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불교와의 전쟁
01. 불교를 강력히 탄압
세종 치세 중 불교에 대한 정책은 훈민정음 창제(세종 25년, 1443년, 세종 47세)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죽고 나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태종 재위기간 중 우여곡절 끝에 선위되었다. 태종의 계략에 의한 의도적 과정을 거쳤다. 세종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배불정책(排佛政策)을 이어받아 더한층 불교 억압에 몰두한다. 태종 때 혁파한 사찰과 노비 중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못한 나머지를 모두 처리했다. 연례행사인 도성 내의 경행을 폐지시켰으며, 성 밖 승려는 성내 출입을 금하고, 동진출가(童眞出家)를 엄금했다.
세종 6년 4월에는 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계종, 천태종, 총남종을 합쳐서 선종(禪宗)으로, 화엄종, 자은종, 중신종, 시흥종을 합쳐서 교종(敎宗)으로 만들었다. 남았던 7종을 선종, 교종의 두 종파로 축소한 것이다. 전국에 36개 사찰만 남겨 선종 18사에 전답 4250결, 각 절의 스님 수 도합 1,970명, 교종 18사에 전답 3700결, 스님 수 1,800명으로 제한했다. 그야말로 종교말살정책을 쓴 것이다.
서울 안의 흥천사(興天寺)를 선종의 도회소(총본사)로 삼고, 흥덕사(興德寺)를 교종의 도회소로 삼아서 덕행 높은 승려로 하여금 양종의 제반 사무(寺務)를 관장하게 했다. 태종에 의해 전국 사찰이 242사로 축소되었는데, 세종 때는 사정없이 줄여서 36사만 남는다. 선교 양종 36사, 전답 7950결, 총 승려 수 3,770명만 남는다. 불교의 초토화 전략이었다.
종파, 사찰을 축소 폐합하니 거기에 속한 적지 않은 토지와 노비가 국가 재산으로 몰수되었다. 세종조 초반에 두 차례에 걸쳐 불교 핍박에 항의하는 사건이 있었다. 승려들이 중국으로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국내의 심한 불교 박해 사정과 이에 대한 구원을 호소한 일이 있었다. 명황제 성조(成祖)는 독실한 불자였기 때문에 그 호소가 다소 효력이 있었다. 세종은 그 사건으로 배불정책을 늦추고 명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잠시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불교 탄압의 절정은 성군 세종 때다. 석가모니를 석씨, 부처를 불씨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미 정도전(鄭道傳)이 유교를 국교로 하기위한 사전 정리차원의 불교말살정책 교재와 같은『불씨잡변(佛氏雜辯)』을 쓰지 않았던가.
이성계가 머물렀던 양주 회암사지
02. 그런 세종이 왜 변심했을까
세종도 한 인간이었다.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성군이었을지라도 개인적인 비애가 많았다. 사무실에 출근했을 때와 퇴근했을 때의 모습이 다른 것이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첫 아이라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정소공주가 세종 6년인 1424년, 나이 13살 관례를 치르고, 또 혼례도 올리지 못하고 병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1444년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나이 스물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다음 해엔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이 역시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연이은 자식들의 죽음은 친정부모형제의 일로 힘겹게 버텨온 소헌왕후를 기어이 병석에 눕게 했고,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1446년 52세로 죽었다.
유교적으로 이런 소헌왕후를 위로해 줄 어떤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불교가 나라의 임금이 바뀐다고 금방 바뀌는 그런 정신문화가 아님은 물론이지만 소헌왕후도 소리 없는 불교신자였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마침 한글 창제와 맞물려 많은 불교관련 서적의 간행으로 이를 한글 실용화와 보급에 활용하기 좋은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또 그를 뒤에서 응원하는 형 효령대군이 스님이 아니었던가. 나중에 불교를 통한 한글 보급은 아들 세조로 이어졌다.
