내렸으니 받아주시오."
아상(亞相)에 불과한 왕건에게 전류가 봉작을 내린 것이었다. 왕이 아닌 신하에게 동시에 이와 같이 예우한 전례는 거의 드문 일이었기에, 배석한 마진 측 신하들이 모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가장 먼 예로 무열왕의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에게 보국대장군, 상주국(輔國大將軍, 上柱國)을 내린 전례도 없지 않았지만,
- 척족인데?
라는 문제로 인해 오해의 소지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오월이 왕건에게 준 것은,
- 검교소사, 보국대장군, 지절, 현도주도독부사마(檢校小師, 輔國大將軍, 指節, 玄莵州都督府司馬)
였으니 김인문의 전례보다 다소 격상된 것이었다.
"폐하께 아뢰어 받아도 합당한지 자문(諮問)을 구할 수 있게 하겠소."
왕건은 이와 같이 하여 일단 논란을 피해 가고자 하였는데 -
막상 이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종간은 왠지 낯빛부터 어두워졌다. 척족인 왕건에게 너무 과도한 예우를 줌으로써 좋지 않은 전례가 됨과 동시에 정쟁의 빌미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래서 내원의 뜻을 모아서 반대 결의를 하고자 하였는데,
"저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대학사 아지태만 홀로 강력하게 찬성하여 그 분위기를 깨버렸다.
"오월이 우리 황제 뿐만 아니라 신하까지 분봉한 것은 분명 참월(僭越)합니다. 일찍이 전례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대당의 천자를 제치고 한 것이라 스스로 칭신(稱臣)한 자로서 도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이 이와 같이 과례를 범한 이유를 먼저 봐야 합니다."
그는 이르기를,
"오월은 백제와 통교하여 봉작을 내린 전례가 있었는데 견훤 한 사람에게 그쳤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백제 스스로 허리를 숙여 어렵게 받아낸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천자 뿐만 아니라 신하에게도 먼저 작위를 내밀었으니 그 예우 면에서 확연히 다릅니다. 이는 우리를 얕보는 것이라기보다 간절히 통해주기 바라는 뜻입니다. 계림 역시 책명(冊命) 문제로 난항을 겪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중례(重禮)를 받았으니 어찌 아니 그렇겠습니까? 이는 중원국 스스로 우리를 주목하고 있다는 증좌입니다. 일찍이 태종(무열왕)은 아들 인문(仁問)까지 봉작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국세가 흥성하여 가벼이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월은 남쪽 풍족한 곳에 자리잡아 가장 많은 물자가 들고 나니 오히려 본토(당나라)보다 더 부유합니다. 우리도 형식적 예에 얽매이지 말고 관대히 처분하여 우리 지위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반대 기류가 크게 바뀌게 되었는데,
사실 이것은 왕건을 잡으려는 아지태의 함정이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