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 읽기 힘드시면 한글 등의 워드 프로그램에 붙여넣기 해서 읽으세요. )
==============================================================================
그가 연주하는 플루트의 선율이 관중들을 휘감는다. 그것은 마치 중독성이 강한 마약처럼, 관중들의 의식을 몽롱한 환각으로 몰아넣는다. 이미 그들에겐 연주회라는 공간이 사라지고, 그의 입술과 손가락이 만들어낸 환상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한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 박영준. 그의 귀국무대는 이렇듯 관객들에게 천상의 플루트라는 그의 실력을 실감하게 했다. 이윽고 잔잔한 분위기와 함께 첫 연주가 끝났다. 고요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박수소리로 물들어버린다.
첫 연주는 성공적이었다. 그는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더니, 대기실로 들어갔다. 이제는 앵콜 무대를 준비할 차례이다. 관중들은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첫 무대는 성공적이군요.”
대기실의 공기가 진동하면서 영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전달된다. 사무적인 말투에 굵은 저음의 성량을 지녔으며, 화사하게 펼쳐지는 미소가 포근한 남성이었다. 영준을 세계적인 플루트 연주자로 만들어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보살펴준 이 씨였다. 영준은 그의 목소리에서 한 가닥 수심을 읽었다. 귀국무대를 결정한 후에 계획한 이벤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준은 그의 걱정을 모른 척한다.
“앵콜 무대는 더욱 멋질 거야.”
영준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케이스에서 하모니카를 꺼내든다.
“솔직히 전 그만두시길 바랍니다.”
이 씨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앵콜 무대는 사실 본무대보다도 더욱 힘이 드는 것이다. 본무대로 인해 감각이 고조에 도달한 관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선, 그보다 배의 감동으로 연주해야한다. 그에게 있어서 영준의 고집은 지금껏 쌓아온 연주자로써의 명성을 단숨에 무너뜨릴지 모르는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건 오래된 약속이야.”
영준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하모니카를 더욱 굳게 쥐었다. ‘약속’이란 단어를 말할 때는 왠지 모를 절박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영준을 바라보던 이 씨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양손을 가볍게 치켜든다.
“박영준 씨의 앵콜 무대가 있겠습니다. 모두 힘찬 박수 부탁드립니다.”
사회자의 스피커 소리가 대기실에 있던 두 남자의 가슴에 울려 퍼졌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성공한다면 영준은 드디어 약속을 지키게 된다. 이제껏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중요한 약속. 하지만 실패한다면? 영준은 불안한 생각들을 떨쳐내듯 머리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실패는 없다.
영준은 하모니카를 손에 쥔 채 떠밀려가듯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명확하게 보이던 공간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인다. 영준은 자신의 시신경에 이상이 생긴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귓가에 잠시 스쳐지나간 듯 했지만, 하모니카를 쥔 손조차 보이지 않았다.
침착해야한다.
영준은 심호흡을 해본다. 그는 마치 데뷔 무대로 돌아간 것처럼 지나치게 긴장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무대는 다른 의미에서의 데뷔 무대이다. 영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손끝에 하모니카의 감촉이 느껴진다. 영준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연습을 하듯이 하모니카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입술의 움직임이 격렬해지면서 그는 아찔한 현기증을 경험했다. 그의 머릿속에선 오래전에 펼쳐보았던 것 같은 희미한 악보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영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어둠을 먹어가기 시작했다. 영준은 황홀감에 휩싸여 그 빛의 악보를 멜로디로 그려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거룩하고 충격적인 만남. 영준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어버릴 뻔 했다.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나면, 악보의 쉼표 하나하나에 한 소녀의 얼굴이 번개처럼 스쳐지나간다. 어느새 영준의 이마에 땀이 고이기 시작한다. 그의 털은 곤두섰고, 척추 근처에서 까닭모를 전율마저 느껴졌다. 마침내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할 때, 하모니카 연주는 서서히 잦아들면서 끝을 맺고 있었다. 영준은 마지막 긴 호흡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의 빛은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영준의 시야에 무대와 관객들의 모습이 조금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무섭도록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영준은 눈을 감아버렸다. 실패인가…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순간, 고요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박수갈채 소리로 가득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여러 박자가 뒤섞인 소리가 점점 일정한 리듬을 타고 울리기 시작한다. 박수소리만으로도 정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즐거운 고문이 몇 대의 텔레비전 카메라를 통해 세계로 실황중계 되었다. 박영준. 그의 이름이 다시 한번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영준은 소감 발표를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무대 위 여기저기에서 카메라의 플래쉬 불빛이 터져 나왔다. 수많은 기자들이 앞 다투어 질문을 퍼부었지만, 영준은 그들을 잠시 진정시킨다.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자, 영준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귀국 무대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정말 기쁩니다. 사실, 이 귀국 무대는 지금까지의 그 어떤 세계무대보다도 노력한 무대였습니다. 본 무대를 장식한 도플러의 헝가리 전원환상곡은 제가 세계 데뷔 무대에서 플루트 독주를 했던 곡이었습니다.”