소헌왕후와 합장릉 여주 영릉
03. 내불당(內佛堂)의 재건
김수온의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에 의하면 1433년(세종 14)에 혁파한 문소전(文昭殿)에 있던 내불당(內佛堂)을 재건하게 하였다. 1448년(세종 30) 7월 19일, 세종은 의정부에 전교하여, 태종이 일찍이 문소전(文昭殿) 곁에 불당(佛堂)을 세워 열성조(列聖朝)의 명복을 빌었으나 지금에 이르러 불당을 경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선왕의 원을 저버린 것이나 다름없음을 밝히고, 의정부 좌참찬(左參贊) 정공(鄭恭)과 중추원사(中樞院事) 민신(閔伸) 등으로 하여금 불당을 경영하게 하고 안평대군(安平大君)용(瑢)에게 새로운 불당을 짓는 일을 총감독하게 하였다.
그 명에 따라 궁성 북쪽에 터를 잡고 7월 28일 기공하여 11월 20일에 준공하였는데, 불전 1칸, 승당 3칸, 선당(禪堂) 3칸, 정문과 주방과 곳간 등이 26칸이었다. 또 황금으로 삼존불을 조성하고, 약사여래와 아미타불, 보살상과 나한상을 조성하여 모셨으며, 대자암(大慈庵) 주지 신미(信眉)와 김수온으로 하여금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짓게 하였다.
04. 훈민정음 창제와 불경 간행
그렇게 해서 석가모니의 일대기중 중요한 것은 상세하게 덜 중요한 것은 간략하게 서술하여 펴낸 언해본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석보상절은 수양대군이 김수온의 도움을 받아 펴낸 책이다. 석보는 석가의 족보(釋譜), 가계와 일대기란 뜻으로 석보상절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모두 1447년 간행되었으니 훈민정음창제이후 최초로 간행된 책이 석가모니 일대기인 것이다.
세종은 석보상절을 읽고 큰 감동을 받고, 석가의 공덕을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라는 대서사시로 노래하였다. 세종이 직접 서술한 월인천강지곡은 불교 역사에서 뛰어난 찬불문학이며 찬불가사이기도 하다. 세종의 불심을 더욱 깊이 들여다 볼 수 있는 기록은 바로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이다.
훈민정음해례본(간송본)
05. 김수온의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
①개설
대자암(大慈庵) 주지 신미(信眉)대사를 궁중의 내불당(內佛堂) 주지로 임명하고 신미대사의 동생 김수온(金守溫, 1410∼1481)에게 불사(佛事) 과정 전부를 기록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이다. 조선초기 서거정.강희맹과 함께 3대 문장가로 꼽히는 김수온이 세종의 명을 받아 직접 기록으로 남긴 것이 동국대 도서관 소장 사리영응기이다. 삼존불 점안식을 준비하면서 세종은 자신이 직접 곡을 쓰고 작시한 7곡 9장의 찬불가를 연주하였다. 7곡 9장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법하실 때 7처 9회 설법을 인용한 것이다. 세종의 불심뿐 아니라 불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엿볼 수 있다.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는 세종의 명을 받은 김수온이 세종 31년(1449)에 간행한 것으로, 내불당(內佛堂) 조성 과정과 사리(舍利) 분신(分身)의 이적을 기록되어 있다. 이 책에는 세종이 지은 7곡의 악곡과 9편의 악장으로 구성된 ‘친제신성(親制新聲)’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②편찬·발간 경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세상을 떠난 후 불교에 의지하던 세종은 1448년(세종 30)에 지난 1433년(세종 14)에 혁파한 문소전(文昭殿)에 있던 내불당(內佛堂)을 재건하게 하였다.(『세종실록』 30년 7월 17일),(『세종실록』 30년 8월 5일) 그 명에 따라 궁성 북쪽에 불당을 준공하였는데, 불전 1칸, 승당 3칸, 선당(禪堂) 3칸, 정문과 주방과 곳간 등이 26칸이었다.
또 황금으로 삼존불을 조성하고, 약사여래와 아미타불, 보살상과 나한상을 조성하여 모셨으며, 대자암(大慈庵) 주지 신미(信眉)와 김수온으로 하여금 『삼불예참문(三佛禮懺文)』을 짓게 하였다. 또한 세종은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발대원지곡(發大願之曲)」·「포법운지곡(布法雲之曲)」 등 새로운 악곡(樂曲) 7수를 만들고, 「귀삼보(歸三寶)」·「찬법신(贊法身)」·「찬보신(贊報身)」·「찬화신(贊化身)」 등 9수의 악장(樂章)을 만들었다.
