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7월 22일 요르단을 향해 가면서
오후午後 2時 자유중국自由中囘 타이페이에 도착하였다. 모든 것이 한문漢文으로 기재된 것이 반가웠다. 밖에 날씨는 무척 더워 보였다.
면세점에서 불교 서화 등을 구경하며 너무나 유명有名했던 장개석을 연상하며 아이들을 챙겨 잡고 국제항구 홍콩을 향해 날아가는 중 조금 정신도 들고 해서 기내를 살펴보니 탑승객이래야 전부가 외국인데다 간혹 보이는 우리동포 몇분은 애비처럼 고국에다 가족을 두고 중동역군으로 가고 있는 듯 안주도 없는 위스키를 훌짝훌짝 마시며 우수에 젖은 모습에서 나는 눈물이 자꾸 쏟아지려 했다.
아이라고는 우리 아이 둘 뿐이니 홍일점으로 귀여움을 받았다. 천진한 순재 순호는 스튜어디스 아가씨들께 아줌마 물 좀 주세요 하며 따랐다. 1시간후 홍콩에 착륙하여 면세점까지는 버-스를 타고 나갔다. 찌는 듯한 더위에다 국제항구이다 보니 흡사 남대문 시장을 방불케 하니 아이 둘 챙기랴 구경하랴 혼이 다 나간듯 세계 각국에 상선들이 빽빽히 운집해 있고 별로 커 보이지 않으며 우리나라 충무항을 방불케 했다.
다시 탑승하여 약 3시간 후 태국에 도착하여 비행기를 바꿔 타야 했다. 짐을 찾아 검사를 받아야 하니 번거로웠다. 순간 두 아이의 손을 놓아버렸으니 떠날 때 아이들 조심하라시든 어머님 생각과 온천지가 아득하다. 온 공항을 뛰어다니며 순재 순호를 외치며 혼을 냈다.
가지고 간 된장 고추장 봉지를 다 수색하니 직원들의 수고가 많았다. 밤이 한참 되어서 맨하탄 호텔로 인도되어 밤을 지내고 한국식당에서 김치찌개로 아침을 먹고 조금 시간 여유가 있어 유명하다는 수상시장 구경을 직원들과 함께 떠났다.
사면에 사원이 보였고 가사를 수한 스님들이 맨발로 줄로 서고 탁발하는 스님들께 여인들이 가진 음식을 꾸러 앉아서 공양을 드리는 모습에서 부처님 나라를 보니 감개무량했다. 그곳을 지나 약 30분간 지나는 길목은 우기라서 인지 무척 질척거렸고 흙탕물들이었다. 그러나 강가에 수목들은 울창하였고 열대과일들이 주렁주렁 장관을 이루었다. 자그마한 모-타 보트에 몸을 담고 생각했다. 야자와 원숭이의 전설처럼 어린 가슴을 울려주든 남양군도에서 원숭이가 던져주는 야자로 목을 추려 전쟁을 치르던 일본 군사들이 연상되었다.
허술한 옷차림의 소년과 노파들은 뗏목 위에서 생활하며 우리나라 30년전 청계천가에서의 생활 환경과 비슷했다. 이제 다다른 곳은 중국과 상통하며 물물교환을 하던 수상시장... 조고만한 조각배에다 온갖 과일을 싣고 다니며 팔고 있어서 야자를 사서 먹어봤더니 기대와는 반대였다. 이제 목적지에 와보니 태국의 명상품인 뱀피, 악어피 즐비했지만 눈 요기만 하고 땅군들이 코부라 와 더불어 노는 것을 보고 징그러움을 느꼈다.
햇살은 무척 따가웠다. 이름 모를 사원을 보며 웅장한 건물 찬란한 단청에 감동하며 사진 촬영을 하고 호텔로 돌아와서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했다. 대합실에서 뜻밖에 애비친구를 만났다. 2시 비행기에 탑승하여 목적지인 요르단을 향해 나르기 시작했다. 떠날 때부터 순호가 감기로 성치 못해 오만 간장을 다 녹였다. 한참을 푹 자고 나서 보니 주위가 웅성거렸다. 창문으로 밖을 보니 황막한 육지가 눈에 뜨인다. 이곳이 아라비아 사막이란다. 슬슬 지형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태국에서 약 8시간이나 후인듯 그 먼 길을 오면서 고달픈 생각도 지루함도 잊은 채 오직 자식의 상봉만을 갈구하며 드디어 요르단 공항에 도착하였다. 이 멀고 험한 길을 수 없이 드나들며 고생한 애비를 생각했다.
