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알렌, 제임스 게일, 에드워드 아담스
아펜젤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1858년 2월 미국 펜실베니아의 서더튼에서 아버지 기드온과 어머니 마리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주로 농장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독일계 루터교회에서 복음적인 위엄과 엄격함을 배우며 자라 철저한 신앙 정신으로 14살에 세례를 받았으며 18세에 중생을 체험했다고 한다. 20세 되던 1878년 필라델피아 서부의 마샬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연구하였고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수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드류 대학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성직에 몸담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품과 학업에 열중하여 드류 대학의 신학적 학풍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교회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한국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아펜젤러 목사를 선교사로 준비하였으며, 가우처 박사는 한국선교를 위한 첫 만남은 한국 사절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아가 맥클레이 박사는 이러한 실무를 도맡음으로써 한국에 대한 미감리교회의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미 초대공사 푸트(Lucius H . Foote)의 입국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위시한 홍영식, 서광범 등의 사절단이 일본을 거쳐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워싱톤 행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국사절단을 초청하여 선교를 위한 상황을 파악하여 감리교 기관지에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으며,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선교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1883년 총선교위원회에서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여 일본주재 선교사인 맥클레이 박사에 의해 선교답사를 하게 하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여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선교사와 일본선교사로써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한 그가 또다시 한국을 위한 선교의 첫장을 열게 되어 참으로 큰 기쁨을 받고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감사하였다.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완화되고 있었으며, 이미 일본에서 만났던 김옥균이 승정원의 승지로써 외교업무를 보고 있었으며, 그에게 부탁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는데 김옥균 역시 한국의 개화에는 개신교의 활동이 최선의 길임을 인식하여 환영하였다. 이를 통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위한 윤허를 받게 된 것이었다.(1884. 7. 3.)
이러한 시기에 1884년 12월 아펜젤러는 도지(E. J. Dodge)양과 결혼하였으며, 드류신학교를 1885년 1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스크랜톤 박사 가족과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제 1회 한국선교사회를 열고 맥클레이 박사를 총책임자로 아펜젤러는 부책임자가 되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기도하기를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2개월간 동경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6월 20일에 재입국하였다. 그는 17년동안 한국인들 사이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학생으로 시작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명을 하사 받았다. 배재학당은 남학생들을 전용으로 가르쳤으며, 과정은 예비과정부, 교양과정부, 대학과정부를 두었으며,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했다. 이화학당에서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도로 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학교였다. 스크랜튼은 알렌이 경영하던 제중원에서 잠시 일하다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힘을 써 고종은 그의 희생적 봉사를 기려 시병원(施病院)이란 칭호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에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 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의 설립자였고, 한국 감리교 선교회의 감리사였으며, 종교신문의 편집자였고, 출판사와 서점의 운영자이면서 영국 왕립협회 아시아지부 도서관의 사서, 외국인 묘지협회의 회계로써 보다 훌륭한 인간을 만드는 일과 한국의 복음선교 사역을 위해 충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요, 자상한 아버지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자녀를 양육하려고 노력한 신사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선상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한 광산 기술자의 목격담에 의하면 1902년 6월11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눈 뒤 아펜젤러는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군산 앞바다에 이르러 이때 갑작스런 짙은 안개로 인해 선박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비서와 어린 소녀들을 먼저 인도하고 함께 나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어 배와 함께 순교하고 만 것이다.
아펜젤러는 하나님과 감리교회에 대하여 충성스러웠고 교리와 법을 준행했다. 교회의 지도자를 존중하였고, 교회의 발전과 봉사에 전념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말하는 복음적 기독교의 진리와 정신, 체제와 정책을 한국인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가 교회에 충성하였던 것처럼 친구와 조국, 그리고 모든 선한 사업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전달자 역할뿐만 아니라 암흑과 무지, 빈곤과 무질서, 미신과 부패를 타파하고 한국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끝내는 함께 가던 한국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알렌
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오신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입니다.
그렇다면, 알렌 선교사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먼저 들어 올 수 있었을까요 ?
당시 알렌 선교사님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것입니다.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습니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막 넘은 12월 어느 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분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갑신정변입니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습니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습니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12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렸습니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입니다.
그 후 이 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설립자 알렌은 미국 선교사이자 주한 미국 공사관 의료진으로, 갑신정변 첫날밤 개화당의 공격을 받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이르는 치명적 상처를 입었던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됩니다.
광혜원은 문 연2주 만에 고종으로부터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받고는 빠르게 발전 속도를 타게됩니다.
1883년 8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는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조선의 젊은 관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큰 갓의 챙으로 스며든 햇살이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러나 충격에 빠진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습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의 오랜 배멀미는 이제 서구 문명에 대한, 다스릴 수 없는 멀미로 뒤바뀌게됩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조선 유사 이래 서구의 세계를 최초로 견문하게 되는 이들은 조미(朝美)조약 체결 1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報聘使)들이었습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
보빙사를 이끌었던 정사(正使) 민영익은 미국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자신의 조국을 암흑세계라고 표현하고, 자신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할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홍영식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서구식 근대 교육의 싹이 바로 이 광혜원을 중심으로 죽순처럼 솟아오릅니다. 광혜원이 자리잡은 곳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참살된 홍영식의 재동 집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도, 역사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핏자국이 남아있을 뿐.
고종이 알렌의 병원 설립 요청에 흔쾌하게 응답하고 그 병원에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한 것은 이 파란 눈의 서양인에 대한 믿음만은 아니었습니다. 청나라의 속국화 정책과 무너지기 직전의 재정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텅비어있는 국고를 샅샅이 뒤져 중국 상하이로부터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서적을 3만여 권이나 사들였습니다. 알렌이 광혜원을 세우던 무렵,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본격화됩니다.
1885년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최초의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1년 후에는 역시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을 개교합니다. 같은 시기, 선교사 언더우드가 고아들을 모아 시작한 구세학당은 훗날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됩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그들의 한결같은 목적은 영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건, 전신국 교환수가 되어 출세를 하는 것이다.”자기 집에서 조선인 두 명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정동에 조선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을 지어 완전한 근대 학교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 아펜젤러의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1880년대 중반의 서울 거리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낭랑하게 중국 고전의 경구를 외우는 소리 사이로 낯선 언어가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신분으로 보장된 출세가 가능하지 않은 청년들, 양반이 아니어서 오히려 본능적으로 진보적이고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중인 청년들은 세계의 변화에 이런 식으로 민감했습다.