수양대군(首陽大君)도 새로 저술한 『월인석보(月印釋譜)』를 받들어 올렸다.
이에 11월 18일 왕은 궁궐 안에서 재계하고 백관에게 형벌과 도살을 금한 뒤 51명의 비구승을 새 절에 모아 융성하게 재를 베풀고 새로 조성한 불상을 점안하였다. 그리고 12월 6일 낙성식을 개최하였는데, 세종은 곤룡포 두 벌과 침수향 1봉을 석가여래상에 올리며 “나의 효성이 능히 부처님을 감동시켜 대중에게 감응을 보이기를 지성으로 기원한다”고 하였다.
이때 불전에서 방광하고, 사리탑 앞에 광채가 찬란한 사리 두 개가 나타났으므로 모인 사람들이 왕과 함께 크게 경탄하였다는 내용이 『사리영응기』에 기록되어 있다.
③서지 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질은 한지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30.3㎝, 가로19.8㎝이다. 현재 고려대학교 육당문고, 동국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④구성·내용
『사리영응기』에는 세종의 ‘친제신성’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노래가 아닌 가(歌)ㆍ무(舞)ㆍ악(樂)으로 구성된 정재(呈才)로, 연꽃ㆍ작약꽃ㆍ모란꽃을 든 무동의 춤과 다수의 아악기 및 동발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점들은 ‘친제신성’이 제례악에 준하는 성격을 갖고 있으며, 불교 의례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친제신성’의 악장 9편은 그 내용 및 시상 전개에 있어 하나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데,『귀삼보』는 서사, 『찬법신』~『찬팔부』는 본사, 『희명자』는 결사에 해당한다. 이들 악장은 ‘예찬 대상의 제시→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삼보의 뛰어난 공덕 예찬→열성(列聖)의 성불(成佛) 희구’라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친제신성’ 전체의 주제의식은 ‘삼보의 공덕 제시’와 이를 통한 ‘성불의 희구’ 된다고 하겠다.
또한, 「앙홍자지곡(仰鴻慈之曲)」·「발대원지곡(發大願之曲)」·「포법운지곡(布法雲之曲)」 등 새로운 악곡(樂曲) 7수를 만들고, 「귀삼보(歸三寶)」·「찬법신(贊法身)」·「찬보신(贊報身)」·「찬화신(贊化身)」 등 9수의 악장(樂章)을 만들었으며,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새로 저술한 『월인석보(月印釋譜)』를 받들어 올렸다.
이러한 ‘친제신성’은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고 작자가 같은 『월인천강지곡』과 비교된다. 『월인천강지곡』이 백성의 교화와 당시 불교계의 순화를 목적으로 하였다면, ‘친제신성’은 세종 자신과 왕실 가족의 위안을 위해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사리영응기』의 소재인 세종의 ‘친제신성’은 세종 개인과 왕실 내심의 위안을 위해 제작된 것으로, 이 작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생교화와 성불은 당시 불교계에 대한 세종의 순화 내지 교정의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조선 초기에 ‘훈민정음’이 창제됨으로써, 한자 차자표기에 기대어 불안하게 표기되던 고유어 이름이 비로소 제 소리값대로 적히는 계기가 열렸으나, 정서법은 확립되지 않아 계속하여 이두식 한자표기를 이용하여 인명표기를 하였다. 『사리영응기』에는 ‘훈민정음’으로 적힌 고유어 이름이 보이는데, 이것은 정 7품과 종 8품 관리 이름이다. 이를 보아 조선 중기까지는 지배층 전부가 한자어 이름을 썼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前典樂署典律臣韓실구디, 前上林園司正臣朴검둥, 前上林園司正臣朴타내, 前上林園司正臣金올마대’와 같은 것이 있고, 47명의 사람 이름이 성씨와 함께 기록돼 있었다. 여기에는 이름들이 모두 한글로 나와 있는데, ‘막동, 타내, 올마대, 오마디, 오마대, 오망디, 오미디, 쟈가둥, 마딘, 도티, 고소미, 매뇌, 가리대, 올미, 더믈, 샹재, 검불, 망오지, 똥구디, 수새, 쇳디, 랑관, 터대, 흰둥, 우루미, 어리딩, 돌히, 눅대, 아가지, 실구디, 검둥, 거매, 쟈근대, 북쇠, 은뫼, 망쇠, 모리쇠, 강쇠, 곰쇠’와 같이 우리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게 성은 한자로 적고 이름은 한글로 적은 것은 이 이름들을 한자로 표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이 책은 고유어로 된 인명 연구에 귀중한 정보를 제공할 자료로 평가받는다.
