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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병대275기 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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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내무실 스크랩 의령남씨
김이구 추천 0 조회 79 08.02.11 18:5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氏族의 연원

시조 남민(南敏)은 중국 당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사람으로 처음 성과 이름은 김충(金忠)이었다.
당나라 天寶 14 년 (신라 경덕왕 14년)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 오던 중 귀로에 태풍을 만나 신라(新羅) 유린(有隣)땅 (지금의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축산동(丑山洞)) 에 표착(漂着), 신라의 풍정(風情)이 좋아 눌러 살게 되었다.
그래서 경덕왕은 소원에 따라 영양현(英陽縣)에 터를 잡게 하였고 남에서 왔다 하여 남(南)씨라 사성(賜姓)하고 , 또 천자(天姿)가 영민하다 하여 민(敏)으로 개명(改名)케 하였다. 아울러 영양현(英陽縣)으로 식읍을 삼고 영의(英毅)라 시호(諡號)하였다고 한다 .
그런데 남민(南敏)의 후손은 고려 1230 년대 남홍보(南洪輔)ㆍ남군보(南君甫)ㆍ남광보(南匡甫) 등 3형제가 나와 각기 중대광(重大匡)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ㆍ추밀원직부사(樞密院直副使)ㆍ고성군(固城君) 등에 올라, 영양남씨(英陽南氏)ㆍ의령남씨(宜寧南民)ㆍ고성남씨(固城南民)의 관조(貫祖)가 되어 각기 중시조가 되었다.

본관지 연혁

英陽은 본래 신라의 고은현(古隱縣)인데, 뒤에 영양(英陽)으로 고쳐 군(郡)이 되었다.
고려조 현종 때 예주(禮州)에 소속하였고 명종 때는 감무(藍務)를 두었으며 , 뒤에 영해(寧海)에 속하였다가 복구되었다.
이후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14년 진보군(眞寶郡)의 동면(東面), 북면(北面)을 흡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 남(南)ㆍ가(李)ㆍ김(金)ㆍ방(房)씨 등이 있었다.
의령(宜寧)은 원래 신라의 위함현(犭韋 含縣)인데 , 경덕왕 때 의령으로 개칭, 함안군에 소속시켰다.
고려조 현종 때 진주(晉州)에 속하였으나 공양왕 때 복구하여 감무(藍務)를 두었고 , 조선조에 와서는 현감(縣藍)을 두었다.
1985년에 군(郡)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는 남(南)ㆍ심(沈)ㆍ여(余)ㆍ림(林)ㆍ김(金)ㆍ강(姜)ㆍ진(陳)ㆍ임(任)ㆍ류(柳)ㆍ조(趙)씨 등이 있었다.
고성(固城)은 본래 가야국(伽倻國)이었는데, 신라가 빼앗아 고자군(古自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 때는 고성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조 성종 때 고주자사(固州刺史)로 만들었고 현종 때 거제(巨濟)에 소속시켰으며 원종 때는 주(州)로 승격시켰다.
공민왕 때 현(縣)으로 강등, 조선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1895년 군(郡)이 되었고 1914년 광이면(光二面), 용남면(龍南面), 광남면(光南面)을 합해 오늘에 이르렀다.
주요 성씨로는 남(南)ㆍ김(金)ㆍ가(李)ㆍ박(朴)ㆍ정(鄭)씨 등이 있었다.

파명록

영양관(英陽貫)-녹사공파(錄事公派)ㆍ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
의령관(宜寧貫)-충간공파(忠簡公派)ㆍ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ㆍ의산위공파(宜山尉公派)ㆍ강무공파(剛武公派)ㆍ보문제학공파(寶文提學公派)ㆍ사천백공파(沙川伯公派)ㆍ좌찬성공파(左贊成公派)양정공파(良靖公派)
고성관(固城貫)-고성파(固城派)

파명록

영양 남 (英陽 南) / 의령 남 (宜寧 南) / 고성 남 (固城 南)

주요 세거지

시조 남민(南敏)이 신라 경덕왕 때 경북 영양(英陽)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후로 영양(英陽)에서 세거하였다.
그의 후손 남홍보(南洪輔)는 영양(英陽)에서, 남군보(南君甫)는 의령(宜寧)에서, 남광보(南匡甫)는 고성(固城)에서 각각 터를 잡고 3관(貫)의 중시조가 되었다.
남홍보(南洪輔)의 후손은 일부가 7세 남영번(南永蕃)의 대 이후로 울진(蔚珍)에 옮겨갔고, 일부는 9세 남중지(南仲芷)의 대 이후로 영해(寧海)에 세거했으며, 10세 남기(南禾己)의 대 이후로는 예천(醴泉)에 터를 잡은 것 같다. 10세 남릉(南稜)은 울진(蔚珍)에서 예안(禮安)으로 이거(移居)하였고, 12세 남계조(南繼曹)는 영양(英陽)에서 청송(靑松)으로 옮겨갔다.
남공약(南公若)은 영양(英陽)에서 세거하다가 안동에 가서 터를 잡았다.
일부가 7세 남득량(南得良)의 대를 전후해서 경주(慶州)로, 남득공(南得恭)의 대에 울진(蔚珍)으로 옮겨갔다. 일부는 8세 남보량(南普良)의 대에 개령(開寧)에서 세거하기 시작했고, 남과(南薖)의 대에는 강원도 삼척에 처음 살게 되었다. 9세 남정(南鼎)의 대 이후로는 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ㆍ감천면(甘泉面) 일원에서 세거했으며, 10세 남팔개(南八凱)의 대에는 안동군(安東郡) 일직면(一直面)에 터를 잡았다. 11세 이후로는 영주(榮州)ㆍ의성(義城)ㆍ북안(北安)·순흥(順興) 등지에도 터를 잡았다 .
남군보(南君甫)의 아들 익지(益胝)의 자손들은 양주군(楊州郡) 일원에 세거하였는데, 일부가 7세남지(南智)ㆍ남휘(南暉)의 대 이후 충북 진천군(鎭川郡) 문백면(文白面)에, 남간)南簡)의 대 이후로는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옮겨간 것 같다. 남오(南衤吳 )는 단종 손위(遜位)를 보고 밀양(密陽)에 은거하여 터를 잡았다.
일부는 8세 남칭(南偁)의 대 이후에 광주(廣州)에, 남유(南瑜)의 대 이후에는 당진(唐津)에, 남숙(南俶)의 대 이후에는 성남(城南)에 터를 잡았고 남정(南廷)의 대 이후 익산(益山)에, 남정소(南廷召)의 대 이후로는 진주(晉州)에, 남윤장(南允章)의 대 이후로는 상주(尙州)에, 남정진(南廷縉)ㆍ남휘(南輝)의 대 이후에는 창녕(昌寧)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9세의 대를 전후해서는 아산(牙山)ㆍ진도(珍島)ㆍ문경(聞慶)ㆍ황해도 강령(康翎)ㆍ나주(羅州)ㆍ담양(潭陽)ㆍ과천(果川)에 세거한 것 같으며, 10세 이후에 는 공주(公州)ㆍ함평(咸平)ㆍ신안(新安)ㆍ양양(襄陽)ㆍ해주(海州)ㆍ용인(龍仁)ㆍ양평(楊平)ㆍ태안(泰安)ㆍ옥천(沃川)ㆍ장흥(長興)ㆍ홍천(洪川)ㆍ고양(高陽)ㆍ연안(延安)ㆍ보은(報恩)ㆍ논산(論山)ㆍ여천(麗川)ㆍ서천(舒川)ㆍ창녕(昌寧)ㆍ파주(坡州)ㆍ개성(開城)ㆍ청원(淸原)ㆍ의령(宜寧)ㆍ김제(金提)ㆍ고성(固城)ㆍ창평(昌平)ㆍ음성(陰城)ㆍ정읍(井邑) 등지에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남효윤(南孝允)의 대 이후에는 안성(安城)에 터를 잡고, 일부가 5세 남좌시(南佐時)의 대에 과천(果川)에 옮겨간 것 같으며 일부는 8세 남철(南轍)의 대 이후로 안동(安東)에서 세거하였다.
한편 남광보(南匡甫)를 중시조로 하는 고성남씨(固城南氏)는 고성(固城)에서 세거하였고, 8세 남기(南奇)는 조선건국 후 벼슬에서 물러나 파주(坡州)에 은거하며 터를 잡았다. 일부는 10세 남수문(南秀文)의 대 이후 영동군(永同那) 학산면(鶴山面)일원에 옮겨갔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경기도 광주(廣州)ㆍ용인(龍仁)ㆍ연천(漣川)ㆍ파주(坡州)ㆍ양주(楊州)ㆍ가평(加平)ㆍ김포(金浦)ㆍ양평(楊平)ㆍ이천군(利川郡), 강원도 명주(冥州)ㆍ정선군(旌善郡), 충북 청원(淸原)ㆍ음성(陰城)ㆍ보은(報恩), 충남 공주(公州)ㆍ논산(論山)ㆍ당진(唐津)ㆍ아산(牙山)ㆍ부여군(扶餘郡), 전북 순창(淳昌)ㆍ익산(益山)ㆍ정읍군(井邑郡), 전남 담양(潭陽)ㆍ나주(羅州)ㆍ신안(新安)ㆍ고흥군(高興郡). 경북 봉화(奉化)ㆍ안동(安東)ㆍ선산(善山)ㆍ의성(義城)ㆍ영양(英陽)ㆍ울진(蔚珍)ㆍ상주(尙州)·문경군(聞慶郡), 경남 하동(河東)ㆍ밀양(密陽)ㆍ창원(昌原)ㆍ고성(固城)ㆍ의령(宜寧)ㆍ진양(晉陽)ㆍ창녕(昌寧)ㆍ협천군(陜川郡)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79년에도 경기도 광주(廣州)ㆍ안성(安城)ㆍ용인(龍仁)ㆍ성남(城南), 강원도 정선(旌善)ㆍ홍주(洪州), 충청도 대덕(大德)ㆍ공주(公州)ㆍ아산(牙山)ㆍ음성(陰城)ㆍ보은(報恩), 전라도 익산(益山)ㆍ나주(羅州)ㆍ화순(和順), 경상도 울진(蔚珍)ㆍ봉화(奉化)ㆍ영덕(盈德)ㆍ안동(安東)ㆍ예천(醴泉)ㆍ문경(聞慶)ㆍ밀양(密陽)ㆍ의성(義城)ㆍ상주(尙州)ㆍ영양(英陽)ㆍ고성(固城)ㆍ의령(宜寧) 등지에 세거하고 였다.
특히 경남 의령군(宜寧郡) 정곡면(正谷面) 성황리(城隍里)의 집성촌은 의령남씨(宜寧南氏)가 4 백년간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마을로 정골마을이라고도 불리운다. 대양산(大養山) 아래에는 90여년 전에 세운 양정거사(養正居士)의 사당과 재실이 있다.