그는 잠시 청중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정신을 잃어버릴 정도의 무대가 끝난 것이 불과 몇 분전이었다. 소감 발표라 해도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영준이 잠시 숨을 고르는 동안, 성질 급한 기자 한 사람이 질문을 던졌다.
“앵콜 무대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말에 청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 기자와 영준을 향해 쏟아졌다.
“그렇습니다.”
그의 눈은 무언가 꼭 해야 할 일을 해냈다는 듯이 빛이 났다.
“사실 앵콜 무대는 제가 오래전에 누군가와 약속했던 것을 지키기 위해 계획된 무대입니다. 제게 있어서 진짜 본 무대는 이 앵콜 무대였다고 말 할 수 있겠죠.”
그는 갑자기 꿈을 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앵콜 무대의 하모니카 곡은 아마 모두들 처음 듣는 곡일 것 입니다. 그 곡은 오래전에 한 친구가 제게 알려준 곡이죠. 제 연주를 들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 곳에 그 곡의 악보가 새겨져 있을 겁니다. 전 이제 하모니카 곡을 연주하지 않겠지만, 여러분은 언제든 그 하모니카 곡을 느낄 수 있겠죠. 오늘 제가 드린 그 감동을, 그 전율을 기억하세요.”
그러면서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영준은 방금 전까지 흥분되어 있던 두뇌가 착 가라않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지쳐있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행사가 마무리 되었다. 무대 뒤에서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던 이 씨는 소감 발표가 끝나자마자 영준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몇몇의 집요한 기자들이 그들을 따라나섰지만, 주위를 감싸기 시작한 경호원들에게 밀려났다. 이 씨는 영준과 함께 비교적 소박해 보이는 리무진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모실까요?”
“바다…… 내가 자주 가던 그 바다로 가도록하자. 꼭 가야만해.”
“그럼, 그 곳까지 가는 동안 자도록 하세요. 당신에겐 휴식이 필요해요.”
잠시 차 안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곡은 영준에게 몹시 익숙한 곡이었다.
“모차르트 협주곡 2번…”
“당신의 휴식에 도움을 줄 겁니다.”
영준은 눈을 감았다. 푹신한 자동차 시트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협주곡의 박자가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그 선율의 움직임이 그의 청각세포에 스며들더니 뇌혈관에 자극을 보낸다. 과거에 들은 기억이 있는 멜로디다. 그 것은 오래전 일. 누구도 믿지 못했고, 무엇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 자신에게 조차도…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어! 혀의 동작을 반대방향으로 교차시키란 말이야! 아냐! 이번엔 tu-ku의 혀놀림이 지켜지지 않았잖아!”
귀가 찢어지는 듯한 하이톤의 음성이 넓은 방 안에 흩어진다. 한참 동안 플루트 연주를 시도하던 소년이 움찔하면서 플루트를 떨어뜨린다.