⑤낙성식(落成式) 행사 상세히 묘사
이에 11월 18일 왕은 궁궐 안에서 재계하고 백관에게 형벌과 도살을 금한 뒤 51명의 비구승을 새 절에 모아 융성하게 재를 베풀고 새로 조성한 불상을 점안하였다. 그리고 12월 6일 낙성식을 개최하였는데 모두 261인이 참석하였다.
수양대군 이유에게 범패 악보를 받들게 하고 국악기를 잡은 이가 45인. 죽간자를 잡은 이가 2인. 노래하는 자가 10인. 동자로 꽃을 들고 춤추는 이가 10인 이었다. 10명의 동자들은 푸른 연꽃.흰연꽃.노란연꽃.붉은연꽃.노란모란.붉은 모란.흰모란.노란작약.붉은작약.흰작약을 잡고 화려한 관현악과 우렁찬 범패가락에 맞추어 극락의 춤을 부처님 전에 공양하였다.
주상께서 효령대군 이보.이구.이유.영응대군 이염 등에게 명하여 부처님을 모시고 가게 하였다. 불상이 교태전(交泰殿)에서 정원을 거쳐 현무문(玄武門)으로 나와 절로 향하니 꽃을 뿌리고 당번(幢幡)을 세우고 법라(法螺)를 불고 법고를 울리며 범패(梵唄)를 열창하니 그 신묘한 장엄과 하늘 음악에 모든 사람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삼존불의 점안이 끝나고 설법 자리를 펴고 낙성식을 하였다. 세종은 안평대군 이용과 이염을 불러 ‘너희는 곤룡포 2벌. 침수향 1봉지를 받들고 가서 세존께 올려라.’하고, 신미대사와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효성이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영감에 합격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대덕들의 법력에 의지하여 감응을 얻는다면 역시 가신 분을 천도하는 마음에 만족하지 않겠는가? 불사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오늘이 아니고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오늘 밤에 정성으로 간절히 애걸하기를 부지런히 하리라.‘
안평대군 이용과 신미대사가 곤룡포를 올리고 수양대군 이유가 향을 올리니 범패 한곡조가 석가모니불을 장엄하게 불렀다. 징과 북이 점점 빨라지며 대중들의 염불소리도 고조되어 염불삼매에 빠져들었다.
그때 대중들이 불전에 빛이 난다하여 바라보니 사리탑 앞에 사리 2과가 출현하여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특이한 향기가 진동하여 모든 사람들이 극락의 향기와 불공덕을 체험하였다. 세종은 곧바로 최읍에게 명하여 곤룡단 2필과 채색비단 2필을 불사리에 공양하였다. 아울러 그 자리에 함께 한 대중들에게도 견직천을 선물하였다.
대중들이 함께 발원하였다.
‘우리들은 오늘 성상의 은혜로운 덕을 입어 친히 세존을 예배하고 공양할 수 있었으니 아난.가섭과 무엇이 다르오리까? 이도량의 대중들은 미혹을 벗어나 깨달음을 이루고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어가기를 발원합니다.’