1886년 3월에 설립된 제중원 부설 국립의학교에는 양반 자제들의 입학이 없어서, 각 관아에서 차출해준 기녀들이 그 첫 번째 입학생이 됩니다.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아름답고 우수한 기녀들은 훌륭한 의학도였을 뿐만 아니라 파티 석상에서는 권주가를 부르는 솜씨 또한 근사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근대교육은, 조선인들 스스로 세운 원산학사나 고위 관리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세웠던 신식학교 육영공원에서도 그 맹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학교를 세웠으니 학생들의 벼슬 길을 열어달라고 청원하는 원산학사(1883년)나, 양반 학생들의 불성실한 수업태도로 말미암아 문을 닫게 되는 육영공원(1886년)은 아직 미래의 문을 힘껏 열기에는 그 힘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청년들을 난세의 심장부로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근대우편제도가 설립되고, 병기제조장인 기기창이 세워지고, 전선이 조선의 구석구석으로 뻗어가며 뒤처진 근대의 길을 빠르게 쫓아갔습니다.
하지만 국제우편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세계화를 앞당길 수도 있었던 해저전선과, 서로 북로 전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보다 본격적인 침탈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문명은 근대화를 앞당겼지만, 무너져가는 나라 조선을 더 빠르게 근대적 식민지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알렌을 미리 보내셨고 갑신정변의 사건을 통해 고관 민영익의 생명을 살리시면서 선교사가 들어오기에 전혀 어려움 없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실지로 처음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알렌의 도움으로 알렌의 집에 거하면서 조선선교를 위해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뿐 아니라 초창기 조선에 들어오셨던 모든 분들이 알렌의 도움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알렌 선교사를 통해 또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마음껏 조선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제임스 게일
게일 선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헤론 부인과 만나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이창직의 도움으로 1895년에 한글판을 내게 된 일이다. 이 천로역정은 당시로서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으며, 구한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양감옥에 같혀 있던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 등이 모두 천로역정을 읽고 감옥에서 예수를 믿었으며 이들이 출옥한 후 한때 연동교회에 출석을 했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천민 만 다니는 교회로만 알던 연동교회는 이들이 출석하면서 교인을 다시한번 쳐다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ht Gale, 奇一)은 1863년 2월 19일 캐니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의 부모로부터 출생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인천으로 내한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뒤, 1890년 예수교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의 선교비 중단으로 같은 해 8월 3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했다.
1892년 4월 7일,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zabeth, 별명:Hattie) 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성서 번역에 착수한 것은 1893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1887년의 성서번역위원회에서 비롯된다.
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890년에 특별히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에게 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정에 의해 언더우드는 게일로, 스크랜튼은 아펜젤러로 교체된다
게일이 성서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되는 1892년이다. 그는 이 때부터 사도행전과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1895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후에 신약 후반부의 단편 성서들을, 즉 『바울이 갈나대인에게 ? 편지』, 『에베소인서』, 『고린도젼셔』, 『고린도후셔』를 번역한다. 1900년에는 다른 선교사들의 신약 번역도 마무리되는데, 이것들은 교정작업(아펜젤러(언더우드), 레이놀즈, 게일)을 거쳐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 역본 『신약젼셔』로 나오게 된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로,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다. 게일에게는 마가복음 번역을 책임지게하고, 1891년 언더우드의 귀국으로 요한복음도 맡아 번역하였다. 언더우드는 1903년에 와서도 하나님 사용을 반대하고 天主를 주장하고 있었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전서(신·구약)을 출판하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도 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신보를 바뀐 뒤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활동하였다.
게일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1897년 미국에 갔을 때 신학은 안 했지만 그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일들이 너무 훌륭해서 마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 사의 주선으로 인디아나주 뉴알비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한국에 와 서 당당하게 성찬예식도 거행하고 설교권도 갖게 되자
1900년 처음 연동교회 담임목사가 되는과 동시에 제1대 당회장이 되는 김쁨도 누리게 되었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1901년 한국성교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기독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두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여(1922)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첫 부인 해티는 1908년 3월 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아-14)에 안장되었다.
1908년 게일 선교사는 부인을 잃고 그 정력을 한국 문화와 풍습을 익히는데 사용 해야 한다면서 그 어려운 교통난을 헤치고 12번이나 한반도를 휘접고 다녔다면 그의 정열을 알 수도 있다. 그후 그는 황해도 솔래에서 만난 이창직을 항상 대동하 면서 개인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때마침 일본 나가자
키에서 만났던 윤치호는 정동에다 기독교문화출판 사업을 한다면서 기독교창문 사를 만들어 기독교서적 출간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무렵 게일은 첫째 부인을 잃 고 충격이 컸는지라 결혼을 하려고 하는 생각을 잊고 있었는데 때마침 일본을 다 니다가 뜻하지 않게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영국인 실업가의 딸인 세일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1910년 4월 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치고 1928년 정년 은퇴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서 중심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하였다.
에드워드 아담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은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해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와 지방풍습을 공부하고 1897년 대구 선교부로 파송됩니다.
그는 1898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또한 대구선교부의 책임자로 많은 동역 선교사들을 필요로 했고 의사인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을 설립해 복음화를 이루게 되는데 이 병원이 지금의 동산병원입니다.