씨족史
조선조 남문(南門)은 구왕조(舊王朝)에 반기를 든 혁명의 주체세력인 〈참여파〉와 구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칸 <충절파〉의 두 갈래 흐름이 있다 . 참여파는 정권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나 충절파는 산 속에 은거 , 절개를 지켜 후 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남씨는 특히 조선조 초ㆍ중기 에 걸쳐 정권의 중앙무대로 진출, 4 색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시조 김충(金忠)은 현종(玄宗) 때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신라 유린(有隣)땅 (현재의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축산동(丑山洞) 죽도(竹島))에 기착하게 됐다.
김충(金忠)이 그 곳에 살기를 원하자 신라왕은 여남(汝南)에서 왔다 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삼게 하니 이때가 경덕왕 14년(755) 이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남민(南敏)의 후손 3 형제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맏형 홍보(洪輔)는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 땅에 정착하게 됐다.
이 때부터 남씨는 3 파의 본관으로 나눠지게 됐다 . 그중 의령(宜寧) 남씨가 3 분의 2 로 가장 번창하고 다음은 영양(英陽)과 고성(固城) 남씨의 순이다.
남씨들은 조선조 개국에 훈1등(勳一等)의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권력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거나 4색당쟁(四色黨爭)에 관여하게 됐고 대대로 숱한 현신(顯臣)과 학자를 배출했다.
영양남씨(英陽南氏)에서는 역학ㆍ풍수ㆍ천문 등에 정통하고 특히 예언에 뛰어난 남사고(南師古)가 기이한 인물이다. 임진왜란때는 무신으로 싸운 인물이 많아 남율(南慄)은 곽재우(郭再祐)의 진에서 싸웠고 남의손(南義孫)ㆍ남경희(南慶熹) 등도 싸움터에서 공을 세웠다. 문재가 뛰어난 남구명(南九明)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10여 년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형 남노명(南老明)의 권유로 벼슬에 나가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낸 선비다.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선조인 남사고(南師古)는 설화같은 삶을 산 기인이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자 예언자였던 남사고(南師古)는 역학ㆍ풍수ㆍ천문ㆍ복서ㆍ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했다. 그는 명종 말년에 1575년의 동서분당(東西分薰)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란(壬亂)을 예언,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가 이 같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젊었을 때 일이다. 경북 울진 불영사(佛影寺)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가지고 있던 바랑을 남사고(南師古)의 말에 지어주고 함께 유람하였다. 둘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흘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南師古)는 “무엇이 두려운가”고 태연히 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힘써 보라”며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南師古)는 이로부터 현묘의 기틀을 꿰뚫어 알았다고 한다.
남문(南門)의 근세 인물로서는 여류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을 들 수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정한(南廷漢)의 딸인 그는 의병인 남편 김영주(金永周)가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자 유복자를 길렀다.
남자현(南慈賢)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에서 활약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신앙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그는 재등실(齋藤實)총독의 암살을 계획했다가 실패하고, 1932년에는 국제연맹(國際聯盟)조사단이 하르빈에 오자 <조선독립청원(朝鮮獨立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1932년 만주 괴뢰정부의 건국일인 3월 1일에 폭탄을 휴대하고 식장에서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결국 장부(丈夫)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객사했다.
이 같은 정계 · 학계의 인물 외에 효성으로 이름을 남긴 남씨 인물도 었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죽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병에 걸릴까 무서워 피했으나 혼자 시선을 수습, 장례를 치렀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에 대해 오랫동안 간병을 했고 장례 후에도 계속 통곡을 그치지 않아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전염병이 옮지 않아 주위에서 모두 놀랐다. 그는 ‘주역(周易)’과 이황(李滉)의 ‘성학도(聖學圖)’ 동을 탐독하며 더욱 정신수양을 했다 한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中始祖) 남군보(南君甫)(고려말의 밀직부사)의 증손 을번(乙蕃)ㆍ을진(乙珍)ㆍ을경(乙敬) 3형제 중 동생 을진(乙珍)은고려 말에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으로 내려가 숨어버렸다.
조선조 개국 후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남을진(南乙珍)이 불응하자 ‘그의 지조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하여 후세에 권장코자 그의 거소(居所) 이름을 따서 〈사천백(沙川伯)〉에 봉했다. 남을진(南乙珍)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고 통곡하며 머리를 풀고 감옥산(紺獄山)(상패리)에 들어가 깊숙한 석굴(남선굴(南仙窟))에 숨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구왕조(舊王朝)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이에 비해 형 남을번(南乙蕃)의 아들 재(在)ㆍ는(誾) 형제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조를 개국하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특히 남은(南誾)은 이방원(李芳遠)(태종),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했으나 조선 개국 초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이방석(李芳碩)의 편에 가담했다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주살됐다.
남재(南在)(충경공(忠景公))는 태조를 측근에서 보필해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1급정치가가 됐다. 태조와 남재(南在)는 교분이 각별히 두터워 어느 날 군신이 함께 묘(墓)자리가 있는 양주군(楊州郡)에 갔다 가 태조가 남재(南在)의 묘(墓)자리가 좋다고 칭찬하니 남재(南在)가 선뜻 묘(墓)자리를 내주어 두 사람은 묘(墓)자리를 바꿨다. 그러나 자고로 ‘왕의 릉(陵)자리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전해지므로 남재(南在)가 이를 걱정하니 태조는‘역적이 나와도 당대의 별로 끝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후에 남이(南怡) 장군이 역적으로 몰렸어도 당대의 처별로 끝났다는 설이 전한다.
남재(南在)는 경제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산학(算學)에 일가를 이뤄 그의 수학을 당시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의남(宜南)>의 문중에서는 조선조에 정승6명과 대제학6명, 판서2A명이 나왔다. 이는 씨족 규모로 보아 대단한 숫자로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全州李氏)ㆍ연안이씨(延安李氏)ㆍ광산김씨(光山金氏)의7명에 버금가는 숫자다.
남재(南在)는3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맏손자 지(智)는 좌의정, 둘째 간(簡)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막내 휘(暉)는 태종의 사위가 되는 등 크게 벼슬길에 올랐다.
남지(南智_는 음보로 관찰에 올라 후일 우의정에 올랐는데 문종 6년 좌의정이 되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요행히 화를 면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 치는 아이들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유명한 이 시조를 지은 남구만(南力萬)은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소론(少論)의 영수다. 남구만(南力萬)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파싸움이 심했던 당시 정계를 주름잡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과 동년배의 인물로 예조판서(禮曹判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남간(南簡)의 9대 손이다. 그의 증손 남유용(南有容)과 아들 남공철(南公轍) 부자는 조선사에 학명을 남겼다.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었던 남유용(南有容)은 문과에 급제, 승지ㆍ좌부빈객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고 후일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은 대사성ㆍ부제학ㆍ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행정가로서의 수완 못지 않게 학명이 높았다.
특히 그는 경전을 연구하고 한(漢)ㆍ당(唐)ㆍ송(宋)의 명저를 읽고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 이들 부자는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시인으로 명필이었다.
명종 때 유명한 의적 임꺽정(林巨正)을 사로잡은 남치근(南致勤)은 남구만(南九萬)의 5대조 남치욱(南致勗)(목사)의 아우로 남문(南門)의 특이한 인물이다.그러나 남문(南門)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은 역시 남이(南怡)장군이 으뜸이었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文夫)’,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두만강 깊은 물 을말을먹여 다없애니/남아 20에 나라평정 못하면/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20대에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만주벌판을 굽어보며 옳은 이 시에는 그의 웅지가 잘 담겨져 있다. 남아의 호기를 상징하는 인물 남이(南怡)는 출생에서부터 결혼·죽음에 이르기까지 평범이 다달을 수 없는 비범을 엿보인다.남휘(南暉)의 손자인 그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權擥)의 넷째 딸과 결혼했는데 혼례에 얽힌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남이(南怡)가 어렸을 때 일이다. 바깥에서 놀고 있던 남이(南怡)는 조그만 아이가 보로 싼 상자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상자 위에는 분을 바른 여귀(女鬼)가 앉아 있었다. 이상히 여긴 그는 아이를 따라가 보니 한 재상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이한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 집 대문에서 서성대던 남이(南怡)는 잠시 후 집안에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집 하인에게 연유를 물은 즉 그 집의 처녀가 죽었다고 했다. 남이(南怡)는 자신만이 그 처녀를 살려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 처녀가 죽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여귀는 처녀의 가슴에 타고 있다가 남이(南怡)를 보고는 흠칫 놀라 달아났다. 얼마가 지나자 처녀는 부시시 눈을 부비고 깨어났으나 남이(南怡)가 방을 나오자 다시 까무라쳤다. 남이(南怡)는 조금 전에 가 져온 상자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니 ‘홍시인데 그 처녀가 한 입 물곤 쓰러졌다’는 대답이었다. 남이(南怡)가 호통쳐 여귀(女鬼)를 쫓아 보내니 그 처녀는 기력을 얻어 회생했다. 그 처녀가 바로 권람(權擥)의 딸이었다.
권람(權擥)은 남이(南怡)가 남다른 데가 있어 혼인을 정하려고 점을 쳐보니 ‘남이(南怡)는 반드시 죄사(罪死)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으나 그의 딸 역시 ‘단명할 것이고 자식도 없는데 부귀를 누려도 화 당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고 해 남이(南怡)와 혼례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남이(南怡)가 26세 되던 해 유자광(柳子光) 등의 모함으로 형장의 이슬로 단명했으나 그의 부인 권씨(權氏)는 남이(南怡)보다 2년 먼저 죽으나 점치는 이의 말이 맞은 셈이다.남이(南怡)는17세 나이로 무과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세조13년 북관에서 이시애(李施愛)난이 일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하고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그는 26세에 병조판서를 역임, 조선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된다.남이(南怡)는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대궐에서 숙직을 하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현상’이라고 말한 것을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남이(南怡)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주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앞서 가는 비범을 시기와 질투·모함과 중상으로 점철된 평범의 조선사가 꺾어 버린 역사의 주살이었다. 순조18년 그의 관직은 복구되고 충무(忠武)란 시호가 주어졌다.
남이(南怡)장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비봉면(飛鳳面) 남전2리(南田二里)에 있다. 그의 묘소는 외가인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살던 마을 부근인 이곳에 모셔졌고 지난 72년 충북음성(陰城)에 있던 부인도 이장해 현재는 함께 묻혀 있다.
남이(南怡)장군 묘는 10여년 전 만 해도 후손들이 잘 돌보지 않아 자연석으로만 대충 다듬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71년 당시 남상집(南相集) 경기도기획실장, 남영우(南永祐) 수원시장 등 후손들이 비석을 새로 세우고 묘소를 다듬었다.
묘소관리인 진창옥(秦昌玉)씨는 “남이(南怡)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고 외가가 있는 곳에 무덤을 방치했으나 후손들이 묘소를 손질해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게 됐다”고 기뻐했다.
후손들은 남이(南怡)장군 묘소가 흔히 남이(南怡)섬에 있다고 선전하면서 실제로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끌고 있는 것은 문중에서 볼 때 한심한 일이라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의남(宜南)>에서 추앙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남간(南簡)의 증손인 생육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그는 사육신사건 이후 정계와 손을 끊고 의령군(宜寧郡) 칠곡면(七谷面) 산림에 묻혀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ㆍ안응세(安應世)와 사귀어 형제처럼 지냈는데 18세 때 문종왕후 권씨의 능인 소릉(昭陵)에 복릉(復陵) 할 것을 상소했다가 도승지 임사홍(任士洪)ㆍ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배척으로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는 과격한 말이나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얘기를 거리낌없이 털어놓곤 했는데 김시습(金時習)이 한 번,“나는 세종에게 후한 덕을 업었으니 이 꼴이 되어 마땅하나, 그대는 나와 다르니 세상에 나설 계책을 세우라”고 권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이 말을 받아,“소릉사건은 천하의 큰 변이니 소릉이 복위된 후에 과거에 나서도 늦지 않으리라”고 답했다.
또 그가 ‘육신전(六臣傳)’을 짓는데 그의 문인들이 화가 두려워 말리자,“내 어찌 죽기가 두려워 대현(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하며 마침내 야사(野史)로 완성, 그의 곧은 기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선조ㆍ광해군조에 걸쳐 정계의 실력자였던 남이공(南以恭)은 4색당쟁의 와중에서 파란을 겪었다.
그는 정유왜란 후 북인(北人)의 거물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탄핵ㆍ파직시키고 소북(小北)의 영수가 됐다가 다시 반대파에 몰려 파직당했다. 그 뒤 다시 기용돼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했다가 광해군 7년 당쟁의 와중에서 또 파직되어 여러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4년 후에는 공조판서로 기용됐다가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자와 대신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보낸 데 대한 책임을 지고 파면되는 동 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임진왜란때는 아버지 남유(南瑜)가 정묘호란때는 아들이 외국의 침입을 막다가 양대가 순직한 남이흥(南以興)이 있다. 그의 자는 사호(士豪)이며 호는 성은(城隱)으로 23세때 부공(父公)이 노량(露梁)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시니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학문을 버리고 무예를 익히어 27세에 무과를 택하여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 장연현감(長淵縣監) 의주판관(義州判官) 용천군수(龍川郡守) 부령부사(富零府使) 충청도경상도병사(忠淸道慶尙道兵使) 구성부사(龜城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지내고 이괄난(李适亂)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올라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지내고 이어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평안병사(平安兵使)로 발탁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후금(後金)의 침입을 안주에서 막다가 패하자 자결순절 하셨다. 공의 장렬한 죽엄이 청국에까지 전하여져 적국에서 조차 근엄한 조의를 표하였다하며 공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인조(仁祖)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忠壯)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旌閭)도 내렸다. 유족은 인조가 무척 아끼면서 돌보아 주었다.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인물로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낸 남수문(南秀文)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일찍이 문명이 높아 집현전(集賢殿)으로 들어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 대부분을 썼다. 술이 과해 임금의 충고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송파(松坡) 남세주(南世周)는 성종18년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의 무도함을 맹렬히 간하다가 처형당한 충신이다.中宗반정 후 그의 충절이 인정돼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임진왜란 때 몸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신도 있다. 남수일(南守一)은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공을 세워 판관(判官)이 됐다. 그 후 무과에 급제,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는 등 미관말직에서 일약 공신으로까지 올라간 특이한 무신이다.

