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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 시대 원로 수필가 인터뷰⑬ ― 이정림
‘문사의 격’,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자의식
문윤정(수필가)
이정림 선생님은 작가 정신이 투철하고 사회의식이 강한 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서정성 짙은 수필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사회성이 강한 작품을 발표하여 문학의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칠팔십 년대에는 프랑스 문학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정림 선생님은 수필 등단 1세대로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 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글에 대해 매우 엄격하다. 선생님의 수필이론서는 몇 쇄를 찍고도 개정증보판으로 나올 정도로 출판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다.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문학과 수필의 정신’을 가르쳐 주는 분이다.
문윤정: 2021년 신년호에 선생님을 모시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2020년 8월에 범우사에서 ‘수필인생 46년 기념문집’ ≪이정림, 그의 수필과 인연들≫을 출간하셨습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수필인생 46년이 궁금합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귀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일 년 가까이 코로나19로 바깥출입이 어렵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이런 난국에 선생님은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이정림: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이전인 2018년 10월 말에 갑자기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건강체라고 자부했던 터라 과로가 병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척추에 염증이 생겼고, 염증이 병이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8개월 만에 퇴원은 했지만, 항생제 후유증으로 하지마비가 와서 보행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코로나19 때문이 아니라 내 건강 때문에 모든 강의는 접은 상태입니다. 강단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문하생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1분 30초의 기적>(2019)이라는 글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보행만 어려울 뿐 일은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우선 제가 발간하는 ≪에세이21≫을 계속 만들고 있고요, 수필인생 46년을 중간 정리하는 책(≪이정림, 그의 수필과 인연들≫, 범우사, 2020)을 냈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 냈던 이론서의 개정증보판(≪세상 모든 글쓰기-수필쓰기≫, 알에치코리아, 2020)도 발간했습니다.
2007년에 냈던 이론서의 개정증보판(≪세상 모든 글쓰기-수필쓰기≫, 2020)도 발간했습니다.
문윤정: 견디기 힘든 병상에서도 ≪에세이21≫을 계속 발행하셨다니 강인한 정신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문윤정: 작가에게는 고향이 문학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정림: 원래 고향은 충남 천안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머니가 서울 사직동 집으로 상경하시게 되어 따라 올라가게 되었지요. 세 살 때였습니다. 아버지가 두 자녀를 위해 마련해 주신 그 사직동 집이 실은 내 유년 시절의 고향이나 같습니다.
집 바로 근처에 사직공원이 있었는데, 거기가 제 놀이터였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팔랑거리며 고무줄놀이는 못하고, 집 앞 골목에 앉아 땅에 그림을 그리며 놀았네요. 마당에는 맑은 물이 마르지 않는 펌프가 있었고, 담장에는 사슴과 꽃 같은 민화가 그려져 있는 아담한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서 6ㆍ25전쟁을 겪었어요. 사직공원 앞에서 모자에 나뭇가지를 꽂고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내려오는 인민군들을 숨죽이며 바라보기도 했지요.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모임에 다녀오시더니 피란을 가야 할 것 같다고 해서, 우리는 마름을 따라 고향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피란이 무엇인지도 몰라 남아서 집을 보시겠다는 어머니를 혼자 두고 천안 집으로 내려갔지요. 큰길을 피해 가느라 산을 넘고 넘어갔지만,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노래까지 부르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인민군들이 본부로 쓰고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야기는 <그 뜨겁던 6월>(1986)과 <6월과 복숭아>(1990) 속에 있습니다.
지금도 꿈에는 너른 천안 집이 아니라 작은 사직동 집이 보입니다. 아버지의 재력으로 큰 집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학생 둘이 사는데 방 두 칸과 마루만 있으면 족하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언젠가 그 집을 도로 살까 하고 찾아갔더니, 재개발 지역으로 묶여 있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쉬움은 <사직동 그 집>(2006)이라는 글 속에 담아 두었습니다.
문윤정: 선생님의 말씀에서 아버지의 교육열이 느껴집니다. 부모님의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세요.