이에 서로 서로 향을 바치고 분신사리에 예배하였다. 세존과 보살.팔부신장을 체험한 기쁨으로 스님과 신도들이 서로 마주보며 큰절을 올렸다. 그때에 불전에서 방광하고 사리탑 앞에서 사리 두 개가 나타났는데, 광채가 찬란하였으므로 모인 사람들이 왕과 함께 크게 경탄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식우집(拭疣集)』 권2에도 수록되어 있다.
규장각도서·동국대학교 도서관 및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육당문고(六堂文庫)에 1부씩 소장되어 있는 이 책의 끝에는 이 일에 참여한 신미(信眉)를 비롯한 많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06. 세종실록 기사
세종실록121권
세종 30년 7월 17일 신축 문소전 서북에 불당을 설치할 것을 명하자 이사철·이의홉 등이 불가함을 아뢰다 |
승정원(承政院)에 글을 내리었는데, 그 글에 말하기를,
"불씨(佛氏)의 도(道)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은 예전 사람이 많이 말하였고, 지금 사람도 많이 말하여, 삼척동자라도 모두 익히 들은 것이니, 무얼 반드시 다시 의논하랴. 세상의 모든 일이 취(取)와 사(捨)에 불과하니, 남김없이 사태(沙汰)한다면 사(捨)라고 이르는 것이 가할 것이고, 사태(沙汰)하지 못한다면 취(取)라고 이르는 것이 가할 것이다. 기신(忌晨)에 재(齋)를 베푸는 것과, 대상(大喪)에 추천(追薦)하는 것과, 여러 절의 조(租)를 먹는 밭과, 도첩(度牒)에 돈을 바치는 영갑이 모두 사(捨)하지 못하고 취한 것이다. 처음에 문소전(文昭殿)이 창덕궁(昌德宮) 중장(重墻) 밖에 있고, 문소전 담 동쪽에 한 불당(佛堂)이 있어 일곱 중이 지키었으니, 개경(開慶)·연경(衍慶)·숭효(崇孝)와 동일한 뜻이다. 계축년에 옮겨 봉안할 때에 인하여 파괴하고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하였다. 국가에서 이미 불씨를 끊어 버리지 않는다면 이 한 불당이 더욱 먼저 하여야 할 것인데, 폐하여 걷어치우고 돌아보지 않으니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인인(仁人) 효자가 시험삼아 마음으로 헤아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문소전(文昭殿) 서북 빈 땅에 한 불당을 짓고 일곱 중으로 지키려고 하는데, 그 제도는 정당(正堂)이 한 간이고, 동서의 낭사(廊舍)가 각각 세 간이며, 부엌이 세 간이어서, 이것에만 그칠 뿐이다. 근일에 이 뜻으로 두 의정(議政)에게 말하니 모두 불가하다 하며, 궁성(宮城) 안에 있는 것은 더욱 불가하다 하였다. 그러나 옛터가 창덕궁 중장(重墻) 밖에 있었고, 이것도 역시 중성(重城) 밖에 있으니, 멀고 가까운 것으로 말한다면, 저것은 가깝고 이것은 머니, 불가한 것을 보지 못하겠다. 흥천(興天)·흥덕(興德)·개경(開慶) 등 절이 혹 비가 새거나, 혹 기울어져 위태하여, 형세가 장차 퇴락하게 되면, 국가에서 반드시 공장을 시켜서 수즙(修葺)하는 것은 선왕이 세운 것이어서, 의리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퇴락하는 것을 앉아서 보고 중수하지 않는 것을 옳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은 차마 할른지, 나는 차마 못하겠다. 지금 이 불당이 다른 절에 비하면, 그 뜻이 더욱 친절한데, 폐철(廢撤)한 지 여러 해가 되었으니, 마음에 부끄럽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수리하지 않는 것도 불가한데, 하물며 폐철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하교(下敎)하기를,
"내 뜻은 여기에 그치고 다시 다른 말을 하지 않겠으니, 정부에 이르라."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이사철(李思哲)·우승지(右承旨) 이의흡(李宜洽)·좌부승지(左副承旨) 안완경(安完慶)·우부승지(右副承旨) 이사순(李師純)·동부승지(同副承旨) 이계전(李季甸) 등이 말을 함께 하여 아뢰기를,
"금내(禁內)에 불당을 설치하는 것은 진실로 불가하고, 또 문소전은 청재(淸齋)하는 곳인데, 승도(僧徒)로 하여금 그 옆에 처하게 하는 것은 더욱 불가합니다. 중을 ‘상문(桑門)’이라고 하는데, 상(桑)이란 말은 상(喪)이니, 길한 것과 흉한 것이 서로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대소의 제사와 향축(香祝)을 행하는 데에 반드시 중이 따르는 것을 금하는 것은, 상인(喪人)에 비하는 것입니다. 지금 문소전은 생(牲)과 악(樂)을 써서 길례(吉禮)로 받드는데, 흉하고 더러운 무리가 그 곁에 끼어 있으면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습니까. 또 그 출입하는 것이 반드시 효선문(孝先門)으로 통하옵는데,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이 효선문으로 말미암아 금중(禁中)에 출입하게 되니, 보고 듣기에 어떠하겠습니까. 원컨대, 이 일을 정지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만일 하나하나 대답하면 인군(人君)이 말이 많은 데에 이르게 되니, 가하겠는가."