씨족史
조선조 남문(南門)은 구왕조(舊王朝)에 반기를 든 혁명의 주체세력인 〈참여파〉와 구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칸 <충절파〉의 두 갈래 흐름이 있다 . 참여파는 정권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나 충절파는 산 속에 은거 , 절개를 지켜 후 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남씨는 특히 조선조 초ㆍ중기 에 걸쳐 정권의 중앙무대로 진출, 4 색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시조 김충(金忠)은 현종(玄宗) 때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신라 유린(有隣)땅 (현재의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축산동(丑山洞) 죽도(竹島))에 기착하게 됐다.
김충(金忠)이 그 곳에 살기를 원하자 신라왕은 여남(汝南)에서 왔다 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삼게 하니 이때가 경덕왕 14년(755) 이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남민(南敏)의 후손 3 형제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맏형 홍보(洪輔)는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 땅에 정착하게 됐다.
이 때부터 남씨는 3 파의 본관으로 나눠지게 됐다 . 그중 의령(宜寧) 남씨가 3 분의 2 로 가장 번창하고 다음은 영양(英陽)과 고성(固城) 남씨의 순이다.
남씨들은 조선조 개국에 훈1등(勳一等)의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권력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거나 4색당쟁(四色黨爭)에 관여하게 됐고 대대로 숱한 현신(顯臣)과 학자를 배출했다.
영양남씨(英陽南氏)에서는 역학ㆍ풍수ㆍ천문 등에 정통하고 특히 예언에 뛰어난 남사고(南師古)가 기이한 인물이다. 임진왜란때는 무신으로 싸운 인물이 많아 남율(南慄)은 곽재우(郭再祐)의 진에서 싸웠고 남의손(南義孫)ㆍ남경희(南慶熹) 등도 싸움터에서 공을 세웠다. 문재가 뛰어난 남구명(南九明)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10여 년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형 남노명(南老明)의 권유로 벼슬에 나가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낸 선비다.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선조인 남사고(南師古)는 설화같은 삶을 산 기인이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자 예언자였던 남사고(南師古)는 역학ㆍ풍수ㆍ천문ㆍ복서ㆍ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했다. 그는 명종 말년에 1575년의 동서분당(東西分薰)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란(壬亂)을 예언,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가 이 같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젊었을 때 일이다. 경북 울진 불영사(佛影寺)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가지고 있던 바랑을 남사고(南師古)의 말에 지어주고 함께 유람하였다. 둘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흘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南師古)는 “무엇이 두려운가”고 태연히 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힘써 보라”며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南師古)는 이로부터 현묘의 기틀을 꿰뚫어 알았다고 한다.
남문(南門)의 근세 인물로서는 여류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을 들 수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정한(南廷漢)의 딸인 그는 의병인 남편 김영주(金永周)가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자 유복자를 길렀다.
남자현(南慈賢)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에서 활약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신앙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그는 재등실(齋藤實)총독의 암살을 계획했다가 실패하고, 1932년에는 국제연맹(國際聯盟)조사단이 하르빈에 오자 <조선독립청원(朝鮮獨立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1932년 만주 괴뢰정부의 건국일인 3월 1일에 폭탄을 휴대하고 식장에서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결국 장부(丈夫)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객사했다.
이 같은 정계 · 학계의 인물 외에 효성으로 이름을 남긴 남씨 인물도 었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죽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병에 걸릴까 무서워 피했으나 혼자 시선을 수습, 장례를 치렀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에 대해 오랫동안 간병을 했고 장례 후에도 계속 통곡을 그치지 않아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전염병이 옮지 않아 주위에서 모두 놀랐다. 그는 ‘주역(周易)’과 이황(李滉)의 ‘성학도(聖學圖)’ 동을 탐독하며 더욱 정신수양을 했다 한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中始祖) 남군보(南君甫)(고려말의 밀직부사)의 증손 을번(乙蕃)ㆍ을진(乙珍)ㆍ을경(乙敬) 3형제 중 동생 을진(乙珍)은고려 말에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으로 내려가 숨어버렸다.
조선조 개국 후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남을진(南乙珍)이 불응하자 ‘그의 지조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하여 후세에 권장코자 그의 거소(居所) 이름을 따서 〈사천백(沙川伯)〉에 봉했다. 남을진(南乙珍)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고 통곡하며 머리를 풀고 감옥산(紺獄山)(상패리)에 들어가 깊숙한 석굴(남선굴(南仙窟))에 숨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구왕조(舊王朝)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이에 비해 형 남을번(南乙蕃)의 아들 재(在)ㆍ는(誾) 형제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조를 개국하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특히 남은(南誾)은 이방원(李芳遠)(태종),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했으나 조선 개국 초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이방석(李芳碩)의 편에 가담했다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주살됐다.
남재(南在)(충경공(忠景公))는 태조를 측근에서 보필해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1급정치가가 됐다. 태조와 남재(南在)는 교분이 각별히 두터워 어느 날 군신이 함께 묘(墓)자리가 있는 양주군(楊州郡)에 갔다 가 태조가 남재(南在)의 묘(墓)자리가 좋다고 칭찬하니 남재(南在)가 선뜻 묘(墓)자리를 내주어 두 사람은 묘(墓)자리를 바꿨다. 그러나 자고로 ‘왕의 릉(陵)자리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전해지므로 남재(南在)가 이를 걱정하니 태조는‘역적이 나와도 당대의 별로 끝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후에 남이(南怡) 장군이 역적으로 몰렸어도 당대의 처별로 끝났다는 설이 전한다.
남재(南在)는 경제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산학(算學)에 일가를 이뤄 그의 수학을 당시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의남(宜南)>의 문중에서는 조선조에 정승6명과 대제학6명, 판서2A명이 나왔다. 이는 씨족 규모로 보아 대단한 숫자로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全州李氏)ㆍ연안이씨(延安李氏)ㆍ광산김씨(光山金氏)의7명에 버금가는 숫자다.
남재(南在)는3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맏손자 지(智)는 좌의정, 둘째 간(簡)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막내 휘(暉)는 태종의 사위가 되는 등 크게 벼슬길에 올랐다.
남지(南智_는 음보로 관찰에 올라 후일 우의정에 올랐는데 문종 6년 좌의정이 되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요행히 화를 면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 치는 아이들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유명한 이 시조를 지은 남구만(南力萬)은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소론(少論)의 영수다. 남구만(南力萬)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파싸움이 심했던 당시 정계를 주름잡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과 동년배의 인물로 예조판서(禮曹判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남간(南簡)의 9대 손이다. 그의 증손 남유용(南有容)과 아들 남공철(南公轍) 부자는 조선사에 학명을 남겼다.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었던 남유용(南有容)은 문과에 급제, 승지ㆍ좌부빈객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고 후일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은 대사성ㆍ부제학ㆍ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행정가로서의 수완 못지 않게 학명이 높았다.
특히 그는 경전을 연구하고 한(漢)ㆍ당(唐)ㆍ송(宋)의 명저를 읽고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 이들 부자는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시인으로 명필이었다.
명종 때 유명한 의적 임꺽정(林巨正)을 사로잡은 남치근(南致勤)은 남구만(南九萬)의 5대조 남치욱(南致勗)(목사)의 아우로 남문(南門)의 특이한 인물이다.그러나 남문(南門)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은 역시 남이(南怡)장군이 으뜸이었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文夫)’,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두만강 깊은 물 을말을먹여 다없애니/남아 20에 나라평정 못하면/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20대에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만주벌판을 굽어보며 옳은 이 시에는 그의 웅지가 잘 담겨져 있다. 남아의 호기를 상징하는 인물 남이(南怡)는 출생에서부터 결혼·죽음에 이르기까지 평범이 다달을 수 없는 비범을 엿보인다.남휘(南暉)의 손자인 그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權擥)의 넷째 딸과 결혼했는데 혼례에 얽힌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남이(南怡)가 어렸을 때 일이다. 바깥에서 놀고 있던 남이(南怡)는 조그만 아이가 보로 싼 상자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상자 위에는 분을 바른 여귀(女鬼)가 앉아 있었다. 이상히 여긴 그는 아이를 따라가 보니 한 재상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이한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 집 대문에서 서성대던 남이(南怡)는 잠시 후 집안에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집 하인에게 연유를 물은 즉 그 집의 처녀가 죽었다고 했다. 남이(南怡)는 자신만이 그 처녀를 살려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 처녀가 죽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여귀는 처녀의 가슴에 타고 있다가 남이(南怡)를 보고는 흠칫 놀라 달아났다. 얼마가 지나자 처녀는 부시시 눈을 부비고 깨어났으나 남이(南怡)가 방을 나오자 다시 까무라쳤다. 남이(南怡)는 조금 전에 가 져온 상자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니 ‘홍시인데 그 처녀가 한 입 물곤 쓰러졌다’는 대답이었다. 남이(南怡)가 호통쳐 여귀(女鬼)를 쫓아 보내니 그 처녀는 기력을 얻어 회생했다. 그 처녀가 바로 권람(權擥)의 딸이었다.
권람(權擥)은 남이(南怡)가 남다른 데가 있어 혼인을 정하려고 점을 쳐보니 ‘남이(南怡)는 반드시 죄사(罪死)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으나 그의 딸 역시 ‘단명할 것이고 자식도 없는데 부귀를 누려도 화 당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고 해 남이(南怡)와 혼례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남이(南怡)가 26세 되던 해 유자광(柳子光) 등의 모함으로 형장의 이슬로 단명했으나 그의 부인 권씨(權氏)는 남이(南怡)보다 2년 먼저 죽으나 점치는 이의 말이 맞은 셈이다.남이(南怡)는17세 나이로 무과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세조13년 북관에서 이시애(李施愛)난이 일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하고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그는 26세에 병조판서를 역임, 조선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된다.남이(南怡)는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대궐에서 숙직을 하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현상’이라고 말한 것을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남이(南怡)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주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앞서 가는 비범을 시기와 질투·모함과 중상으로 점철된 평범의 조선사가 꺾어 버린 역사의 주살이었다. 순조18년 그의 관직은 복구되고 충무(忠武)란 시호가 주어졌다.
남이(南怡)장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비봉면(飛鳳面) 남전2리(南田二里)에 있다. 그의 묘소는 외가인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살던 마을 부근인 이곳에 모셔졌고 지난 72년 충북음성(陰城)에 있던 부인도 이장해 현재는 함께 묻혀 있다.
남이(南怡)장군 묘는 10여년 전 만 해도 후손들이 잘 돌보지 않아 자연석으로만 대충 다듬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71년 당시 남상집(南相集) 경기도기획실장, 남영우(南永祐) 수원시장 등 후손들이 비석을 새로 세우고 묘소를 다듬었다.
묘소관리인 진창옥(秦昌玉)씨는 “남이(南怡)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고 외가가 있는 곳에 무덤을 방치했으나 후손들이 묘소를 손질해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게 됐다”고 기뻐했다.
후손들은 남이(南怡)장군 묘소가 흔히 남이(南怡)섬에 있다고 선전하면서 실제로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끌고 있는 것은 문중에서 볼 때 한심한 일이라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의남(宜南)>에서 추앙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남간(南簡)의 증손인 생육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그는 사육신사건 이후 정계와 손을 끊고 의령군(宜寧郡) 칠곡면(七谷面) 산림에 묻혀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ㆍ안응세(安應世)와 사귀어 형제처럼 지냈는데 18세 때 문종왕후 권씨의 능인 소릉(昭陵)에 복릉(復陵) 할 것을 상소했다가 도승지 임사홍(任士洪)ㆍ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배척으로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는 과격한 말이나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얘기를 거리낌없이 털어놓곤 했는데 김시습(金時習)이 한 번,“나는 세종에게 후한 덕을 업었으니 이 꼴이 되어 마땅하나, 그대는 나와 다르니 세상에 나설 계책을 세우라”고 권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이 말을 받아,“소릉사건은 천하의 큰 변이니 소릉이 복위된 후에 과거에 나서도 늦지 않으리라”고 답했다.
또 그가 ‘육신전(六臣傳)’을 짓는데 그의 문인들이 화가 두려워 말리자,“내 어찌 죽기가 두려워 대현(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하며 마침내 야사(野史)로 완성, 그의 곧은 기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선조ㆍ광해군조에 걸쳐 정계의 실력자였던 남이공(南以恭)은 4색당쟁의 와중에서 파란을 겪었다.
그는 정유왜란 후 북인(北人)의 거물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탄핵ㆍ파직시키고 소북(小北)의 영수가 됐다가 다시 반대파에 몰려 파직당했다. 그 뒤 다시 기용돼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했다가 광해군 7년 당쟁의 와중에서 또 파직되어 여러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4년 후에는 공조판서로 기용됐다가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자와 대신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보낸 데 대한 책임을 지고 파면되는 동 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임진왜란때는 아버지 남유(南瑜)가 정묘호란때는 아들이 외국의 침입을 막다가 양대가 순직한 남이흥(南以興)이 있다. 그의 자는 사호(士豪)이며 호는 성은(城隱)으로 23세때 부공(父公)이 노량(露梁)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시니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학문을 버리고 무예를 익히어 27세에 무과를 택하여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 장연현감(長淵縣監) 의주판관(義州判官) 용천군수(龍川郡守) 부령부사(富零府使) 충청도경상도병사(忠淸道慶尙道兵使) 구성부사(龜城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지내고 이괄난(李适亂)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올라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지내고 이어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평안병사(平安兵使)로 발탁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후금(後金)의 침입을 안주에서 막다가 패하자 자결순절 하셨다. 공의 장렬한 죽엄이 청국에까지 전하여져 적국에서 조차 근엄한 조의를 표하였다하며 공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인조(仁祖)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忠壯)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旌閭)도 내렸다. 유족은 인조가 무척 아끼면서 돌보아 주었다.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인물로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낸 남수문(南秀文)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일찍이 문명이 높아 집현전(集賢殿)으로 들어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 대부분을 썼다. 술이 과해 임금의 충고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송파(松坡) 남세주(南世周)는 성종18년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의 무도함을 맹렬히 간하다가 처형당한 충신이다.中宗반정 후 그의 충절이 인정돼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임진왜란 때 몸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신도 있다. 남수일(南守一)은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공을 세워 판관(判官)이 됐다. 그 후 무과에 급제,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는 등 미관말직에서 일약 공신으로까지 올라간 특이한 무신이다.

