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현 가라쓰1 - 니지노마츠바라 방풍림을 지나 가라쓰에 도착해 옛일을 생각하다!
우리 가족 7명은 2023년 2월 22일 11시 30분에 부산을 출발해 한시간만에 후쿠오카 공항에 내려 셔틀버스
로 국내선 공항 에 가서 도로 건너편에 Budget 회사 사무실에서 렌트카 승합차를 빌려타고는
이토시마시 (糸島市)를 거쳐 사가현으로 들어서 소나무 숲 니지노마츠바라를 지나 가라쓰성 에 도착합니다.
가라쓰시 (唐津市) 는 사가현 북서부 대한해협에 면한 도시로 충청남도 당진(唐津)시 와 마찬가지로
옛날 당나라와 교역하던 항구 였던데서 유래한다는데, 예전부터 한국과 교역이 활발한 항구였으며
오래 전에는 韓津(한진 가라쓰) 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정도로 한반도와의 왕래가 활발했습니다.
드디어 가라쓰성 (唐津城) 에 도착하였기로 렌터카 차에서 내리는데 나중에 보니 왼쪽 으로
올라 갔으면 바로 가라쓰성 정문으로 오르는 긴 계단 을 만났을 것인데.....
우리는 오른쪽 길 로 간지라, 오른쪽은 바다이고 왼쪽은 성벽 바깥을 한바퀴 돌게 되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은 고대에 문자가 없었으니 오랜 세월 말 로만 이어지다가 중국 한나라에서 漢字(한자) 가 전해
지니 자기 고유의 말을 한자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가야 를 뜻하는 말만 해도.... 가야(加耶· 伽耶·
伽倻)· 가라(加羅)· 가량(加良)·가락(駕洛)· 구야(狗邪· 拘邪)·임나(任那), 한(韓) 등 인데.... 모두 같은 뜻 입니다?
규슈 가고시마 북쪽에 기리시마 霧島(무도) 산 일대를 에비노 고원 えびの こうげん 高原 이라 하니
일본 건국신화에 천손 니니기가 강림했다는 다카치호봉 高千穗峰 과 가라쿠니다케 (韓國岳) 가
있는데..... 韓國岳(한국악) 을 “가라쿠니다케” 라고 하니 한국 = 가라 = 가야 는 모두 같은 뜻입니다.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의 손자 니니기 가 하늘로 부터 다카지호다케 (高天穗岳) 구시후루봉
에 내려왔다고 하는데..... 韓國岳(한국악, 가라쿠니다케)의 근처에 있으며,
“구시후루” 는 김수로왕이 김해 “구지봉” 에 내려왔다는 한국의 건국신화를 차용한 것입니다?
니니기는 “여기는 가라가 보이는 곳이니 좋은 땅 이다” 라고 말한 것이나 또 “ 이곳은 한국(韓國) 을
향하고 있고 가사사의 곶과도 통하여 아침해가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이다!
라고 말하고는 반석에 기둥을 세우고 궁궐을 지어 살았다“ 고 하는데..... 그럼
천손 니니기는 가야인(한국) 이고 하늘나라 란 왜국으로 이주하기 전의 "한반도" 를 말함일러나?
삼국시대 일본은 가야에서 철 을 수입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는데 가야 = 가라 이니 “가라가 곧 외국”
이라는 뜻으로 되는데..... 훗날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가 되면 더 이상 한국에서 중국 문물을
간접적으로 수입하지 않고 중국에 직접 사신을 보내 문물 을 수입하니 韓津(한진)은 (唐津 당진)
으로 바뀌었지만.... 발음 만큼은 외국을 뜻하는 “가라” 를 계속 사용하니 “가라쓰” 라고 부르는 것 입니다.
왜국에서는 당나라에 앞선 수나라에 보낸 견수사 (遣隋使) 는 스이코 오키미 시대에 왜국
(倭国) 이 기술이나 제도를 배우기 위해 중국의 수나라에 조공 사절 을 파견했으니
스이코 8년(600년) ~ 26년(618년) 이렇게 18년 동안에 5회 에 걸쳐 파견 되었습니다.
