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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가장. 한때는 허창에서 가장 큰 장원이었지만 이제는 그나마 남은 전각조차 부서지고 불에 타 폐허가 되어 버렸다. 그 폐허의 잔재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주름이 가득한 노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서른쯤 돼 보이는 사내였다. 둘 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사내의 허리춤에는 검이 매달려 있었고, 그 검에 걸맞은 날카로운 기세가 주변을 잠식했다.
"완전히 무너졌군요."
"그래, 무영이 생각보다 일을 잘 처리했어."
노인은 폐허가 된 조가장을 마치 감상하듯 둘러봤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고개와 눈을 돌리며 감상하는 노인의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곧 무림맹 놈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슬슬 피하시는 것이......"
사내의 말에 노인이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얼굴의 주름이 자글자글 표정을 만들었다.
"무림맹 따위가 두려운가?"
노인의 말에 어린 웃음기를 느낀 사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내는 굳이 대답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무림맹 전체가 몰려오지 않는 한, 혈영(血影)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노인의 말에 사내의 몸이 흠칫 떨렸다. 그리고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사내의 눈에서는 자신감이 빛이 되어 뻗어 나왔다. 사내가 바로 혈영이었다.
혈영의 자신 있는 태도에 노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들이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혈영이 결국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뭐가 말인가?"
"대체 왜 조가장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의미가 없을뿐더라 괜히 무림맹에 경각심만 심어줬습니다."
그 말에 노인이 잠시 혈영을 쳐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림맹 따위가 뭐가 두렵나?"
"무림맹은 두렵지 않지만 그들에게는 천기자의 안배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혈영의 대답에 노인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변 공기를 단숨에 얼려버릴 듯한 한기가 폐허 곳곳에 스며들었다.
혈영은 노인의 그런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평온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그런 혈영의 모습에 표정을 풀었다. 노인의 표정이 풀어짐과 동시에 주변에 스며들던 한기도 따스하게 변했다.
"천기자와 나의 관계를 알고 있나?"
"목숨을 걸고 경쟁하던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혈영의 대답에 노인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허헛, 그렇지. 이 혈마자와 천기자는 뗄 수 없는 관계라네. 물론 지금은 나만 남았지만."
노인. 혈마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그 천기자의 안배가 처음 시작한 곳은 바로 이 조가장이지. 어떤가, 이제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혈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혈마자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천기자가 필생의 노력을 담아 만들어 낸 무공이 있네. 그리고 그 무공을 익힌 자가 백 명이나 되고.
하지만 난 그보다 더 대단하지. 그것을 뛰어넘는 무공을 만들었거든. 천기자는 나를 견제하느라 온전히 힘을 쏟지 못했던게야.
더구나 그 견제마저 많이 희미해지고 말았네. 천기자가 어떤 무공을 만들었는지 내가 알아냈거든."
"서, 설마 그럼......"
"말했지 않나. 내가 만든 무공이 훨씬 뛰어나다고. 그리고 그것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아이들이 있지 않나. 백 명이나."
혈영은 혈마자의 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비로소 혈마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혈마자는 천기자의 계획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부숴 버릴 작정이었다. 무림을 얻는 건 그 와중에 저절로 얻어지는 부산물에 불과했다.
"자, 이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겠나?"
혈마자가 웃으며 물었다. 혈영은 더 이상 혈마자의 웃음이 그냥 웃음으로 보이지 않았다. 두려웠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폐허를 감쌌다. 그 바람은 차가웠다. 혈마자의 웃음소리만큼.
"오, 오라버니......"
조설연이 눈물을 그렁거리며 단형우를 안고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살아났다는 안도감과 아끼던 사람들이 죽음, 그리고 도망가면서 들은 소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휘저었다.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조설연이 우는 동안 단형우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고마워요."
조설연이 단형우에게 슬며시 떨어지며 말했다. 단형우는 그런 조설연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손을 뻗어 조설연의 눈에 남아 있는 물기를 닦아냈다.
"눈물......"
그것은 눈물이었다. 너무나도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아온 것이었다. 지옥에 있을 때는 눈물을 흘릴 틈도 없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싸움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럴 여유가 생겼을 때는 그럴 이유가 사라졌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조설연은 남아 있는 눈물을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결심했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이제...... 이제 어쩌죠? 전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조설연이 어렵게 꺼낸 말이었다. 사실 무슨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묻는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옆에 단형우가 있따는 사실만으로 큰 의지가 되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뭐든지."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이 눈을 크게 뜨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설마 정말로 대답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조설연은 그제야 억지로나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요, 하고 싶은 걸 해야죠."