수속을 마치고 나와보니 달려오는 애비의 모습 까맣게 탄 얼굴에다 눈은 천길이나 패인 애비의 손을 잡고 반기며 오래 간만에 본 애비라서인지 아이들은 좀 서먹해 하는 듯했다. 오래간만에 우리 다섯 식구는 대기해 놓은 차에 동승하여 시내를 향해 1시간 정도 달려왔지만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삭막한 거리였다.
저녁식사는 이곳 한인식당에서 했다. 이곳 노무자들을 위해서 생겼나보다 한복으로 단장한 아가씨들과 전층민보며 유행가도 열심히 연주하고 있었다. 김치와 한식으로 저녁을 마치고 마련된 사택 아파트로 들어왔다. 평수도 무척 넓어 보였고 환했다.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생활도 처음이나 시차 관계인지 잠은 도무지 오지 않는다.
아이들은 새벽 4시부터 일어나 야단 법석들이다. 아무 가림도 없이 5시쯤 붉은 태양은 서슴없이 지평선을 뚫고 솟아 오르니 두렵기만 했다. 이곳 암만은 해발 1000m나 되는 고지대에다 아파트 6층 꼭대기니 아침밥을 지어도 밥이 뜸이 안 들고 이상했다. 먹을 것은 냉장고에 차 있었고 하나 식수마저도 사서 마셔야 하니 난감했다. 오렌지, 수박, 멜론은 듣도 보고 못했든 신기한 과일들이 즐비했다. 너무 높은 지대라서 인지 숨이 가쁜 느낌이 든다.
창창한 햇살은 콩크리트 건물을 완전 불덩이로 만들고 밖을 내려다보니 거리를 거니는 사람은 하나도 안 보인다. 대신 멋진 쎄단차들만 분주할 뿐이다. 습기는 없었고 해만 떨어졌다 하면 쌀쌀한 가을날씨처럼 돌변하니 일교차가 많이 나는 곳이 바로 지중해 날씨인 듯 실감했다.
집안은 온통 카페트로 깔려 있고 하얀 돌가루 먼지가 날아들며 문을 열면 열기가 침입하니 이곳은 실내만 넓게 쓰고 있었다. 식물이래야 오직 생존성이 강한 알로에와 올리브 나무만이 강직하게 버티고 이슬람 종교국인 이곳은 하루에 네 차례 모스코(교회)에서 스피카에서 울려 퍼지는 알라신을 경배하는 기도소리가 귓창을 울린다.
철저한 국민종교이고 길을 걷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속절없이 맨바닥에 엎드려 알라알라 외치며 예배하는 모습들이 참 우습고 교회에 가는 길에 혹 여자와 스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다시 하고 교회로 간다고 했다. 우리도 임시생활이지만 있을 것은 있어야 해서 쇼핑도 해야 해서 애비 운전기사 아-민이란 현지인 청년인데 가끔 애비가 차를 보낸다. 한국사람과 접촉을 많이 해서 인지 익숙한 인상이었다.
이곳 유일한 백화점인 알포화(?)쇼핑센타를 찾았다. 살펴보니 그 나라 물품이란 하나도 없고 세계 각국에서 수입해온 식품들이 눈부시게 진열되어 있었다. 소득이 없는 나라인데도 어떻게 잘사는지 찾는 사람들 외국인뿐 현지인들은 외지에서 벌어온 돈으로 사는 사람도 있는 듯 일부다처제도인 이곳은 남자 한 분이 여러 부인을 대동하니 아이들은 수도 없이 오롱조롱 달고 유일한 그늘이래야 올리브 나무 그늘에서 폭삭 거리는 먼지와 와글거리는 왕파리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그들의 무이한 낙이리라.
하루는 탐스러운 한국 두부처럼 빚어 놓은 식품이 있어 달라고 했더니 그것이 바로 두부가 아닌 치-즈란다. 생활 필수품인 물 한 병에도 몇 백원이란다(미네랄워터) 여기서 영어단어 하나는 확실히 배웠다. 8월 음력 7월 1일 요르단에서 생일을 맞이했다. 해마다 생일은 여로에서 지냈지만 올해는 공교롭게도 이곳에서 맞이하니 감개무량이다.
매일 찾아오는 사람 안차창댁 미연엄마 먼저와 살고 있어 이곳 사정이면 모-든 일에 도움이 많았다. 오늘은 전 지사장 댁을 찾았다. 남편은 귀국하고 아이들 학교 때문에 머물고 있었다. 차례차례 대사관 요원댁을 방문했다. 마침 대사님이 김재성 대사인데 동향 미동 사람이어서 더욱 탐탐(?)했다.
