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27 - 후진의 석경당이 거란에 중국의 앞마당인 연운 16주를 바치다!
5대 10국시대에 중원지방에 자리잡은 5대 왕조는 짧으면 4년이고 길어도 16년 만에
모두 망했지만 송나라는 수백년을 갔으니 창업주와 제왕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정책을 펴나갔는지 알만한데.... 말 위에 천하를 얻었지만 말 위에서는 다스릴
수는 없으니...... 나라가 단명하는 것은 성할 때 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늙어서 나는 병은 이 모두가 젊었을 때 불러 온 것이며,
쇠한 뒤의 재앙도 모두 성시(盛時)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 는 가장 성할 때에
더욱 조심하여야 한다. - "菜根譚(채근담)" 에서 -
천복(936~944) 때 서역(西域)의 중 말라(襪羅) 가 오대 10국의 3번째 왕조인 후진(後秦)에 와서
조회하였는데 화복(火卜) 을 잘하였으니 얼마후 고조(高祖) 에게 하직하고 고려에 유람하기를
청했고 고려왕 왕건은 심히 예우하였으니...... 거란이 발해 지역을 병탄한지 몇 년이 되었습니다.
왕건이 조용히 말라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본디 우리의 친척 나라인데 그 왕이 거란에게
잡혀갔다. 내가 중국 조정을 위하여 거란을 쳐서 그 지역을 취하고 또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하니, 대사는 돌아가서 천자에게 말해 기일을 정하여 양쪽에서 습격하게 해달라.”
하였다. 말라가 돌아가서 낱낱이 아뢰었으나 고조는 회답하지 아니했다. 속통전(續通典) 중
처음 고려 왕건이 군사를 써서 이웃나라(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자못 강대해졌으니
호승(胡僧) 말라(襪羅) 를 통하여 (후진 後秦) 고조(석경당) 에게 말하기를....
“발해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 입니다. 그의 왕이 거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조정과 함게 치기를 청합니다.” 하였으나 고조는 회보하지 않았다. 자치통감 중
사실 거란이 쳐들어오기 전에 왕건이 발해 멸망후 거란 견제를 위해서 석경당에게 함께
거란을 양면에서 치자는 제안을 했지만 석경당은 이 제안을 그냥 무시해버렸습니다.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왕건의 야심을 고려할 때 그 의도를 경계했을 수도
있지만, 연운 16주를 거란에 바치며 거란의 책망에 근심하는 등 전후 석경당
의 행보를 볼 때 그냥 거란에 대적할 생각 자체를 안 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렇게 원하던 황제가 된 석경당은 신하인 유지원이 자립하고 토욕혼이 이반한 후에 조덕균 등의
번진들의 반란에 시달리는중 진압하지 못하는 것을 요나라 조정에서 책망을 받자 근심합니다.
황제가 된후 고작 6년만에 죽으니 후계자인 아들 석중예는 어리다는 명분으로 형의 아들인 출제
석중귀에게 찬탈당하고 이어 석중귀 조차 거란에 적대하다가 패함으로써 후진은 멸망합니다.
대사를 꾀하는 초기에 오랑캐를 불러 원조를 받아, 이때부터 오랑캐의 기세가 강해졌고, 백성
들이 이로 인해 재앙에 빠졌다. 후사에게 이르러, 전쟁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좀처럼
끝나지 않고, 군대를 부려도 지키지 못하였으며 온 겨레가 사로잡혔다. 구오대사(舊五代史) 중
자기를 믿어준 황제를 두번이나 배신해 죽게 만든 것으로 박한 평가를 들어도 할말 없지만 무엇
보다 기병 양성의 요충지인 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거란족에게 통째로 넘겨 진시황 이래
북방이민족의 침략을 막는 최전방의 보루인 만리장성 방어선을 무력화시킨 것이 큰 실책입니다.
석경당은 단기적으로는 한족 왕조를 이민족의 위성국으로 전락시켰고, 장기적으로는
한족 왕조를 아예 멸망당하게 한 단초를 제공햇으니, 특히나 그 후로 명나라가
건국되기까지 노예취급을 당했던 강남 한족 입장에서는 둘도 없는 중국
역사상 최하의 저질로 통하며..... 진회와 더불어 한족들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입니다.