조설연은 대답을 하며 단형우를 쳐다봤다. 그제야 조금씩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합류였다. 원래 조가장을 나온 목적이 그거였으니 표행만은 끝까지 완수해야 했다.
표사들도 남아 있지 않다고 했지만 어떻게든 끝내리라 마음먹었다.
그 다음 조가장에 돌아가 소문의 진상을 확인할 것이다. 조설연의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도 조가장이 건재하고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물론 아닌 쪽으로 저울추가 크게 기울어 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일은 그 후에 다시 계획할 것이다.
"지금 하고 싶은 건 뭐지?"
조설연의 머릿속이 대충 정리되었을 때, 때를 맞춰 단형우가 물었다. 조설연은 옆에 조용히 미소 지으며 누워 있는 사마철을 내려다봤다.
그 옆에는 머리만 남은 조인도 함께 있었다. 흘리지 않겠다고 맹새한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두 분을......"
조설연은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단형우는 그런 조설연을 보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한번 휘둘렀다.
콰콰콰!
단형우가 휘두른 검의 궤적을 따라 바닥이 패이며 안으로 나아갔다.
마치 땅 속을 용이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 땅속이 용은 멀찍이 떨어진 바위 아래로 가더니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콰아아아!
마치 승천하는 용 같았다. 조설연은 그 광경을 멍하게 쳐다봤다. 너무나 놀라운 광경이었다.
단형우는 사마철의 시체와 조인의 머리를 들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바위 아래 어느새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나 있었다.
둘을 그곳에 넣은 단형우가 가볍게 손짓하자 주변의 흔들이 그 위를 덮었다. 순식간에 무덤이 만들어졌다.
조설연이 무덤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나중에는 정말로 근사한 곳에서 쉬게 해 드릴게요, 정말로......"
조설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단형우를 쳐다봤다.
"저도 표행에 합류할 거예요."
조설연의 말에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자 왠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졌다.
그동안 단형우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 단형우가 이렇게 강한 줄도 몰랐고, 이렇게 자신을 구해 줄 줄도 몰랐다.
사마철이 비록 절세고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허창에서는 적수가 거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그런 사마철이 제대로 상대하지도 못할 정도의 고수들을 스물이나 한꺼번에 처리했으이 얼마나 강하다는 뜻인가.
'무림맹 장로들쯤 되는 건가?'
아직 경험이 없고 무공이 강하지도 않아 견문이 일천한 조설연으로서는 단형우가 과연 얼마나 강한 것인지 측정할 수 없었다. 그저 강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조설연이 그렇게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단형우가 손을 잡았다.
"지금 간다."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이 당황했다. 가면 가지 갑자기 왜 손을 잡는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단형우만 이렇게 따로 표행에서 떨어져 나온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과 사마철이 아무리 열심히 경공을 펼치며 도망쳤다고 해도 표행을 따라잡으면 앞으로도 꽤 가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적들을 따돌리기 위해 이리저리 어지럽게 움직였으니 더 더욱 거리가 있을 터였다.
조설연은 그런 중요한 사실을 왜 이제야 생각해냈는지 스스로 자책하며 단형우에게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단형우가 걷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흐으윽!"
조설연은 갑자기 얼굴을 강하게 압박하는 바람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바람을 피해 숨을 쉬어 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숨이 막힌 순간 다시 숨쉬기가 편해졌다.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의 압력도 사라졌다.
조설연은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어머!"
주변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방금 전에 자신이 있던 곳은 거의 허허벌판이었다. 덕분에 그들에게 따라잡혀 죽을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지금 있는 곳은 수풀이 우거진 곳이었다. 나무들도 꽤 많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아, 아가씨?"
조설연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형표가 서 있었다.
"형 표사 아저씨!"
형표를 보며 반갑게 소리친 조설연이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되어 주변을 둘러봤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건장한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의 옷은 하남표국 쟁자수들이 입는 옷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 역시 조설연에게 너무도 익숙했다.
"서, 설마......!"
조설연이 팩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돌려 단형우를 쳐다봤다.
"합류했다."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자신이 원래 있던 곳이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 결코 가까운 곳은 아닐 것이다. 그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왔다. 그것도 자신을 데리고.