수나라 이전에는 왜 5왕 에 의한 중국 남조(제, 양, 진) 로 조공사를 보내 책봉 을 받았었는데, 견수사의 목적
은 동아시아의 선진국인 수의 문화 를 섭취하는 것이었으니.... 왜 5왕 시대와 달리 책봉을 받지는 않는
(일본왕은 중국 황제의 신하가 아님!) 것을 외교 원칙으로 하였으며 이후 견당사 파견에도 계승되었는데,
중국 주변의 나라들이 황제에게 책봉을 받으며 국서에 자신은 "신(臣) 이라 칭하며 공순했던 것과는 다릅니다.
제1회(600년) 사신은 수서에 보면, 성은 아마(阿毎), 자는 다리사북고(多利思北孤), 아배계미(阿輩雞弥,
오키미) 라 하니 상(황제)이 소사를 시켜 그 풍속을 묻자 사자가 말하기를 왜왕은 하늘을 형으로
하고 태양을 동생 으로 한다. 날이 밝기 전에 나아가 정사를 듣고자 가부좌를 틀고 앉으며 해가
떠오르면 동생에게 맡긴다 하니 수 문제가 말하기를 이는 의리가 없는 것 이라 훈시하고 고치도록 하였다.
왜왕의 성인 아매는 일본어로 '하늘' 이라는 뜻의 '아메' (アメ), 다리사북고는 다라시히코, 즉 '아메노
다라시히코' 로, '하늘에서 내리신 분' 의 뜻이 된다. 아배기미는 '오오키미' 로 대왕
으로 여겨지니 『신당서』는 오키미 요메이라고 하지만 개황 20년은 오키미 스이코 8년에 해당합니다.
제2회(607년) 견수사는 《일본서기》 에도 기재되어 있으며, 스이코 15년(607년) 에
오노노 이모코 가 국서를 가지고 파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의
왕으로 부터 수 양제에게 보낸 국서가, 《수서》「동이전」 왜국전 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 뜨는 땅의 천자 가 해 지는 땅의 천자 에게 글을 보내니 별고 없으신가」(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
無恙云云) 이라고 쓰여져 있었으니..... 이것을 본 수 양제는 매우 화가 나서 외교 담당관
인 홍려경(贚臚卿) 에게 「만이의 글에 무례한 것 이 있으니 거듭 알리지 말라」 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또한, 양제가 불쾌해 한 것은, 천자는 중화 사상에서는 한 명 뿐이어야 했고, 수의 입장에서는 일개
변방 국가의 수장이 「천자」 를 자칭 했다는 것에 대해서 불쾌해한 것이지 「해 뜨는 땅」,
「해 지는 땅」 등의 기술에 대해서는 불쾌하지 않았다는데.... 사신의 목을 베지 않고 이후에도 받는
것을 보면 고구려와 전쟁 중이라 왜국을 적국으로 돌릴수 없어 "수양제가 화를 참은" 것으로 봅니다?
오노노 이모코(소인고) 는 반서 를 갖고 돌아왔는데, 양제가 칙사로 파견한 배세청 (裴世清) 과 함께
귀국한 이모코는 양제의 답서를 백제에서 도난 당해 잃어버렸다고 밝혔는데.... 이에 대해서는
양제로 부터의 답서가 왜국을 신하 취급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보였다가는 왜국왕
의 분노 를 살 것을 두려워한 이모코가 답서를 파기해 버린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배세청이 가져온 양제의 칙서는.... “황제가, 왜황 에게 묻는다. 짐은 천명을 받아 천하를 통치 하며, 덕을
넓혀 만물에 미치게끔 하고자 한다. 사람들을 어여삐 여겨 기르고자 하는 마음에 멀고 가까움의
차별은 없도다. 왜황은 바다 가까이에 있어 잘 인민을 다스렸고, 국내는 안락하고, 풍속은 온화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 다하기를 지성으로 하였으니 먼 곳에서 본조에 조헌해 온 마음을 짐은 가상히 여기노라."