이정림: 저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세 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지요. 우리 5남매가 모두 대학을 나오고, 궁핍하게 살지 않은 것은 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 덕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금광을 하셨는데 성공하시어 그 당시 미국산 크라이슬러를 갖고 계셨고, 그 차로 천안에서 종로 화신백화점으로 점심을 드시러 갔다고도 하는데, 막내인 제게는 소설 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버지를 소재로 한 글은 두 편밖에 없는데 <잃은 것과 얻은 것>(2005)과 <당신의 의자>(2011)가 그것입니다. 아버지는 제 이름을 지으면서 끝에 ‘림’자가 들어 있어 나중에 학생들이 “이정림 선생님” 하고 부르면 발음이 겹쳐 놀리겠다고 하셨다는데, 아버지는 제가 선생이 되기를 바라지않으셨나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머니는 쪽을 찌셨던 구식 분이었는데, 마음이 선하셔서 남의 일에도 눈물을 잘 짓던 분이었습니다. 학교는 다니지 못했지만, 자식들의 어깨 너머로 글을 깨쳐서 주로 고전 장편 소설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에게서 문학적인 소양이 있음을 발견하고 놀라곤 했는데, 그건 작은언니를 앉혀 놓고 편지를 대필하게 하실 때 문학적인 수사를 많이 구사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사업적인 수완과 카리스마보다는 어머니의 여린 감성을 닮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린 우리들이 아버지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일탈하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글을 쓰던 초기에는 어머니를 소재로 한 글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돌아가신 후 쓴 <사십구일재>(1996)와 <윤 5월 초하루>(2017)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군요.
문윤정: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셨습니다. 불문학을 전공하게 된 어떤 계기가 있는지요?
이정림: 아이들의 꿈은 자라면서 수없이 변하게 마련이지요. 어렸을 때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어느 여성 외교관을 보고 외교관이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갈 때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에 다닐 때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명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직업여성을 위한 대변지의 발행인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는 그 꿈들을 하나도 이루지 못한 실패자인 것 같습니다. <외길의 고독 그리고 아름다움>(1988)은 이런 주제로 쓴 글입니다. 프랑스어를 전공한 것은 단순히 디자이너가 되려면 프랑스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문윤정: 알베르트 카뮈, 생텍쥐페리, 모파상 등 수십 편의 프랑스 문학작품을 번역하였습니다. 선생님의 번역서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가와 작품을 말씀해 주세요.
이정림: 저는 생택쥐페리가 좋았습니다. 그가 조종사이면서도 글을 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글은 책상 위에서 상상으로 쓰인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 위에서 홀로 바람과 구름과 비와 고독하게 싸우며 쓴 생생한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어린 왕자≫입니다. 법정 스님도 이 책을 남에게 선물하면서 자기처럼 좋아하는 사람은 친구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친구가 되지 못할 사람이라 생각했다지요. 아동문학가인 정채봉 선생은 기차를 타고 지방으로 내려가다가 잠깐 쉬는 어느 역 가판대에서 제가 번역한 ≪어린 왕자≫를 사서 읽은 후 제 이름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을 했다고 해서 제가 프랑스어를 잘할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입니다. 그저 사전을 열심히 뒤적이면서 우리말로 옮겼을 뿐입니다. ‘어린 왕자’를 소재로 한 글로는 <어린 왕자>(1990)가 있습니다.
문윤정: 1980, 90년대 문학청년이라면 선생님께서 번역한 책 한두 권은 읽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여행이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라, 선생님은 청년들에게 프랑스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심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윤정: 1971년에 월간 ≪직업여성≫ 창간호를 발간하시게 된 배경과 폐간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정림: 1970년대는 제가 군소 잡지사와 신문사를 전전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서 기대하는 바가 있었던지 저에게 직업여성의 권익을 위한 잡지를 만들어 보라는 권유가 있었습니다. 젊음은 무모하리만큼 용감해서 제가 스물일곱 살 때 ‘390만 명의 직업여성을 위한 최초의 대변지’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월간 ≪직업여성≫을 창간했습니다. 창간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인 최은희 선생의 인터뷰와 ‘이 달의 인물’로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숙종 회장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인 이희호 여사를 권두 인터뷰로 앉혔습니다.