지금의 대구 제일교회와 동산병원 부지, 계명대학의 구 캠퍼스 모두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이 선교사역 가운데서 얻은 땅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그 땅을 얻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선교사님들이 대구 성내에서 사역하면서 가장 힘들어했던 3가지 S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Smell 입니다. 선교사님들은 하수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환경 속에 살면서 냄새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또 하나는 Smoke 입니다. 쌩나무를 태워서 밥을 짓고 난방을 위해 불을 피웠기 때문에 그 연기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Sound 입니다. 서양인만 보면 짖어대는 개소리와 밤마다 무당 굿 소리에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4대문 성안에 사는 것 보다 밖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지금의 동산병원과 계명대 캠퍼스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지 못해 몰래 시신을 묻었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당시 고관들에게도 그 땅이 골치 아픈 땅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님들은 쉽게 그 땅을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그 땅은 대구지역 복음화의 요람으로 남아있습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와 사역을 감당하던 아담스 선교사님은 부인 닐 딕의 죽음으로 큰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스 선교사님은 그 고통가운데에서도 조선 사랑을 이어갑니다.
제일교회 내에 남자 소학교를 세워 교육선교를 지속하면서 계성중학교를 세웠고 후에 계명대학까지 아담스 선교사님에 의해 세워지게 됐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놓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근 40년 동안 한국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는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조선사랑을 위해 한국에서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십자가의 복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대구의 ‘사과 미인’이라는 말도 선교사님들이 대구에 사과를 심음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우고 우리 민족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의 삶을 살고 가신 분들입니다.
동산병원 선교관 앞에 자리 잡은 선교사님들의 무덤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 됐는지를 알려주는 증표로 남아있습니다.
[출처] 아펜젤러,알렌, 제임스 게일, 에드워드 아담스|작성자 농심곰
아펜젤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1858년 2월 미국 펜실베니아의 서더튼에서 아버지 기드온과 어머니 마리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주로 농장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독일계 루터교회에서 복음적인 위엄과 엄격함을 배우며 자라 철저한 신앙 정신으로 14살에 세례를 받았으며 18세에 중생을 체험했다고 한다. 20세 되던 1878년 필라델피아 서부의 마샬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연구하였고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수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드류 대학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성직에 몸담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품과 학업에 열중하여 드류 대학의 신학적 학풍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교회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한국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아펜젤러 목사를 선교사로 준비하였으며, 가우처 박사는 한국선교를 위한 첫 만남은 한국 사절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아가 맥클레이 박사는 이러한 실무를 도맡음으로써 한국에 대한 미감리교회의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미 초대공사 푸트(Lucius H . Foote)의 입국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위시한 홍영식, 서광범 등의 사절단이 일본을 거쳐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워싱톤 행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국사절단을 초청하여 선교를 위한 상황을 파악하여 감리교 기관지에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으며,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선교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1883년 총선교위원회에서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여 일본주재 선교사인 맥클레이 박사에 의해 선교답사를 하게 하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여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선교사와 일본선교사로써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한 그가 또다시 한국을 위한 선교의 첫장을 열게 되어 참으로 큰 기쁨을 받고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감사하였다.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완화되고 있었으며, 이미 일본에서 만났던 김옥균이 승정원의 승지로써 외교업무를 보고 있었으며, 그에게 부탁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는데 김옥균 역시 한국의 개화에는 개신교의 활동이 최선의 길임을 인식하여 환영하였다. 이를 통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위한 윤허를 받게 된 것이었다.(1884. 7. 3.)
이러한 시기에 1884년 12월 아펜젤러는 도지(E. J. Dodge)양과 결혼하였으며, 드류신학교를 1885년 1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스크랜톤 박사 가족과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제 1회 한국선교사회를 열고 맥클레이 박사를 총책임자로 아펜젤러는 부책임자가 되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기도하기를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2개월간 동경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6월 20일에 재입국하였다. 그는 17년동안 한국인들 사이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학생으로 시작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명을 하사 받았다. 배재학당은 남학생들을 전용으로 가르쳤으며, 과정은 예비과정부, 교양과정부, 대학과정부를 두었으며,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했다. 이화학당에서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도로 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학교였다. 스크랜튼은 알렌이 경영하던 제중원에서 잠시 일하다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힘을 써 고종은 그의 희생적 봉사를 기려 시병원(施病院)이란 칭호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에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 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의 설립자였고, 한국 감리교 선교회의 감리사였으며, 종교신문의 편집자였고, 출판사와 서점의 운영자이면서 영국 왕립협회 아시아지부 도서관의 사서, 외국인 묘지협회의 회계로써 보다 훌륭한 인간을 만드는 일과 한국의 복음선교 사역을 위해 충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요, 자상한 아버지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자녀를 양육하려고 노력한 신사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선상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한 광산 기술자의 목격담에 의하면 1902년 6월11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눈 뒤 아펜젤러는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군산 앞바다에 이르러 이때 갑작스런 짙은 안개로 인해 선박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비서와 어린 소녀들을 먼저 인도하고 함께 나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어 배와 함께 순교하고 만 것이다.
아펜젤러는 하나님과 감리교회에 대하여 충성스러웠고 교리와 법을 준행했다. 교회의 지도자를 존중하였고, 교회의 발전과 봉사에 전념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말하는 복음적 기독교의 진리와 정신, 체제와 정책을 한국인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가 교회에 충성하였던 것처럼 친구와 조국, 그리고 모든 선한 사업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전달자 역할뿐만 아니라 암흑과 무지, 빈곤과 무질서, 미신과 부패를 타파하고 한국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끝내는 함께 가던 한국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알렌
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오신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입니다.
그렇다면, 알렌 선교사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먼저 들어 올 수 있었을까요 ?
당시 알렌 선교사님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것입니다.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습니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막 넘은 12월 어느 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분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갑신정변입니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습니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습니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12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렸습니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입니다.
그 후 이 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설립자 알렌은 미국 선교사이자 주한 미국 공사관 의료진으로, 갑신정변 첫날밤 개화당의 공격을 받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이르는 치명적 상처를 입었던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됩니다.
광혜원은 문 연2주 만에 고종으로부터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받고는 빠르게 발전 속도를 타게됩니다.
1883년 8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는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조선의 젊은 관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큰 갓의 챙으로 스며든 햇살이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러나 충격에 빠진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습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의 오랜 배멀미는 이제 서구 문명에 대한, 다스릴 수 없는 멀미로 뒤바뀌게됩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조선 유사 이래 서구의 세계를 최초로 견문하게 되는 이들은 조미(朝美)조약 체결 1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報聘使)들이었습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
보빙사를 이끌었던 정사(正使) 민영익은 미국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자신의 조국을 암흑세계라고 표현하고, 자신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할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홍영식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서구식 근대 교육의 싹이 바로 이 광혜원을 중심으로 죽순처럼 솟아오릅니다. 광혜원이 자리잡은 곳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참살된 홍영식의 재동 집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도, 역사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핏자국이 남아있을 뿐.