이것은 황제가 번이의 수장 에게 내리는 형식의 국서이지만 “왜황(倭皇) 으로 되고 있어, 「왜황」을
훗날 《일본서기》 편찬에서의 개찬 으로 하는 견해가 있다. 《일본서기》 에 따르면
이에 대한 답서는 「동쪽의 천황이 삼가 서쪽의 황제 에게 고한다」(「東天皇敬白西皇帝」 《일본서기》)
제3회(608년) 배세청을 보냘때 오노노 이모코가 다시 파견됐다. 이때는 많은 유학생 을 대동하고
갔는데, 다카무코노 겐리(高向玄理), 미나부치노 쇼안(南淵請安), 승민(僧旻), 야마토노아야
후쿠인(倭漢福因), 에긴(恵隠) 등이었다. 이들은 수 왕조의 멸망과 당 왕조의 개창 을 체험
하고 귀국하였으며, 7세기 후반의 왜국의 개혁에 공헌하며 614년 마지막 견수사가 파견됩니다.
견당사 (遣唐使)는 야마토 정권과 나라 시대 (710년~794년) 와 헤이안 시대 (794년~1185년) 에 일본 조정
에서 당(唐) 에 파견한 사신으로 618년 수가 멸망하고 새로 당이 개창하였는데, 사신 파견의 전통은
이어져 견수사를 견당사로 개칭하고 당에 190차례 에 사신을 파견해 문물을 도입 했으며.... 894년
당나라가 대혼란에 빠지자 더 배울게 없다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 의 건의에 따라 폐지 됩니다.
최초 견당사 (제1차) 는 조메이왕(舒明天皇 630년) 때 파견된 이누카미노 미타스키(犬上御田鍬) 였는데
중국의 선진 기술과 불교 경전 의 수집이 주요 목적이었으니 《구당서(舊唐書)》 에는 일본의 사절이
중국 황제로 부터 하사받은 보물을 모두 시정에 내다팔아 돈으로 바꾸어서 많은 “서적” 을 사가지고
귀국했다는데. 19세기 후쿠자와 유기치 가 미국 출장비를 줄여 서구문명에 관한 책을 사온 것과 유사합니다.
견당사 가 파견될 무렵 천황(天皇) 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 대해, 중국과의 대등한
외교 자세를 보인 것으로 해석하지만 어디까지나 일본측의 일방적인 태도이고......
당(唐)나라 측 기록에서 일본을 자국과 대등한 국가로 취급한 기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 덴표쇼호(天平勝宝) 5년(753년) 에 당으로 파견된 사신이 참석한 당 조정의 신년 하례 에서 일본 사신
이 신라 사신보다 석차가 낮게 매겨지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옛날 왜의 전신인 노국왕(奴國王) 이나
야마타이국(邪馬臺國) 의 여왕 히미코(卑弥呼), 왜5왕(倭の五王) 이 중국 왕조에 신하 를 칭하며
책봉 을 받은 것에 비해 견당사 시대에 일본왕(천황)이 당 왕조로 부터 책봉받은 기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후 당의 승려 유탁(維躅) 의 글에 보이는 「20년에 한 번(二十年一来)」조공 은 8세기에 이르러
규정화되어, 십수년에서 이십수년의 단위로 견당사의 파견이 이루어졌으니 이들은
당시의 선진국이었던 당의 문화와 제도, 그리고 불교 를 일본으로 전파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630년에서 894년에 이르는 265년간 총 190차례의 견당사 가 파견되었습니다.