씨족史
조선조 남문(南門)은 구왕조(舊王朝)에 반기를 든 혁명의 주체세력인 〈참여파〉와 구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칸 <충절파〉의 두 갈래 흐름이 있다 . 참여파는 정권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나 충절파는 산 속에 은거 , 절개를 지켜 후 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남씨는 특히 조선조 초ㆍ중기 에 걸쳐 정권의 중앙무대로 진출, 4 색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시조 김충(金忠)은 현종(玄宗) 때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신라 유린(有隣)땅 (현재의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축산동(丑山洞) 죽도(竹島))에 기착하게 됐다.
김충(金忠)이 그 곳에 살기를 원하자 신라왕은 여남(汝南)에서 왔다 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삼게 하니 이때가 경덕왕 14년(755) 이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남민(南敏)의 후손 3 형제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맏형 홍보(洪輔)는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 땅에 정착하게 됐다.
이 때부터 남씨는 3 파의 본관으로 나눠지게 됐다 . 그중 의령(宜寧) 남씨가 3 분의 2 로 가장 번창하고 다음은 영양(英陽)과 고성(固城) 남씨의 순이다.
남씨들은 조선조 개국에 훈1등(勳一等)의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권력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거나 4색당쟁(四色黨爭)에 관여하게 됐고 대대로 숱한 현신(顯臣)과 학자를 배출했다.
영양남씨(英陽南氏)에서는 역학ㆍ풍수ㆍ천문 등에 정통하고 특히 예언에 뛰어난 남사고(南師古)가 기이한 인물이다. 임진왜란때는 무신으로 싸운 인물이 많아 남율(南慄)은 곽재우(郭再祐)의 진에서 싸웠고 남의손(南義孫)ㆍ남경희(南慶熹) 등도 싸움터에서 공을 세웠다. 문재가 뛰어난 남구명(南九明)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10여 년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형 남노명(南老明)의 권유로 벼슬에 나가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낸 선비다.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선조인 남사고(南師古)는 설화같은 삶을 산 기인이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자 예언자였던 남사고(南師古)는 역학ㆍ풍수ㆍ천문ㆍ복서ㆍ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했다. 그는 명종 말년에 1575년의 동서분당(東西分薰)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란(壬亂)을 예언,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가 이 같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젊었을 때 일이다. 경북 울진 불영사(佛影寺)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가지고 있던 바랑을 남사고(南師古)의 말에 지어주고 함께 유람하였다. 둘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흘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南師古)는 “무엇이 두려운가”고 태연히 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힘써 보라”며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南師古)는 이로부터 현묘의 기틀을 꿰뚫어 알았다고 한다.
남문(南門)의 근세 인물로서는 여류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을 들 수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정한(南廷漢)의 딸인 그는 의병인 남편 김영주(金永周)가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자 유복자를 길렀다.
남자현(南慈賢)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에서 활약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신앙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그는 재등실(齋藤實)총독의 암살을 계획했다가 실패하고, 1932년에는 국제연맹(國際聯盟)조사단이 하르빈에 오자 <조선독립청원(朝鮮獨立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1932년 만주 괴뢰정부의 건국일인 3월 1일에 폭탄을 휴대하고 식장에서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결국 장부(丈夫)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객사했다.
이 같은 정계 · 학계의 인물 외에 효성으로 이름을 남긴 남씨 인물도 었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죽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병에 걸릴까 무서워 피했으나 혼자 시선을 수습, 장례를 치렀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에 대해 오랫동안 간병을 했고 장례 후에도 계속 통곡을 그치지 않아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전염병이 옮지 않아 주위에서 모두 놀랐다. 그는 ‘주역(周易)’과 이황(李滉)의 ‘성학도(聖學圖)’ 동을 탐독하며 더욱 정신수양을 했다 한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中始祖) 남군보(南君甫)(고려말의 밀직부사)의 증손 을번(乙蕃)ㆍ을진(乙珍)ㆍ을경(乙敬) 3형제 중 동생 을진(乙珍)은고려 말에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으로 내려가 숨어버렸다.
조선조 개국 후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남을진(南乙珍)이 불응하자 ‘그의 지조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하여 후세에 권장코자 그의 거소(居所) 이름을 따서 〈사천백(沙川伯)〉에 봉했다. 남을진(南乙珍)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고 통곡하며 머리를 풀고 감옥산(紺獄山)(상패리)에 들어가 깊숙한 석굴(남선굴(南仙窟))에 숨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구왕조(舊王朝)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이에 비해 형 남을번(南乙蕃)의 아들 재(在)ㆍ는(誾) 형제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조를 개국하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특히 남은(南誾)은 이방원(李芳遠)(태종),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했으나 조선 개국 초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이방석(李芳碩)의 편에 가담했다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주살됐다.
남재(南在)(충경공(忠景公))는 태조를 측근에서 보필해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1급정치가가 됐다. 태조와 남재(南在)는 교분이 각별히 두터워 어느 날 군신이 함께 묘(墓)자리가 있는 양주군(楊州郡)에 갔다 가 태조가 남재(南在)의 묘(墓)자리가 좋다고 칭찬하니 남재(南在)가 선뜻 묘(墓)자리를 내주어 두 사람은 묘(墓)자리를 바꿨다. 그러나 자고로 ‘왕의 릉(陵)자리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전해지므로 남재(南在)가 이를 걱정하니 태조는‘역적이 나와도 당대의 별로 끝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후에 남이(南怡) 장군이 역적으로 몰렸어도 당대의 처별로 끝났다는 설이 전한다.
남재(南在)는 경제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산학(算學)에 일가를 이뤄 그의 수학을 당시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의남(宜南)>의 문중에서는 조선조에 정승6명과 대제학6명, 판서2A명이 나왔다. 이는 씨족 규모로 보아 대단한 숫자로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全州李氏)ㆍ연안이씨(延安李氏)ㆍ광산김씨(光山金氏)의7명에 버금가는 숫자다.
남재(南在)는3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맏손자 지(智)는 좌의정, 둘째 간(簡)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막내 휘(暉)는 태종의 사위가 되는 등 크게 벼슬길에 올랐다.
남지(南智_는 음보로 관찰에 올라 후일 우의정에 올랐는데 문종 6년 좌의정이 되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요행히 화를 면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 치는 아이들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유명한 이 시조를 지은 남구만(南力萬)은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소론(少論)의 영수다. 남구만(南力萬)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파싸움이 심했던 당시 정계를 주름잡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과 동년배의 인물로 예조판서(禮曹判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남간(南簡)의 9대 손이다. 그의 증손 남유용(南有容)과 아들 남공철(南公轍) 부자는 조선사에 학명을 남겼다.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었던 남유용(南有容)은 문과에 급제, 승지ㆍ좌부빈객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고 후일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은 대사성ㆍ부제학ㆍ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행정가로서의 수완 못지 않게 학명이 높았다.
특히 그는 경전을 연구하고 한(漢)ㆍ당(唐)ㆍ송(宋)의 명저를 읽고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 이들 부자는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시인으로 명필이었다.
명종 때 유명한 의적 임꺽정(林巨正)을 사로잡은 남치근(南致勤)은 남구만(南九萬)의 5대조 남치욱(南致勗)(목사)의 아우로 남문(南門)의 특이한 인물이다.그러나 남문(南門)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은 역시 남이(南怡)장군이 으뜸이었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文夫)’,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두만강 깊은 물 을말을먹여 다없애니/남아 20에 나라평정 못하면/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20대에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만주벌판을 굽어보며 옳은 이 시에는 그의 웅지가 잘 담겨져 있다. 남아의 호기를 상징하는 인물 남이(南怡)는 출생에서부터 결혼·죽음에 이르기까지 평범이 다달을 수 없는 비범을 엿보인다.남휘(南暉)의 손자인 그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權擥)의 넷째 딸과 결혼했는데 혼례에 얽힌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남이(南怡)가 어렸을 때 일이다. 바깥에서 놀고 있던 남이(南怡)는 조그만 아이가 보로 싼 상자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상자 위에는 분을 바른 여귀(女鬼)가 앉아 있었다. 이상히 여긴 그는 아이를 따라가 보니 한 재상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이한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 집 대문에서 서성대던 남이(南怡)는 잠시 후 집안에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집 하인에게 연유를 물은 즉 그 집의 처녀가 죽었다고 했다. 남이(南怡)는 자신만이 그 처녀를 살려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 처녀가 죽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여귀는 처녀의 가슴에 타고 있다가 남이(南怡)를 보고는 흠칫 놀라 달아났다. 얼마가 지나자 처녀는 부시시 눈을 부비고 깨어났으나 남이(南怡)가 방을 나오자 다시 까무라쳤다. 남이(南怡)는 조금 전에 가 져온 상자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니 ‘홍시인데 그 처녀가 한 입 물곤 쓰러졌다’는 대답이었다. 남이(南怡)가 호통쳐 여귀(女鬼)를 쫓아 보내니 그 처녀는 기력을 얻어 회생했다. 그 처녀가 바로 권람(權擥)의 딸이었다.
권람(權擥)은 남이(南怡)가 남다른 데가 있어 혼인을 정하려고 점을 쳐보니 ‘남이(南怡)는 반드시 죄사(罪死)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으나 그의 딸 역시 ‘단명할 것이고 자식도 없는데 부귀를 누려도 화 당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고 해 남이(南怡)와 혼례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남이(南怡)가 26세 되던 해 유자광(柳子光) 등의 모함으로 형장의 이슬로 단명했으나 그의 부인 권씨(權氏)는 남이(南怡)보다 2년 먼저 죽으나 점치는 이의 말이 맞은 셈이다.남이(南怡)는17세 나이로 무과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세조13년 북관에서 이시애(李施愛)난이 일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하고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그는 26세에 병조판서를 역임, 조선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된다.남이(南怡)는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대궐에서 숙직을 하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현상’이라고 말한 것을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남이(南怡)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주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앞서 가는 비범을 시기와 질투·모함과 중상으로 점철된 평범의 조선사가 꺾어 버린 역사의 주살이었다. 순조18년 그의 관직은 복구되고 충무(忠武)란 시호가 주어졌다.
남이(南怡)장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비봉면(飛鳳面) 남전2리(南田二里)에 있다. 그의 묘소는 외가인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살던 마을 부근인 이곳에 모셔졌고 지난 72년 충북음성(陰城)에 있던 부인도 이장해 현재는 함께 묻혀 있다.
남이(南怡)장군 묘는 10여년 전 만 해도 후손들이 잘 돌보지 않아 자연석으로만 대충 다듬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71년 당시 남상집(南相集) 경기도기획실장, 남영우(南永祐) 수원시장 등 후손들이 비석을 새로 세우고 묘소를 다듬었다.
묘소관리인 진창옥(秦昌玉)씨는 “남이(南怡)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고 외가가 있는 곳에 무덤을 방치했으나 후손들이 묘소를 손질해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게 됐다”고 기뻐했다.
후손들은 남이(南怡)장군 묘소가 흔히 남이(南怡)섬에 있다고 선전하면서 실제로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끌고 있는 것은 문중에서 볼 때 한심한 일이라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의남(宜南)>에서 추앙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남간(南簡)의 증손인 생육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그는 사육신사건 이후 정계와 손을 끊고 의령군(宜寧郡) 칠곡면(七谷面) 산림에 묻혀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ㆍ안응세(安應世)와 사귀어 형제처럼 지냈는데 18세 때 문종왕후 권씨의 능인 소릉(昭陵)에 복릉(復陵) 할 것을 상소했다가 도승지 임사홍(任士洪)ㆍ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배척으로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는 과격한 말이나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얘기를 거리낌없이 털어놓곤 했는데 김시습(金時習)이 한 번,“나는 세종에게 후한 덕을 업었으니 이 꼴이 되어 마땅하나, 그대는 나와 다르니 세상에 나설 계책을 세우라”고 권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이 말을 받아,“소릉사건은 천하의 큰 변이니 소릉이 복위된 후에 과거에 나서도 늦지 않으리라”고 답했다.
또 그가 ‘육신전(六臣傳)’을 짓는데 그의 문인들이 화가 두려워 말리자,“내 어찌 죽기가 두려워 대현(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하며 마침내 야사(野史)로 완성, 그의 곧은 기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선조ㆍ광해군조에 걸쳐 정계의 실력자였던 남이공(南以恭)은 4색당쟁의 와중에서 파란을 겪었다.
그는 정유왜란 후 북인(北人)의 거물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탄핵ㆍ파직시키고 소북(小北)의 영수가 됐다가 다시 반대파에 몰려 파직당했다. 그 뒤 다시 기용돼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했다가 광해군 7년 당쟁의 와중에서 또 파직되어 여러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4년 후에는 공조판서로 기용됐다가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자와 대신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보낸 데 대한 책임을 지고 파면되는 동 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임진왜란때는 아버지 남유(南瑜)가 정묘호란때는 아들이 외국의 침입을 막다가 양대가 순직한 남이흥(南以興)이 있다. 그의 자는 사호(士豪)이며 호는 성은(城隱)으로 23세때 부공(父公)이 노량(露梁)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시니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학문을 버리고 무예를 익히어 27세에 무과를 택하여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 장연현감(長淵縣監) 의주판관(義州判官) 용천군수(龍川郡守) 부령부사(富零府使) 충청도경상도병사(忠淸道慶尙道兵使) 구성부사(龜城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지내고 이괄난(李适亂)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올라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지내고 이어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평안병사(平安兵使)로 발탁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후금(後金)의 침입을 안주에서 막다가 패하자 자결순절 하셨다. 공의 장렬한 죽엄이 청국에까지 전하여져 적국에서 조차 근엄한 조의를 표하였다하며 공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인조(仁祖)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忠壯)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旌閭)도 내렸다. 유족은 인조가 무척 아끼면서 돌보아 주었다.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인물로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낸 남수문(南秀文)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일찍이 문명이 높아 집현전(集賢殿)으로 들어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 대부분을 썼다. 술이 과해 임금의 충고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송파(松坡) 남세주(南世周)는 성종18년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의 무도함을 맹렬히 간하다가 처형당한 충신이다.中宗반정 후 그의 충절이 인정돼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임진왜란 때 몸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신도 있다. 남수일(南守一)은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공을 세워 판관(判官)이 됐다. 그 후 무과에 급제,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는 등 미관말직에서 일약 공신으로까지 올라간 특이한 무신이다.