조설연이 새삼스러운 눈으로 단형우를 바라봤다.
단형우의 도착과 거의 동시에 표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단형우가 조설연을 데리고 오는데 걸린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에 그동안 주변 정리는 완벽하게 끝낼 수 있었다.
물론 시체를 태우지 않고 땅에 묻을 수밖에 없긴 했지만.
"아가씨, 어떻게 된 일입니까?"
형표는 조설연 옆에서 걸었다. 당연히 단형우도 그 옆에 있었다.
조설연은 두 사람을 힐끗 본 후 담담하게 얘기를 풀어나갔다. 어차피 숨길 일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단형우에게도 꼭 얘기를 해 주고 싶었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묵묵히 조설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형표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아무래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전 있는 그대로 말씀드린 거예요."
"아, 아가씨가 뭔가를 숨겼다는 의미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전 장주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버님이요?"
"그 한순간에 그런 판단을 내리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마 아가씨께선 허창을 벗어나지도 못하셨을 것입니다. 물론 무림맹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죠."
듣고 보니 그랬다. 조설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생각보다 복작한 일이 얽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지금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당가로부터 의뢰비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표행의 의뢰비는 꽤 되니까요."
형표가 빙긋 웃었다. 조설연은 그 모습을 보며 형표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었다.
"형 표사님은 벌써 그런 생각까지 하고 계셨군요. 그에 비해 저는......"
"아가씨는 그냥 그대로 계시면 됩니다. 그 자체로 힘이 되니까요. 그렇지 않은가?"
형표가 단형우를 보며 말하자 단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걸 해라."
단형우의 말에 조설연은 다시 한 번 억지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두 사람이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으니까.
관도를 약간 벗어난 곳에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마차 주변에는 청의를 입은 사내들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무질서하게 마차를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특별한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청의 사내들은 그 수가 서른이나 되었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덜컹.
마차 문이 열렸고, 그 안에서 한 여인이 사뿐히 내려섰다.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경국지색(傾國之色)이란 말이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미모의 여인이 나타났다는데도 주변에 서 있는 사내들의 눈에서는 일말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여인이 마차에서 내려서자 즉시 그 옆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마치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은밀하고 귀신같은 움직임이었다.
"정말로 실패했다고?"
"그렇습니다."
여인은 믿을 수 없었다. 상대의 전력을 충분히 예측했다.
자신이 계산한 바에 따르면 흑사단(黑蛇團) 전원이 나서면 전혀 피해 없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실패한 것이다.
"믿을 수가 없는 걸? 정말이야?"
여인의 말에 사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전멸입니다."
"전멸? 하나도 살아남지 못헀다고? 흑사단이? 단주는?"
"단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분해. 정말로 자신 있었는데. 그럼 그쪽의 현재 상태는? 남은 무사가 몇이나 돼?"
"전멸. 없습니다."
"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다.
"흑사단이 전멸하는 바람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쪽에 대단한 고수가 섞여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여인은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영사(影蛇) 생각은 어때? 청사단(靑蛇團) 정도면 성공할 수 있을까?"
"당주님. 지금은 서두르실 때가 아닙니다. 적의 정확한 정보를 모으고 움직이다가는 피해만 가중될 뿐입니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영사의 말에 당주라 불린 여인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너무나 분해서 참을 수 없었다.
"백사단(白蛇團)도 안 될까?"
"백사단은 사령당(蛇靈黨)의 전부나 다름없습니다. 역시 정보가 더 필요합니다.
"하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여인, 사령당주 우문혜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쨌든 흑사단을 모두 잃은 것만 해도 타격이 상당했다.
흑사단 오십 무사는 비록 청사단이나 백사단보다 약하기는 했지만 대외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만은 최고였다.
그런 흑사단이 전멸했으니 당분간 사령당은 손발이 마지된 거나 다름없었다.
"마차에 오르시지요. 일단 세가로 돌아가 계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돌아가서 제가 세가의 정보를 좀 들춰보겠습니다."
우문혜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영사를 쳐다봤다.
"내가 가서 알아볼게."
우문혜의 갑작스러운 말에 영사가 크게 당황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직접 알아보겠다고. 그쪽에 누가 있는지."
영사는 잠시 우문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내 그 말뜻을 깨닫고 깜짝 놀라 외쳤다.