고종이 알렌의 병원 설립 요청에 흔쾌하게 응답하고 그 병원에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한 것은 이 파란 눈의 서양인에 대한 믿음만은 아니었습니다. 청나라의 속국화 정책과 무너지기 직전의 재정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텅비어있는 국고를 샅샅이 뒤져 중국 상하이로부터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서적을 3만여 권이나 사들였습니다. 알렌이 광혜원을 세우던 무렵,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본격화됩니다.
1885년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최초의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1년 후에는 역시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을 개교합니다. 같은 시기, 선교사 언더우드가 고아들을 모아 시작한 구세학당은 훗날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됩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그들의 한결같은 목적은 영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건, 전신국 교환수가 되어 출세를 하는 것이다.”자기 집에서 조선인 두 명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정동에 조선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을 지어 완전한 근대 학교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 아펜젤러의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1880년대 중반의 서울 거리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낭랑하게 중국 고전의 경구를 외우는 소리 사이로 낯선 언어가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신분으로 보장된 출세가 가능하지 않은 청년들, 양반이 아니어서 오히려 본능적으로 진보적이고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중인 청년들은 세계의 변화에 이런 식으로 민감했습다.
1886년 3월에 설립된 제중원 부설 국립의학교에는 양반 자제들의 입학이 없어서, 각 관아에서 차출해준 기녀들이 그 첫 번째 입학생이 됩니다.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아름답고 우수한 기녀들은 훌륭한 의학도였을 뿐만 아니라 파티 석상에서는 권주가를 부르는 솜씨 또한 근사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근대교육은, 조선인들 스스로 세운 원산학사나 고위 관리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세웠던 신식학교 육영공원에서도 그 맹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학교를 세웠으니 학생들의 벼슬 길을 열어달라고 청원하는 원산학사(1883년)나, 양반 학생들의 불성실한 수업태도로 말미암아 문을 닫게 되는 육영공원(1886년)은 아직 미래의 문을 힘껏 열기에는 그 힘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청년들을 난세의 심장부로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근대우편제도가 설립되고, 병기제조장인 기기창이 세워지고, 전선이 조선의 구석구석으로 뻗어가며 뒤처진 근대의 길을 빠르게 쫓아갔습니다.
하지만 국제우편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세계화를 앞당길 수도 있었던 해저전선과, 서로 북로 전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보다 본격적인 침탈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문명은 근대화를 앞당겼지만, 무너져가는 나라 조선을 더 빠르게 근대적 식민지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알렌을 미리 보내셨고 갑신정변의 사건을 통해 고관 민영익의 생명을 살리시면서 선교사가 들어오기에 전혀 어려움 없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실지로 처음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알렌의 도움으로 알렌의 집에 거하면서 조선선교를 위해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뿐 아니라 초창기 조선에 들어오셨던 모든 분들이 알렌의 도움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알렌 선교사를 통해 또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마음껏 조선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제임스 게일
게일 선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헤론 부인과 만나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이창직의 도움으로 1895년에 한글판을 내게 된 일이다. 이 천로역정은 당시로서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으며, 구한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양감옥에 같혀 있던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 등이 모두 천로역정을 읽고 감옥에서 예수를 믿었으며 이들이 출옥한 후 한때 연동교회에 출석을 했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천민 만 다니는 교회로만 알던 연동교회는 이들이 출석하면서 교인을 다시한번 쳐다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ht Gale, 奇一)은 1863년 2월 19일 캐니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의 부모로부터 출생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인천으로 내한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뒤, 1890년 예수교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의 선교비 중단으로 같은 해 8월 3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했다.
1892년 4월 7일,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zabeth, 별명:Hattie) 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성서 번역에 착수한 것은 1893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1887년의 성서번역위원회에서 비롯된다.
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890년에 특별히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에게 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정에 의해 언더우드는 게일로, 스크랜튼은 아펜젤러로 교체된다
게일이 성서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되는 1892년이다. 그는 이 때부터 사도행전과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1895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후에 신약 후반부의 단편 성서들을, 즉 『바울이 갈나대인에게 ? 편지』, 『에베소인서』, 『고린도젼셔』, 『고린도후셔』를 번역한다. 1900년에는 다른 선교사들의 신약 번역도 마무리되는데, 이것들은 교정작업(아펜젤러(언더우드), 레이놀즈, 게일)을 거쳐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 역본 『신약젼셔』로 나오게 된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로,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다. 게일에게는 마가복음 번역을 책임지게하고, 1891년 언더우드의 귀국으로 요한복음도 맡아 번역하였다. 언더우드는 1903년에 와서도 하나님 사용을 반대하고 天主를 주장하고 있었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전서(신·구약)을 출판하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도 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신보를 바뀐 뒤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활동하였다.
게일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1897년 미국에 갔을 때 신학은 안 했지만 그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일들이 너무 훌륭해서 마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 사의 주선으로 인디아나주 뉴알비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한국에 와 서 당당하게 성찬예식도 거행하고 설교권도 갖게 되자
1900년 처음 연동교회 담임목사가 되는과 동시에 제1대 당회장이 되는 김쁨도 누리게 되었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1901년 한국성교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기독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두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여(1922)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첫 부인 해티는 1908년 3월 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아-14)에 안장되었다.
1908년 게일 선교사는 부인을 잃고 그 정력을 한국 문화와 풍습을 익히는데 사용 해야 한다면서 그 어려운 교통난을 헤치고 12번이나 한반도를 휘접고 다녔다면 그의 정열을 알 수도 있다. 그후 그는 황해도 솔래에서 만난 이창직을 항상 대동하 면서 개인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때마침 일본 나가자
키에서 만났던 윤치호는 정동에다 기독교문화출판 사업을 한다면서 기독교창문 사를 만들어 기독교서적 출간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무렵 게일은 첫째 부인을 잃 고 충격이 컸는지라 결혼을 하려고 하는 생각을 잊고 있었는데 때마침 일본을 다 니다가 뜻하지 않게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영국인 실업가의 딸인 세일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1910년 4월 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치고 1928년 정년 은퇴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서 중심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하였다.