“세상에! 악기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맞는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이런 건 내가 원하던 게 아니다. 딱히 플루트를 연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단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릴 적. 무뚝뚝하던 어머니가 처음으로 아름답게 보였던 때가 있었다. 어머니의 플루트 연주. 그건 한순간이었지만, 지금도 내 각막에서 지워지지 않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래서 악기를 연주할 수 있을 나이가 되자 플루트를 배우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뛰어난 플루트 연주자를 선생님으로 모셨다.”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넌 저런 애들하고 놀아선 안 된다. 너의 재능은 플루트를 위해 태어난 거야.”
“세상에 동요라니! 그런 저속한 음악을 입에 담아선 안 된단다.”
“플루트가…”
어머니는 내게서 플루트 이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아무리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도 플루트 연습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면, 바로 버려졌다. 플루트 교사의 가르침도 점점 난폭해졌다. 조금이라도 목표한 진도에 미달되면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폭력을 경험해야 했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말리진 않으셨다. 한번은 아버지가 그런 어머니를 말리려 했지만, 오히려 어머니는 화를 내셨다.
“당신이 뭘 알아! 당신이 상류 세계의 욕망을 알아? 지금 누구 돈으로 살고 있는지 잊었어?”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아버지는 힘없이 집을 나갔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나는 잠잘 시간도 없이 플루트 연습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가진 플루트의 집착. 그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알게 된다. 옛날부터 플루트를 몹시 좋아해서 총명한 두뇌를 지녔음에도 음대를 지원한 어머니 이야기를. 플루트를 지원했지만 재능이 없었기에 자신의 스승에게조차도 포기하라는 말을 들은 이야기를… 그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머니는 내게 그 꿈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대리만족이자…일그러진 사랑이었다.
시간은 지나간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길게만 느껴지더니 한 달은 계절은 일 년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내 두뇌가 성장하고, 내 신체가 성장했다. 그러나 내 감정은 조금도 성장하지 못했다. 오히려 어릴 적 지녔던 감정보다도 더욱 단순해진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플루트를 증오했고, 내 자신을 증오했고, 세상을 증오했다. 유쾌한 감정은 오직 잠을 잘 때 뿐. 내게 다른 일들은 모두 증오나 무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학교라는 공간은 형식적이어서 이미 플루트로 장래가 결정된 내가 꾸준히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연주 기술도 몇 배는 성장했기 때문에 더 이상 교사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만큼 내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나는 놀 방법을 몰랐다. 내가 즐기는 유일한 취미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잠을 자는 것. 어머니가 보신다면 무척 화를 내실 일이지만, 그런 작은 쾌락이 그나마 엷은 감정의 실을 연결해주었다. 그날도… 난 작은 쾌락을 위해 공원을 찾았다.
“누가 앉아 있잖아.”
햇살이 알맞게 비춰서 가장 맘에 들었던 자리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하긴 내가 그 자리를 독점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어쩔 수 없다. 나는 그 자리에 최대한 가까운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막상 잠을 자기엔 부담스러웠다. 명당을 차지한 사람은…나보다 한두 살 어려보이는 소녀였다. 왠지 본 것 같기도 하지만, 언뜻 생각나지는 않는 얼굴이다. 하긴, 본적이 있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신경이 쓰인다. 내 휴식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경이 쓰이고, 내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에서도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그보다 신경 쓰이는 이유는 유난히 창백한 그녀의 얼굴이다. 지금껏 얼굴이 하얀 사람은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몸이 한순간 심하게 흔들린다.
“털썩!”
“뭐…뭐야!”
갑자기 일어난 당황스러운 일은 내 머릿속에서 생각해왔던 의문들을 말끔히 지워버렸다. 그녀가 쓰러진 것이다. 난감하다. 주위에 도움을 청할 다른 사람들도 없었다. 더욱이 모른 척 하기엔 장소가 너무나 가깝다. 결국 이 상황은 내게 잠자는 것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할 수 없군. 잠자기는 글렀잖아.”