하였다. 이사철 등이 재차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原文】
下書承政院。 其書曰:
佛氏之道是非善惡, 古人多言之, 今人多言之, 三尺童子, 皆習聞之, 何必更論! 世之凡事, 不過取與捨而已。 沙汰無遺, 則謂之捨可也, 不能沙汰, 則謂之取可也。 (忌晨) 之設齋、大喪之追薦、諸寺食租之田、度牒納錢之令, 皆所以不能捨而取之也。 初, 文昭殿在昌德宮重墻之外, 殿之墻東有一佛堂, 七僧守之, 與開慶、衍慶、崇孝同一義也。 癸丑年移安之時, 因而破壞, 至今未復。 國家旣不棄絶佛氏, 則此一堂, 尤其所先者也, 而廢撤不顧, 於心安乎? 仁人孝子試以心度之, 則可知矣。 今欲於文昭殿西北空地, 營構一堂, 七僧守之。 其制度正堂一間, 東西廊各三間, 門三間, 廚三間, 止此而已。 近日以此意語兩議政, 皆曰: "不可。", 而在宮城之內, 尤以爲不可。 然古基在昌德宮重墻之外, 此亦在重城之外, 以遠近言之, 彼近而此遠, 未見其不可也。 興天、興德、開慶等寺, 或雨漏, 或傾危, 勢將頹落, 則國家必使工匠修葺之者, 以先王之所建, 義不得不然也。 若以坐視頹落不修爲是, 則他人忍之乎? 我不忍也。 今此佛堂, 比之他寺, 其義尤爲親切, 而廢撤累年, 於心有所愧恥, 孰甚於此! 不修且不可, 況廢之乎!
仍敎曰: "予意止此, 更不他言, 亦諭於政府。" 都承旨李思哲、右承旨李宜洽、左副承旨安完慶、右副承旨李師純、同副承旨李季甸等同辭以啓曰: "禁內設佛堂, 固不可也, 且文昭殿淸齋之所, 使僧徒處於其傍, 尤爲不可。 號僧爲桑門, 桑之爲言, 喪也。 吉凶不可相干, 故大小之祭, 香祝之行, 必禁僧從, 比喪人也。 今文昭殿用牲與樂, 奉以吉禮, 而凶穢之徒, 間於其側, 豈安於心乎! 且其出入, 必由孝先門, 異服之人, 由孝先門出入禁中, 於觀聽何如? 願停此擧。"
上曰: "予何言哉! 若一一答之, 則人君至於多言, 可乎?" 思哲等請至再, 不允。
세종실록
세종 30년 8월 5일 무오 수양과 안평 대군이 궁금 옆에 불당을 설치하다 |
【국역】
대간(臺諫)이 불당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두세 번이나 청하였으나, 마침내 회답하지 아니하였다. 임금이 만년에 병으로 대신과 접견하지 못하였는데, 광평(廣平)과 평원(平原) 두 대군(大君)이 연하여 죽고, 소헌 왕후(昭憲王后)가 또 승하하니, 임금의 마음이 힘입을 데가 없었다. 이에 수양 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의 휘(諱). 】과 안평 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이 사설(邪說)에 혹하여 먼저 뜻을 열고 인도하여 궁금(宮禁) 옆에 불당을 두므로, 일국의 신료가 극진히 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오히려 하늘을 돌이키지 못하여 성덕(聖德)에 누를 끼쳤으니, 이것은 실로 두 대군의 계적(啓迪)한 허물이었다.