그런데 “71년도에 소망을 건 여인”이라는 소제목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당시 이희호 여사는 신민당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 선생의 부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창간호가 나간 뒤 제겐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정보기관원들이 찾아오는가 하면, 신문로 사무실 앞에는 종로서 형사가 아예 죽치고 앉아 하루 종일 제 동태를 주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제게 ≪선데이 서울≫ 같은 잡지나 만들라고 회유를 했습니다.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2호를 내고 3호를 제작하는 인쇄소에 서 기어이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그 사건은 당사자인 저보다 동아일보가 먼저 알아 신문에 보도까지 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간 정부를 상대로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무효 소송’을 벌여 마침내 승소를 하고 복권이 되었으나, 그때는 이미 저는 전의를 상실하여 복간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후 긴 무기력 속에 빠져 있다가 수필을 만나 겨우 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의 암울한 심경은 <엽서를 보내는 마음으로>(1985)에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판권 취소를 당한 후 일면식도 없는 대한일보 부국장인 박현서 선생이 불러 차를 대접해 주시면서 몸을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위로를 해 주었던 생각이 나는군요.
문윤정: 살벌한 시대에 정부를 상대로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무효 소송을 벌인 것 자체가 얼마나 담대한 분인지를 알 수 있겠습니다.
문윤정: 1974년에 지금 ≪한국수필≫의 전신인 ≪수필문예≫로 등단하셨습니다. 그 후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재등단했습니다. 수필가로 등단하신 특별한 계기가 있는지요?
이정림: 수필계에 들어오기 전부터 저는 수필적 산문을 많이 썼습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도 문화면에 ‘문책기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수필 종류의 글을 썼지요. 어느 때는 콩트도 쓰고 시도 썼습니다.
그러다가 1974년에 처음으로 수필 전문지인 ≪수필문예≫에 글이 실리게 되었는데, 그 잡지에서 편집 일을 맡고 있었던 박연구 선생의 재촉으로 <얼굴>(1974)이라는 글을 드린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는 번역 일에 열중하느라 수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래도 기회가 오면 마다하지 않고 써서 한국수필 75인집인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한국수필가협회 편, 1974)과 ≪한국수필문학대전집≫(범조사, 1975) 20권에 글을 올리기까지 했습니다.
박연구 선생과는 20대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제가 ≪직업여성≫을 만들 때 우리 사무실 한편에서 ≪현대수필≫ 창간호를 준비하고 계셨지요.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를 하게 된 것도 박연구 선생이 ‘무면허 작가’ 딱지를 떼라고 성화를 부리셨기 때문이에요. 그때까지 등단을 하지 않은 상태로 수필을 쓰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수필가가 될 생각이 없었고 재능까지 없어서 ‘문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싶은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문인협회도 가입할 생각이 없었는데, 상의 안주머니에 원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나만 보면 재촉하는 박연구 선생의 성화에 못 이겨 1995년에서야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사장이었던 황명 선생이 마라톤 선수가 이제야 문협에 들어왔다고 놀리던 생각이 나는군요. 황명 선생도 그때 처음 보았는데, 자기를 처음 본 사람이 다 있다고 내 등을 치면서 큰 소리로 웃던 기억이 납니다.
문윤정: 선생님은 한국 수필 등단 1세대입니다. 선생님께서 등단했을 때의 문단의 분위기는 어떠했는지요?