에드워드 아담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은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해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와 지방풍습을 공부하고 1897년 대구 선교부로 파송됩니다.
그는 1898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또한 대구선교부의 책임자로 많은 동역 선교사들을 필요로 했고 의사인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을 설립해 복음화를 이루게 되는데 이 병원이 지금의 동산병원입니다.
지금의 대구 제일교회와 동산병원 부지, 계명대학의 구 캠퍼스 모두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이 선교사역 가운데서 얻은 땅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그 땅을 얻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선교사님들이 대구 성내에서 사역하면서 가장 힘들어했던 3가지 S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Smell 입니다. 선교사님들은 하수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환경 속에 살면서 냄새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또 하나는 Smoke 입니다. 쌩나무를 태워서 밥을 짓고 난방을 위해 불을 피웠기 때문에 그 연기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Sound 입니다. 서양인만 보면 짖어대는 개소리와 밤마다 무당 굿 소리에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4대문 성안에 사는 것 보다 밖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지금의 동산병원과 계명대 캠퍼스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지 못해 몰래 시신을 묻었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당시 고관들에게도 그 땅이 골치 아픈 땅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님들은 쉽게 그 땅을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그 땅은 대구지역 복음화의 요람으로 남아있습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와 사역을 감당하던 아담스 선교사님은 부인 닐 딕의 죽음으로 큰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스 선교사님은 그 고통가운데에서도 조선 사랑을 이어갑니다.
제일교회 내에 남자 소학교를 세워 교육선교를 지속하면서 계성중학교를 세웠고 후에 계명대학까지 아담스 선교사님에 의해 세워지게 됐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놓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근 40년 동안 한국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는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조선사랑을 위해 한국에서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십자가의 복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대구의 ‘사과 미인’이라는 말도 선교사님들이 대구에 사과를 심음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우고 우리 민족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의 삶을 살고 가신 분들입니다.
동산병원 선교관 앞에 자리 잡은 선교사님들의 무덤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 됐는지를 알려주는 증표로 남아있습니다.
[출처] 아펜젤러,알렌, 제임스 게일, 에드워드 아담스|작성자 농심곰
아펜젤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는 1858년 2월 미국 펜실베니아의 서더튼에서 아버지 기드온과 어머니 마리아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을 주로 농장에서 보냈다.
어려서부터 독일계 루터교회에서 복음적인 위엄과 엄격함을 배우며 자라 철저한 신앙 정신으로 14살에 세례를 받았으며 18세에 중생을 체험했다고 한다. 20세 되던 1878년 필라델피아 서부의 마샬 대학에 입학하여 고전학을 연구하였고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수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드류 대학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성직에 몸담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품과 학업에 열중하여 드류 대학의 신학적 학풍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교회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1876년 10월 6일 웨스터체스트의 장로교회에서 봉사하던 풀턴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고 1879년 4월 20일에 좀더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회로 교적을 옮겼다. 1881년경부터 인도선교의 비전을 갖고 있던 중 파울러 감독의 요청으로 선교지를 한국으로 정하여 1885년 2월 1일 스크랜튼, 언더우드와 더불어 부산으로 출발하여 4월 2일에 도착하였고 4월 5일 부활주일에 제물포 항구를 통하여 입국하였다.
한국의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는 아펜젤러 목사를 선교사로 준비하였으며, 가우처 박사는 한국선교를 위한 첫 만남은 한국 사절단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아가 맥클레이 박사는 이러한 실무를 도맡음으로써 한국에 대한 미감리교회의 선교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의 체결로 미 초대공사 푸트(Lucius H . Foote)의 입국에 대한 답례로 민영익을 위시한 홍영식, 서광범 등의 사절단이 일본을 거쳐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워싱톤 행 기차 안에서 가우처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한국사절단을 초청하여 선교를 위한 상황을 파악하여 감리교 기관지에 한국선교를 촉구하는 글을 싣기도 하였으며,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부에 선교기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1883년 총선교위원회에서 한국선교를 정식으로 결정하여 일본주재 선교사인 맥클레이 박사에 의해 선교답사를 하게 하였다.
맥클레이 목사는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여 감리교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선교사와 일본선교사로써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한 그가 또다시 한국을 위한 선교의 첫장을 열게 되어 참으로 큰 기쁨을 받고 자신의 사명으로 알고 감사하였다. 그 당시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완화되고 있었으며, 이미 일본에서 만났던 김옥균이 승정원의 승지로써 외교업무를 보고 있었으며, 그에게 부탁하여 고종황제를 알현하였는데 김옥균 역시 한국의 개화에는 개신교의 활동이 최선의 길임을 인식하여 환영하였다. 이를 통해 의료와 교육 사업을 위한 윤허를 받게 된 것이었다.(1884. 7. 3.)
이러한 시기에 1884년 12월 아펜젤러는 도지(E. J. Dodge)양과 결혼하였으며, 드류신학교를 1885년 1월에 졸업하였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고 스크랜톤 박사 가족과 함께 한국선교를 위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하여 제 1회 한국선교사회를 열고 맥클레이 박사를 총책임자로 아펜젤러는 부책임자가 되었다.