【原文】
臺諫請停佛堂之役再三, 竟不報。上晩年以病不得與大臣接見, 而廣平、平原二大君連逝, 昭憲王后又薨, 聖心無聊。於是首陽大君、【世祖諱。】安平大君 瑢惑於邪說, 先意啓迪, 置佛堂於宮禁之傍, 一國臣僚, 莫不極諫, 而尙不回天, 以累聖德, 此實兩大君啓迪之過也。
세종 30년 12월 5일 정사 불당 경찬회를 베풀다 |
【국역】
불당(佛堂)이 이룩되니, 경찬회를 베풀고 5일 만에 파하였다. 불당의 제도가 사치와 화려함이 지극하여 금과 구슬이 눈을 부시게 하고, 단청이 햇볕에 빛나며, 붉은 비단으로 재봉(裁縫)하여 기둥에 입혀서 주의(柱衣)라고 이름하여 더럽혀짐을 방지하고, 향나무를 새겨 산(山)을 만들고 금부처 세 구(軀)를 그 가운데 안치하였으니, 그 금부처는 안평 대군(安平大君)이 일찍이 성녕 대군(誠寧大君) 집에서 감독해 만든 것이다. 근장(近仗)으로 하여금 관대(冠帶)를 갖추고 대가(大駕)를 호위하는 의식과 같이 대내(大內)에 메고 들어가게 하여, 친히 관람하신 뒤에 불당에 안치하였다. 그 바깥담을 쌓을 때에 자꾸 얼어서, 담의 안팎에 숯불을 피워서 따뜻하게 하니, 잠시 만에 담이 말랐다. 종친(宗親)·대군(大君)·제군(諸君)들이 다투어 일재(日齋)를 베풀어 혹 뒤질까 염려하였고, 의정부 좌참찬 정분(鄭苯)과 병조 판서 민신(閔伸)이 그 역사(役事)에 제조(提調)가 되었으므로, 모두 털옷[毛衣]을 하사하고, 이명민(李命敏)은 역사를 감독한 일로써 품계를 뛰어 올려 벼슬을 제수하였다. 정분과 민신은 처음에는 의정부와 육조(六曹)의 당상(堂上)으로써 예(例)에 따라 간(諫)하였으나, 감독의 명을 받음에 미쳐서는 지극히 사치하게 하기를 힘써서 임금의 뜻을 맞추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비난하였다.
경찬회를 베풀자,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에게 명하여 기일 전에 그곳에서 치재(致齋)하고 모든 일을 통찰(統察)하게 하며, 또 각사(各司)의 장관(長官)으로 하여금 공급할 찬품(饌品)을 친히 감독하게 하니, 모두 내주 옹인(內廚饔人) 이 장만한 것으로 어선(御膳)과 다름이 없고, 또 외승(外僧)과 사장(社長)을 불당 밖의 건천(乾川)에서 공궤하니, 하룻동안에 공궤한 사람이 7,8백 명에 내려가지 아니하고, 소비한 쌀이 2천 5백 70여 석이었다.
신곡(新曲)을 지어 관현(管絃)에 올리고, 악기(樂器)를 모두 새로 만들어서 공인(工人) 50명과 무동(舞童) 10명으로 미리 연습시켜서 부처에게 공양하여, 음성공양(音聲供養)이라고 일렀으니, 종(鍾)·경(磬)·범패(梵唄)·사(絲)·죽(竹)의 소리가 대내(大內)에까지 들리었다. 정분·민신·이사철·박연(朴堧)·김수온(金守溫) 등이 여러 중[僧]들과 섞이어 뛰고 돌면서 밤낮을 쉬지 아니하니, 땀이 나서 몸이 젖어도 피곤한 빛이 조금도 없었다. 이명민이 한 환자(宦者)와 더불어 선언하기를,
"바야흐로 정근(精勤)할 때에 문(門)에 나와 돌아보니, 사리(舍利)가 빛을 내는데, 빛이 불꽃과 같고, 가운데에 흰 기운이 있어 진하게 맺혀서, 떨어지는 것이 진주(眞珠)와 같았다."