오대십국시대 개국 군주들은 어느정도 영웅의 풍모들이 있었고, 최소한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만한
면이 한두개쯤은 있었으니 후량의 태조 주전충은 군사적 능력이 탁월했고 위진남북조시대 -
수나라 - 당나라 내내 적폐가 되었던 문벌귀족을 학살하고 수도를 개봉으로 천도해 송나라로
표되는 중국 근세로 가는 기틀을 열어주었으며,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후당의 장종 이존욱은 주전충을 꺾고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에게 판정승을 거둔 비범한 군사적
능력이 놀라운 사람이며 후당의 명종 이사원의 치세는 오대 국가들 중 드물게 안정적인
시기였으니 이는 이사원 본인이 내치와 외치에서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이며
후한의 고조 유지원은 거란족 요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중원을 다시 수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후주의 태조 곽위는 치세를 안정시키며 세종(후주)에게 제위를 물려줄 정도의 심미안도
있는 사람이었으니..... 저 세종(후주) 과 그의 최측근인 조광윤이 한 일은 더욱
대단하니 세종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후주가 오대십국시대를 종결시켰을 가능성도 큽니다.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은 건국은 다른나라들 처럼 찬탈로 시작했지만 찬탈 과정도 다른 왕조들에
비하면 온건하게 했으며 무엇보다 500년 넘게 지속된 찬탈후 전왕조 몰살 행위를 중단
시켰으며 오히려 전 왕조에 단서철권을 내려 적극적으로 보호했고 공신들을 숙청하기는
했지만 배주석병권이라고 병권만 내려놓게 하고, 죽이지 않고 잘 대접해주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후당의 시조가 된 이극용 또한 황소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웠고 한때는 주전충 보다도 더
거대한 세력을 일구었는데 다만 실수와 악재가 겹쳐 유능한 인재를 잇달아 셋이나 죽이고
나중에는 유인공의 배신에 화가 나서 공격했다가 대패하는 등 먼가 잘 안풀린 경우였습니다.
요나라에 준 연운 16주는 거란이 중원에 진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요충지를 잃은 중원은
내내 거란에 시달리며 송나라 시기까지도 2개 주만 간신히 되찾는데 그치고 마니 송나라
는 건국부터 요나라라는 강국 때문에 기를 펴지 못하였는데, 거기에도 책임이 있는
인물이니 한족 문명의 열위는 요나라 시기에 끝난게 아니라 금나라, 원나라까지 이어집니다.
유주(계, 탁 등), 삭주등 연운16주가 중원 전체의 입장에서 큰 영토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넓이가 아니라 지형이니 원래 중국의 한족 왕조들은 험준한 방어 요충지를 성벽으로
이어서 건설하였는데 이게 바로 만리장성이었고, 이후로 이 만리장성을 의지해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방어해 왔는데 연운 16주는 만리장성 바로 이남에 위치한 곳들입니다.
하북 평야를 방어하는 노른자로 비유될 중요한 지정학 요충지이자 지형적 방어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니 요, 금, 원 등 유목민족 국가들이 이후로 아무런 저항 없이 중원으로 쳐내려올수 있었을
뿐더러 지역에서 나는 물자를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유목 연맹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중앙집권화
까지 가능하게 해준 지역인데 스스로 이 알토란 같은 땅을 넘겨주었으니 참으로 큰 손실이었습니다.
석경당이 942년에 죽은 뒤에 석경당의 형의 아들인 석중귀(石重貴)가 황제에 올라
요(遼) 나라에 강경 정책을 펼치니 이에 요태종(太宗) 야율덕광(耶律德光)이
대군을 이끌고 후진으로 쳐들어왔고, 수도 개봉을 함락시킨 뒤 석중귀
를 사로잡아 포로로 삼아 요나라로 끌고가면서 후진은 2대 10년만에 단명합니다.
4. 후한(後漢)
오대십국시대에 후진(後晉)이 거란에게 망하고 나서 세워진 국가로 호한(胡漢), 북한(北漢)이라고
칭하며 이때는 지방 정권 북한과 일체로 보는데, 건국자는 사타족 출신의 유지원(劉知遠) 이니
그는 후진 왕조가 거란에 멸망할 때 후진을 섬기며 절도사로서 진양(晉陽)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후진을 돕지않고, 형세를 관망하다가 요나라 군대가 돌아간뒤 무주공산이 된 카이펑(개봉)에 입성해
948년에 황제에 올라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칭하고 후진을 대신해 왕조를 새로이 열었으며
그후 낙양(洛陽)을 점령하고 거란을 축출한뒤 중원을 지배해 오대(五代) 왕조의 명맥을 이어갑니다.
거란군이 개봉을 함락시키고 후진을 멸망시켰음에도 유지원과 전투를 벌이지 않은 이유는 거란이
카이펑의 통치에 실패해 거란 병사들이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고, 또한 거란의 남진은
후진에 대한 징벌과 약탈이 목적이었기에 유지원과 싸울 생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유지원은 후진(後晉)의 창건자인 석경당(石敬瑭:고조)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금군의 실권
을 장악하였으며 하동 절도사를 겸했는데...... 거란이 후진을 침공하자 사령관으로서
출병을 거부하였고, 석경당의 조카 출제(석중귀)가 거란에 연행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랐습니다.
이름을 고(暠)로 바꾼 후 나라 이름은 한(漢)으로 정했는데, 그 이유가 동한의 시조 광무제
의 8남 유병의 후손임을 자칭했기 때문인데.... 그러나 한족인 광무제와 달리 이 사람은
석경당 처럼 투르크(돌궐)계 이민족이었는데 유지원을 소재로 한 희곡 《백토기
(白兎記)》 가 있으며 그의 맏딸 영녕공주(永寧公主) 유씨는 송태조 조광윤의 장모였습니다.