나는 애써 아쉬운 마음을 접고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의 팔을 잡고 부축하듯이 그녀를 업어본다. 가볍다. 업은 내가 놀랄 정도로 그녀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리고…살며시 느껴지는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느낌이다. 그러나 이내 곧 불쾌해진다. 이 여자는 내게서 휴식을 빼앗아간 존재다. 더욱이 난 이 여자를 본 적도 없다. 결국, 내가 이 여자에게 호감을 보일 이유는 조금도 없다. 지금 내가 이 여자를 병원에 데려가려 하는 것은…단지 기계적인 의무감에 따른 것이었을 뿐, 그 어떤 호의도 담겨져 있지 않다.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응급실에 들어간 경험이 없는 나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 소녀의 상태를 다른 간호사나 의사에게 알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응급실의 절차는 의외로 복잡했다.
“혈압을 체크할 때니까 일단 접수하고 오세요.”
“접…접수…요?”
“네. 여기 오른쪽 복도로 나가시면 원무과가 있어요.”
한번도 본적도 없고, 겪어보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무지한가. 나는 ‘접수’라는 것을 하는 것조차 애를 먹었다.
“환자의 성명과 주소를 말씀해주세요.”
“몰라요.”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간호사의 말투가 거칠어진다.
“정말 모른다고요. 갑자기 쓰러졌다니까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나는 그 소녀를 몇 분전에 겨우 처음 봤을 뿐이다. 단지 본 것만으로 그런 것을 알 수 있었다면, 유명한 점성술사로 TV에 출연했을지 모른다.
“알았어. 그럼 너의 성명과 주소를 말해볼래? 보호자의 정보가 필요하거든.”
“보…호자요? 전 그런 관계가…”
“이거 답답한 녀석이네. 여기에 환자와 관계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얼굴이 붉어졌다. 무언가를 모른다는 것이 이 정도까지 분노를 일으킬 줄은 생각도 못해봤었다. 아무튼, 난 도망치듯 내 이름과 주소를 말하고는 그 소녀가 누워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응급실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구나 대부분이 나보다 일찍 온 사람들이었다. 그 때문인지, 차례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 것은 낭비되는 시간. 나는 섣부르게 여자를 도와준 자신을 책망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여자를 바라보는 것뿐이다. 처음엔 지루한 공상. 하지만…한 인간이란 존재를 이렇게 가까이서 관찰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 있는 일이었다. 이제껏 한번도, 이렇게 누군가를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없었다. 이 것은 미지의 탐험이었고, 신성한 의식이었다. 단순히 바라보기만 하는데도 그 소녀는 아주 손쉽게 나의 경계선을 파괴했다.
“박영준 학생?”
“예?”
“환자는 지금 영양실조로 인한 급성 빈혈에 축적성 피로가 겹친 상태예요. 이런 경우 입원을 해야 환자에게 도움이 될텐데…”
“네…그렇게 해주시죠.”
그 외의 몇 가지 절차가 지나가고, 그 소녀는 병실로 옮겨졌다. 그녀의 소지품에서 집 전화를 알 수 있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지금 나는 형식상이라도 보호자. 병실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핑계. 나는 지금 도피하고 있었다. 소녀의 보호자를 가장해서, 플루트 연주와 어머니가 있는 집에서 도피하고 있었다. 집에는 필요할 때 잠시 들르고,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그 소녀를 바라보면서 지냈다. 보면 볼수록 내 처지와 동일시되는 그녀에게 조금씩 호감이 갔다.
그 소녀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 3일째. 어쩐지 ‘집에서 도망치고 싶다’라기 보다 ‘소녀의 깨어난 모습을 보고 싶다’로 조금씩 목적이 변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저기….”
“엉?”
나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그 소녀가 일어나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어난 낌새를 전혀 알지 못한 상태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소녀의 목소리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여긴 어디죠?”
나는 알고 있는 한 자세하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 소녀는 조금은 혼란스러워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그녀를 돌봐줄 의무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헤어질 때.
“내 이름은 박영준이다. J고등학교 1학년이지. 서로 이름은 알아두자고.”