고 하니, 듣는 자들이 비난하기를,
"진실로 그런 것이 있었다면 무엇 때문에 문밖에 있는 명민만이 홀로 보고, 당(堂) 안에 있는 여러 사람은 보지 못하였을까."
하였다. 회(會)를 파하고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경찬회를 그림으로 그리고, 또 계문(契文)을 지어 모임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벌여 써서 축(軸)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으니, 주서(注書) 성임(成任)도 참여하였다. 수양대군이 말하기를,
"너는 공자(孔子)의 도(道)와 석가(釋迦)가 누가 낫다고 이르느냐."
하니, 성임이 대답하기를,
"공자의 도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읽어서 대강 그 뜻을 알거니와, 석씨(釋氏)에 이르러서는 내가 일찍이 그 글을 보지 못하였으니, 감히 알지 못합니다."
하매, 대군이 말하기를,
"석씨의 도가 공자보다 나은 것은 하늘과 땅 같을 뿐만 아니다.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비록 좌소용마(挫燒舂磨) 하고자 할지라도 베푸는 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말한 것이다."
하였다.
【原文】
佛堂成, 設慶讃會, 凡五日而罷。 佛堂制作, 窮極侈麗, 金珠眩目, 丹靑耀日。 以絳綃裁縫被楹, 謂之柱衣, 以防汚毁。 刻香木爲山, 安黃金佛三軀于其中。 其金佛, 安平大君嘗監鑄于誠寧大君第, 令近仗具冠帶, 如衛大駕儀輿入于內, 親賜觀覽, 然後安于佛堂。 其築外垣時方凍洌, 垣之內外, 燃炭以溫之, 須臾而燥。 宗親、大君、諸君爭設日齋, 惟恐或後。 議政府左參贊鄭苯、兵曹判書閔伸提調其役, 皆賜毛衣; 李命敏以督役, 超資授職。 苯、伸初以政府六曹隨例諫諍, 及承監督之命, 務極奢侈, 以稱上意, 識者譏之。 及作會, 命都承旨李思哲, 先期致齋于其所, 統察諸事。 又令各司長官親監供給饌品, 皆內廚饔人所辦, 與御膳無異。 又供外僧及社長於佛堂外乾川, 一日所供, 不下七八百人, 所費米二千五百七十餘石。 爲製新曲, 被之管弦, 樂器皆令新造。 以工人五十、舞童十人預習之, 用以供佛, 謂之音聲供養。 鍾磬梵唄絲竹, 聲聞大內。 苯、伸、思哲、朴堧、金守溫雜於群僧, 踴躍周匝, 不徹晝夜, 汗出渾身, 略無倦色。 命敏與一宦者宣言: "方精勤時, 出門顧見, 舍利放光, 光如火焰。 中有白氣, 濃結滴落, 若眞珠然。" 聞者譏之曰: "誠有是歟? 何故在門外命敏獨見, 而堂內衆人, 未之見也?" 會罷, 首陽大君圖慶讃會, 又製契文, 列書與會人名, 作軸分與之。 注書成任亦與焉, 首陽大君語曰: "汝謂孔子之道, 與釋迦孰優?" 任曰: "孔子之道, 吾嘗讀其書, 粗知其義, 至若釋氏, 吾不嘗見, 其書未敢知也。" 大君曰: "釋氏之道過孔子, 不啻霄壤。 先儒曰: ‘雖欲挫燒舂磨, 無所施。’ 此未知其理而妄言者也。"
세종대왕의 영릉
[출처] 세종대왕의 불교와의 전쟁|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