씨족史
조선조 남문(南門)은 구왕조(舊王朝)에 반기를 든 혁명의 주체세력인 〈참여파〉와 구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칸 <충절파〉의 두 갈래 흐름이 있다 . 참여파는 정권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나 충절파는 산 속에 은거 , 절개를 지켜 후 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남씨는 특히 조선조 초ㆍ중기 에 걸쳐 정권의 중앙무대로 진출, 4 색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시조 김충(金忠)은 현종(玄宗) 때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신라 유린(有隣)땅 (현재의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축산동(丑山洞) 죽도(竹島))에 기착하게 됐다.
김충(金忠)이 그 곳에 살기를 원하자 신라왕은 여남(汝南)에서 왔다 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삼게 하니 이때가 경덕왕 14년(755) 이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남민(南敏)의 후손 3 형제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맏형 홍보(洪輔)는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 땅에 정착하게 됐다.
이 때부터 남씨는 3 파의 본관으로 나눠지게 됐다 . 그중 의령(宜寧) 남씨가 3 분의 2 로 가장 번창하고 다음은 영양(英陽)과 고성(固城) 남씨의 순이다.
남씨들은 조선조 개국에 훈1등(勳一等)의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권력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거나 4색당쟁(四色黨爭)에 관여하게 됐고 대대로 숱한 현신(顯臣)과 학자를 배출했다.
영양남씨(英陽南氏)에서는 역학ㆍ풍수ㆍ천문 등에 정통하고 특히 예언에 뛰어난 남사고(南師古)가 기이한 인물이다. 임진왜란때는 무신으로 싸운 인물이 많아 남율(南慄)은 곽재우(郭再祐)의 진에서 싸웠고 남의손(南義孫)ㆍ남경희(南慶熹) 등도 싸움터에서 공을 세웠다. 문재가 뛰어난 남구명(南九明)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10여 년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형 남노명(南老明)의 권유로 벼슬에 나가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낸 선비다.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선조인 남사고(南師古)는 설화같은 삶을 산 기인이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자 예언자였던 남사고(南師古)는 역학ㆍ풍수ㆍ천문ㆍ복서ㆍ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했다. 그는 명종 말년에 1575년의 동서분당(東西分薰)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란(壬亂)을 예언,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가 이 같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젊었을 때 일이다. 경북 울진 불영사(佛影寺)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가지고 있던 바랑을 남사고(南師古)의 말에 지어주고 함께 유람하였다. 둘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흘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南師古)는 “무엇이 두려운가”고 태연히 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힘써 보라”며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南師古)는 이로부터 현묘의 기틀을 꿰뚫어 알았다고 한다.
남문(南門)의 근세 인물로서는 여류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을 들 수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정한(南廷漢)의 딸인 그는 의병인 남편 김영주(金永周)가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자 유복자를 길렀다.
남자현(南慈賢)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에서 활약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신앙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그는 재등실(齋藤實)총독의 암살을 계획했다가 실패하고, 1932년에는 국제연맹(國際聯盟)조사단이 하르빈에 오자 <조선독립청원(朝鮮獨立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1932년 만주 괴뢰정부의 건국일인 3월 1일에 폭탄을 휴대하고 식장에서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결국 장부(丈夫)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객사했다.
이 같은 정계 · 학계의 인물 외에 효성으로 이름을 남긴 남씨 인물도 었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죽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병에 걸릴까 무서워 피했으나 혼자 시선을 수습, 장례를 치렀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에 대해 오랫동안 간병을 했고 장례 후에도 계속 통곡을 그치지 않아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전염병이 옮지 않아 주위에서 모두 놀랐다. 그는 ‘주역(周易)’과 이황(李滉)의 ‘성학도(聖學圖)’ 동을 탐독하며 더욱 정신수양을 했다 한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中始祖) 남군보(南君甫)(고려말의 밀직부사)의 증손 을번(乙蕃)ㆍ을진(乙珍)ㆍ을경(乙敬) 3형제 중 동생 을진(乙珍)은고려 말에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으로 내려가 숨어버렸다.
조선조 개국 후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남을진(南乙珍)이 불응하자 ‘그의 지조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하여 후세에 권장코자 그의 거소(居所) 이름을 따서 〈사천백(沙川伯)〉에 봉했다. 남을진(南乙珍)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고 통곡하며 머리를 풀고 감옥산(紺獄山)(상패리)에 들어가 깊숙한 석굴(남선굴(南仙窟))에 숨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구왕조(舊王朝)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이에 비해 형 남을번(南乙蕃)의 아들 재(在)ㆍ는(誾) 형제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조를 개국하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특히 남은(南誾)은 이방원(李芳遠)(태종),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했으나 조선 개국 초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이방석(李芳碩)의 편에 가담했다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주살됐다.
남재(南在)(충경공(忠景公))는 태조를 측근에서 보필해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1급정치가가 됐다. 태조와 남재(南在)는 교분이 각별히 두터워 어느 날 군신이 함께 묘(墓)자리가 있는 양주군(楊州郡)에 갔다 가 태조가 남재(南在)의 묘(墓)자리가 좋다고 칭찬하니 남재(南在)가 선뜻 묘(墓)자리를 내주어 두 사람은 묘(墓)자리를 바꿨다. 그러나 자고로 ‘왕의 릉(陵)자리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전해지므로 남재(南在)가 이를 걱정하니 태조는‘역적이 나와도 당대의 별로 끝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후에 남이(南怡) 장군이 역적으로 몰렸어도 당대의 처별로 끝났다는 설이 전한다.
남재(南在)는 경제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산학(算學)에 일가를 이뤄 그의 수학을 당시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의남(宜南)>의 문중에서는 조선조에 정승6명과 대제학6명, 판서2A명이 나왔다. 이는 씨족 규모로 보아 대단한 숫자로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全州李氏)ㆍ연안이씨(延安李氏)ㆍ광산김씨(光山金氏)의7명에 버금가는 숫자다.
남재(南在)는3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맏손자 지(智)는 좌의정, 둘째 간(簡)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막내 휘(暉)는 태종의 사위가 되는 등 크게 벼슬길에 올랐다.
남지(南智_는 음보로 관찰에 올라 후일 우의정에 올랐는데 문종 6년 좌의정이 되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요행히 화를 면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 치는 아이들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유명한 이 시조를 지은 남구만(南力萬)은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소론(少論)의 영수다. 남구만(南力萬)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파싸움이 심했던 당시 정계를 주름잡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과 동년배의 인물로 예조판서(禮曹判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남간(南簡)의 9대 손이다. 그의 증손 남유용(南有容)과 아들 남공철(南公轍) 부자는 조선사에 학명을 남겼다.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었던 남유용(南有容)은 문과에 급제, 승지ㆍ좌부빈객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고 후일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은 대사성ㆍ부제학ㆍ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행정가로서의 수완 못지 않게 학명이 높았다.
특히 그는 경전을 연구하고 한(漢)ㆍ당(唐)ㆍ송(宋)의 명저를 읽고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 이들 부자는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시인으로 명필이었다.
명종 때 유명한 의적 임꺽정(林巨正)을 사로잡은 남치근(南致勤)은 남구만(南九萬)의 5대조 남치욱(南致勗)(목사)의 아우로 남문(南門)의 특이한 인물이다.그러나 남문(南門)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은 역시 남이(南怡)장군이 으뜸이었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文夫)’,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두만강 깊은 물 을말을먹여 다없애니/남아 20에 나라평정 못하면/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20대에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만주벌판을 굽어보며 옳은 이 시에는 그의 웅지가 잘 담겨져 있다. 남아의 호기를 상징하는 인물 남이(南怡)는 출생에서부터 결혼·죽음에 이르기까지 평범이 다달을 수 없는 비범을 엿보인다.남휘(南暉)의 손자인 그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權擥)의 넷째 딸과 결혼했는데 혼례에 얽힌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남이(南怡)가 어렸을 때 일이다. 바깥에서 놀고 있던 남이(南怡)는 조그만 아이가 보로 싼 상자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상자 위에는 분을 바른 여귀(女鬼)가 앉아 있었다. 이상히 여긴 그는 아이를 따라가 보니 한 재상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이한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 집 대문에서 서성대던 남이(南怡)는 잠시 후 집안에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집 하인에게 연유를 물은 즉 그 집의 처녀가 죽었다고 했다. 남이(南怡)는 자신만이 그 처녀를 살려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 처녀가 죽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여귀는 처녀의 가슴에 타고 있다가 남이(南怡)를 보고는 흠칫 놀라 달아났다. 얼마가 지나자 처녀는 부시시 눈을 부비고 깨어났으나 남이(南怡)가 방을 나오자 다시 까무라쳤다. 남이(南怡)는 조금 전에 가 져온 상자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니 ‘홍시인데 그 처녀가 한 입 물곤 쓰러졌다’는 대답이었다. 남이(南怡)가 호통쳐 여귀(女鬼)를 쫓아 보내니 그 처녀는 기력을 얻어 회생했다. 그 처녀가 바로 권람(權擥)의 딸이었다.
권람(權擥)은 남이(南怡)가 남다른 데가 있어 혼인을 정하려고 점을 쳐보니 ‘남이(南怡)는 반드시 죄사(罪死)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으나 그의 딸 역시 ‘단명할 것이고 자식도 없는데 부귀를 누려도 화 당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고 해 남이(南怡)와 혼례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남이(南怡)가 26세 되던 해 유자광(柳子光) 등의 모함으로 형장의 이슬로 단명했으나 그의 부인 권씨(權氏)는 남이(南怡)보다 2년 먼저 죽으나 점치는 이의 말이 맞은 셈이다.남이(南怡)는17세 나이로 무과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세조13년 북관에서 이시애(李施愛)난이 일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하고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그는 26세에 병조판서를 역임, 조선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된다.남이(南怡)는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대궐에서 숙직을 하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현상’이라고 말한 것을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남이(南怡)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주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앞서 가는 비범을 시기와 질투·모함과 중상으로 점철된 평범의 조선사가 꺾어 버린 역사의 주살이었다. 순조18년 그의 관직은 복구되고 충무(忠武)란 시호가 주어졌다.
남이(南怡)장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비봉면(飛鳳面) 남전2리(南田二里)에 있다. 그의 묘소는 외가인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살던 마을 부근인 이곳에 모셔졌고 지난 72년 충북음성(陰城)에 있던 부인도 이장해 현재는 함께 묻혀 있다.
남이(南怡)장군 묘는 10여년 전 만 해도 후손들이 잘 돌보지 않아 자연석으로만 대충 다듬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71년 당시 남상집(南相集) 경기도기획실장, 남영우(南永祐) 수원시장 등 후손들이 비석을 새로 세우고 묘소를 다듬었다.
묘소관리인 진창옥(秦昌玉)씨는 “남이(南怡)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고 외가가 있는 곳에 무덤을 방치했으나 후손들이 묘소를 손질해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게 됐다”고 기뻐했다.
후손들은 남이(南怡)장군 묘소가 흔히 남이(南怡)섬에 있다고 선전하면서 실제로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끌고 있는 것은 문중에서 볼 때 한심한 일이라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의남(宜南)>에서 추앙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남간(南簡)의 증손인 생육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그는 사육신사건 이후 정계와 손을 끊고 의령군(宜寧郡) 칠곡면(七谷面) 산림에 묻혀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ㆍ안응세(安應世)와 사귀어 형제처럼 지냈는데 18세 때 문종왕후 권씨의 능인 소릉(昭陵)에 복릉(復陵) 할 것을 상소했다가 도승지 임사홍(任士洪)ㆍ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배척으로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는 과격한 말이나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얘기를 거리낌없이 털어놓곤 했는데 김시습(金時習)이 한 번,“나는 세종에게 후한 덕을 업었으니 이 꼴이 되어 마땅하나, 그대는 나와 다르니 세상에 나설 계책을 세우라”고 권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이 말을 받아,“소릉사건은 천하의 큰 변이니 소릉이 복위된 후에 과거에 나서도 늦지 않으리라”고 답했다.
또 그가 ‘육신전(六臣傳)’을 짓는데 그의 문인들이 화가 두려워 말리자,“내 어찌 죽기가 두려워 대현(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하며 마침내 야사(野史)로 완성, 그의 곧은 기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선조ㆍ광해군조에 걸쳐 정계의 실력자였던 남이공(南以恭)은 4색당쟁의 와중에서 파란을 겪었다.
그는 정유왜란 후 북인(北人)의 거물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탄핵ㆍ파직시키고 소북(小北)의 영수가 됐다가 다시 반대파에 몰려 파직당했다. 그 뒤 다시 기용돼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했다가 광해군 7년 당쟁의 와중에서 또 파직되어 여러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4년 후에는 공조판서로 기용됐다가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자와 대신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보낸 데 대한 책임을 지고 파면되는 동 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임진왜란때는 아버지 남유(南瑜)가 정묘호란때는 아들이 외국의 침입을 막다가 양대가 순직한 남이흥(南以興)이 있다. 그의 자는 사호(士豪)이며 호는 성은(城隱)으로 23세때 부공(父公)이 노량(露梁)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시니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학문을 버리고 무예를 익히어 27세에 무과를 택하여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 장연현감(長淵縣監) 의주판관(義州判官) 용천군수(龍川郡守) 부령부사(富零府使) 충청도경상도병사(忠淸道慶尙道兵使) 구성부사(龜城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지내고 이괄난(李适亂)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올라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지내고 이어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평안병사(平安兵使)로 발탁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후금(後金)의 침입을 안주에서 막다가 패하자 자결순절 하셨다. 공의 장렬한 죽엄이 청국에까지 전하여져 적국에서 조차 근엄한 조의를 표하였다하며 공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인조(仁祖)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忠壯)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旌閭)도 내렸다. 유족은 인조가 무척 아끼면서 돌보아 주었다.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인물로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낸 남수문(南秀文)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일찍이 문명이 높아 집현전(集賢殿)으로 들어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 대부분을 썼다. 술이 과해 임금의 충고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송파(松坡) 남세주(南世周)는 성종18년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의 무도함을 맹렬히 간하다가 처형당한 충신이다.中宗반정 후 그의 충절이 인정돼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임진왜란 때 몸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신도 있다. 남수일(南守一)은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공을 세워 판관(判官)이 됐다. 그 후 무과에 급제,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는 등 미관말직에서 일약 공신으로까지 올라간 특이한 무신이다.