왜국이 처음 견당사를 파견한 것은 조메이 왕 2년(630년) 이었는데, 스이코 왕(推古天皇 618년)때 수가 멸망
하고 당이 천하를 평정하였다는 정보를 왜국도 빠르게 접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쇼토쿠 태자(聖徳太子) 나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스이코왕등의 잇따른 죽음 으로 사신 파견이 늦춰졌을 가능성도 있으며 반면에
고구려(高句麗)는 당의 성립 이듬해 에,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는 그 2년 뒤에 당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당은 귀국하는 견당사에게 고표인(高表仁)을 붙여주었지만, 고표인은 왜국에서 예(禮)를 다투다가 황제의 말도
전하지 않은채 귀국해 버렸으니 조메이왕(천황)과 불화 가 일어난 것인데.... 당이 일본을 다른 나라들 처럼
조공국 으로 대우하려 한 것에 일본은 중국의 신하가 아니라며 책봉 받는 것을 거부한 것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사이메이왕(齊明天皇) 5년(659년)의 제4차 견당사는 이듬해 있을 백제 공격의 정보가 누설될 것을
우려한 당에 의해 억류된 채 2년 뒤에야 귀국할 수 있었고, 그 사이에 왜국에서는 백제 부흥군
을 지원하기 위한 2차례에 걸친 3만 5천명의 대규모 원병 을 파병했다가 당 수군에게
화공 을 당해 처참하게 패해 철수하니...... 수많은 백제인들이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 합니다.
일본은 견당사로 당의 선진 문화 를 흡수해 덴무(天武)·지토(持統)·몬무(文武)의 3대(673년~707년)
에는 활력에 찬 것이 특징인 하쿠호(白鳳)문화 를 일으켰고 덴표 시대(729년~748년) 에는
대륙적 문화를 꽃피웠으며..... 수입된 서적과 기술 은 이후 일본 문화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수많은 승려들이 몇십년씩 수련한 후에 일본으로 돌아와 천태종등 불교 종파 를 열었습니다.
가라쓰성 주위 를 한바퀴 돌면서 견수사와 견당사를 회상하고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가라쓰 성 으로 들어가는데...... 여긴 참으로 높은 곳이니 적군이 공격하기는
어려울 듯 싶으니, 가라쓰성은 학이 춤춘다 는 뜻의 마이즈루(舞鶴)성 이라고도 합니다.
센고쿠시대인 1591년에 데라자와 히로타카 는 조선 침략의 전초기지인 가라쓰의 히젠 나고야성
건설에 봉행 으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그 공으로 1595년에 여기 가라쓰 지역을
영지로 하사 받았으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속해 자신의 영지를 존속시켰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히고국(구마모토현) 아마쿠사군에 4만석이 가증 되는지라 도합 12만 3천석의 도자마
다이묘 가 되었으며.... 1602년 부터 여기 미쓰시마 산에 가라쓰 성을 축성 하기 시작해 1608년 완성
하는데 건축에 쓰인 돌들은 히데요시가 죽은후 폐성이 된 히젠 나고야 성을 허물어 가져왔다고 합니다.
가라쓰성 은 바다에 면한 돌출 언덕에 자리하니 얼핏 부산진성이나 다대진성과 비슷해 보이지만 더 견고해
보이는데 성을 공격할때는 첫째 5배 이상의 병사를 동원하고 둘째 성을 물샐틈 없이 포위 하며 셋째 적의
원군이 올 후방에 목책 을 쌓아 이를 저지하고 넷째 적의 성 앞에 우리편의 성을 쌓아 장기전을 대비합니다.
공격군은 병력을 나누어 밤낮으로 성을 공격해 열세인 수비군이 잠을 자지 못하도록 하는게 일반적
이지만 하시바 히데요시가 돗토리성을 포위했을때 처럼 공격하지 않고 식량이 떨어져 굶어죽기
를 바라거나 역시 히데요시가 오카야마의 다카야마성을 공격할때 성 주변을 흐르는 강 상류와
하류에 댐 을 만들어 물을 가득 가둔후 상부 댐을 터뜨려 배를 타고 성을 넘어가 공격하기도 합니다.
수나라때 고구려 요동성이나 당나라때 안시성, 고려때 귀주성이나 충주성 그리고 임진왜란때 김시민
의 진주성이나 권율의 행주산성,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 도산성, 시마즈 요시히로의 선진리성,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이며 일본 서남전쟁때 구마모토성 처럼 끝까지 수성 하거나 5~6개월을
버티는경우도 많지만.... 부산진성이나 다대진성 및 동래성 처럼 공격 2~3시간만에 함락 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