이정림: 그때는 ≪신세계≫라는 무명 잡지를 통해 박연구 선생이 1963년에 등단은 했다 하더라도 수필 활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개 교수나 언론인같이 전문 직업을 가진 분들이 글을 많이 썼지요. 그분들은 오늘날의 수필가들과는 다르게 삶의 여기(餘技) 쯤으로 생각하며 글을 썼을 것입니다. 그 후 정식으로 문학지를 통해 수필로 등단한 분들을 연령순으로 보면 변해명(≪한국문학≫ 1975년), 유혜자(≪수필문학≫ 1972년), 이정림(≪수필문예≫ 197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1976년), 정목일(≪월간문학≫ 1975년, ≪현대문학≫ 1976년) 씨 등이고, 우리 등단 1세대들이 ≪시간의 대장장이≫(2006년)라는 4인 수필집을 발간했습니다. 그런데 변해명 선생이 작고하시는 바람에 2집 발간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문윤정: 윤모촌 선생님, 김시헌 선생님, 이응백 선생님, 고봉진 선생님, 정진권 선생님 등 고인이 된 이분들은 수필 문단의 초석이 된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이분들에 대한 추억이나 회고담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정림: 이분들에 대한 추억은 참으로 많습니다. 모두 같은 수필문우회 회원들이라 자주 만나 이야기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수필문우회 회장은 김태길 선생이었는데, 수필문우회에는 세 층이 있었습니다. 김태길․차주환․이응백 선생은 상원로이시고, 그 아래로는 김우현ㆍ김시헌ㆍ송규호ㆍ윤모촌ㆍ정봉구 선생이 계셨고, 그 아래로는 허세욱ㆍ유경환ㆍ박연구ㆍ정진권 씨 등이 있었지요.
회식 자리에서는 술을 안 하시는 상원로님들은 고지대라 불렀고, 술을 잘하며 떠들썩한 아랫사람들은 저지대라 불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우현ㆍ고봉진 선생과는 글 좋고 사람 좋고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문주회(文酒會)’를 결성했는데, 김우현 선생이 육십을 겨우 넘기고 작고하시어 얼마나 안타까웠는지도 모릅니다. 살아 계셨다면 우리 수필계를 위해 큰일을 하실 분이었기에 우리의 상실은 너무도 컸었지요. <재회再會>(1991)라는 글은 김우현 선생을 기리는 추도의 글입니다.
윤모촌ㆍ김시헌 선생과는 돌아가실 때까지 개인적으로 각별했습니다. 김시헌 선생이 대구에 계시다가 부인과 사별하면서 서울로 올라오시게 된 후로는 셋이 함께 자주 고궁도 가고 차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었지요.
선생님들은 저와 나이 차이가 많았어도 친구로 대해 주셨어요. 다른 여성과 만날 때는 언행을 조심해야 하지만, 저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오해 살 일이 없으니 친구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어울려 지내다가 건방지게 김시헌 선생을 속현(續絃)까지 해 드렸는데, 두 분이 서로 존중하며 사시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모릅니다.
이응백 선생은 우리 ‘전주 이 씨’라고 아껴 주셨는데, 촌수는 따지지 말자고 해서 누가 아지매고 누가 아저씨인 줄은 끝내 밝히지 않고 가셨습니다. 제가 감기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는 수기(手技)로 목소리를 트여 주셨고, 늘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은 어깨가 아픈 법이라고 만날 적마다 뭉친 근육을 풀어 주시곤 했지요. 정진권 선생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저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아 갑작스런 비보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모두 훌륭한 인품을 지니신 분들이었고, 이분들께 문사의 격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내 수필 인생에서 가장 값진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분들 한 분 한 분을 조사와 함께 떠나 보내드리면서 내 수필 인생도 저물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속멋쟁이들>(1987)과 <파나회장실>(1993)은 이분들과의 추억이 깃든 글입니다.
문윤정: 김태길 선생님은 우리 수필계를 빛내 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태길 선생님에 대한 추억담을 들려주세요.