씨족史
조선조 남문(南門)은 구왕조(舊王朝)에 반기를 든 혁명의 주체세력인 〈참여파〉와 구왕조에 대해 절개를 지칸 <충절파〉의 두 갈래 흐름이 있다 . 참여파는 정권에 참여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나 충절파는 산 속에 은거 , 절개를 지켜 후 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남씨는 특히 조선조 초ㆍ중기 에 걸쳐 정권의 중앙무대로 진출, 4 색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하며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시조 김충(金忠)은 현종(玄宗) 때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가 태풍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던 중 신라 유린(有隣)땅 (현재의 경북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축산동(丑山洞) 죽도(竹島))에 기착하게 됐다.
김충(金忠)이 그 곳에 살기를 원하자 신라왕은 여남(汝南)에서 왔다 하여 〈남(南)〉이라는 성을 하사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의공(英毅公)에 봉하고 영양현(英陽縣)을 식읍으로 삼게 하니 이때가 경덕왕 14년(755) 이다.
그 후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남민(南敏)의 후손 3 형제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맏형 홍보(洪輔)는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 땅에 정착하게 됐다.
이 때부터 남씨는 3 파의 본관으로 나눠지게 됐다 . 그중 의령(宜寧) 남씨가 3 분의 2 로 가장 번창하고 다음은 영양(英陽)과 고성(固城) 남씨의 순이다.
남씨들은 조선조 개국에 훈1등(勳一等)의 공을 세움으로써 중앙권력의 중추에 오른 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거나 4색당쟁(四色黨爭)에 관여하게 됐고 대대로 숱한 현신(顯臣)과 학자를 배출했다.
영양남씨(英陽南氏)에서는 역학ㆍ풍수ㆍ천문 등에 정통하고 특히 예언에 뛰어난 남사고(南師古)가 기이한 인물이다. 임진왜란때는 무신으로 싸운 인물이 많아 남율(南慄)은 곽재우(郭再祐)의 진에서 싸웠고 남의손(南義孫)ㆍ남경희(南慶熹) 등도 싸움터에서 공을 세웠다. 문재가 뛰어난 남구명(南九明)은 숙종 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10여 년간 향리에서 은거하다가 형 남노명(南老明)의 권유로 벼슬에 나가 순천부사(順天府使) 등을 지낸 선비다. 영양남씨(英陽南氏)의 선조인 남사고(南師古)는 설화같은 삶을 산 기인이다. 조선조 중기의 학자이자 예언자였던 남사고(南師古)는 역학ㆍ풍수ㆍ천문ㆍ복서ㆍ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했다. 그는 명종 말년에 1575년의 동서분당(東西分薰)을 예언했고, 명종 19년에는, “내년에 필연코 태산을 봉하리라”했는데 이듬해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죽어 태릉에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는 또 임란(壬亂)을 예언, “살기가 심히 악하여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는데 과연 그 해 임진왜란이 터졌다. 그가 이 같은 묘결(妙訣)을 얻은 데는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그가 젊었을 때 일이다. 경북 울진 불영사(佛影寺)를 가던 길에 승려를 만났다. 승려는 가지고 있던 바랑을 남사고(南師古)의 말에 지어주고 함께 유람하였다. 둘은 소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중은 갑자기 소리를 내지르더니 흘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한참만에 모습을 드러낸 승려는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사고(南師古)는 “무엇이 두려운가”고 태연히 답하였다.
그러자 승려는 “그대는 능히 두려워하지 않으니 내가 가르칠 수 있다. 그대는 범상한 사람이 아니니 힘써 보라”며 비결을 주고 사라져 버렸다. 남사고(南師古)는 이로부터 현묘의 기틀을 꿰뚫어 알았다고 한다.
남문(南門)의 근세 인물로서는 여류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을 들 수 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정한(南廷漢)의 딸인 그는 의병인 남편 김영주(金永周)가 왜병과 싸우다 전사하자 유복자를 길렀다.
남자현(南慈賢)은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暑)에서 활약하며 많은 교회를 세워 신앙을 통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5년 그는 재등실(齋藤實)총독의 암살을 계획했다가 실패하고, 1932년에는 국제연맹(國際聯盟)조사단이 하르빈에 오자 <조선독립청원(朝鮮獨立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1932년 만주 괴뢰정부의 건국일인 3월 1일에 폭탄을 휴대하고 식장에서 요인을 암살하려다 체포돼 결국 장부(丈夫)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객사했다.
이 같은 정계 · 학계의 인물 외에 효성으로 이름을 남긴 남씨 인물도 었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가 전염병으로 죽으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병에 걸릴까 무서워 피했으나 혼자 시선을 수습, 장례를 치렀다. 남만회(南萬會)는 어머니에 대해 오랫동안 간병을 했고 장례 후에도 계속 통곡을 그치지 않아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전염병이 옮지 않아 주위에서 모두 놀랐다. 그는 ‘주역(周易)’과 이황(李滉)의 ‘성학도(聖學圖)’ 동을 탐독하며 더욱 정신수양을 했다 한다.
의령남씨(宜寧南氏)의 시조(中始祖) 남군보(南君甫)(고려말의 밀직부사)의 증손 을번(乙蕃)ㆍ을진(乙珍)ㆍ을경(乙敬) 3형제 중 동생 을진(乙珍)은고려 말에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상패리)으로 내려가 숨어버렸다.
조선조 개국 후 태조의 간곡한 부름이 있었으나 남을진(南乙珍)이 불응하자 ‘그의 지조는 누구도 꺾을 수 없다’하여 후세에 권장코자 그의 거소(居所) 이름을 따서 〈사천백(沙川伯)〉에 봉했다. 남을진(南乙珍)은 이 소식을 듣고 오히려 수모를 당했다고 통곡하며 머리를 풀고 감옥산(紺獄山)(상패리)에 들어가 깊숙한 석굴(남선굴(南仙窟))에 숨어 죽을 때까지 사람을 보지 않으면서 구왕조(舊王朝)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다. 이에 비해 형 남을번(南乙蕃)의 아들 재(在)ㆍ는(誾) 형제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조를 개국하는 데 1등 공신이 됐다.
특히 남은(南誾)은 이방원(李芳遠)(태종),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활약했으나 조선 개국 초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함께 이방석(李芳碩)의 편에 가담했다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주살됐다.
남재(南在)(충경공(忠景公))는 태조를 측근에서 보필해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1급정치가가 됐다. 태조와 남재(南在)는 교분이 각별히 두터워 어느 날 군신이 함께 묘(墓)자리가 있는 양주군(楊州郡)에 갔다 가 태조가 남재(南在)의 묘(墓)자리가 좋다고 칭찬하니 남재(南在)가 선뜻 묘(墓)자리를 내주어 두 사람은 묘(墓)자리를 바꿨다. 그러나 자고로 ‘왕의 릉(陵)자리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나온다’는 말이 전해지므로 남재(南在)가 이를 걱정하니 태조는‘역적이 나와도 당대의 별로 끝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후에 남이(南怡) 장군이 역적으로 몰렸어도 당대의 처별로 끝났다는 설이 전한다.
남재(南在)는 경제에 밝았고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산학(算學)에 일가를 이뤄 그의 수학을 당시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의남(宜南)>의 문중에서는 조선조에 정승6명과 대제학6명, 판서2A명이 나왔다. 이는 씨족 규모로 보아 대단한 숫자로 대제학 6명은 전주이씨(全州李氏)ㆍ연안이씨(延安李氏)ㆍ광산김씨(光山金氏)의7명에 버금가는 숫자다.
남재(南在)는3명의 손자를 두었는데 맏손자 지(智)는 좌의정, 둘째 간(簡)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막내 휘(暉)는 태종의 사위가 되는 등 크게 벼슬길에 올랐다.
남지(南智_는 음보로 관찰에 올라 후일 우의정에 올랐는데 문종 6년 좌의정이 되어 김종서(金宗瑞)ㆍ황보인(皇甫仁) 등과 함께 단종을 보필하라는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병으로 사직, 수양대군(首陽大君)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요행히 화를 면했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소 치는 아이들은 상기 아니 일었느냐/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유명한 이 시조를 지은 남구만(南力萬)은 남지(南智)의 후손으로 숙종 때 영의정(領議政)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소론(少論)의 영수다. 남구만(南力萬)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당파싸움이 심했던 당시 정계를 주름잡은 정치인이기도 했다. 남구만(南九萬)과 동년배의 인물로 예조판서(禮曹判書)ㆍ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ㆍ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남용익(南龍翼)은 남간(南簡)의 9대 손이다. 그의 증손 남유용(南有容)과 아들 남공철(南公轍) 부자는 조선사에 학명을 남겼다.도암(陶庵) 이재(李縡)의 문인이었던 남유용(南有容)은 문과에 급제, 승지ㆍ좌부빈객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렀고 후일 양관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남공철(南公轍)은 대사성ㆍ부제학ㆍ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에 이르렀는데 그는 행정가로서의 수완 못지 않게 학명이 높았다.
특히 그는 경전을 연구하고 한(漢)ㆍ당(唐)ㆍ송(宋)의 명저를 읽고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 이들 부자는 당대의 대문장가이자 시인으로 명필이었다.
명종 때 유명한 의적 임꺽정(林巨正)을 사로잡은 남치근(南致勤)은 남구만(南九萬)의 5대조 남치욱(南致勗)(목사)의 아우로 남문(南門)의 특이한 인물이다.그러나 남문(南門)에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은 역시 남이(南怡)장군이 으뜸이었다.
“백두산석마도진(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수음마무(豆滿江水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後世誰稱大文夫)’, (백두산 높은 봉을 칼을 갈아 다 없애고/두만강 깊은 물 을말을먹여 다없애니/남아 20에 나라평정 못하면/그 누가 대장부라 일컬으리오) 20대에 천하를 평정하겠다고 만주벌판을 굽어보며 옳은 이 시에는 그의 웅지가 잘 담겨져 있다. 남아의 호기를 상징하는 인물 남이(南怡)는 출생에서부터 결혼·죽음에 이르기까지 평범이 다달을 수 없는 비범을 엿보인다.남휘(南暉)의 손자인 그는 태종의 외증손으로 태어나 당시 좌의정이던 권람(權擥)의 넷째 딸과 결혼했는데 혼례에 얽힌 전설적인 일화가 전해진다.
남이(南怡)가 어렸을 때 일이다. 바깥에서 놀고 있던 남이(南怡)는 조그만 아이가 보로 싼 상자를 들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상자 위에는 분을 바른 여귀(女鬼)가 앉아 있었다. 이상히 여긴 그는 아이를 따라가 보니 한 재상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기이한 느낌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 집 대문에서 서성대던 남이(南怡)는 잠시 후 집안에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 집 하인에게 연유를 물은 즉 그 집의 처녀가 죽었다고 했다. 남이(南怡)는 자신만이 그 처녀를 살려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 처녀가 죽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여귀는 처녀의 가슴에 타고 있다가 남이(南怡)를 보고는 흠칫 놀라 달아났다. 얼마가 지나자 처녀는 부시시 눈을 부비고 깨어났으나 남이(南怡)가 방을 나오자 다시 까무라쳤다. 남이(南怡)는 조금 전에 가 져온 상자가 무엇인가를 물어보니 ‘홍시인데 그 처녀가 한 입 물곤 쓰러졌다’는 대답이었다. 남이(南怡)가 호통쳐 여귀(女鬼)를 쫓아 보내니 그 처녀는 기력을 얻어 회생했다. 그 처녀가 바로 권람(權擥)의 딸이었다.
권람(權擥)은 남이(南怡)가 남다른 데가 있어 혼인을 정하려고 점을 쳐보니 ‘남이(南怡)는 반드시 죄사(罪死)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으나 그의 딸 역시 ‘단명할 것이고 자식도 없는데 부귀를 누려도 화 당하는 것을 보지 않는다’고 해 남이(南怡)와 혼례를 올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남이(南怡)가 26세 되던 해 유자광(柳子光) 등의 모함으로 형장의 이슬로 단명했으나 그의 부인 권씨(權氏)는 남이(南怡)보다 2년 먼저 죽으나 점치는 이의 말이 맞은 셈이다.남이(南怡)는17세 나이로 무과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세조13년 북관에서 이시애(李施愛)난이 일자 우대장으로 이를 토벌하고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를 칠 때 선봉장으로 공을 세웠다.
그는 26세에 병조판서를 역임, 조선조 역사상 최연소 장관이 된다.남이(南怡)는 예종이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대궐에서 숙직을 하면서 혜성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려는 현상’이라고 말한 것을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남이(南怡)가 모반한다’고 무고하여 주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대를 앞서 가는 비범을 시기와 질투·모함과 중상으로 점철된 평범의 조선사가 꺾어 버린 역사의 주살이었다. 순조18년 그의 관직은 복구되고 충무(忠武)란 시호가 주어졌다.
남이(南怡)장군 묘소는 경기도 화성군(華城郡) 비봉면(飛鳳面) 남전2리(南田二里)에 있다. 그의 묘소는 외가인 남양홍씨(南陽洪氏)가 살던 마을 부근인 이곳에 모셔졌고 지난 72년 충북음성(陰城)에 있던 부인도 이장해 현재는 함께 묻혀 있다.
남이(南怡)장군 묘는 10여년 전 만 해도 후손들이 잘 돌보지 않아 자연석으로만 대충 다듬어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 71년 당시 남상집(南相集) 경기도기획실장, 남영우(南永祐) 수원시장 등 후손들이 비석을 새로 세우고 묘소를 다듬었다.
묘소관리인 진창옥(秦昌玉)씨는 “남이(南怡)장군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했다고 외가가 있는 곳에 무덤을 방치했으나 후손들이 묘소를 손질해 이제야 편안히 눈을 감게 됐다”고 기뻐했다.
후손들은 남이(南怡)장군 묘소가 흔히 남이(南怡)섬에 있다고 선전하면서 실제로 가묘(假墓)를 만들어 놓고 관광객을 끌고 있는 것은 문중에서 볼 때 한심한 일이라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의남(宜南)>에서 추앙하는 또 하나의 인물은 남간(南簡)의 증손인 생육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다. 사림의 거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그는 사육신사건 이후 정계와 손을 끊고 의령군(宜寧郡) 칠곡면(七谷面) 산림에 묻혀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김시습(金時習)ㆍ안응세(安應世)와 사귀어 형제처럼 지냈는데 18세 때 문종왕후 권씨의 능인 소릉(昭陵)에 복릉(復陵) 할 것을 상소했다가 도승지 임사홍(任士洪)ㆍ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배척으로 사람들로부터 미치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는 과격한 말이나 임금의 비위에 거슬리는 얘기를 거리낌없이 털어놓곤 했는데 김시습(金時習)이 한 번,“나는 세종에게 후한 덕을 업었으니 이 꼴이 되어 마땅하나, 그대는 나와 다르니 세상에 나설 계책을 세우라”고 권했다. 남효온(南孝溫)은 이 말을 받아,“소릉사건은 천하의 큰 변이니 소릉이 복위된 후에 과거에 나서도 늦지 않으리라”고 답했다.
또 그가 ‘육신전(六臣傳)’을 짓는데 그의 문인들이 화가 두려워 말리자,“내 어찌 죽기가 두려워 대현(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하며 마침내 야사(野史)로 완성, 그의 곧은 기개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선조ㆍ광해군조에 걸쳐 정계의 실력자였던 남이공(南以恭)은 4색당쟁의 와중에서 파란을 겪었다.
그는 정유왜란 후 북인(北人)의 거물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을 탄핵ㆍ파직시키고 소북(小北)의 영수가 됐다가 다시 반대파에 몰려 파직당했다. 그 뒤 다시 기용돼 홍문관부제학을 역임했다가 광해군 7년 당쟁의 와중에서 또 파직되어 여러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등 시련을 겪었다. 4년 후에는 공조판서로 기용됐다가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자와 대신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보낸 데 대한 책임을 지고 파면되는 동 당쟁의 와중에서 부침(浮沈)을 거듭했다.
임진왜란때는 아버지 남유(南瑜)가 정묘호란때는 아들이 외국의 침입을 막다가 양대가 순직한 남이흥(南以興)이 있다. 그의 자는 사호(士豪)이며 호는 성은(城隱)으로 23세때 부공(父公)이 노량(露梁)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시니 이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학문을 버리고 무예를 익히어 27세에 무과를 택하여 급제하였으며 선전관(宣傳官) 장연현감(長淵縣監) 의주판관(義州判官) 용천군수(龍川郡守) 부령부사(富零府使) 충청도경상도병사(忠淸道慶尙道兵使) 구성부사(龜城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지내고 이괄난(李适亂)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올라 연안부사(延安府使)를 지내고 이어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평안병사(平安兵使)로 발탁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때 후금(後金)의 침입을 안주에서 막다가 패하자 자결순절 하셨다. 공의 장렬한 죽엄이 청국에까지 전하여져 적국에서 조차 근엄한 조의를 표하였다하며 공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하자 인조(仁祖)는 눈물을 흘리면서 어의를 벗어 덮어주었다.
사후에 좌의정에 추증(追贈)되고 의춘부원군(宜春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忠壯)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정려(旌閭)도 내렸다. 유족은 인조가 무척 아끼면서 돌보아 주었다.
고성남씨(固城南氏)의 인물로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을 지낸 남수문(南秀文)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일찍이 문명이 높아 집현전(集賢殿)으로 들어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초고 대부분을 썼다. 술이 과해 임금의 충고를 받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송파(松坡) 남세주(南世周)는 성종18년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연산군10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왕의 무도함을 맹렬히 간하다가 처형당한 충신이다.中宗반정 후 그의 충절이 인정돼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임진왜란 때 몸을 일으켜 공을 세운 무신도 있다. 남수일(南守一)은 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싸움터에 나가 공을 세워 판관(判官)이 됐다. 그 후 무과에 급제,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는 등 미관말직에서 일약 공신으로까지 올라간 특이한 무신이다.