그후 유지원이 10개월 만에 붕어하고, 차남 유승우(劉承祐)가 황제가 되었는데 유승우가 재위
한 기간에는 내분이 잇따라 일어나서 국가가 어지러웠으니 이에 노장 곽위(郭威) 가 반란
을 모두 진압하였는데 유승우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중신들을 제거하였습니다.
유승우는 명장 곽위를 의심하여 일족을 학살하고 곽위까지 없애려고 하니 자신에게도 위험
이 닥치는 것을 느낀 곽위는 분노하여 위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유승우를 공격했는데
곽위의 군대가 카이펑에 육박하던 도중 950년 유승우는 곽윤명(郭允明)에게 살해당합니다.
그때 중원에는 유지원(劉知遠)의 두 동생 유숭(劉崇)과 유신(劉信), 그리고 유숭의 아들 유빈(劉贇)
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니 곽위는 일단 유빈을 옹립하였으나, 부하들의 추대로 스스로
제위에 올라 후주(後周)를 건국하니 후한은 4년이란 오대(五代)를 넘어 중국 최단명 왕조가 됩니다.
하지만 후한의 잔여 세력인 유숭이 산서 지역에서 북한(北漢)을 창건하고 지역에 할거하였으며,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후한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천명하였고 거란의 도움을 받아 3대 만에 북송의
태종 조광의에게 망할 때까지 버텼기 때문에 일부 사서에는 후한과 북한을 동일 국가로 보기도 합니다.
5. 후주(後周)
후주는 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로 951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곽위(郭威)가 개봉
(開封)에 세운 국가인데 국호는 주(周)이지만 과거의 무왕(주)(周武王)이 세운
주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 성씨를 따라 곽주(郭周), 시주(柴周)라고 부릅니다.
곽위는 형주 요산 사람으로 당나라의 절도사인 유인공이 순주를 공격하면서 곽간(郭簡)이
전사하자 고아가 되었으며 노주 사람인 상씨에게 의지했하다가 18세 때 이계도가
군사를 모집하자 응해 용맹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저자에서 힘으로 사람들을 괴롭힌
백정을 죽인 일로 관리에게 체포되었지만 이계도가 몰래 풀어주면서 휘하에 들어갑니다.
이계도를 따라서 후량에 귀부했다가 후당이 후량을 멸망시키면서 이계도를 주살하자 후당에
투항해 글자를 알고 셈을 할수 있어 군리를 지냈으며, 곤외춘추를 읽는 것을 즐겨 병법
을 알아 시위군리가 되었으며 유지원 휘하에서 시위친군도우후가 되어 총애를 받아
그가 가는 곳마다 따랐으며, 유지원이 태원에서 거병해 후한을 건국하자 추밀 부사가 됩니다.
948년에 유지원이 죽기 전에 사홍조와 함께 유승우를 부탁받았으며, 그가 즉위하자
추밀사가 되었는데 3월에 이수정, 조사관, 왕경숭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더해졌으며 곽위는 군중에서 사졸들과 같은 차림을
하면서 위에서 하사한 것을 장수들이나 사졸들에게 나눠주어 그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곽위는 영채 3개를 세우면서 이수정이 군량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해서 승리했으며,
이수정이 자살하자 조사관등의 항복을 받았는데 곽위는 검교태사겸 시중이 되었지만 자신의
공을 다른이에게 양보했으며 겨울에 요나라가 공격하자 위주로 군사를 움직여 물러나게 합니다.
황제 유승우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권세있는 신하들의 권력을 제어하지
못하다가 결단을 내려 여러 신하를 암살하였는데 실제 몇명은 성공하였으며
유승우가 자신을 암살하라 명령했다는 것을 알게 된 곽위는 950년 3월 거병합니다.
유승우는 곽위의 가족을 모두 사형시켰으니 전쟁에서 곽위가 승리하여 유승우를 죽이고
유빈을 일시적으로 황제로 세웠으며 12월에 요나라에 북벌을 행했는데 그후 유빈
을 죽이고 감국이 되었다가 951년에 황제에 즉위해 후주를 건국하면서 연호를 고칩니다.
951년 5월에는 동쪽으로 원정해 조주에서 유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면서 연주를 함락하자
연주에서도 사면을 했으니 고조부, 증조부, 부친의 신주를 영접해 태묘에 모아서
제사를 지냈으며, 954년에 남쪽 교외에서 제사지내면서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고쳤습니다.
곽위는 황제가 되었지만 거병할 때 자식이 모두 살해되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954
년에 죽을 때 처남 시수례(柴守禮)의 아들인 시영(柴榮)을 양자로 세워 제위를
잇게하니 이가 오대십국시대 최고의 명군인 후주 세종(世宗, 954년 ~ 959년)입니다.