1885년 4월5일 제물포(인천)에 도착한 아펜젤러는 기도하기를 "사망의 권세를 이긴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2개월간 동경에서 체류하다가 다시 6월 20일에 재입국하였다. 그는 17년동안 한국인들 사이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배재학당을 시작으로 이화학당, 정동교회를 차례로 설립하는 등 학원선교 및 목회에 열중하였다. 배재학당은 1885년 8월에 한옥을 매입하여 4명의학생으로 시작하였으며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명을 하사 받았다. 배재학당은 남학생들을 전용으로 가르쳤으며, 과정은 예비과정부, 교양과정부, 대학과정부를 두었으며, 영어, 중국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공부했다. 이화학당에서는 스크랜튼 부인의 주도로 주로 고아나 과부와 같은 소외 계층으로부터 시작하여 교육선교를 시작하였고 여성의 지위향상과 복음사역에 충실한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학교였다. 스크랜튼은 알렌이 경영하던 제중원에서 잠시 일하다 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봉사에 힘을 써 고종은 그의 희생적 봉사를 기려 시병원(施病院)이란 칭호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펜젤러는 1888년에 1월에 배재학당의 교사로 입국한 올링거 목사의 도움으로 배재학당 내에 삼문(三文) 출판사를 설립하였는데, 이는 한·중·영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였다. 여기에서 신문, 잡지 등 정기간행물 특히 격주간지 [교회](1889년 5월)의 발간으로 신앙의 교제와 소식을 나누었고, 영문 월간지 Korean Re- pository(1892년 1월)는 폐쇄적인 한국사회를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는 5권까지 발행되었으며, 지금까지 한국사회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로 되어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 [교회]지를 확대하여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발간하고, 협성회보도 발간하였다. 1889년 교리서인 [미이미 교회강례]와 [성교촬요]를 발행했으며, 1900년까지 25만여권의 서적을 인쇄·출판하였다. 또한 배재학당, 이화 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을 출판하는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의 효시를 이루었다.
또한 아펜젤러는 성서번역사업에도 헌신하여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스크랜튼,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다. 1890년에는 종로서점을 설치하고, 대한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그는 단지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독립과 주체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한 사역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의 설립자였고, 한국 감리교 선교회의 감리사였으며, 종교신문의 편집자였고, 출판사와 서점의 운영자이면서 영국 왕립협회 아시아지부 도서관의 사서, 외국인 묘지협회의 회계로써 보다 훌륭한 인간을 만드는 일과 한국의 복음선교 사역을 위해 충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성실한 남편이요, 자상한 아버지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자녀를 양육하려고 노력한 신사였다.
아펜젤러 목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목포로 가는 선상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최후를 지켜본 한 광산 기술자의 목격담에 의하면 1902년 6월11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눈 뒤 아펜젤러는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다. 군산 앞바다에 이르러 이때 갑작스런 짙은 안개로 인해 선박의 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비서와 어린 소녀들을 먼저 인도하고 함께 나가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어 배와 함께 순교하고 만 것이다.
아펜젤러는 하나님과 감리교회에 대하여 충성스러웠고 교리와 법을 준행했다. 교회의 지도자를 존중하였고, 교회의 발전과 봉사에 전념하였다. 그는 감리교회가 말하는 복음적 기독교의 진리와 정신, 체제와 정책을 한국인에게 전해주었으며, 그가 교회에 충성하였던 것처럼 친구와 조국, 그리고 모든 선한 사업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의 전달자 역할뿐만 아니라 암흑과 무지, 빈곤과 무질서, 미신과 부패를 타파하고 한국의 근대화와 자립정신을 일깨워주고 끝내는 함께 가던 한국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만일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나는 한국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북쪽의 호랑이 사냥꾼으로부터 남쪽의 벼농사꾼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설교하고 싶다."
알렌
우리는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가장 먼저 조선 선교사로 들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오신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입니다.
그렇다면, 알렌 선교사가 어떻게 우리 민족에게 가장 먼저 들어 올 수 있었을까요 ?
당시 알렌 선교사님은 미 북장로교 선교사로 중국에 파송을 받은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의사로서 중국 해안가에서 정착하여 의료선교사역을 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 해안가에는 많은 선교사님들이 들어와 정착하여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곳도 정착하기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알렌 선교사는 8개월간 상해와 남경일대를 헤매고 다니다가, 조선이 문을 열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것입니다. 그는 조선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바로 미국 선교부에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에 가기를 원한다는 편지 였습니다.
그가 1884년 6월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의 조선 입국을 허락해 주세요. 그렇지 않다면 단신이라도 들어가겠습니다.""
그해 7월 22일 선교본부는 해저전신을 통해 입국을 허락했고 그는 1884년 9월 20일 드디어 제물포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알렌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주한 미국 공사관의 공의라는 직분을 가지고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의보다는 왕실의 시의가 되면 더 좋은 선교의 기회가 올 것을 알고 고관들과 친분을 쌓아 가며 기도하며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조선 땅에 온지 2개월이 막 넘은 12월 어느 날, 조선에 큰 어지러운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김옥균을 비롯해서 개화파 사상을 가진 분들이 수구파에 대항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이 3일 천하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갑신정변입니다. 이 사건으로 민영익은 자객의 칼에 맞아 목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스물 두 살의 나이로 청나라 외교사절이 되었었고 23살의 나이로 전권대사가 되어 미국을 거쳐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인도 싱가폴, 홍콩을 둘러보고 온 야망에 찬 고관 민영익, 그가 칼에 맞아 중상을 입고 과도한 출혈 끝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전전긍긍 손을 쓰고 있었으나 출혈을 멈추게 할 방법이 없어 우왕좌왕 하기만 하였습니다.
알렌이 보기에도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했고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알렌은 의료기기를 다루면서 간절하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습니다.
그 결과 민영익은 소생하게 되었고 민영익을 살해 모함한 개화파는 진압되었습니다 .
이 사건으로 알렌 선교사는 조정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알렌은 왕실의 시의가 되었고 조선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885년 4월 12일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 문을 열렸습니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인 알렌 선교사에게 감사하여 십만냥을 주었고 알렌은 이 돈을 기초로 병원을 마련하였는데 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입니다.
그 후 이 병원은 제중원이라고 개명하였고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이 되었습니다.
설립자 알렌은 미국 선교사이자 주한 미국 공사관 의료진으로, 갑신정변 첫날밤 개화당의 공격을 받아 얼굴과 목, 그리고 등에 이르는 치명적 상처를 입었던 민영익을 치료하여 고종으로부터 총애를 받게 됩니다.
광혜원은 문 연2주 만에 고종으로부터 ‘제중원’이란 이름을 하사받고는 빠르게 발전 속도를 타게됩니다.