"아가씨! 안 됩니다!"
너무 놀라 당주님이라는 말보다 아가씨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정도였다. 우문혜는 그런 영사의 반응에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도 그리 약하지 않아. 만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 한 몸 빼내는 것 정도는 자신 있어."
우문혜가 약하지 않다는 것은 영사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다.
강호에는 우문혜 정도는 손가락 하나로 처리할 수 있는 고수들도 있었다. 만일 그들과 함께 있는 고수가 그런 사람이라면 절대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영사는 우문혜를 쳐다봣다. 우문혜는 아름다운 눈을 일렁이며 영사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허락을 구하는 아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로서는 도저히 그녀의 부탁이나 명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십시오. 대신 금사(金蛇)와 은사(銀蛇)를 데려가셔야 합니다."
"금사랑 은사?"
우문혜가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걔들 보다 영사가 훨씬 강하지 않아?"
"물론 저도 따라갑니다. 전 당주님의 그림자니까요."
영사의 대답에 우문혜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영사는 우문혜의 환한 웃음을 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런 미소를 보면 어느 사내라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얼어붙은 가슴을 가진 사내라 하더라도.
조가장에서 몸을 피한 팽철영 일행은 조설연이나 다른 조가장, 혹은 하남표국 사람들과 달리 별다른 추적도 받지 않고 무사히 무림맹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림맹에 도착한 그들은 즉시 맹주에게 조가장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조가장이 멸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맹에서는 즉시 자체적인 조사단을 편성해서 조가장이 있는 허창으로 파견했다.
팽철영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남궁진이 팽철영과 다르지 않은 얼굴로 서 있었다.
"갔어야 했어. 그녀를 끝까지 따라 갔어야 했어. 대체 내가 왜......"
팽철영의 중얼거림에 남궁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젠 다 지난 일일세. 흉수가 밝혀지면 복수나 제대로 해 주게."
남궁진의 말에 팽철영이 벌떡 일어섰다.
"그래야지, 그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전부겠지."
팽철영이 밖으로 나가자 남궁진이 그 뒷모습을 보며 나직하게 혀를 찼다.
"대체 진담인지 아닌지 구분을 할 수가 없군. 몇 번 보지도 않은 여자를 위해 목숨을 걸리는 없고......"
남궁진은 고개를 저었다. 팽철영은 분명히 함께 따라갈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알 수가 없군. 다른 사람들을 의식한 행동이라기엔 조금 지나친 면이 있는데...... 그럴 이유도 없고."
남궁진은 여전히 의아한 표정을 풀지 못하고 방에서 나갔다. 어쨌든 자신도 충분히 준비를 해야 했다.
흉수가 밝혀지면 남궁진 역시 힘을 써야 했다. 이유나 원인이 어찌 되었건, 그들은 조가장주 덕분에 목숨을 구했으니까.
허창에서 시작한 표행이 어느새 사천으로 들어섰다.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모두 노련한 덕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형표는 조설연이 나타난 이후로 좀 더 단형우와 가까워졌다. 대하는 게 편해졌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조설연은 가족들의 죽음을 한시라도 빨리 잊으려 노력했다.
섬서에서 사천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편한 반면 지루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당연했다.
평소 표행을 할 때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이번에는 초반에 워낙 큰 일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평안한 길을 가니 당연히 대화가 많아졌고, 단형우도 처음 조설연을 만났을 때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오라버니는 어떻게 그리 강한 거죠? 저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데."
조설연은 계속해서 이런 식의 질문을 했다. 단형우가 그렇게 강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단형우는 그런 조설연이 질문에 꽤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목숨을 걸고 오랫동안 싸우다 보면 자연히 이렇게 된다."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실전보다 좋은 수련은 없다고 하지 않은가. 그 실전이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거라면 그 효과도 탁월할 수밖에 없다.
"대체 누구랑 그렇게 싸우신 거예요?"
"마물."
단형우의 대답에 조설연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요괴 말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조설연이 놀란 눈을 했다. 요괴와 싸웠다니. 그럼 신선이 되는 수련이라도 했단 말인가.
"단 오라버니는 형산에서 살았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글쎄."
조설연은 단형우의 대답에 살짝 기가 막히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력 하나만큼은 꽤 자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 있었다.
"분명히 그랬던 것 같은데......"
단형우가 직접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거의 수긍하는 듯 대답했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그렇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점도 없지 않지만 그래도 형산에서 살아왔음이 분명했다.