세종은 북한(北漢)과 싸워 고평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군대를 정비해
천하통일의 야심을 품고 남당(南唐)과 북한을 압박하고 요나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959년, 39살 젊은 나이에 병사한 뒤에 그의 어린 아들인 시종훈이 제위를 잇자,
군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서 장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로 옹립되었으며 이로서
통일 왕조의 초석을 닦은 후주도 겨우 9년 만에 멸망하고 조씨에 의한 송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의 황족인 시씨는 조광윤의 쿠데타 때에 선양했기 때문에 대귀족
으로서 대우받았고, 시종훈 본인도 조광윤의 후한 대우와 보호를 받았으니 그래서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에서 시씨 일족은 남송 최후의 군대와 함께 항전하여 남송과 최후를 함께합니다.
후주는 고려와도 관계가 있으니 이 나라 출신 인물인 쌍기(雙冀)는 956년, 광종때 고려에 사신
으로 왔다가 병이 나는 바람에 귀국하지 못하고 고려 광종의 권유로 귀화하고, 한림학사와
문형에 올랐는데 그는 958년 한반도에서 최초로 과거 제도를 창설하고 첫 지공거가 되었습니다.
과거 제도는 신라 진골 귀족들처럼 세습이 아니라.... 실력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로서 그동안
군림하였던 호족 세력을 누르고 광종의 왕권 강화에 일조하였으니 대표적인 중국계 한국인인
셈이지만 후손은 단절되었으며, "고려청자" 도 이때 그 제조비법이 중국에서 고려로 전해졌는가
본데...... 이후 고려 도공들은 비색을 찾아냄으로써 중국 보다 더 우수한 고려청자를 탄생시킵니다!
십국(十國)
한편 십국은 오대의 왕조들 처럼 차례차례 건국되지 않고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세워
졌으며 그 세력 규모도 천차만별이었으니 심지어 오가 남당으로 교체된 것처럼
이전의 왕국을 멸망시킨 다음 그 자리에 새로 건국한 경우까지 있어서 십국이 전부
동시에 존재하는 일은 없었으며 전촉은 후당에게 망했고 민, 초는 남당에게 망했습니다.
한때 고려가 그랬던 것처럼 오월은 외왕내제를 택했으니 오월의 군주는 다섯명인데 처음은 황제
를 칭하고 묘호를 정했으며 초대황제의 경우 능호까지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오대의 제후국
을 자처했으며 남당 처럼 황제를 칭했다가 제후국으로 내려앉은 경우도 있으니 남당은 후주
세종 이후 후주-송에게 고개를 숙이는 국가로 전락했는데 이때 국호까지 강남국으로 바꿉니다.
십국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는 당나라가 멸망하기도 전에 이미 건국된 초(楚, 897년 ~ 951년)
와 오(吳, 904년 ~ 937년) 및 오월(吳越, 904년 ~ 978년)이었는데 십국중 가장 나중에 세워진
왕조는 오대 왕조 중 하나인 후한의 황족이 세운 북한으로 951년에 건국되었으며 가장
빨리 망한 나라는 925년 후당에 병합당해 건국 18년만에 망한 전촉(前蜀)이었고 가장
나중에 망한 나라는 979년에 망한 북한이었으며 북한을 제외한 대부분은 남방에 건국되었습니다.
이 중에 오월(吳越)은 저장성(절강성) 지역에 자리를 잡았으니 존재 기간(75년)도 가장
길었고, 세수 인구수가 최대 55만에 달했다으며 후삼국시대에 후백제, 고려와도
교역한 나라로 알려져 있으며 남당이 망하고 송(宋)과 국경이 접하게 되자 항복합니다.
후기의 남당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등장해 회수 이남의 초와 민을 멸망, 합병시키며
남방의 패자를 꿈꿨으나 후주 세종의 공격으로 많은 땅을 잃고 후주와 송에게
고개를 숙이며 살아가는 소국으로 전락했고 송나라 하에서는 제후국으로 공을
자처했지만 그러다가 송태조의 공격으로 남당의 후주 이욱이 항복하면서 멸망합니다.
남방은 촉과 남당을 중심으로 문화와 시서가 발달했으니 촉에서는 화조화 시조인 황전과 문필가
모문석, 구양형이 유명했고, 남당에서는 한희재 야연도를 그린 고광중, 화조화의 시조 서희,
하북 산수의 창시자인 형호, 강남 산수의 동원, 문필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서현,
문사 한희재 등이 있었는데 남당 후주(3대) 이욱은 송휘종과 함께 예술가 기질이 다분하나 그
때문에 나라를 망친 인물이지만 능력만큼은 뒷시대인 송의 4대 문학가에 들어가는 인물 입니다.
1. 초(楚)
초(楚) 나라는 호남절도사 마은(馬殷)이 건국한 국가로 다른 시대의 초나라와 구분
하기 위해 성씨를 따서 마초(馬楚) 또는 방위에 따라 남초(南楚) 라고 합니다.