애비도 많은 신세를 지는 듯했다. 박사장댁도 방문하면서 하루하루를 분주하게 지냈다. 박사장님의 기사 자그마한 이계원 기사님이 시간을 내어 안차장댁 식구들과 같이 미니 버-스를 타고 이곳 고적지를 찾아나섰다. 빵조각과 물병을 준비하여 첫 번째로 간 곳이 팔레스타인 난민촌.
흙벽돌로 다닥다닥 지어놓은 등대(?)를 바라보며 로-마의 유적지인 제라시에 당도 했다. 어마어마한 돌기둥들 어데서 갔다가 지어 놓았는지 당시의 당당했든 로-마군들의 위력을 한눈에 살필 수가 있었다. 햇빛은 불길같이 달아오르고 시장기와 목이 타오르지만 회갈을 면할 수 없었다. 점심은 어느 유명하다는 레스토랑에 가서 아랍 정식을 주문했는데 몇 시간이 지나서야 음식이 나온 것이 꼭 꿀꿀이 죽 같은 것이 나왔고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돈은 수십 디나를 내고 아지둔 성을 향했다. 천야만야한 계곡길을 거슬러 올라 정상성에 올라 생각했다. 1184-85에 건립 사라세인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며 그 많은 돌을 시리아에서 운반돼 왔단다 사람의 힘으로 이 위대한 일을 하자니 미개인의 희생도 만만치 않았으리라 짐작해지고 십자군의 본 기지는 시리아에 있단다.
길목에 곱게 핀 자멀이둔이라는 꽃 나무 동산 삼각형으로 다듬어진 진당홍 꽃이 만발했고 이 꽃은 40度가 되는 열사에서만 피운다 한다. 긴 치마 허술한 옷차림에 목동들이 양떼를 몰고 있는 것을 봤고 와-디 아순을 거쳐 그 유명한 요단강!
목자들이면 꼭 이 강을 건너서 만나자는 찬송가에서만 얻어듣던 이 강 요르단강을 준해서 요단이 된 듯했다. 무척 큰 기대를 했다. 막상 다다르고 보니 얼마나 거대하고 웅장하리라 한 기대와는 정 반대다. 큰 도랑물이 졸졸 흐르고 기독교 성지인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경계하고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성지라면 불교나 기독교나 억세게 성황 할 줄 알았지만 그것은 허명무실이다. 수천만의 교인들은 꿈엔들 이곳을 가 볼 수가 없었지만 이 교도인 나로서 이곳을 먼저 본 것에 긍지를 느꼈다.
저녁 노을과 멀리 불빛 어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먼 옛날 작은아버님 영결식 때 가족들이 울부짖어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라던 말이 떠 올랐다. 멀리 농장에서 뿌려 되는 스프링쿨러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보며 그곳을 떠나 길목마다 설치된 군인초소를 통과 할 때마다 우리 이기사님 한보 KOREA를 외친다. 유명有名해진 한보의 가족임을 과시하면서 아슬아슬한 데랄라 고갯길을 거슬러 올라 암만에 도착했다. 남들이 흔히 못 와보는 이곳 중동 땅을 본다는 것에 우쭐해진다.
to be continued
첫댓글 와~~대단하세요!...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표현을 할수가 있으신건지, 정말 깜짝놀랐습니다.
"땅군들이 코부라 와 더불어 노는 것을 보고 징그러움을 느꼈다." 어머님께서만 표현할수 있는 글과
"미네랄워터" 영어를 잘 못하시는 아쉬움이 있으신 열정이 느껴집니다..아~~답글 달기가 민망합니다.
이렇게 멋진글에 무슨 표현을 할수 있단 말인가? 진짜루 휼륭하십니다.......까아~~~~
몇번 더 읽어야 겠습니다~ 학국의역사도 같이 볼수 있는 역사서라해도 무방할듯 싶어요.
탐탐했다라는 말씀은,,건강(건실)해 보인다는 말씀이실까요?^^
"막상 다다르고 보니 얼마나 거대하고 웅장하리라 한 기대와는 정 반대다. 큰 도랑물이 졸졸 흐르고 기독교 성지인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경계하고 있었다." 명확하시고 꼼꼼하신 성품이신것을 느낄수 있었어요^^
아드님에 대한 연민과 자랑스러움,
경제, 종교, 인간관계, 자연 등등 참 세심한 관찰력과
무엇보다 이렇게 글로 남기신 것 참으로 존경 스러우신 분이십니다.
미네랄 워터 배우신 것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 신선합니다.
탐탐은 사전을 찾아 보니 매우 즐겨 좋아 하는 모양으로 풀이가 되어있습니다.
어머님의 귀한 글 잘 봤습니다,
한평생 잘못된 삶을 살아온 사람의 인생담이라 할지라도
타산지석 정도의 교훈을 얻을 가치는 있다고 봅니다.