“장…주희. J고등학교 1학년이야.”
동…갑이었다. 더구나 같은 학교라니…망치로 맞은 듯한 충격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그동안 고마웠어. 그리고…또 만나자.”
“응.”
그 후로 주희가 퇴원했다. 이제 더 이상 보호자라는 구실은 없어졌지만, 우리는 틈만 나면 서로 만나곤 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어쩌서 끌리고 있는지 알지는 못했지만… 누군가를 만난다는 거. 그리고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건 새롭고,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주희를 만나는 동안 내 깊숙이 자리 잡았던 옛 기억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치유되었다.
하지만…난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때의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녀의 고통조차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이야기 하나 해줄까?”
구연동화작가가 꿈일 정도로 주희의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그날의 난 그렇게 가벼운 기분으로 주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개미의 이야기였다.
개미의 사회는 역할 분담이 철저하게 이루어져 있다. 여왕개미는 중요한 출산과 개미들의 통솔을, 병정개미는 그 강한 힘으로 적들과 싸운다. 숫자가 몇 되지 않는 수캐미들은 그들 간의 경쟁을 통해 강한 유전자를 남기려한다.
“그런데, 일개미는 말 그대로 일을 하는 것이 의무였어. 사실 일개미의 역할은 가장 중요해. 먹이를 공급하고, 알과 어린 개미들을 보살피고, 병정개미와 함께 싸우기도 하고, 개미굴이 무너지면 수리도 하거든. 하지만 일개미들은 언제나 일만 하면서 죽어갔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은 일개미들이 가여웠다. 그래서 그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었다. 그 것은 하모니카였다. 일개미들은 너무나 기뻐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즐거움. 일개미들은 그 유쾌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즐겁게 일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해질 수 있었을까?”
일개미들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신이 준 선물을 본 다른 개미들이 일개미들에게 질투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개미는 그저 일만 해야 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런 존재들이 선물을 받는 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일개미들의 일을 일부러 늘렸다. 결국, 일개미들은 하모니카를 버리기로 결심했다. 일이 너무 많아져서 하모니카를 불 틈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개미들은 마지막으로 한 번 하모니카를 연주해 보고는 그 것들을 버렸다. 그 한 번의 연주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래서 신은 그 음악 소리를…
“지나가던 내게 들려주었어.”
분명 슬프고 애달픈 이야기였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농담일거라 생각했지만,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하는 주희였다. 잠시 후에 주희는 주머니에서 하모니카 하나를 꺼냈다.
“크로매틱 하모니카…”
“들어볼래?”
주희의 숨결의 하모니카에 내려앉으면서 미세한 파동을 일으킨다. 처음엔 그저 공기의 진동에 불과했던 파동이 귓가의 청각세포와 만나면서 아름다운 음색으로 변화되어간다. 그것은 놀라운 마술. 나는 처음으로 플루트가 아닌 다른 악기의 연주에 취해서 눈물을 흘렸다.
“정말…아름다워.”
그 후로 난, 매일 주희에게 하모니카를 배웠다. 어찌된 일인지 주희는 하모니카를 가져오지 않았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난 주희에게 보답으로 플루트를 연주해주었다. 오랫동안 내게 상처 입힌 악기였지만, 주희가 내 연주를 듣고 감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상처는 이미 아물어 버렸다. 그 곡은 모차르트 협주곡 2번. 내 행복한 마음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곡이었다. 그리고 그 행복한 연주와 함께… 주희와의 시간도 언제나 행복하게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장주희가 과로사로 우리 곁을 떠나게 됐습니다.”
