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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병대275기 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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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내무실 스크랩 대구수성구/망우공원
김이구 추천 0 조회 57 08.02.11 18: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임진왜란 때 경상도 이곳저곳에서 신출귀몰하면서 왜적을 무찌른 곽재우(郭再祐)장군의 호(號) 망우당(忘憂堂)을 따서 망우공원이라 했다.

경부고속도로진입로(京釜高速道路進入路)변에 위치해 있으며 동촌(東村)유원지와 접해 있다. 동구 효목동 1번지 일대에 펼쳐진 이 공원의 면적은 23,044평이다. 국유지 6필 563평, 시유지 14필 11,473평, 사유지 31필 11,008평에 조성된 공원이다.

1972年 11月 16日 건설부 고시 제484호를 결정고시가 있었고 지적(地籍)고시는 1975年 2月 18日 경북도 고시 제18호이다. 1974年 2月 28日 관리사무실 및 변소가 지어졌으며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고도 불린 망우당(忘祐堂)의 동상 및 망우당(忘祐堂) 기념관이 1972年 4月 22日 준공되었다. 금호강(琴湖江)쪽으로 절벽이 있고 잘 손질된 잔디밭이 아름답다.

동상이 서 있는 홍의장군 망우당(紅衣將軍 忘祐堂) 곽재우(郭再祐)는 명종7年(1552年) 8月 감사(監司)인 곽월(郭越)의 세째 아들로 났다. 아버지가 현풍 솔례촌(지금 達城郡(달성군) 玄嵐面(현람면) 大桐(대동))에 살다가 처가인 의형 세간리(宜寧郡 柳谷面 世干里)에 이사한 동안에 외가에서 난 것이다. 홍의장군(紅衣將軍)이란 붉은 비단으로 군복을지어 입었기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다. 아버지를 따라 북경(北京)에 갔을 때 명(明)나라 황제가준 물건들이 있었는데 구름 비단(雲錦) 한 폭과 은(銀)으로 만든 안장과 붉은 벼루 두개였었다. 그가 입은 옷이 그것이었다. 투구에는 백금(白金)으로 꾸미고 양편에 날개를 달았다. 그러므로 왜적까지도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3살때 어머니를 잃었고 외가마을 의령의 세간리에 있는 아버지의 용연정(龍燕亭)에서 글을 읽었다. 16세 때 조식(曺植, 南溟)의 외손녀에게 장가들었다. 조식(曺植)에게 도학(道學)을 배웠다. 글읽는 여가에 활쏘기 말달리기와 병서(兵書) 천문(天文) 등의 학문을 두루 익혔다. 27세때는 사신(使臣)으로 파견되는 아버지를 따라 요동(遼東)을 거쳐 북경(北京)을 갔는데 그곳에서 선진국의 문물을 살필 수 있었다. 이때에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은 여러해를 두고 조선(朝鮮) 침략의 야망을 품고 배를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우리나라 조정(朝廷)에서는 당파싸움만 일상고 지방에는 관리와 토호(土豪)의 행패만 늘러 백성들은 굶주렸고 군비(軍備)란 형편없었다.

宣祖 25年(1592年) 4月0 13日(음력) 아침에 왜적이 침입했다. 부산청사(釜山僉使) 정발(鄭潑), 다대포첨사(多大浦倉僉使) 윤흥신 (尹與傍), 동래부사(東來府使) 송상현(宋象賢)등이 적을 맞아 싸우다가 차례로 전사했다.

왜적이 침입한지 10日만인 4月 22日 곽재우는 일어났다. 모두 제 목숨만 살려고 도망치기가 바쁘고 국가의 존망을 생각지도 않으니 관군(官軍)으로도 할 수 없다. 야(野)에 있는 우리가 목숨을 바쳐야 하겠구나 하고 일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집에 있는 하인 10여명을 거느리고 의령(宜寧)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전국 의병의 시초였다. 집에 쌓인 재물을 모아 군비(軍費)에 충당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수백명이 의기(義氣)에 감동되어 모여들었다. 붉은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타고 앞장서니 모두 그를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 불렀다.

길에서 도망하는 관헌을 만나

"너는 망건에 옥관자(玉貫子)를 붙인 것을 보니 분명 관헌이로구나 난리를 만나 적과 싸우지 않고 도망이란 웬일이냐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이 활로 쏠 터이다" 라고 소리쳤다.

"네가 무슨 상관이나"며 대항하자

"내가 지금 의병을 일으키고 있다. 나를 따르면 의사(義士)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국가를 배반한 역적이 될 것이다. 어느 길을 택하겠느냐"

고 타이르자 의기에 감동되어 말에서 내려 공손히 인사를 청했다. 왜병은 의령 삼가(三嘉 합천(陜川)을 함락시켰다.

망우당(忘祐堂)은 장사 10여병을 거느리고 적을 공격하여 적의 머리 50급을 베어 말에 달고 돌아왔다. 이를 보자 의병에 응모하는 자가 날로 불어났다.

주인없는 고을에 남아 있는 무기를 가져오고 양식은 "국가의 곡식을 왜적에게 줄 수 없다" 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갈라먹게 했다. 강을 따라 진주(晋州)로 가던 세미(稅米)배 한 척을 발견하고 그것도 붙들었다. 군량이 충족하니 사람들이 즐겨 모여들어 세력을 점점 떨쳤다

망우당(忘祐堂)은 정암진(鼎岩津(정암진), 宜寧郡(의녕군) 宜寧面(의녕면) 鼎岩里(정암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니 그게 첫 번째 승리였다.