하물며,자식을 훌륭히 키워낸 현모의 인생담을
단편적이나마 경험해 볼수 있다는것은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예전에도,오래전 부모님을 떠나 보낸 현재도,
심산님같은,그 지고한 효심을 갖추지 못했던,못한, 저로서는
그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수만은 없는 문제점은 있군요.
괴롭기까지합니다.
개인적으론,글 내용의 재미여부는 부수적인 문제겠죠.
좋은 글, 고맙습니다.
오늘은 선 댓글 후 천천히 감상입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댓글이 달린 것을 보니 역시 심산선생님은 깨끗하고 건전한 청춘합창단 카페에... 큰 힘을 실어주는 최고의 작가이십니다...^^
역시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답게 자식에 대한 애틋함이 곳곳에 묻어납니다.
먼 열사에 나라에 와서 고생하는 아들을 "까맣게 탄 얼굴에다 천길이나 패인 눈"
으로 보이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 하셨겠습니까?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기대 속에서도 여행에 대한 설레임도 살짝 엿보이고 순간 순간의
담백한 기록들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생동감 넘치는 현장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심산선생님께서 어머님 떠나신 후 이글을 보셨으니 얼마나 어머님이 사뭇치고 그리우실지 표현하지 않으셨으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어느글에서 '맹모삼천지교'를 예로 드시면서 어머니를 표현하신적이 있는 것 같으신데, 어머님 글을 보니, 매우 훌륭하셨던 분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늘도 새벽길을 걸었습니다. 칼바람 매우 차더군요. 여러분 제 어머니 글 이렇게 읽어주시고
마음어린 댓글달아주시니 저는 물론 돌아가신 어머님도 좋아하실듯 싶습니다. 어제 또 한권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어머니 시집올때 얘기부터 아버님과의 마지막 대면, 아버님의 죽음을 모르신채 어렵게 바느질하시며 저 키우시던 일,
뒤늦게 아버지 죽음을 알고 통한의 눈물 흘리시던 이야기.....저는 그 아픈 기록들을 밤늦도록 읽으면서
어머니를 기렸습니다. 이세상 그 어느 어머니가 장하고 그리웁지 않겠습니까마는 제 경우는 좀 특별납니다.
좀 다릅니다
아픈 민족사적 아픔뒤의 그 간구했던 삶의 편린들과 잊혀지는 역사의 기록들을 귀히 여기고 남기는 일들이
그냥 하고픈 일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될 일로 무겁게 여겨졌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데 이것은 어느 개인의 기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아픈 역사와 간구했던 삶을 살았던
그시대 우리 어머니들의 아름답고 슬프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번영을 만든 그 근본의 힘이 예서 나왔다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이글을 이곳에 게제하는 이유이고 간추려 하나의 책으로 엮으려는 생각의 근본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정리되는 대로 형식에 구애됨 없이 올리겠습니다.
어머님은 모두 위대하시겠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일기라기보다는 역사책을 만들듯 꾸준히 기록하셨다는게
더 대단하십니다. 세계 곳곳에 남기신 심산님의 발자욱들을 따라 우리들은 눈과 마음들을 같은곳으로 모아 가겠지요
언제나 좋은카페 들러 맘껏 좋은글 읽고 한 아름의 꽃을안고 가겠습니다.
3탄을 기대하면서 물러갑니다~~
그 시절 어머니께서 기행문을 적으셨네요.
심산님에 대한 사랑과 뿌듯함에 행복하신 어머니 모습에 글을 대하는 저까지 행복해집니다......
심산님 ,어머니 작가이심이 분명합니다.....^^*
스몰님 처럼 저도 선댓글^^ 저녘에 천천히 읽어야 할것 같습니다. 기대가 됨니다
읽기도 힘들 만큼에 많은 분량의 글에 압도 당합니다^^
대단한 열정 과 힘 을 가지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 입니다
작은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꼼꼼히 기록 하신걸 보니.......
하나 밖에 없는 자식과의 삶이 너무 소중했나 봅니다.
여자는 비록 약하지만 어머니는 정말 강하시네요.
어머니의글을 살피다 보면 저 또한 그방대한 양과 정성에
많이 놀랩니다. 글의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상황과 느낌의 묘사가 바로 곁에 계신듯
리얼합니다. 글 중 어떤 부분은 공개가 꺼려지기도 합니다. 너무나 아파서 저도 읽을 수 없는 글도 있습니다. 잘 반추하고 숙고하여 펴냄 여부를 결정 할 것입니다만 이미 이일을 잘 할 수 있다 생각하는 제자(Mentee)에게 선행작업(워드, 스캔 등)맡긴 상태입니다. 어머님에 대한 관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