896년에 호남 절도사에 추대된 마은이 형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907년에 초왕에
책봉된 것이 초나라의 시작인데 마은은 후당이 들어서면서 다시 초왕으로 책봉되었고,
930년에 사망하였으며 마은이 사망한 이후 아들들 사이에서 후계자 분쟁이 발생합니다.
마은 사후 뒤를 이은 마희성과 마희범은 사치를 좋아하여 초나라의 재정을 크게 악화
시켜 초나라는 쇠퇴하게 되었으니 마희범 사후 마희광이 초왕이 되면서, 마희광
에게 불만을 품은 마희악이 스스로 왕을 칭하며 초나라는 내전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마희악은 남당에 지원을 요청해 마희광을 죽이고 초왕이 되었으나, 아우 마희숭에게 배신당해 유폐
당했으며 초나라의 혼란을 기회로 본 남당이 초나라를 정벌하여 초나라는 951년에 멸망하게 됩니다.
2. 오(吳)
오(吳) 나라는 당나라 절도사 양행밀(楊行密)이 건국해 현재 장쑤성, 안후이성, 장시성
을 지배했던 나라(904년 ~ 937년)로 다른 오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건국자의
성씨를 딴 호칭인 양오(楊吳)와 방위명을 딴 호칭인 남오(南吳)로 불리기도 합니다.
광릉(廣陵)을 수도로 삼아서 강도부(江都府)라고 명명했는데, 이곳은 현재의 장쑤성 양저우
(揚州)시이며 특이하게도 이 나라가 있던 시기의 대부분은 이웃 국가이자,
같은 글자를 포함하고 있던 오월(吳越) 정권이 공존하였고 그래서 오월과 종종 대립합니다.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마지막 황제 양부(楊溥)가
오나라 승상 서온(徐溫)의 양자이자, 당시 권력자였던 이변(李昪)에게 제위를 찬탈
당해서 망하였고, 남당(南唐)이 대신 들어서게 되는데 양오의 황족들은 남당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후주의 세종이 남당을 정벌할 때 이경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습니다.
3. 오월(吳越)
오월(吳越)는 전류(錢鏐)가 저장성(절강성) 일대에 세웠던 왕국으로 중국 오대십국시대
때 10국의 하나이니 수도는 항주(杭州, 항저우) 였고, 제2 수도는 월주(越州)였습니다.
오월의 군주는 황제를 칭하지 않고 왕을 칭했지만 처음 3대는 천자처럼 묘호를 올렸으며 단 시호는
오대(五代)의 황제에게서 받은 시호를 사용하였는데 초대 왕인 전류는 심지어 독자적인
연호와 능호까지 썼으니 중국 역사에서 독특하게 이 시기의 고려처럼 외왕내제를 했던 사례입니다.
오월은 전류가 오대 왕조 중 첫번째인 후량에 칭신하여 '오월왕' 으로 책봉을
받으면서 시작되었으니 이름은 문자 그대로 오나라와 월나라를 한데
합친 것이지만 옆에 그냥 오나라가 건국되어 오월동주에 실패하였습니다.
오월은 해상 무역을 전개하여 고려, 후백제, 일본 등과도 교역을 하였으며, "견훤
에게는 후백제왕" 의 작위를 내려주기도 하였는데..... 오월의 역대 왕들은
대개 5대 정권에 조공을 바쳐 형식상 그들의 제후라는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
978년, 송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자 마지막 왕 전홍숙이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나라를 들어 바치면서 멸망하였으니 전홍숙은 송 태종에 의해
'회해국왕' (淮海國王) 에 봉해지고 수도 개봉으로 보내져 안락한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전홍숙의 정확한 판단으로 인해 오월국은 후세에도 평가가 상당히 좋은
편이고 역사책에도 그다지 나쁜 것들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특기할 점은 오월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전쟁에서 화약을 사용한 나라이니 낭산강
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화약에 불을 붙여서 적에게 뿌리는 식의 전술을 썼는데,
뒷날 오월을 합병한 송나라에서 이 기록을 참고해서 "로켓" 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송나라의 로켓은 현대의 관점으로 폭죽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불을 붙여서 쏘는 무기를 난생
처음 봤던 당대인들에게는, 흡사 현대인이 핵무기를 보는 것처럼 놀라움과 공포를 느꼈습니다.
낭산강에서의 전투 이전까지 화약이란 그냥 취급하기 까다로운 약재로만 여겨졌을 뿐, 무기로 쓰인다는
발상은 없었으니 화약을 무기로 쓰는 법을 처음 생각해낸 사람이 바로 2대 왕이었던 세종 장목왕입니다.
당대에 화약이 불 붙으면 폭발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으므로 임시 방편으로 약재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화약을 꺼내서 뿌린 것이며 이 왕조의 창시자 전류의 후손인 첸쉐썬
(전학삼 은 훗날 조상의 명성을 뒤이어 중국 로켓-미사일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참 놀랍습니다.
