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 청풍김씨 시조 김대유 묘(시조묘가 맞는가?)
1 청풍김씨
* 신라 경순왕의 후예 김순웅의 12세손 고려말 문하시중 청풍부원군 김대유(金大猷)를 시조(起世祖)로 한다. 그러나 김대유는 경순왕의 넷째 김정구의 17대손이라는 주장도 있고 김대유 이전의 상계는 실전하였다. 2015년기준 인구 11만명이다(나무위키 참조).
* 이조 초기까지 미미하다가 임란이후에 왕비2, 상신8, 대제학3, 문과급제110명을 배출했다. 김식(1482~1520)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을 열었고(조광조의동지) 김육(1580~1658)이 병자호란(1636)후 효종의 신임을 얻어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경제를 살렸다. 18대 현종(효종의 아들, 1674死)의 명성왕후와 22대 정조(1800死)의 효의왕후가 모두 청풍김씨로서 정비(正妃)가 되어 영정조대에 상신을 많이 배출하고 신안동김씨의 세도 정치시에도 번성하였다. 명성왕후는 정치에도 관여하고 기갈이 세어 헌종이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 1남(숙종)3녀를 낳았으나 다른 왕들과 달리 후궁이 없는 바람에 직계 왕손이 끊어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 시조 김대유 묘는 충북 제천 수산면 도전리 산8에 있고 조선8대 명당의 하나라는 견해도 있다.
2. 시조 김대유 묘의 내력에 관한 설화, 족보, 마을 안내문
* 설화에 의하면, 어떤 노인이 자라를 물에 살려 주었더니 상주의 꿈에 자라가 나타나서 옷자락을 물고 산으로 인도하였고 꿈깬 뒤 찾아보니 현재의 묘터이었다. 금계포란형이다. 병란이 일어 피난갔다가 돌아오니 누군가 시조묘 옆에 똑 같은 봉분을 만들고 암장하는 바람에 어느 묘가 시조묘인지 알 수 없게 되어 함께 관리한다. 실전한 시조묘를 찾기 위하여 후손 판서들이 넘어다닌 재를 육판재라 하고 후손들은 호무실도 찾아다녔다.
* 청풍김씨세보(청풍김씨세보는 1750년 영조26년 목판보도 있으나 1903년 순종계유년 이후에 발간된 것)에 의하면, 묘소가 백치(白峙)에 있다고 하나 실전했다. 후손 김우명이 백치우측 뒤를 살폈으나 지석을 찾지 못하고 후손 김증명도 백치앞 기슭 추동(楸洞)을 살펴보았으나 안성인이 장사지낸 곳이었다. 그래서 순종계유년(기유년?,1910년)에 추동에 단(壇, 실전했을 때 제사를 모시는 곳)을 설치하고 비를 세웠다.
* 추동(楸洞) 안내판에 의하면, 청풍김씨시조 김대유는 수산면 오티리 백치(白峙)의 능촌에 안장하였으나 실묘하고 오티리와 도전리의 중간을 선택하여 도전리 추동 자라골에 청원각(淸源閣)을 짓고 그 안에 가묘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던중 누군가가 똑 같은 봉분을 만들어 암장하는 바람에 봉분두개가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김대유 묘를 쓸 때 자라가 상주 옷을 잡아 끌어 따라가니 금계포란형의 명당이었다. 그런 연유로 명당이 있는 골짜기를 자라골이라 부르고 동네주변에 가래나무가 많아서 추동(楸洞)이라 한다.
* 위의 자료중 세보가 제일 믿음직하고 다음은 마을 안내도이다. 종합해 보면, 후손들은 언제부터인가 김대유 시조묘를 실전하였는데 오티리 백치능촌에 안장하였다는 말이 전해 오므로 후손 김우명이 순종때(1907~1910) 백치의 뒤를 탐색하였으나 찾지 못 하고 그 무렵 후손 김증명은 추동에서 의심스러운 곳을 찾았으나 안성인이 장사지낸 곳이었다. 끝내 찾지 못함에 순종때 시조단을 설치하고 재실 청성각을 건축했다.
3. 시조묘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 후손들이 순종때까지 찾지 못하여 시조단과 재각을 설치하여 제사를 모셨는데 언제 어떻게 지금의 시조묘를 찾았는지에 대하여 설명이 없다. 김씨문중은 금계포란형이므로 닭등에서 제사를 모실 수 없어서 시조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존(實存)하는 묘를 가까이 두고 청성각 뒤뜰에 가묘를 만든 것은 설명이 안된다.
* 후손들이 시조묘를 탐색(육판재라는 지명이 생길 정도로 한양에서 종종 찾아 왔다는 말이 된다)한 지역은 백치 일원, 육판재의 서쪽 추동일원, 호무실일원이고 역시 그 지역내에 시조묘가 있었을 것이다
* 백치는 지도상 흰티재이고 능말골이란 이름이 있으니 유력하다. 호무실일원도 음택을 쓸 수 있는 국세이다. 그러나 이 묘를 쓴 경위가 자라의 역할이라고 하니 추동 안쪽 자라골(왜 자라골이라 하는가는 뒤에 설명한다)이 유력하고 풍수적으로 다른 곳은 이 묘보다 나은 명혈이 없다
4. 국세
* 래룡---회룡 고조형
* 탐색지역---
* 자라골---시조제단의 안쪽.
* 시조제단 사진----자라형상이다
* 청성각안에 있는 가묘---
* 쌍분---어느 쪽이 김대유 묘인가? 후손도 판별할 수 없어서 비석을 세우지 못했다.
* 돌혈---개장낙맥이 아니고 횡맥인데 낙산 후장 귀성이 없다. 그러나 하수사가 잘 발달되어 있고 높이 솟은 돌혈이다. 금계가 보이지 않아 포란형이 아니다. 복부형(覆釜形)이라는 견해도 있다.
* 조안산(朝案山)---고만고만한 산들이 가득 채우고 있어서 보기가 좋을지 모르겠으나 주제(예컨대 청마 문필등)없이 무질서 하다. 삽짝풍수는 앙꼬없는 찐빵이라 한다.
5. 김대유 묘인가?
풍수에 따라서는 아예 실전했다고 보는 분도 있다. 청풍김씨가 언제 찾았는지 설명하면 좋겠다. 이 묘는 대충보면 화려하나 단점도 많다. 중등중급(2023.8)
첫댓글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젠 아침에 가을 냄새가 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