이정림: 앞에서도 말했지만, 저는 문단에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작가는 글만 쓰면 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김태길 선생이 어느 날 모 제약회사 사보에 실린 내 수필(<어느 낯선 아침>, 1984)을 보시고 ‘수필문우회’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의사를 박연구 간사에게 비치셨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박 간사의 또 집요한 권유에 못 이겨 1984년에 인사만 하러 나간다고 한 것이 그만 선생이 작고하신 2009년까지 문우회의 열성 회원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수필 문단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나라 수필가들의 글을 거의 섭렵했습니다. 대체로 서정적인 글들이었는데, 읽고 나면 뭔가 아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김태길 선생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행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주제를 발견했을 때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제가 미흡하게 생각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 후로 제 글은 달라졌습니다. 주제 있는 글을 쓰게 된 것이지요. 김태길 선생의 글은 제 수필이 변화되는 데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 셈입니다.
제자들의 수필집에 평론이라도 달면, 애정을 갖고 그 수필을 읽으시곤 필자를 불러 자상하게 격려까지 해 주셨지요. 당신의 휘자를 딴 ‘김태길수필문학상’이 제정되고 나서 수필가로는 첫 번째로 제가 수상하게 되었는데, 명부(冥府)에서도 저를 지켜보고 계시다는 증좌로 생각되어 더욱 감사하고 그리울 뿐입니다.
문윤정: 선생님께서 한국수필에 기여한 가장 훌륭한 요소는 ‘사회수필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작품 <문 안에 있는 자와 문 밖에 있는 자>는 수필 문단에서 ‘사회수필’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수필가들에겐 사회 참여 의식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정림: 저는 글을 일반적 산문(기사)으로부터 시작해서인지 감성 일변도의 글은 쓰지 못합니다. 제 사회의식은 감성보다 강해서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 더 관심이 갑니다. 그중에서도 평범한 보통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던 김용구 선생은 저를 자연주의자가 아니라 인본주의자라 했지만, 자연도 인간이 있기에 더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문 안에 있는 자와 문 밖에 있는 자>(1985)는 학생과 전경의 대치를 보고 쓴 글인데, 시국을 소재로 한 이 글은 어느 곳에서도 실어 주지 않았습니다. 표현도 고르고 에둘러 쓰면서 조심했지만 결국 그 글은 공적인 지면에는 실리지 못하고 제 단행본에 넣어 빛을 보게 되었지요.
봄이면 온갖 꽃들로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봄날에 생존을 위해 고공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애완견은 이제 반려견이라고 불리며 식구처럼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살아 있는 돼지를 땅속에 묻고 그 비명 소리에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반된 사회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작가라면 밝은 사회뿐만 아니라 어두운 사회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가족에게만 향하는 관심과 애정을 타인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내 행복에만 안주하지 말고 행복하지 못한 타인의 삶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수필로 간주될 수 있는 글로는 <아름다운 손>(1979), <남자 수의를 입고 떠난 당신>(1992), <생존의 의미>(1992), <뱀사골의 물빛>(1994) 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내 사회의식은 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행동으로까지는 연결되지 못합니다. 그것을 늘 부끄럽게 생각하지요.
문윤정: 1998년에 범우사에서 펴낸 ≪한국수필평론≫은 한국수필 문단에서는 ‘수필 평론’의 전범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2002년에 개정판이 나왔으니 출판시장에서도 성공한 책입니다. 오랫동안 준비하여 발표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수필 평론을 써야 할 시대적인 요구가 있었는지요?
이정림: 처음부터 수필 평론을 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수필 평론을 하는 사람도 없었지만요. 문학평론가들은 수필 평론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수필이 허구로 쓰는 문학이 아니어서 자칫하면 작자 자신의 인품을 건드리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지요.
윤오영 선생은 일찍이 수필 평론은 수필가가 해야 한다고 했는데, 제 글의 성향에 그런 점이 있었던지 수필 평론에 대한 원고 청탁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겁도 없이 쓰게 되었고, 책으로 묶어 낼 정도의 분량이 되었지요. 아는 게 별로 없어서 현학적으로 쓰지는 못하고 제가 느낀 인상비평만 썼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책을 내게 되면 작품세계를 써 달라고 해서 그 분량도 꽤 됩니다. 원고는 다 있으니, 금년에 묶어 낼 생각입니다. 김태길 선생도 생전에 제가 ‘한국수필작가론’을 쓰기를 원했으니 좋아하시리라 믿습니다.