4. 전촉(前蜀)
전촉(前蜀)은 907년 ~ 925년까지 존속한 나라로 다른 촉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전촉(前蜀) 또는 건국자인 왕건의 성을 따서 왕촉(王蜀)이라고도 부릅니다.
전촉의 건국자는 고조 왕건(王建)인데, 한자가 고려 태조 왕건과 같으며 심지어 생몰년도도 비슷한
편인데 사천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양잠과 농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발전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문인이나 화가가 피난을 많이 왔는데, 전촉 당나라 말기
대표적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위장(韋荘), 글과 그림에 두루 뛰어났던
선월대사(禅月大師) 관휴(貫休)가 유명하며 전촉은 후당에 멸망을 당합니다.
5. 민(閩)
민(閩) 나라는 지금의 푸젠 성(복건성)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수도는 복주(福州,푸저우)
이고 민나라의 초대 군주였던 왕심지가 복건성에 정착하여 건국하였는데
왕심지는 내정에 힘을 기울여 낙후된 복건성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민나라의 백성들이 그를 개민성왕(開閩聖王)이라고 부르며 칭송하였습니다.
기존에는 왕으로 후당 조정에 칭신하는 입장이었다가 933년에는 후당의 혼란을 틈타
독립하여 황제를 칭하였는데 민나라는 왕심지 사후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
났고, 반란이 잇달았으니 결국 945년에 남당의 공격으로 민나라는 멸망하였습니다.
6. 남평(南平)
남평(南平)은 형남(荊南)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대부분의 나라들에게 제후국을 자처
하는 대신에 교역의 요충인 형주 지역을 다스리며 번영했으며 그리고
초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정초가도" 를 내세운 송나라에 의해서 멸망했습니다.
남평의 역사는 후량(後梁)의 황제 주전충이 고계흥을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로 임명하고,
후당 ~ 후주 시기에 남평왕(南平王)으로 봉해지면서 10국의 일원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다른 지역인 기(岐)와 연(燕) 등의 절도사 세력과 비교했을 때, 남평(형남)의 영토가 오늘날
의 경상도 영토 크기만 하여 매우 협소했기에 독립국이 아니고, 절도사 세력으로
보는 역사학자의 견해도 있지만 신오대사, 십국춘추 등의 사서에서 엄연한 10국의
일원으로 실려 있기에 일반적으로 10국을 얘기할 때 남평(형남)은 반드시 들어갑니다.
이 나라의 창업군주인 고계흥에게는 아들 고종회와 손자 고보욱이 있었는데, 고보욱이
아버지 고종회의 과잉 보호로 인해 응석받이로 자라 안하무인한 성품에 군주
로서는 완벽하게 실격이라, 그를 본 사람들이 탄식하며 '모든 것이 끝났다.'
라는 뜻의 만사휴의(萬事休矣) 라는 말을 했던 것이 해당 고사성어의 유래 입니다.
7. 남한(南漢)
남한(南漢)은 당나라 멸망 후 지금의 광둥성과 광시 지역을 지배한 국가로 건국자
유은(劉隱)의 선조는 후난성에 있었는데 조부 유안인이 복건 지역으로
이주하여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획득하고 지역의 유력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유겸(劉謙) 때 광저우로 옮겨 황소의난 때 공적을 세우고, 봉주 자사가 되었는데 유은의
선조는 아랍계라는 설도 있으며 유겸이 사망한후, 그 지위를 이어받아 자사가 된 유은은
정해군 절도사의 반란을 진압하고, 오히려 기회로 삼아 904년 정해군 절도사가 되었습니다.
그후 광동 전 지역과 광서의 일부를 지배하고, 당나라 멸망과 더불어 자립할 준비를 하였는데
남해 교역으로 얻은 이익을 토대로 광동, 광서에 세력을 넓혀 반독립 세력화했으니 이에
대해 중원 세력이었던 후량은 909년에 그를 남평왕(南平王)으로 봉하였고, 911년에
남해왕(南海王)으로 다시 책봉하였으니 유은은 남해왕에 임명된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습니다.
계승한 동생 유엄(劉龑)은 917년 황제를 칭하고, 완전히 독립했으며 국호는 대월(大越)이라고 했으나,
918년에 서한, 동한을 건국한 유씨(劉氏)와 같은 성씨라고 하면서 국호를 한(漢)으로 고쳤으니
남한(南漢), 월한(越漢)이라는 이름은 다른 정권과 구별하기 위해 후대의 역사가가 명명한 것입니다.
전란의 시대라 압도적으로 군인 주도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오대십국시대에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문관이 주도하는 정치가 이루어졌으니 지방관은 전부 문관이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당나라 시대 중앙에서의 권력 다툼
에서 패한 관료들의 좌천 지역으로 선택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이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대로 이곳에 눌러앉아 정착한 이들도 많아, 이런 사람들이 남한 세력에 참가하게 된 것이었으니
유은 자신도 이러한 문관의 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이 지역을 비교적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며 또한 남해 교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려 궁정의 재정은 크게 윤택하였습니다.