조설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산에 요괴가 나타난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단형우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럼...... 그 얘기를 해 주세요. 요괴랑 싸웠던 얘기요."
조설연의 질문에 단형우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물론 아무도 그 표정 변화를 알아볼 수 없었다. 조설연을 제외하고는.
"왜요? 기분이 안 좋으셔......, 아!"
조설연은 뭔가가 기억났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살짝 가렸다.
단형우는 아흔아홉 명의 친구가 있었다고 했고, 그 친구들이 모두 죽었다 했다. 아마 요괴들에 의한 짓일 것이다.
그 일을 물었으니 당연히 기분이 안 좋으리라 생각한 조설연이 급히 입을 다문 것이다.
조설연은 단형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심 요괴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 아쉬웠다.
잠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단형우를 힐끗 쳐다보던 조설연은 문득 요괴가 나타나는 곳이 과연 어디일까를 생각해 봤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 안에서는 그런 곳이 없었다.
"그럼 오라버니는 대체 어디에서 살다 오신 거예요?"
조설연의 질문에 단형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이나 뜸을 들였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지옥."
단형우의 대답을 듣는 순간 한기가 흘렀다. 조설연은 갑자기 든 오한에 살짝 몸을 떨었다. 조설연의 눈이 조심스럽게 단형우에게로 향했다.
단형우의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가 갑자기 허무지기로 바뀌었다. 그곳을 떠올리니 천기자가 생각났고, 천기자가 죽었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천기자는 정말로 죽었나?"
"그렇게 알려져 있어요, 십 년 전에 죽었다고."
단형우의 허무지기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들의 몸과 마음이 조금씩 무기력해졌다.
"사실 난 아직도 믿지 않는다네."
형표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사방에 퍼져 있던 허무지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갉아먹던 무기력증이 깨끗이 사라졌다.
민감한 사람들은 이 변화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는데 어쨌든 영문을 알 수 없었기에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믿지 않는다고?"
"사실 천기자가 죽었다는 소문 자체를 난 믿지 않는다네. 그 소문에는 뭔가 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단형우의 눈이 빛났다. 형표는 기대감으로 빛나는 단형우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왜 그런지 자세히 설명하자면 기닌까 결론만 말하자면, 그 소문은 뭔가 의도적인 것이 엿보인다네."
"의도적인 것이요?"
조설연이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어느새 형표의 말에 조설연은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쟁자수들까지 빠져들었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그랬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천기자가 죽었다고 소리치고 다니는 듯하다고 할까."
"그럼 천기자가 아직 살아 있따는 건가?"
단형우의 말투에는 약간의 기대감마저 실려 있었다. 평소 말할 때 감정을 거의 싣지 않던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단형우는 약간 흥분까지 한 상태였다.
"대체 누가 왜 그런 소문을 퍼뜨린 거죠?"
조설연의 질문까지 이어졌다. 형표는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후, 조설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게 일단 가장 큰 의혹입니다. 소문의 근원이 확실치 않습니다.
즉, 확실치 않은 소문이었다는 뜻이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마치 확인된 듯 믿었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상하네요."
"어쩌면 천기자 스스로가 퍼뜨린 소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장난으로 퍼뜨린 소문일 수도 있겠지요.
사실 전 천기자가 했다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자신이 죽었다고 소문을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겁니다."
"십 년 전이라고 했나?"
단형우의 질문에 형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이라......"
단형우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에서 시간의 유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지옥에 있던 시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십 년 전이 과연 언제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설마 자신과 친구들이 잡혀왔던 시기는 아닐 거라 믿었다.
그때라고 하기엔 자신이 지옥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얼마나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형우가 생각에 잠겨들자 형표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형표의 뒷얘기가 궁금했지만 그들 역시 단형우의 눈치를 보느라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단형우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당호관이 멈추며 손을 들어올렸다. 당호관의 손짓을 본 형표는 급히 표행을 멈추고 당호관에게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어르신."
"저길 좀 보게."
당호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마차 한 대가 있었다. 상당히 화려했는데 마차 옆에 두 명의 사내가 서서 날카로운 안광을 빛내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형표는 사내들의 눈빛에 잠시 흠칫했지만 이내 차분하게 마차와 그 주변을 살폈다. 마차의 바퀴들이 모조리 부서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직 마차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 모양이군요."