1883년 8월, 미국의 샌프란시스코 항구에는 긴 도포자락을 휘날리는 조선의 젊은 관리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큰 갓의 챙으로 스며든 햇살이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러나 충격에 빠진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습다.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의 오랜 배멀미는 이제 서구 문명에 대한, 다스릴 수 없는 멀미로 뒤바뀌게됩니다.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 조선 유사 이래 서구의 세계를 최초로 견문하게 되는 이들은 조미(朝美)조약 체결 1주년을 맞아 미국으로 파견된 보빙사(報聘使)들이었습니다.
"나는 암흑세계에서 태어나 광명세계에 갔다가 다시 암흑세계로 돌아왔다."
보빙사를 이끌었던 정사(正使) 민영익은 미국 유럽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후, 자신의 조국을 암흑세계라고 표현하고, 자신은 이제 어디로 나아가야할지를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홍영식이 그토록 열망하였던 서구식 근대 교육의 싹이 바로 이 광혜원을 중심으로 죽순처럼 솟아오릅니다. 광혜원이 자리잡은 곳은 갑신정변의 주모자로 참살된 홍영식의 재동 집이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운명의 엇갈림 속에서도, 역사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핏자국이 남아있을 뿐.
고종이 알렌의 병원 설립 요청에 흔쾌하게 응답하고 그 병원에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의 ‘제중원’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한 것은 이 파란 눈의 서양인에 대한 믿음만은 아니었습니다. 청나라의 속국화 정책과 무너지기 직전의 재정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텅비어있는 국고를 샅샅이 뒤져 중국 상하이로부터 근대화 사업에 필요한 서적을 3만여 권이나 사들였습니다. 알렌이 광혜원을 세우던 무렵, 선교사들의 교육활동이 본격화됩니다.
1885년에는 선교사 아펜젤러가 최초의 근대 학교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1년 후에는 역시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조선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을 개교합니다. 같은 시기, 선교사 언더우드가 고아들을 모아 시작한 구세학당은 훗날 경신학교, 연희전문학교 등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연세대학교의 전신이 됩니다.
“지금 조선에서는 영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대단하다. 그들의 한결같은 목적은 영어를 배워 통역관이 되건, 전신국 교환수가 되어 출세를 하는 것이다.”자기 집에서 조선인 두 명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이듬해에는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정동에 조선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건물을 지어 완전한 근대 학교의 기초를 이루게 되는 아펜젤러의 말입니다.
그의 말처럼, 1880년대 중반의 서울 거리에는 몸을 앞뒤로 흔들며 낭랑하게 중국 고전의 경구를 외우는 소리 사이로 낯선 언어가 자리잡기 시작합니다. 신분으로 보장된 출세가 가능하지 않은 청년들, 양반이 아니어서 오히려 본능적으로 진보적이고 실용적일 수밖에 없었던 중인 청년들은 세계의 변화에 이런 식으로 민감했습다.
1886년 3월에 설립된 제중원 부설 국립의학교에는 양반 자제들의 입학이 없어서, 각 관아에서 차출해준 기녀들이 그 첫 번째 입학생이 됩니다. 알렌의 기록에 의하면, 이 아름답고 우수한 기녀들은 훌륭한 의학도였을 뿐만 아니라 파티 석상에서는 권주가를 부르는 솜씨 또한 근사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근대교육은, 조선인들 스스로 세운 원산학사나 고위 관리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정부가 세웠던 신식학교 육영공원에서도 그 맹아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학교를 세웠으니 학생들의 벼슬 길을 열어달라고 청원하는 원산학사(1883년)나, 양반 학생들의 불성실한 수업태도로 말미암아 문을 닫게 되는 육영공원(1886년)은 아직 미래의 문을 힘껏 열기에는 그 힘이 미약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청년들을 난세의 심장부로 끌어들이고 있었습니다. 조선 최초의 근대우편제도가 설립되고, 병기제조장인 기기창이 세워지고, 전선이 조선의 구석구석으로 뻗어가며 뒤처진 근대의 길을 빠르게 쫓아갔습니다.
하지만 국제우편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세계화를 앞당길 수도 있었던 해저전선과, 서로 북로 전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보다 본격적인 침탈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문명은 근대화를 앞당겼지만, 무너져가는 나라 조선을 더 빠르게 근대적 식민지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나라에 선교의 문을 열기 위해 알렌을 미리 보내셨고 갑신정변의 사건을 통해 고관 민영익의 생명을 살리시면서 선교사가 들어오기에 전혀 어려움 없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실지로 처음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는 알렌의 도움으로 알렌의 집에 거하면서 조선선교를 위해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더우드 뿐 아니라 초창기 조선에 들어오셨던 모든 분들이 알렌의 도움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알렌 선교사를 통해 또 갑신정변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조선 선교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들이 마음껏 조선에서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제임스 게일
게일 선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업적이 있다면 헤론 부인과 만나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이창직의 도움으로 1895년에 한글판을 내게 된 일이다. 이 천로역정은 당시로서는 가장 많이 팔린 책이었으며, 구한말 독립협회 사건으로 한양감옥에 같혀 있던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 등이 모두 천로역정을 읽고 감옥에서 예수를 믿었으며 이들이 출옥한 후 한때 연동교회에 출석을 했던 일도 있었다. 그래서 천민 만 다니는 교회로만 알던 연동교회는 이들이 출석하면서 교인을 다시한번 쳐다보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ht Gale, 奇一)은 1863년 2월 19일 캐니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의 부모로부터 출생했다. 1888년,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 기독청년회 지원으로 25세 되던
1888년 12월 15일 기포드와 함께 인천으로 내한했다.
1889년 황해도 해주 지방과 경상도 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한 뒤, 1890년 예수교학당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891년 2월 토론토대학의 선교비 중단으로 같은 해 8월 31일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전적했다.
1892년 4월 7일, 헤론 선교사의 미망인 깁슨(Harriet Elizabeth, 별명:Hattie) 선교사와 서울에서 결혼했다.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이 공식적으로 성서 번역에 착수한 것은 1893년 상임성서실행위원회를 조직하면서부터이다. 본격적인 작업은 1887년의 성서번역위원회에서 비롯된다.