그러나 942년, 유엄의 사후에는 왕위 계승권 다툼으로 인해서 혼란이 일어났으니 즉
유엄의 3남 유분이 뒤를 잇자, 그를 동생 유성이 살해하고, 자신이 즉위했습니다.
유성은 제위를 다투던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고 황권을 안정시킨 뒤, 이윽고 북쪽 초나라의 내란을 틈타
출병하여 영토를 빼앗았는데 그러나 원정의 성공후 자만해진 유성은 동생들의 아내를 후궁으로
들이는등 불량한 행동을 일삼았고, 이윽고 정치를 환관에게 맡기면서 남한의 정치는 부패하게 됩니다.
유성은 958년에 죽고, 장남 유창이 계승했으나, 유창은 의심이 매우 강해 문관들을 살해하고
그 자리를 모두 환관으로 메우면서 조정을 환관이 독점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등용
하려는 인물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거세(!)를 해야만 임명햇다고 하며 무엇
보다도 유창은 매일마다 페르시아인 첩과 놀면서 정치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민심은 떠났고 971년 북송의 침공때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으니 유창은 재물을
갖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신임하던 환관에 의해 붙잡혀 송군의 포로가 되었고, 그의
영토도 송에 병합되었는데 유창과 그의 일족은 카이펑으로 옮겨져서 왕족으로서
대우받았으니 유창은 송나라의 좌천우위 대장군이 되었고 사후에는 남월왕에 추봉됩니다.
고대에 기원전 204년 부터기원전 111년까지 중국 남방 ~ 베트남 북부를 영토로하고 수도를 번우로
하는 남비엣(南越 남월) 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한무제에게 정복된후 한나라의 지배와
당나라 지배를 거쳐 938년에 베트남인 최초의 독립 왕조인 응오왕조가 탕롱(하노이)에 세워집니다.
베트남 지역의 관할권은 분열된 5대 10국 중에 유씨의 남한(南漢)이 차지했었는데
938년 응오꾸옌(Ngô Quyền, 吳權, 오권)이 바익당강 전투에서 남한군을 물리
치고는 베트남인이 중심이 되는 왕조인 응오 왕조를 세웠으니 베트남은 한나라
무제 부터 이어져 온 지배를 벗어나 중국으로 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944년에 응오꾸옌이 승하하고 태자의 외삼촌 즈엉빈브엉(楊平王, 양평왕) 즈엉땀카( 楊三哥,
양삼가)의 찬탈이 있었으니 즈엉땀카의 찬탈은 6년만에 종결되었지만, 이후 5대를
넘기지 못하고 응오 왕조는 968년에 멸망하고 딘보린은 다이비엣(大越 대월)을
세우니 1802년까지 쓰인 베트남의 옛 이름으로 원나라 대군의 3차례 침공을 물리칩니다.
8. 후촉(後蜀)
후촉(後蜀)은 후당의 절도사 맹지상이 장종 사후 후당의 혼란을 틈타 독립하였는데 후촉 시대에는
화조화(花鳥畵)에 능했던 화가 황전(黃筌), 시인 모문석(毛文錫), 구양형 등이 유명하였습니다.
구양형의 경우엔 승상까지 역임했는데, 이런 문치주의적인 면이 후촉의 멸망을 불러
왔다고 여겨지니 특히 당말부터 각지에서 읊어지던 시와 사(詞)을 모아
편찬한 시집 <화간집(花間集)> 이 발간되었는데 구양형이 서문을 썼다고 합니다.
후촉은 북송에 멸망했으며 전, 후촉 모두 2대만에 멸망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당시 후촉은 무려
14만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실전 경험도 없고 장군들의 실력도 부족해서 송나라 강병들에게
그대로 무너졌는데 초기 송나라는 오대십국을 통일한 병사들이 건재해서 군사력이 강력했습니다.
경제력이 강했다는 이유로 병합 이후 송나라가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착취를 했고, 이것이
대대적인 농민 봉기인 왕소파, 이순의 봉기(王小波、李順起義; 993년 ~ 995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9. 남당(南唐)
남당(南唐)은 초대 황제 이변(李昪)이 오나라(남오 또는 양오)의 마지막 군주인 양부로
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세운 국가이니 당연히 당시에는 그냥 '당'(唐) 또는 '대당'
(大唐)이라고 하였는데 이름에서 알수 있듯 과거 당나라의 계승을 주장하였습니다.
937년, 이변이 남오 군주 양부에게서 제위를 찬탈하여 황제에 즉위해 국호를 제(齊)로 정했는데
2년이 지난 939년에 이변은 자신이 당태종 이세민의 3남 이각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면서,
제(齊)에서 당(唐)으로 국호를 변경하였으니 통칭 남당, 제당(齊唐), 이제(李齊)라고도 불립니다.