형표의 말에 당호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호관을 비롯한 당가 무사들의 눈에는 강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차 옆을 지키고 있는 두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형표는 일단 자신이 가서 말을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부서진 마차가 길을 막고 있었으니 길을 지나가려면 마차를 치워야 했기 때문이다.
마차의 위치는 참으로 교묘해서 그것을 치우지 않는다면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서 갈 수밖에 없었다.
형표가 막 나서려고 할 때, 마차 문이 덜컹 열리더니 누군가 내려섰다.
흑의를 입고 있는 사내였는데, 체격도 단단했고, 기세도 잘 갈무리 되어 있었다.
사내는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형표와 당호관을 향해 똑바로 걸아왔다. 그리고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죄송합니다. 본의 아니게 피해를 끼쳐드리게 되었군요.
사내의 정중한 말에 형표가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마차가 부서진 모양이군요."
"예, 갑자기 바퀴가 내려앉았습니다. 혹시 마차를 고치도록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내의 말에 형표가 고개를 돌려 쟁자수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마차를 몰던 쟁자수가 눈치 빠르게 달려왔다.
"자네가 한 번 보게. 고칠 수 있는지."
형표의 말에 쟁자수가 급히 달려가 마차를 살폈다. 쟁자수가 이러저리 살펴보고 있는 동안 그 옆에 서 있던 두 사내는 쟁자수에게 눈을 떼지 않고 감시했다.
"성도(成都)까지 가야 하는데, 사천에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되어서 참으로 난감하던 차였는데 다행입니다."
어느새 쟁자수가 마차를 살피고 다시 형표에게 달려왔다.
"고치는 건 불가능합니다요, 바퀴가 완전히 부서지고 축이 부러졌습니다요."
쟁자수의 말에 형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쟁자수는 급히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형표는 어떻게 하곘느냐는 듯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는 나감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참 난처하게 되었군요."
"일단 마차를 치워야겠습니다."
형표의 말에 사내가 급히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일단 아가씨께 말슴 드려야겠습니다."
사내는 형표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마차로 달려갔다. 가볍게 몸을 날리는 모습이 상당히 매끄러웠다. 형표와 당호관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사내가 마차 문을 열고 안에다 뭔가를 얘기하자 그 안에서 한 여인이 내려섰다. 움직이기 편한 가벼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여인이 내려선 순간 좌중에 적막만 감돌았다.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저 옆모습만을 봤을 뿐인데도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사내들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대부분은 침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멍하니 입을 벌렸다.
"꿀꺽."
누군가의 목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을 신호로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렀다.
"하아......"
한숨과도 비슷한 탄성을 배경으로 여인이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섰고, 미소를 지은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녀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사내들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심지어는 나이가 상당한 당호관조차도 놀라 눈을 부릅뜰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놀라고 있는 사이 마차 앞에 서 있던 사내가 다시 형표 앞으로 달려왔다.
"죄송하지만 길이 같은 곳까지 만이라도 함께 가면 안되겠습니까?"
사내의 말에 형표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흠칫 놀라 당호관을 쳐다봤다. 당호관은 형표의 눈길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이래선 안 되지만 당호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심 저 정도 여인이라면 함께 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얻은 사내가 포권을 취한 후 여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여인을 조심스럽게 모시고 일행이 있는 곳으로 왔다.
여인은 당호관과 형표 앞에 서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우문혜에요."
청아한 목소리가 사내들의 귀를 뒤흔들었다. 몇몇 사내들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형표입니다."
형표가 서둘러 인사했다.
우문혜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남표국의 표사 분들이시군요."
"아, 예. 그, 그렇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우문혜가 그렇게 인사하자 뒤에 서 있던 사내가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우선 마차부터 치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형표가 손짓하자 쟁자수들이 마차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당가 무사들 몇몇도 눈치를 보다가 합세했다.
그 모습을 본 당호관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있이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마차가 크고 무겁긴 했지만 당가 무사들까지 합세한 덕분에 순식간에 길을 정리했다.
마차를 치우고 길을 정리하자, 우문혜 옆에 서 있던 사내, 영사가 재빨리 나섰다.
"괜찮으시다면 저 마차들 위에 아가씨를 태웠으면 합니다만......"
영사의 말에 형표가 당황하며 당호관을 쳐다봤다. 물론 이런 형표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다. 표물을 실은 마차에는 그 누구도 탈 수 없었다.