몇 번 보지도 못한 선생님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재미없는 농담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나는 도대체 무엇을 준 걸까. 내가 증오스럽다. 난 더 이상 플루트를 연주할 목적을 잊어버렸다. 내가 사랑할 사람도 잊어버렸고, 내가 있어야 할 존재 이유조차 잊어버렸다. 그렇게 방황을 거듭하던 내게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것은… 주희의 유언장이었다. 그 곳에는 많은 것이 적혀 있었다. 술만 마실 줄 아는 무능력한 아버지. 그리고 약간의 청각 장애가 있지만, 밤늦게까지 일을 하면서 아버지와 주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유일한 안식처 하모니카연주.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아버지. 결국 어려운 집안 사정에 하모니카를 팔아야만 했던 당시 상황. 어머니의 마지막 연주를 듣고 내게 알려준 주희…
‘너는 원망하겠지. 어쩌서 도움을 청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난 너에게만은 떳떳해 지고 싶었어. 어이없는 이유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날 그렇게 만들더라…’
자살할 생각이었던 주희. 도중에 쓰러진 주희를 살린 나. 처음에 자신을 살려버린 것을 증오했던 그녀. 그러나 나를 사랑해준 그녀…
‘두 가지 부탁만 들어줄 수 있겠니?’
아아, 물론이야. 무엇이든 들어주겠어.
‘내 어머니를 도와줘. 그리고… 내가 들려준 하모니카 소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지 않을래? 내가 들은 어머니의 하모니카 소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 보다 아름다운 것이었어. 그런 것이 잊혀진다는 게 너무나 슬퍼… 너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줄 수 있겠지? 그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는 악보를 그려줘. 나는 자유로운 바다에 갈 거야 그곳에서 듣고 있을 테니까…’
‘영준아, 사랑해…’
난 주희의 유언장을 모두 읽고 나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가출이나 마찬가지인 생활 때문에 호되게 혼이 났지만, 나는 겨우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할 수 있었다.
“플루트를 다시 시작 하겠어요.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본격적인 프로의 수업은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가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존재했기에 큰 어려움 없이 나는 성장해갔다. 그리고…
“영준 씨 바다에 도착했습니다.”
귓가에 고요한 파도 소리와 갈매기 소리가 적절한 리듬에 맞춰서 고막을 자극한다. 한바탕 긴 꿈이 아직도 그의 정신을 몽롱하게 만든다.
“피곤…하십니까?”
“아냐. 걱정할 필요없어.”
영준은 기지개를 켜며 차안에서 나왔다. 콧속으로 익숙한 소금기가 흘러들어온다. 영준의 손엔 어느새 하모니카가 쥐어져 있었다.
“주희야….”
영준은 마치 아직도 꿈에서 깨지 못한 듯 중얼거린다. 그것을 지켜보던 이 씨는 살며시 바다에서 걸어 나간다. 영준의 노력이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오래전에 알게 된 이 씨였다. 지금 이런 감격스러운 재회에 불청객이 끼어들어선 안 된다. 그 세심한 배려였다.
“주희야…”
그의 목소리에 좀 더 힘이 실린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부름이었다.
“내 하모니카 연주… 들었어? 너의 말대로… 정말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악보를 새겨주었는지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 누구도 잊지는 않겠지.”
영준의 목소리가 조금 씩 잦아든다. 무언가 오래된 과거를 이야기 하듯. 그의 목소리가 잠긴다.
“너의 첫 번째 부탁은 들어주지 못했지. 너의 어머니가 너를 지켜주고 싶었는지, 손 쓸 틈도 없이 너한테 가시더라. 하지만…”
영준은 입에 하모니카를 가져간다. 그리고 천천히 과거의 그 아름다운 선율을 다시 한번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에 따라 바다의 파도가 자갈 사이를 스쳐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알맞게 박차를 맞춰간다. 어느새 붉은 석양이 바다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영준은 지친 듯 하모니카 연주를 마친다.
“이제… 너에게 이 곡을 돌려줄게.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지만, 약속을 지킨 후에도 내가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겠지…주희야, 사랑한다.”
영준은 마지막 말과 동시에 자신이 쥐고 있던 하모니카를 바다를 향해 던졌다. 바다의 수면 위에 흐르는 작은 파장이 ‘퐁당’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멀리 퍼져나간다. 영준은 돌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년 □□월 ○○일. 박영준의 귀국 무대는 그렇게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