남당의 황제 이변이 죽고, 이경이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그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945년에 민(閩)을
멸망시키고 951년에는 초(楚)를 멸망시키며 이웃 국가인 오월과 대립하면서 남방의 패자를 꿈꿨습니다.
955년에 후주(後周)의 영민한 황제 세종(世宗)이 남당을 공격하자 회수 이남 장강 이북의
땅을 잃게 되었고, 후주에 고개를 숙이며 살아가는 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961년
원종 이경이 죽고 후주 이욱이 즉위하였는데 북방에서 송나라의 군세가 강력해
지자 이욱은 남창부(南昌府)로 천도를 하였고 다시 강녕(江寧)으로 천도하게 됩니다.
971년 송나라의 압박이 계속되자 남당은 국호를 '강남국'(江南國) 으로 바꾸고
송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는데 975년에 북송(北宋)의 황제
조광윤의 공격으로 남당의 후주 이욱이 항복하면서,남당은 3대 만에 멸망합니다.
남당의 역사서 '육씨남당서' 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자 왜, 탐라, 환어라, 철륵, 동이의 여러나라들이
모두 고려에 내부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니 때문에 남당은 고려가 사신을 보낼 때 신하를
칭하지 않아도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주변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인정하며 이를 수용
하였고 거란이 10국중 가장 강한 남당의 군주를 대당황제라 칭한 것을 생각한다면 흥미롭습니다.
남당을 중심으로 문화와 시서가 발달했으니 한희재 야연도를 그린 고광중, 화조화의 시조 서희,
하북 산수의 창시자인 형호, 강남 산수의 동원, 문필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서현, 문사 한희재
등이 있었으며 남당 후주 이욱은 송휘종과 함께 예술가 기질이 다분하나 그 때문에 나라
를 망친 인물이지만 능력만큼은 뒷시대인 송나라의 4대 문학가에 들어가는 인물로 꼽힙니다.
10. 북한(北漢)
북한(北漢)은 951년 곽위가 후한(後漢)을 멸하고 후주(後周)를 창건하자, 이에 반발하여 후한 고조
유지원(劉知遠)의 동생 유숭이 산서성(山西省) 일대를 근거지로 하여 세운 왕조로 세우자마자
후주와 싸웠지만 크게 무너진 후에는 더 이상 중원을 공격하지 않고 산서 일대만 굳게 수비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칭 황제라고 일컬었으나 실상은 '태원(太原)' 을 중심으로 한 산서성의
지방 정권에 불과했으며 주연에서 유숭이 매우 한탄했다는데 위치의 특성상
10국 왕조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남았다가 송 태종이 979년에 멸망시켰습니다.
서성의 특성상 영토가 작고 지형이 험하며 인구가 적어서 국력이 약한 데다가 거란과 인접해서 그
전시기를 거란에 크게 기댔는데 멸망할 때도 거란의 구원군이 출발했으나, 북송의 토벌군에 맞설
만한 군세를 만들기엔 시간상 역부족이라 북송 토벌군은 거란의 방해를 거의 안받고 북한을 멸합니다.
곽위가 사망하자 잠시 공세에 나서기도 했지만 당시 후주의 무장이었던 조광윤의
활약으로 패퇴했으며 북한이란 표현은 중국의 수많은 한(漢)나라들과
구별하기 위함이지, 왕조가 북한은 아니니 당연히 당시엔 한나라로 불렀습니다.
후한의 건국자 유지원의 아우인 유숭은 아들인 상음공 유빈이 곽위에 의해 살해당하자, 곽위
에 대한 복수와 후한의 부활을 천명하며 태원에서 거병하여 북한을 건국하였는데
유숭은 거란족 요나라의 힘을 빌어 후주를 공격하였고, 고평 전투에서 처음에는
승세를 잡는 것처럼 보였지만 후주의 맹공에 패배하여 결국 그 충격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2대 예종 효화제 유승균은 유숭의 아들로 정치를 잘한 인물이었지만 요나라에 알리지 않고
연호를 고쳤던 것과 이균의 반란을 지원한 것 때문에 한때 요나라와의
관계가 나빠지기도 하였는데 유승균은 아들이 없어서 유숭의 외손자 2명을 양자로 들입니다.
3대 소주 유계은은 유승균 사후 968년에 제위에 오르긴 하였지만, 유약하여 풍전등화의 국가를 다스리기
에는 능력이 부족한 인물이었고 결국 2개월도 안되어 살해되었는데 본래 성씨는 설(薛)씨였다고 합니다.
4대 영무제 유계원은 북한의 마지막 황제로 유계은의 아버지의 다른 형제이며 하(何)씨였다는데 유계은
사후 옹립되어 요나라와의 관계 개선에 주력하였지만 잔인한 면모가 있었고 유승균의 형제들을
주륙했으며 요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송나라를 물리치기도 했지만 결국 979년에 송(宋)태종 조광의
에 의해 멸망하고 오대십국 시대가 막을 내렸으며 유계원은 송나라에서 천수를 누리다가 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