문윤정: 한국 현대수필 작가 중 수필 공부하는 이들이 꼭 읽어 보아야 하는 작가를 소개해 주세요.
이정림: 2011년도에 ≪이분들이 계셨다≫라는 편저를 냈습니다. 수필 문단의 맥을 짚어 드리기 위해서였지요. 이 책에 수록된 작가들은 김시헌․송규호․김규련․정혜옥․반숙자․김영만․이정림입니다. 196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에 걸친 7인 수필집인데 물론 빠진 분들도 있습니다.
근원 김용준․김동석․노천명․이양하․윤오영․김소운․김우현․박문하․유병석․박규환․유경환․윤형두․정봉구. 정재은 선생들의 수필도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한 가문에서도 조상이 있듯이 문단에서도 기억해야 할 원로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의 정통 수필에서 기초를 닦은 후 새로운 세대의 글을 읽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온고지신일 것입니다
문윤정: 2004년에 창간한 계간지 ≪에세이21≫은 단단한 문예지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에세이21≫을 창간하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이정림: 삼십도 안 된 나이에 창간한 ≪직업여성≫이 정치적인 압력으로 폐간되었던 쓰라린 경험이 있어 두 번 다시는 잡지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하생들이 기존 잡지로는 등단을 하지 않겠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에세이21≫을 창간하게 되었습니다. 창간하면서 제가 끌어갈 수 있을 때까지만 하고 없을 때는 단호히 폐간시키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창간 17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는 그게 실행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잡지를 만들면서 출신지를 가리지 않고 좋은 필자를 모시려 애썼고, 독자나 필자 모두에게 인정받는 잡지를 만들기 위해 원고 하나하나를 꼼꼼히 보아 넘기는 성의를 다했습니다. 그런 결과 필자들로부터 청탁을 받으면 긴장부터 하게 된다는 말과 긴장을 하면서 글을 쓰게 되는 잡지가 있다는 것이 좋다는 과분한 말까지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창간할 때 수필의 저변 확대에 주력하지 않고 질적 향상을 꾀하겠다는 초심대로 등단에 까다로운 잡지라는 평도 얻게 되었습니다. ≪에세이21≫은 제 자존심이나 같습니다.
문윤정: 선생님의 작품 <빙심氷心> 잘 읽었습니다. 무골호인은 원하지 않는 이미지라고 하셨으니 ‘차가운 이미지’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외람되지만, 부연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정림: 선비는 원래 조용히 난초나 치고 풍류만 즐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선비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병자수호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요. 말년에 의병장이 되었던 면암은 대마도로 끌려가 왜놈이 주는 쌀은 한 톨도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하다가 끝내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느 베이유는 런던의 병실에서 굶주리고 있는 프랑스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 치료와 식사를 거부하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이런 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요 행동하는 지성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천梅泉의 뜰에서>(1996)는 망해 가는 나라에서 선비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절명시를 짓고 자결한 황현을 그린 글입니다.
<겨울 산에서 시작하리라>(1986)는 폐부까지 시려 오는 겨울 산을 닮고 싶어 써 본 글입니다. 차갑다는 것은 명징(明澄)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차가움 속에 뜨거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선비이지요.
문윤정: 수필 강의를 하신 지 꽤 오래되었지요. 어디에서 강의하시는지요?
이정림: 처음으로 수필 강의를 시작한 것은 1988년 한국일보 문화센터에서였습니다. 그 당시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만 문화센터에 수필반이 있었습니다. 한국일보에서는 박연구 선생이 금요반을 맡았고, 저는 목요반을 맡았지요. 중앙일보는 서정범 선생이 맡았고요. 그러다가 1996년 한국일보가 문화센터 사업을 접는 바람에 이 반을 잠실롯데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가 또 시청 앞에 있던 중앙문화센터 서울본점으로 옮겼어요. 중앙일보마저 문화센터 사업을 중단하게 되어 그 다음에는 한겨레신문사 문화센터에 정착을 했지요. ≪목요일 아침≫(2012)이라는 편저는 목요반 출신 작가들의 작품집입니다.