역대 주요 인물
▲고려조

남홍보(南洪輔)(영양남씨중시조(英陽南氏中始祖))
남군보(南君甫)(의령남씨중시조(宜寧南氏中始祖))
남광보(南匡甫)(고성남씨중시조(固城南氏中始祖))
남일(南佚)(밀직사(密直使))
남좌시(南佐時)(정당상의(政堂商議))
남을진(南乙珍)(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

▲조선조

남을번(南乙蕃)(검교시중(檢校侍中))
남은(南誾)(절제사(節制使))
남재(南在)(영의정(領議政))
남지(南智)(좌의정(左議政))
남간(南簡)(직제학(直提學))
남휘(南暉)(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
남양덕(南陽德)(헌납(獻納))
남계영(南季瑛)(직제학(直提學))
남수문(南秀文)(직제학(直提學))
남효온(南孝溫)(이판(吏判))
남이(南怡)(병판(兵判))
남세주(南世周)(전한(典翰))
남응운(南應雲)(이참(吏參))
남응룡(南應龍)(공의(工議))
남곤(南袞)(영의정(領議政))
남효의(南孝義)(형판(刑判))
남진(南振)(학자(學者))
남순민(南舜民)(오위장(五衛將))
남유(南瑜)(목사(牧使))
남이신(南以信)(이판(吏判))
남치근(南致勤)(판윤(判尹))
남언경(南彦經)(공의(工議))
남언순(南彦純)(승지(承旨))
남사고(南師古)(천문교수(天文敎授))
남계하(南啓夏)(시인(詩人))
남천한(南天漢)(대사간(大司諫))
남치리(南致利)(학자(學者))
남이웅(南以雄)(좌의정(左議政))
남이흥(南以興)(병사(兵使))
남선(南선)(관찰사(觀察使))
남발(南撥)(상의원정(尙衣院正))
남급(南급)(현감(縣監))
남선(南銑)(이판(吏判))
남노성(南老星)(예참(禮參))
남학명(南鶴鳴)(주부(主簿))
남해준(南海準)(학자(學者))
남구만(南九萬)(영의정(領議政))
남용익(南龍翼)(대제학(大提學))
남치욱(참판(參判))
남하정(南夏正)(학자(學者))
남하행(南夏行)(학자(學者))
남이성(南二星)(예판(禮判))
남익훈(南益熏)(관찰사(觀察使))
남정중(南正重)(부윤(府尹))
남극표(南極杓)(부사(府使))
남태징(南泰徵)(통제사(統制使))
남유용(南有容)(대제학(大提學))
남태제(南泰齊)(이판(吏判))
남태기(南泰耆)(예판(禮判))
남한기(南漢紀)(부총관(副摠管))
남태온(南泰溫)(대사간(大司諫))
남연년(南延年)(영장(營將))
남유상(南有常)(이정(吏正))
남명학(南溟學)(공좌(工佐))
남기만(南基萬)(정언(正言))
남용만(南龍萬)(학자(學者))
남공철(南公轍)(영의정(領議政))
남주헌(南周獻)(부사(府使))
남이관(南履灌)(순교자(殉敎者))
남상교(南尙敎)(순교자(殉敎者))
남계우(南啓宇)(화가(畵家))
남상길(南相吉)(좌참찬(左參贊))
남병철(南秉哲)(대제학(大提學))
남정철(南廷哲)(예판(禮判))
남종삼(南鍾三)(순교자(殉敎者))
남상덕(南相悳)(시위대참위(侍衛隊參尉))


[등과인명(登科人名)]

(영양관(英陽貫))

▲조선조

문과(文科)
남숭(南崧)(전적(典籍))
남복규(南復圭)(장령(掌令))
남연
남천한(南天漢)(대간(大諫))
남지망(南之望)(예좌(禮佐))
남천택(南天澤)(승지(承旨))
남몽뢰(南夢賚)(목사(牧使))
남붕익(南鵬翼)(현감(縣監))
남천상(南天祥)(전적(典籍))
남노명(南老明)(현감(縣監))
남하명(南夏明)(찰방(察訪))
남구명(南九明)(부사(府使))
남국한(南國翰)(현감(縣監))
남지(南至)(좌랑(佐郞))
남용진(南龍震)(예좌(禮佐))
남태운(南泰運)(병좌(兵佐))
남명핵(도사(都事))
남제만(南濟萬)(정자(正字))
남상천(南相天)(현감(縣監))
남석로(南碩老)(막감(膜監))
남용견(南龍見)(첨지(僉知))
남기만(南基萬)(정언(正言))
남경의(南景義)(정언(正言))
남술의(南述毅)(현감(縣監))
남경룡(南景龍)(정랑(正郞))
남경홍(南景鴻)
남식(南湜)(장령(掌令))

(의령관(宜寧貫))

▲조선조

문과(文科)
남양덕(南陽德)(헌납(獻納))
남계영(南季瑛)(직제학(直提學))
남간(南簡)(직제학(直提學))
남경(南輕)(소윤(少尹))
남기(南琦)(헌납(獻納))
남윤종(南潤宗)(사인(舍人))
남계당(南季堂)(수찬(修撰))
남제(南悌)(사예(司藝))
남율(南慄)(대간(大諫))
남진문(南振門)(학유(學諭))
남곤(南袞)(영상(領相))
남포(南褒)(직학(直學))
남세준(南世準)(이참(吏參))
남세환(南世煥)(봉정(奉正))
남효순(南孝純)(판서(判書))
남효의(南孝義)(판서(判書))
남세웅(南世雄)(참판(參判))
남순민(南舜民)(한림(翰林))
남세건(南世健)(대헌(大憲))
남응룡(南應龍)(공의(工議))
남응운(南應雲)(예참(禮參))
남경춘(南慶春)(통례(通例))
남연경(南延慶)(현감(縣監))
남복흥(南復興)(동지(同知))
남근(南瑾)(대헌(大憲))
남이공(南以恭)(이판(吏判))
남탁(南晫)(장령(掌令))
남이신(南以信)(병참(兵參))
남이준(南以俊)(삼사(三司))
남발(南撥)(승지(承旨))
남성신(南省身)(전적(典籍))
남이웅(南以雄)(좌상(左相))
남명우(南溟羽)(이랑(吏郞))
남두첨(南斗瞻)(호의(戶議))
남진명(南振溟)(병좌(兵佐))
남선(南銑)(이판(吏判))
남노성(南老星)(예참(禮參))
남선(南선)(영백(嶺伯))
남명익(南溟翼)(병랑(兵郞))
남구만(南九萬)(영상(領相))
남이성(南二星)(예판(禮判))
남몽성(南夢星)(병정(兵正))
남유성(南有星)(정언(正言))
남익훈(南益勳)(예참(禮參))
남필성(南弼星)(형참(刑參))
남치훈(南致熏)(예참(禮參))
남언창(南彦昌)(목사(牧使))
남치훈(南致勳)(승지(承旨))
남세진(南世珍)(수찬(修撰))
남정중(南正重)(감사(監司))
남도익(南圖翼)(전적(典籍))
남적명(南迪明)(지사(知事))
남상하(南相夏)(집의(執義))
남취명(南就明)(지사(知事))
남일명(南一明)(응교(應敎))
남도규(南道揆)(승지(承旨))
남중계(南重繼)(직강(直講))
남세운(南世雲)(군수(郡守))
남수언(南壽彦)(현감(縣監))
남수현(南壽賢)(현감(縣監))
남태경(南泰慶)(승지(承旨))
남위로(南渭老)(헌납(獻納))
남윤관(南胤寬)(첨정(僉正))
남유상(南有常)(이정(吏正))
남태제(南泰齊)(이판(吏判))
남태량(南泰良)(이참(吏參))
남전(병정(兵正))
남태온(南泰溫)(참판(參判))
남태기(南泰耆)(예판(禮判))
남태행(南泰行)
남덕로(南德老)(헌납(獻納))
남학종(南鶴宗)(집의(執義))
남언욱(南彦彧)(헌납(獻納))
남태혁(南泰爀)(공참(工參))
남혜로(南惠老)(대간(大諫))
남태계(南泰階)(병좌(兵佐))
남유용(南有容)(판서(判書))
남태회(南泰會)(병판(兵判))
남처관(南處寬)(병좌(兵佐))
남학로(南鶴老)(지평(持平))
남운로(南雲老)(양사(兩司))
남태저(南泰著)(대간(大諫))
남옥(南玉)(현감(縣監))
남중(南重)(현감(縣監))
남기로(南綺老)(교리(校理))
남현로(南玄老)(교리(校理))
남윤희(南允熙)(장령(掌令))
남주관(지평(持平))
남학원(南鶴遠)(장령(掌令))
남주로(南柱老)(교리(校理))
남이관(南履寬)(정언(正言))
남강로(南絳老)(교리(校理))
남학문(南鶴聞)(승지(承旨))
남학명(南鶴鳴)(주부(主簿))
남필석(南必錫)(장령(掌令))
남달손(南達孫)(집의(執義))
남이익(南履翼)(병판(兵判))
남학순(南鶴純)(첨지(僉知))
남속(南涑)(정언(正言))
남혜관(南惠寬)(승지(承旨))
남공철(南公轍)(영상(領相))
남암로(南巖老)(현감(縣監))
남도중(南度中)(교리(校理))
남길관(南吉寬)(헌납(獻納))
남병관(南秉寬)(교리(校理))
남규채(南奎采)(정언(正言))
남이무(南履懋)(참판(參判))
남주헌(南周憲)(응교(應敎))
남주원(南周源)(승지(承旨))
남이형(南履炯)(승지(承旨))
남헌교(南獻敎)(병판(兵判))
남병철(南秉喆)(판서(判書))
남연룡(南延龍)(이참(吏參))
남영서(南永書)(승지(承旨))
남성원(南性元)(판서(判書))
남주원(南周元)(승지(承旨))
남제원(南濟元)(승지(承旨))
남정익(南廷益)(판서(判書))
남정순(南廷順)(이판(吏判))
남정숙(南廷淑)(주서(注書))
남정호(南廷皓)(승지(承旨))
남정룡(南廷龍)(이참(吏參))
남정철(南廷哲)(판서(判書))
남정길(南廷吉)(지평(持平))
남일우(南一祐)(판서(判書))
남학희(南學熙)(승지(承旨))
남숙희(南肅熙)(참판(參判))
남광희(南光熙)(응교(應敎))
남규희(南奎熙)(직각(直閣))
남장희(南章熙)(승지(承旨))
남석희(南錫熙)(한림(翰林))
남병문(南秉文)(정언(正言))
남종두(南宗斗)(정언(正言))
남계륜(南啓輪)(승지(承旨))

무과(武科)
남이(南怡)(병판(兵判))
남유(南瑜)(부사(府使))
남이흥(南以興)(병사(兵使))
남두극(南斗極)(첨정(僉正))
남치욱(목사(牧使))
남언순(南彦純)(승지(承旨))
남타(첨정(僉正))
남두병(南斗柄)(어장(禦將))
남헌(북병사(北兵使))
남륜(南崙)(수사(水使))
남효원(南孝元)(수사(水使))
남이수(별천(別薦))
남오성(南五星)(통수(統帥))
남명선(南命善)(병사(兵使))
남치근(南致勤)(판윤(判尹))

(고성관(固城貫))

▲조선조

문과(文科)
남수문(南秀文)(직제학(直提學))
남세담(南世聃)(부사(府使))
남세주(南世周)(전적(典籍))
남주(전적(典籍))
남규년(부사(府使))
남봉년(南鳳年)(군수(郡守))
남전(南銓)(부정(副正))
남형운(南亨雲)(정자(正字))


[조선조 급제자 정록]

(영양관(英陽貫))

승보(勝寶)(단종(端宗) 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복규(復圭)(선조(宣祖) 33년·별시(別試)·을과(乙科))
연(인조(仁祖) 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천한(天漢)(인조(仁祖) 2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지망(之望)(인조(仁祖) 2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천택(天澤)(인조(仁祖) 2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몽뢰(夢賚)(효종(孝宗) 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천상(天祥)(숙종(肅宗) 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노명(老明)(숙종(肅宗) 1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하명(夏明)(숙종(肅宗) 19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구명(九明)(숙종(肅宗) 1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국한(國翰)(숙종(肅宗) 2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지(至)(영조(英祖)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태운(泰運)(영조(英祖) 1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용운(龍雲)(영조(英祖) 1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명핵(영조(英祖) 1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제만(濟萬)(영조(英祖) 1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상천(相天)(영조(英祖) 2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석로(碩老)(영조(英祖) 30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용견(龍見)(영조(英祖) 3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기만(基萬)(영조(英祖) 50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경희(景羲)(정조(正祖)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술의(述毅)(정조(正祖) 1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경룡(景龍)(정조(正祖) 7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명익(溟翼)(헌종(憲宗) 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협(浹)(고종(高宗) 2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식(湜)(고종(高宗) 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의령관(宜寧貫))