그것은 표물의 안전을 위한 기본적인 조치였다. 이런 말이 나오자마자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거절하기에는 우문혜가 보여준 미모가 너무 대단했다. 어찌 되었건 형표도 남자였다. 그것도 마흔이 넘도록 혼자 살아 외롭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당호관은 인상을 찌푸리며 영사를 쳐다봤다.
그 사이 우문혜는 당연하다는 듯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처음 마차 옆에 서 있던 두 사내, 금사와 은사가 재빨리 우문혜의 양 옆에 따라 붙었다.
당호관이나 형표가 채 말릴 새도 없이 우문혜가 마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표물 위에 살며시 앉았다.
"이제 가죠."
우문혜의 한 마디에 표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쟁자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마차를 움직인 탓이었다. 상당히 돌발적인 행동이었음에도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형표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다가 화들짝 놀라 당화관을 쳐다봤다.
당호관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형표는 머쓱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뒤로 물러나며 생각해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그리고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 형표가 믿을 만한 것은 단형우뿐이었다.
표물은 실은 마차는 모두 다섯 대다. 그중 우문혜가 탄 마차는 가운데 마차였다. 단형우는 형표의 부탁에 따라 가운데 마차 옆에서 걸어갔다.
우문혜가 탄 마차 주변에는 쟁자수들이 하나도 없었다. 우문혜의 호위무사인 금사와 은사의 기세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자리를 피한 탓이다.
그런 와중에 단형우만 홀로 마차 옆에서 걸어가니 당연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조설연은 단형우 옆에 가고 싶었지만 왠지 우문혜와 비교될 것 같은 생각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형 표사님.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걸까요?"
조설연의 표정에는 살짝 불만이 어려 있었다. 형표는 그런 조설연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안 되지요,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수십 년 동안 표사 생활을 해 온 형표조차 처음 겪는 일이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하지만 그 어떤 쟁자수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기회가 생기는 대로 힐끗거리며 우문혜를 훔쳐보기 바빴다. 그리고 그것은 당가 무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설연은 그런 모습을 확인하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걱정되네요."
형표는 여전히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표행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조설연과 형표, 그리고 당화관과 단형우뿐이었다.
'이건 숫제 마력인군.'
형표는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남은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길어야 칠 일 정도면 목적이에 도착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온 길보다 훨씬 더 힘들 것 같은 예감에 절로 한숨이 새나왔다.
우문혜는 마차 위에 앉아 조용히 주변을 둘러봤다.
'저들은 쟁자수로군. 수는 서른. 표사는...... 하나?'
표행에 표사가 하나뿐이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당가 무사들이 함께 한다지만 일을 그렇게 해선 안되는 법이다.
[이 표행은 습격을 받아 표사들이 거의 전멸했습니다. 그리고 하남표국은 지금 누군가의 습격을 받아 몰락한 상태입니다.]
영사의 전음이었다. 우문혜의 표정을 읽고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전음으로 알려 준 것이다.
우문혜는 영사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였ㄷ.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당가의 반응은 조금 의외였다. 표사까지 모두 잃어버린 마당에 굳이 하남표국을 고집할 이유를 아직 찾이 못했다.
그리고 흑사단의 습격을 막아낸 그 고수도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리 봐도 그만한 고수가 없네.'
당호관이 가장 나아 보였지만 절대로 흑사단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당가 무사들을 모조리 합해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어떻게 흑사단을 막아낸 거지?'
우문혜의 눈이 빛나며 조금 더 찬찬히 주변 인물들을 훑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특별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으로 눈이 살짝 찌푸려질 무렵 문득 자신이 타고 있는 마차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쟁자수가 눈에 띄었다.
'음? 특이하네.'
쟁자수 주제에 칼을 차고 있었다. 만일 표사들이 살아 있었다면 건방지다고 가만 두지 않았을 것이다.
표사들도 없는 마당이니 쟁자수들 중에서 그나마 힘 좀 쓴다는 자에게 칼을 지급한 모양이었다.
'흐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힘이 없어 보이는데?'
우문혜가 판단하기에는 쟁자수들 중에도 꽤 쓸만한 사람이 있었다. 물론 쟁자수와 표사를 기준으로 판단한 거였지만 어쨌든 지금 옆에서 걸어가고 있는 쟁자수 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우문혜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그들의 중심에는 우문혜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는 조설연조차도 기회만 되면 힐끗거리며 우문혜를 쳐다봤다.