1995년, 마포평생학습관이 개관하면서 생긴 수필반을 23년 동안 이끌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군데에서 강의를 했지만, 나중까지 한 곳은 그 두 곳뿐입니다.
문윤정: 수필이론서도 펴낸 선생님의 수필관이 궁금합니다.
이정림: 수필은 결코 생각나는 대로 쓰는 잡문이 아닙니다. 또 사회의 위치를 등에 업고 쓰는 삶의 여적 같은 글도 아닙니다. 소설은 문자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수필은 문자 이후에 지성인들이 쓴 글이기에 선비의 문학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한 편의 수필 속에는 작가의 품격이 들어 있고, 인생에 대한 철학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필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선비는 아닙니다. 선비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만 그분들의 정신만은 이어 받았으면 합니다.
문윤정: 선생님께서 존경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인지요?
이정림: 우리 수필계로 좁혀 말하면 김태길 선생님과 김시헌ㆍ윤모촌 선생님입니다.
문윤정: 수필에서도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하면 ‘수필은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데 왜 상상력이 필요’한지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에 대한 선생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이정림: 수필은 사실의 기록도 아니요, 사실의 기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수필에서 상상은 허구의 도입이 아니라 수필을 좀 더 문예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수법이자 기법일 뿐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상상과 수필의 상상은 다릅니다. 소설에서는 상상이라 하지 않고 허구라 하며, 그 허구의 사실 여부를 밝힐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상상이 상상임을 밝히지 않으면 허구가 됩니다.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필은 산문이지만 문예적인 산문이라서 문예적인 요소를 지니게 됩니다. 문예적인 요소란 비유ㆍ상징ㆍ상상 같은 표현상의 기법을 말합니다. 제 수필에서 상상 기법을 차용한 글로는 <실종>(1992)과 <태양이 없는 그림>(1998)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문윤정: 수필이 신변잡기가 아닌 문학작품으로 탄생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무엇인지요?
이정림: 신변잡기는 일상의 기록일 뿐입니다. 기록은 비망록이나 같습니다. 비망록은 수필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소재를 취하는 수필이 문학성을 지니려면 그 소재에 주제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소재는 주제를 품고 있습니다. 다만 작가의식이 있는 작가에게만 그 주제가 보일 뿐입니다. 작가의식이 있는 작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모두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문윤정: 선생님의 글 중에서 “내가 수필에서 시도하고 싶은 것은 수필의 문학성에 현실 참여적인 시각을 접목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거기에 지성의 꽃을 피워 올리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수필의 정신을 함축적으로 말씀한 글이라 생각합니다.
문윤정: 후배 수필가들을 위해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정림: 작가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은 작품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글만 잘 쓰면 됩니다. 자기 이름 석 자를 내걸고 발표하는 글은 어느 지면이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글을 처음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요.
문단 정치를 하지 마십시오. 문단 정치를 할 시간이 있으면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하십시오, 유명해지기 위해 조바심을 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당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날 것입니다. 문학상에 대해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상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문학비는 후세에 사람들이 세워 주는 것이지 살아 있는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문사가 되려면 이런 세속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문윤정: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정림: 앞으로 무언가를 새로 계획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게을러서 미루고 있었던 일들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2021년에 ‘수필이론서’가 한 권 더 나올 예정이고 ‘현대수필작가론’을 발간할 계획입니다. 계획이 아니라 희망이 있다면 빨리 건강해져서 다시 강단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문윤정: 선생님의 말씀 중 ‘문사의 격’, 이 한 마디가 가슴에 꽉 박혔습니다.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인터뷰는 수필가들에게 깊은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빨리 건강을 회복하시어 강단으로 돌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2021년엔 예정되어 있는 책 두 권이 빨리 출간되어 읽어 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필과비평≫ 2021년 1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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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정 :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및 객원 기자. *인도네팔여행집 ≪신들의 땅에서 찾은 행복 한 줌≫*수필집 ≪선재야 선재야≫ ≪답일소≫ ≪당신의 아침을 위하여≫ ≪마음의 눈≫ ≪잣나무는 언제 부처가 되나≫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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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천히 되새김하며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전 생애가 녹아 있는 인터뷰 내용이 가슴 뭉클하게 합니다. 현대수필의 맥도 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어서 건강 회복하셔서 계획하시는 일 다 이루시기를 바라나이다.