의병은 날로 강하여 수천 명이 되었다. 17개소로 나눠 주둔하여 왼편으로는 낙동강, 오른편으로는 정암나루까지 60∼70리 거리에 걸친 진을 치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은 중앙에서 통솔하며 창원(昌原) 함안(咸安) 영산(靈山) 창녕(昌寧) 등지 낙동강의 왜적을 소탕했다. 홍의장군(紅衣將軍)은 기발한 전술을 썼다. 날랜 장사 10여명을 선별하여 그와 똑같이 옷을 입히고 백마를 태웠다.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며 왜진 중에 달려들어 좌우로 충돌, 적을 교란시켰다. 홍의장군(紅衣將軍)을 추격하여 10여리를 따라가면 홍의장군(紅衣將軍)은 간데 없고 수풀만 자욱하다. 놀라고 있는데 앞산절벽 위에서 불쑥 나타난다. 북소리 피리소리가 산골을 진동하고 동서로 출몰한다. 왜적은 이편군사가 많은지 적은지 몰라 어리등절하고 있는데 사방에서 화살이 비오든 쏟아 졌다. 죽은 왜적의 시체가 강물에 가득했다. 정암진에서 왜적은 크게 패했고 홍의장군(紅衣將軍)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줄만 알았다.

망우당(忘祐堂)은 선조1595年(선조 28年)에 진주목사(晋州牧使) 정유란(丁酉亂(정유란), 1597年)에는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다가 그해 8月 계모 허(許)씨가 죽어 산성을 나왔다. 1599年 (宣祖 32年)에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在道 兵馬節度使)로 부임했다. 지방실정을 들어 수군(水軍)보다 육군(陸軍)을 더 보강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소(疏)를 올리고는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이런 태도가 조정에 거슬려 전라도 영암(全羅道 靈岩)으로 귀양가는 몸이 되었다. 3년만에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다시 영산현(靈山縣, 지금 昌寧郡 都泉面) 남쪽 낙동강가에 망우당(忘祐堂)이란 정자를 지어 살았다. 1617年(광해군 9年) 4月 10日 세상을 떠나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낙동강의 지류인 금호강이 보이는 곳에 1972年 그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운 것은 나라가 왜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았을 때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그 높은 뜻을 길이 본받자는 뜻에서이다.

망우공원에는 1981年 4月 22日 영남 제일관(嶺南 第一關)이 세워졌다. 영남의 첫통로 영남의 제일문이란 뜻의 영남제일관은 원래 대구읍성(大邱邑城)의 남문이었다. 대구에는 1590年(宣祖 23年)에 선산(善山), 군위(軍威), 인동(仁同)의 3개 읍민을 징발하여 대구부민과 함께 이듬해 1591年(宣祖 24年)에 완성한 토성(土城)이 있었다. 토성을 쌓은 것은 왜구(倭寇)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토성은 1592年(宣祖 25年) 4月 21日 왜군 가운데 가장 먼저 대구에 들어온 고니시(小西行長(소서행장))군에 의하여 부서졌다. 그러다가 1736年(英祖 12年)에 가서야 대구읍성은 당시 경상도 관찰사겸 대구도호부사(慶尙道 觀察使 兼 大丘都護府使)였던 민응수(閔應洙)의 건의에 따라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해 1月 8日에 채석을 시작하여 4일후인 12日에 터를 닦고 4月 25日에는 체성(체城)을 마치고 6月 6日에 여첩(女堞, 성위에 낮게 쌓는 담)을 완성했다. 반년이 걸려 완성한 이 석성(石城)공사에는 연인원 78,584명이 동원되었다. 대구 칠곡의 부역 인부 함경도 육진(六鎭)의 속오군(束伍軍, 15세이상 양반으로 조직된 군대) 경상도내의 승군(僧軍) 등이었다. 이 성에는 동서남북의 4정문이 있었는데 동을 진동문(鎭東門), 서를 달서문(達西門), 북을 공북문(拱北門)이라 하였으며, 남쪽에는 영남 제일관(嶺南 第一關)의 편액이 걸려 있었다. 진동문은 현재의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부근, 달서문은 서성로 조흥은행 부근, 공북문은 북성로 경북인쇄소 부근이었으따, 영남 제일관은 남성로 대남한의원 앞, 남성로와 종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대구읍성은 1870年(高宗 7年)에 당시 경상감사 김세호(金世鎬)가 대수리를 했으나 축성한지 170年 후인 1906年 박중양(朴重陽)등 친일세력에 의해 철거됐다.

일본인들의 반일(反日)의 사적지인 이 읍성의 철거를 요구해 왔기 때문이었다.

성벽이 철거된 자리의 지명이 동, 서, 남, 북성로로 남아 있는데 영남 제일관을 망우공원으로 옮긴 것은 원래의 장소가 도심인데다 도로가 좁아 공사가 어렵다는 사정 외에 방우공원이 경부고속도로의 진입로로 대구의 관문이라 할 수 있고, 또 망우공원에는 임란때의 의병장 흥의장군 동상과 기념관이 있어 호국 의지를 나타내는 성문의 복원지로는 적지라는 여론에 의한 것이다. 이 공사는 650,000,000원의 예산으로 1979년 11월 착공하여 1980年 12月에 완공을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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