양덕(陽德)(세종(世宗) 2년·식년시(式年試)·진사(進士))
계영(季瑛)(세종(世宗) 9년·친시(親試)·을1등(乙一等))
간(簡)(세종(世宗) 9년·친시(親試)·을2등(乙二等))
경(輕)(세종(世宗) 24년·친시(親試)·을과(乙科))
기(琦)(단종(端宗) 2년·증광시(增廣試)·정과(丁科))
윤종(潤宗)(세조(世祖) 12년·고성춘시1등(高城春試一等))
계당(季堂)(세조(世祖) 12년·고성춘시3등(高城春試三等))
제(悌)(성종(成宗)(成宗) 2년·별시(別試)·을과(乙科))
계당(季堂)(성종(成宗) 10년·중시(重試)·병과(丙科))
율(慄)(성종(成宗) 20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진문(振門)(성종(成宗) 2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곤(袞)(성종(成宗) 25년·별시(別試)·을과(乙科))
포(褒)(연산(燕山) 8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세준(世準)(중종(中宗) 5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세환(世煥)(중종(中宗)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효순(孝純)(중종(中宗) 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효의(孝義)(중종(中宗) 6년·별시(別試)·병과(丙科))
세웅(世雄)(중종(中宗) 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순민(舜民)(중종(中宗) 19년·별시(別試)·병과(丙科))
세건(世健)(중종(中宗) 19년·별시(別試)·병과(丙科))
응룡(應龍)(중종(中宗) 30년·별시(別試)·병과(丙科))
응운(應雲)(중종(中宗) 30년·별시(別試)·병과(丙科))
경춘(慶春)(중종(中宗) 35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연경(延慶)(명종(明宗) 3년·별시(別試)·병과(丙科))
복흥(復興)(선조(宣祖) 1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근(瑾)(선조(宣祖) 19년·별시(別試)·갑과(甲科))
이공(以恭)(선조(宣祖) 23년·증광시(增廣試)·갑과(甲科))
탁(晫)(선조(宣祖) 23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이신(以信)(선조(宣祖) 2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이준(以俊)(광해(光海)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발(撥)(광해(光海) 2년·별시(別試)·을과(乙科))
성신(省身)(광해(光海) 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이웅(以雄)(광해(光海) 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명우(溟羽)(광해(光海) 6년·전주별시(全州別試)·을과(乙科))
두첨(斗瞻)(광해(光海) 8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진명(振溟)(인조(仁祖) 5년·강도정시(江都庭試)·병과(丙科))
선(銑)(인조(仁祖) 7년·별시(別試)·병과(丙科))
노성(老星)(인조(仁祖) 9년·별시(別試)·병과(丙科))
선(인조(仁祖) 7년·별시(別試)·을과(乙科))
노성(老星)(인조(仁祖) 14년·중시(重試)·을과(乙科))
명익(溟翼)(인조(仁祖) 15년·별시(別試)·을과(乙科))
중회(重晦)(인조(仁祖) 22년·별시(別試)·병과(丙科))
용익(龍翼)(인조(仁祖) 26년·정시(庭試)·병과(丙科))
구만(九萬)(효종(孝宗) 7년·별시(別試)·을과(乙科))
용익(龍翼)(효종(孝宗) 7년·중시(重試)·갑과(甲科))
이성(二星)(현종(顯宗) 3년·정시(庭試)·을과(乙科))
몽성(夢星)(현종(顯宗) 4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후(현종(顯宗) 1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유성(有星)(현종(顯宗) 10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익훈(益熏)(현종(顯宗) 13년·별시(別試)·병과(丙科))
필성(弼星)(숙종(肅宗) 1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치훈(致熏)(숙종(肅宗) 4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언창(彦昌)(숙종(肅宗) 7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지훈(至熏)(숙종(肅宗) 9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세진(世珍)(숙종(肅宗) 13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정중(正重)(숙종(肅宗) 15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도익(圖翼)(숙종(肅宗) 16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적명(迪明)(숙종(肅宗) 19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상하(相夏)(숙종(肅宗) 19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취명(就明)(숙종(肅宗) 20년·별시(別試)·병과(丙科))
일명(一明)(숙종(肅宗) 33년·별시(別試)·병과(丙科))
도규(道揆)(숙종(肅宗) 36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중계(重繼)(숙종(肅宗) 36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세운(世雲)(숙종(肅宗) 39년·증광시(增廣試)·갑과(甲科))
수언(壽彦)(숙종(肅宗) 4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수현(壽賢)(숙종(肅宗) 45년·알성시(謁聖試)·갑과(甲科))
태경(泰慶)(경종(景宗) 2년·정시(庭試)·병과(丙科))
위로(渭老)(경종(景宗)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윤관(胤寬)(영조(英祖) 1년·정시(庭試)·병과(丙科))
유상(有常)(영조(英祖) 3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태제(泰齊)(영조(英祖)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태량(泰良)(영조(英祖)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전(영조(英祖) 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태온(泰溫)(영조(英祖) 4년·별시(別試)·을과(乙科))
태기(泰耆)(영조(英祖) 8년·정시(庭試)·을과(乙科))
학종(鶴宗)(영조(英祖) 10년·정시(庭試)·병과(丙科))
덕로(德老)(영조(英祖) 10년·정시(庭試)·병과(丙科))
언욱(彦彧)(영조(英祖) 11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태혁(泰赫)(영조(英祖) 11년·정시(庭試)·병과(丙科))
혜로(惠老)(영조(英祖) 12년·정시(庭試)·을과(乙科))
태계(泰階)(영조(英祖) 12년·정시(庭試)·병과(丙科))
태회(泰會)(영조(英祖) 12년·정시(庭試)·병과(丙科))
유용(有容)(영조(英祖) 16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처관(處寬)(영조(英祖) 18년·정시(庭試)·병과(丙科))
학로(鶴老)(영조(英祖) 18년·정시(庭試)·병과(丙科))
운로(雲老)(영조(英祖) 22년·정시(庭試)·갑과(甲科))
태저(泰著)(영조(英祖) 28년·정시(庭試)·을과(乙科))
옥(玉)(영조(英祖) 29년·정시(庭試)·병과(丙科))
중(重)(영조(英祖) 32년·정시(庭試)·병과(丙科))
기로(綺老)(영조(英祖) 32년·정시(庭試)·병과(丙科))
윤희(允熙)(영조(英祖) 37년·정시(庭試)·병과(丙科))
주관(영조(英祖) 38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학원(鶴遠)(영조(英祖) 4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주로(柱老)(영조(英祖) 43년·알성시(謁聖試)·을과(乙科))
이관(履寬)(영조(英祖) 47년·정시(庭試)·병과(丙科))
강로(絳老)(영조(英祖) 47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학문(鶴聞)(영조(英祖) 48년·별시(別試)·을과(乙科))
필석(必錫)(영조(英祖) 49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달손(達孫)(정조(正祖) 10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이익(履翼)(정조(正祖) 1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속(涑)(정조(正祖) 1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혜관(惠寬)(정조(正祖) 14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공철(公轍)(정조(正祖) 1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도중(度中)(정조(正祖) 19년·정시(庭試)·병과(丙科))
길관(吉寬)(정조(正祖) 23년·알성시(謁聖試)·병과(丙科))
규채(奎采)(순조(純祖) 1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병관(秉寬)(순조(純祖) 7년·정시(庭試)·을과(乙科))
로(潞)(순조(純祖) 10년·식년시(式年試)·갑과(甲科))
이무(履懋)(순조(純祖) 13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이형(履炯)(순조(純祖) 13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주헌(周獻)(순조(純祖) 14년·정시(庭試)·병과(丙科))
헌교(獻敎)(순조(純祖) 27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병철(秉哲)(헌종(憲宗) 3년·정시(庭試)·병과(丙科))
성교(性敎)(헌종(憲宗) 3년·정시(庭試)·병과(丙科))
종삼(鍾三)(헌종(憲宗) 4년·정시(庭試)·병과(丙科))
대유(大儒)(헌종(憲宗) 4년·함경도(咸鏡道)·병과(丙科))
이륜(履輪)(헌종(憲宗) 9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병길(秉吉)(헌종(憲宗) 14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종순(鍾順)(헌종(憲宗) 14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종일(鍾馹)(철종(哲宗) 6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종익(鍾益)(철종(哲宗) 8년·정시(庭試)·병과(丙科))
일우(一愚)(철종(哲宗) 10년·증광시(增廣試)·을과(乙科))
종두(宗斗)(철종(哲宗) 1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헌진(憲珍)(철종(哲宗) 12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정룡(廷龍)(고종(高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석연(錫淵)(고종(高宗) 1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상열(相說)(고종(高宗) 7년·정시(庭試)·갑과(甲科))
숙희(肅熙)(고종(高宗) 9년·정시(庭試)·병과(丙科))
병문(秉文)(고종(高宗) 14년·정시(庭試)·병과(丙科))
규희(奎熙)(고종(高宗) 14년·정시(庭試)·병과(丙科))
정호(廷皓)(고종(高宗) 16년·정시(庭試)·갑과(甲科))
정호(廷皓)(고종(高宗) 17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제원(濟元)(고종(高宗) 17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주원(周元)(고종(高宗) 19년·정시(庭試)·병과(丙科))
정철(廷哲)(고종(高宗) 19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익원(翊元)(고종(高宗) 22년·정시(庭試)·병과(丙科))
정필(廷弼)(고종(高宗) 23년·정시(庭試)·병과(丙科))
정술(廷述)(고종(高宗) 24년·함경도(咸鏡道)·병과(丙科))
광희(光熙)(고종(高宗) 24년·정시(庭試)·갑과(甲科))
학희(學熙)(고종(高宗) 28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정숙(廷淑)(고종(高宗) 28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장희(章熙)(고종(高宗) 28년·정시(庭試)·병과(丙科))

(고성관(固城貫))

수문(秀文)(세종(世宗) 8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수문(秀文)(세종(世宗) 18년·중시(重試)·을1등(乙一等))
세담(世聃)(성종(成宗) 17년·식년시(式年試)·을과(乙科))
세주(世周)(성종(成宗) 18년·별시(別試)·을과(乙科))
주(중종(中宗) 9년·별시(別試)·병과(丙科))
규년(중종(中宗) 33년·별시(別試)·병과(丙科))
봉년(鳳年)(명종(明宗) 1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전(銓)(명종(明宗) 13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붕익(鵬翼)(현종(顯宗) 14년·식년시(式年試)·병과(丙科))
형운(亨雲)(영조(英祖) 50년·증광시(增廣試)·병과(丙科))


[벌열(閥閱)]

(영양관(英陽貫))
●문집(文集)
: 묵산집(남기만(南基萬)), 활산집(活山集)(남용만(南龍萬))

(의령관(宜寧貫))
●상신(相臣)
: 남재(南在)(태종조·영의정(領議政)), 남지(南智)(세종조·좌의정(左議政)), 남곤(南袞)(중종조·영의정(領議政)), 남이웅(南以雄)(인조조·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숙종조·영의정(領議政)), 남공철(南公轍)(숙종조·영의정(領議政))
●공신(功臣)
: 남은(南誾)(태조조·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 남재(南在)(태조조·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 남이(南怡)(세조조·이시애난토벌1등공신(李施愛亂討伐一等功臣)), 남절(南山截 )(선조조·정여립옥사2등공신(鄭汝立獄事二等功臣)), 남이흥(南以興)(인조조·이괄난토평1등공신(李适亂討平一等功臣)), 남두북(南斗北)(숙종조·삼복역모고변3등공신(三福逆謀告變三等功臣))
●문형(文衡)
: 남효의(南孝義)(중종조), 남곤(南袞)(중종조), 남이공(南以恭)(명종조), 남언경(南彦經)(선조조), 남이웅(南以雄)(광해조), 남이흥(南以興)(인조조), 남구만(南九萬)(숙종조), 남용익(南龍翼)(숙종조), 남정중(南正重)(경종조), 남유용(南有容)(영종조), 남공철(南公轍)(헌종조), 남병철(南秉哲)(철종조)
●호당(湖堂)
: 남지(南智)(세종조), 남곤(南袞)(연산조), 남응룡(南應龍)(중종조), 남용익(南龍翼)(효종조), 남이성(南二星)·남유용(南有容)(명종조)
●청백리(淸白吏)
: 남재(南在)(고려 고종조), 남지(南智)(세종조), 남효온(南孝溫)(성종조), 남효의(南孝義)(중종조), 남응룡(南應龍)(중종조), 남선(南銑)(선조조), 남언경(南彦經)(선조조), 남이웅(南以雄)(광해조), 남이흥(南以興)(인조조), 남선(인조조), 남이성(南二星)(현종조), 남용익(南龍翼)(숙종조), 남유용(南有容)(영종조), 남공철(南公轍)(헌종조), 남이형(南履炯)(순조조)
●절의(節義)
: 남연년(南延年)(영조무신청주난사절신(英祖戊申淸州亂死節臣))
●장신(將臣)
: 남두병(南斗柄)(효종조·훈련대장(訓練大將))


●명륜(明倫)
: (효행(孝行)) 남익오(南翼五)(증이조참의(贈吏曹參議)), 남용우(南龍祐)(고종조·증동중추(贈同中樞))
(열녀(烈女)) 남씨(南氏)(윤영희(尹永羲)의 처(妻)·정려(旌閭))
●문집(文集)
: 지정집(止亭集)(남곤(南袞)), 유자광전(柳子光傳)(남곤(南袞)), 남악창수록(南岳昌酬錄)(남곤(南袞)) 금릉집(金陵集)(남공철(南公轍)), 귀은당집(歸恩堂集)(남공철(南公轍)),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남공철(南公轍)), 영옹속고(穎翁續橋)(남공철(南公轍)), 영은문집(瀛隱文集)(남공철(南公轍)), 영옹재속고(穎翁再續稿)(남공철(南公轍), 독예록(讀禮錄)(남공철(南公轍)), 약천집(藥泉集)(남구만(南九萬))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남구만(南九萬)), 몽예집(남극관(南克寬))풍패기사(豊沛記事)(남극표(南極杓)), 병정록(丙丁錄)(남극표(南極杓)), 아아록(我我錄)(남기제(南紀濟)), 오룡재유고(五龍齋遺稿)(남명학(南溟學)), 화은집(華隱集)(남발(南撥)), 규재집(圭齋集)(남병철(南秉哲)), 유보속해(惟步續解)(남병철(南秉哲)), 의기집설(儀器輯說)(남병철(南秉哲)), 해경세초해(海鏡細草解)(남병철(南秉哲)), 우촌시고(雨村詩藁)(남상교(南尙敎)), 만향재시초(남상길(南相吉)), 시헌기요(時憲紀要)(남상길(南相吉)), 추보첩례(推步捷例)(남상길(南相吉)), 성경(星鏡)(남상길(南相吉)), 산학정의(算學正義)(남상길(南相吉)), 춘추일식고(春秋日食考)(남상길(南相吉)), 태양경원표(太陽更源表)(남상길(南相吉)), 중성신표(中星新表)(남상길(南相吉)), 창명집(滄溟集), 효반유편(孝槃遺編)(남언기(南彦紀)), 남충장공시고(南忠壯公詩稿)(남연년(南延年)), 호곡집(壺谷集)(남용익(南龍翼)), 기아(箕雅)(남용익(南龍翼)), 부상록(扶桑錄)(남용익(南龍翼)), 태화자고(太華子稿)(남유상(南有常)), 뇌연집(雷淵集)(남유용(南有容)), 명사정강(明史正綱)(남유용(南有容)), 설사집(남이공(南以恭)), 귀정유고(龜亭遺稿)(남재(南在)), 기봉집(碁峰集)(남정중(南正重)), 의재집(宜齋集)(남주헌(南周獻)), 분지문집(賁趾文集)(남치리(南致利)), 죽리집(竹裏集)(남태기(南泰耆)), 담정유고(澹亭遺稿)(남태제(南泰齊)), 사대춘추(四代春秋)(남하정(南夏正)), 동소만록(남하정(南夏正)), 와유록(臥遊錄)(남하행(南夏行)), 술선록(述先錄)(남하행(南夏行)), 회은집(晦隱集)(남학명(南鶴鳴)), 회은잡지(晦隱雜識)(남학명(南鶴鳴)), 기옹집(寄翁集)(南漢紀)), 추강집(秋江集)(남효온(南孝溫)), 귀신론(鬼神論)(남효온(南孝溫)), 사례질의(四禮質疑)(남해준(南海準))

(고성관(固城貫))
●문형(文衡)
: 남수문(南秀文)(중종조)
●호당(湖堂)
: 남수문(南秀文)(세종조), 남주(중종조)
●청백리(淸白吏)
: 남주(세종조)
●문집(文集)
: 경재유고(敬齋遺稿)(남수문(南秀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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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2.11 22:14

    첫댓글 참으로 귀한자료를 많이도 올려놓았구나! 그러나 큰일이구나! 동기들 성씨를 다 올려야할텐데 어떤성은 올리고 어떤성은 안올리면 되겠냐, 하여튼 고마워 복 많이 받을껴.......

  • 작성자 08.02.11 22:38

    의령남씨 대종손 우리동기 행정업무에 능통한 현 의령에 본가를둔 남문호동기가 있잔어 참으로 양반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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