감사합니다.~~♡
이 인터뷰는 지상인터뷰입니다.
몇 번 감수를 했는데도 오자가 났군요.
사진은 지금 사진이 아니라 2016년 9월 행사 때 사진입니다. .
선생님, 참 의미있는 인터뷰입니다.
선생님의 훌륭하신 업적을 되짚어 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역사가 곧 한국 수필의 역사이지요.
긴글이지만 문장마다 깊은 의미가 새겨져
진하게 감동을 받으며 보았습니다.
선생님, 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건강이 속히 회복되셔서 강의실에서 뵙기를,
또 선생님 소망하시는 일 꼭 이루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셔요.
평소에 저가 느끼고 마주한 선생님의 모습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 인터뷰입니다.
강인하심과 굽함이 없으신 열정으로 여기까지 이끌어 오신 선생님, 존경합나다.
앞으로는 쉬엄쉬엄 한 번 더 쉬엄쉬엄 하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김우현 선생님이 나오시기에 김선생님 사모님께드리려고 프린트 했습니다.
긴 글 읽으시느라고 고생하셨습니다.
김우현 선생 사모님께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의 이 대담기사는 선생님의 자서전이면서 우리나라 수필역사를 보는 것 같습니다.
투철한 작가정신,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김태길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 수필을 쓰기의 전환점이 된 점.
박현서씨로부터 위로를 들은 얘기, 등이 잊혀지지 않은군요.마음에 남구요.
선생님 사진을 보니 이제 교실에서 뵐 날이 얼마남지 않은 것 같아 설렘니다.
그동안도 화이팅하시길 빕니다.
사진은 요즘 내 모습이 아니라 2016년 9월에 행사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라면 햇빛과 공기, 물...기타 여러 가지가 밑받침이 되어야 하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게 영향을 준 많은 분들이 있어 오늘 내가 있는 것이겠지요.
수필문학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자산'이 구전이 아닌 기록으로 정리되었네요.
문학으로서 수필의 본령, 작가의 자세, 수필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까지,
두고두고 읽을 필독 목록이 추가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건강하시기를 늘 기원합니다.
인터뷰하자고 해서 사양하고 또 사양했는데,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권하고 또 권해서 하게 되었네요.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가 독자에게 무슨 도움이 될는지 모르겠군요.
최근에 선생님의 책 2권 (산길이 보이는 창. 숨어 있는 나무)를 다시 읽고, (이정림, 그의 수필과 인연들)을 읽은 상태에서
이 글을 읽으니, 작품 별로 나타난 선생님의 삶과 수필 인생이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좋은 수필 쓰는 요령과
작가의 마음 가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두고 두고 읽을 글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저도 선생님의 사진이 최근 모습인가 하고 엄청 반가웠습니다. 지난 사진이지만 반갑습니다.
새해 더욱 건강하시고, 수필 교실에서 뵙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건강하셔요.
선생님의 음성으로 잘 읽었습니다..
정통 수필계의 거목이신 선생님의 일대기가
한편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된것 같아요.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한치의 흔들림없이
하시던 일을 해 내시고
하고자 했던 일까지 해 내시는 정신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신축년 새해에는..
모두가 염원하는 일들이 현실이 되어
수필교실에서 뵐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고맙습니다.
장재옥 씨도 건강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