5명의 선교사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1890년에 특별히 언더우드와 스크랜튼에게 성서 번역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정에 의해 언더우드는 게일로, 스크랜튼은 아펜젤러로 교체된다
게일이 성서 번역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언더우드의 역할을 대신 맡게 되는 1892년이다. 그는 이 때부터 사도행전과 마태복음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1895년에 마무리되었고, 그 후에 신약 후반부의 단편 성서들을, 즉 『바울이 갈나대인에게 ? 편지』, 『에베소인서』, 『고린도젼셔』, 『고린도후셔』를 번역한다. 1900년에는 다른 선교사들의 신약 번역도 마무리되는데, 이것들은 교정작업(아펜젤러(언더우드), 레이놀즈, 게일)을 거쳐 1906년 한국 최초의 공인 역본 『신약젼셔』로 나오게 된다.
성경 번역 과정에서 언더우드는 하나님을 ‘천주’로, 마펫과 게일은 ‘하나님’으로 번역하기를 주장하여 결국 하나님으로 관철하였다. 게일에게는 마가복음 번역을 책임지게하고, 1891년 언더우드의 귀국으로 요한복음도 맡아 번역하였다. 언더우드는 1903년에 와서도 하나님 사용을 반대하고 天主를 주장하고 있었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으로 성경 전서(신·구약)을 출판하였다.
1897년 4월, 「그리스도 신문」 주간으로 시작하여 기독신보를 바뀐 뒤까지 10여 년간 주필로 활동하였다.
게일 선교사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1897년 미국에 갔을 때 신학은 안 했지만 그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던 일들이 너무 훌륭해서 마펫(한국명, 마포삼열) 선교 사의 주선으로 인디아나주 뉴알비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한국에 와 서 당당하게 성찬예식도 거행하고 설교권도 갖게 되자
1900년 처음 연동교회 담임목사가 되는과 동시에 제1대 당회장이 되는 김쁨도 누리게 되었다.
1900년 5월, 연동교회 목회를 시작으로 1901년 정신여학교와 경신학교의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교육기반을 구축하였다.
1901년 한국성교서회 회장(제3대)과 황성기독청년회 창립위원 및 초대회장(1903)으로 문서 선교활동에 힘썼다.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장으로 두차례(1908, 1910) 선출되었으며, 평양신학교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음악연구회를 조직하고 찬송가 개편에 힘썼다.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여(1922) 출판하는 등 단행본 저서가 43권에 이른다.
첫 부인 해티는 1908년 3월 29일 결핵으로 별세하여 양화진 제1묘역(아-14)에 안장되었다.
1908년 게일 선교사는 부인을 잃고 그 정력을 한국 문화와 풍습을 익히는데 사용 해야 한다면서 그 어려운 교통난을 헤치고 12번이나 한반도를 휘접고 다녔다면 그의 정열을 알 수도 있다. 그후 그는 황해도 솔래에서 만난 이창직을 항상 대동하 면서 개인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착수하였다. 때마침 일본 나가자
키에서 만났던 윤치호는 정동에다 기독교문화출판 사업을 한다면서 기독교창문 사를 만들어 기독교서적 출간에 힘을 쏟고 있었다.
이무렵 게일은 첫째 부인을 잃 고 충격이 컸는지라 결혼을 하려고 하는 생각을 잊고 있었는데 때마침 일본을 다 니다가 뜻하지 않게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영국인 실업가의 딸인 세일을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후 1910년 4월 7일 영국 실업가의 딸 루이스(Ada Louise Sale)와 재혼했다.
1927년 5월 연동교회 시무를 마치고 1928년 정년 은퇴하여 부인의 고향인 영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37년 1월 31일 부인과 막내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로 생을 마쳤다.
“그의 설교는 치밀하고 논리적이며 예화나 일화가 없는 성서 중심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상재 선생은 “길의 방향을 잃은 사람에게 바른 데로 돌아오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자에게 빛을 얻게 하였다”고 하였다.
에드워드 아담스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은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해 부산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와 지방풍습을 공부하고 1897년 대구 선교부로 파송됩니다.
그는 1898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또한 대구선교부의 책임자로 많은 동역 선교사들을 필요로 했고 의사인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을 설립해 복음화를 이루게 되는데 이 병원이 지금의 동산병원입니다.
지금의 대구 제일교회와 동산병원 부지, 계명대학의 구 캠퍼스 모두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이 선교사역 가운데서 얻은 땅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이 그 땅을 얻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를 하나 소개합니다.
선교사님들이 대구 성내에서 사역하면서 가장 힘들어했던 3가지 S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Smell 입니다. 선교사님들은 하수처리가 되어있지 않은 환경 속에 살면서 냄새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또 하나는 Smoke 입니다. 쌩나무를 태워서 밥을 짓고 난방을 위해 불을 피웠기 때문에 그 연기로 인해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Sound 입니다. 서양인만 보면 짖어대는 개소리와 밤마다 무당 굿 소리에 곤혹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님들은 4대문 성안에 사는 것 보다 밖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지금의 동산병원과 계명대 캠퍼스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지 못해 몰래 시신을 묻었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당시 고관들에게도 그 땅이 골치 아픈 땅이었기 때문에 선교사님들은 쉽게 그 땅을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그 땅은 대구지역 복음화의 요람으로 남아있습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와 사역을 감당하던 아담스 선교사님은 부인 닐 딕의 죽음으로 큰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스 선교사님은 그 고통가운데에서도 조선 사랑을 이어갑니다.
제일교회 내에 남자 소학교를 세워 교육선교를 지속하면서 계성중학교를 세웠고 후에 계명대학까지 아담스 선교사님에 의해 세워지게 됐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놓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근 40년 동안 한국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는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조선사랑을 위해 한국에서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선교사님들은 십자가의 복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대구의 ‘사과 미인’이라는 말도 선교사님들이 대구에 사과를 심음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우고 우리 민족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의 삶을 살고 가신 분들입니다.
동산병원 선교관 앞에 자리 잡은 선교사님들의 무덤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 됐는지를 알려주는 증표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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