그런데 단 한 명, 우문혜에게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그것도 사내가. 다른 아닌 단형우였다.
우문혜는 조심스럽게 힐끗거리며 단형우를 쳐다봐다. 우문혜가 보기에는 전혀 대단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런대로 잘 생긴 편이긴 했지만 지금까지 숱하게 봐 온 후기지수들에 비하면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았다. 게다가 무공을 익힌 것 같지도 않았다.
'발걸음만 봐도 알 수 있지.'
고수는 발걸음부터 다르다. 단형우의 발걸음은 고수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닌 척 하려는 고수라도 발걸음에 새겨진 무공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각고의 수련을 거친 특유의 보법이 발걸음에 그대로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그것을 숨기려 하더라도.
단형우의 발걸음은 평범했다. 아무런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의 걸음걸이였다. 규칙적이면서도 그 안에 불규칙이 숨어 있는.
보법과 신법에 가장 자신 있는 우문혜였기 때문에 그것을 보는 눈도 남달랐고, 자신의 판단을 절대 의심하지 않았다.
우문혜는 한참이나 단형우를 관찰했다. 물론 은밀히. 하지만 그동안 단형우는 단 한 번도 우문혜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관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지.'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자신을 보고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사내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문혜는 단형우가 자신을 못 봤거나 아니면 초인적인 인내로 참고 있다고 생각했다.
'대단한데?'
자신의 등장이 화려했으니 못 봤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참고 있다는 뜻인데, 이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우문혜의 미모는 감정이 완전히 죽어 버린 살수들 마음 깊숙이 남은 불꽃마저 일으킬 정도였으니까.
"이봐요."
우문혜는 결국 먼저 단형우에게 말을 걸고 말았다. 한 번 보면 참을 수 있었도 다시 한 번 보면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믿었다.
우문혜의 부름에도 단형우는 여전히 앞을 쳐다본 채 걸었다.
마치 자신을 부른 우문혜의 말을 못 들었다는 듯이. 우문혜는 그 모습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이봐요, 쟁자수 아저씨."
우문혜의 나이나 단형우의 나이나 비슷해 보였으니 아저씨라는 호칭이 조금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것이 우문혜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너무도 어울렸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단형우는 주변에 있는 쟁자수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슬쩍 돌려 우문혜를 쳐다봤다. 단형우와 우문혜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우문혜는 단형우의 눈을 보고 살짝 놀랐다. 그리고 곧 기분이 나빠졌다.
단형우의 눈은 지극히 무심했다.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 같았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예전 감정이 죽어버린 살수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것은 완벽한 무관심, 우문혜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불렀으면 말을 해라."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문혜는 그 목소리가 흘러나온 단형우의 입을 쳐다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이것은 위장이 아니라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단형우는 우문혜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 표정은 여전히 무심했다.
우문혜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분하다는 감정을 느낀 것은 지금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첫 번째보다 지금이 훨씬 더 분했다.
"이봐요, 아직 내 말이 안 끝났어요."
우문혜는 너무 분하고 당황해서 단형우가 자신에게 반말을 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반면 그녀 주변에 있던 세 사내는 놀람과 분노로 얼룩진 눈으로 단형우를 노려봤다. 물론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봐요!"
우문혜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단형우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이번에는 얼굴에 표정이 드러났다. 그것은 우문혜에게 무표정보다 더 심한 굴욕감을 안겨 주었다.
단형우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 눈빛만은 귀찮음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우문혜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지만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해 그것을 삼켜버렸다. 그리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우문혜에요, 아저씨는요?"
"단형우."
단형우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우문혜는 조금 더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단숨에 머리를 부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 자신이 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내 발 밑에 엎드리게 만들겠어.'
그 이후로도 우문혜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연방 단형우에게 말을 걸었고, 어떻게든 단형우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쳐다보게 만들려 애썼다.
우문혜의 이런 행동은 상당히 조심스러웠지만 표행을 함께 하는 일행들은 모두 단형우를 부러운 누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몇몇은 질시어린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서 우문혜가 타고 있는 마차 옆으로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문혜의 인간 같지 않은 미모는 오히려 범접할 수 없는 벽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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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그러다 다친다 단형우의활약기대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미모믿다 벼락맞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
즐감요~^^
쓰레기들 빨리치우자
잘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