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재현과 고통의 출구
이 송 희
1.
시인은 시적 대상에 대한 자료의 결핍과 부재의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표현하는 존재들이다. 문학이 언어로 표현된 예술이라는 점은 현실 변화에 따른 그들의 민감한 반응을 직접적으로 유도하며 독자와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들은 비유와 상징, 알레고리의 방식을 통해 시대의 부조리와 물화된 욕망, 소외의 단면들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독자와 소통한다. 치열한 역사적 사건들이 즐비했던 열망과 고뇌의 20세기는 그 시대의 문학 작품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현실에 대한 냉정한 거리 유지는 곧 현실에서 삶의 진정성과 올곧은 가치를 찾으려는 하나의 전략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샤르트르의 말처럼 문학은 그 사회적 현실이나 역사적 상황에 대해 스스로를 구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속을 내적 결핍과 부재를 견디는 소통의 전략으로 인식한다.
지면을 통해 만나게 되는 다음의 몇몇 작품들은 지나간 역사에 대한 기억이나 재현 또는 모순된 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 갖게 되는 가치관의 혼란 등을 우회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역사는 기억에 의해 재현되고 현재를 증언하며 새롭게 구성한다. ‘기억’은 현재를 움직이는 근원적 장치다. 우리는 ‘기억’의 재현 속에서 시대의 모순과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보고한다. 정형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일정한 언어의 제약이 따르는 시조에서도 이제 현실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럼, 이 자연스러움 속에 내재된 부자연스러운 상징의 숲으로 들어가 보자.
2.
우리는 아팠던 과거를 오래 기억한다. 언어는 과거 이 자리에 아픔과 상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흉터와 같다.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는 여타 리얼리즘의 이론들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문학은 충분히 현실 참여적이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 지나간 역사에 대한 증언, 진정성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부딪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날선 시선들로 교전하는 거리 위에
짓밟혀 피 흘리는 일그러진 우리 우상
누리고 다지던 자리 무너지고 있나니,
댓잎처럼 푸른빛을 꿈꾸던 시간에도
진창의 풀잎 위에 찬바람 일으키고
그늘 속 시린 손마저 매섭게 뿌리쳤네
돌아보면 그리운 길, 그 푸르던 전설까지
이 시대 불문율로 몰아가는 벼랑 끝에
한 발짝 물러설 곳도 앉을 곳도 이제 없네
- 김연동, 「무너지는 우상」, (서정과 현실 2010 하반기호)
‘댓잎처럼 푸른’ 열망으로 ‘누리고 다지던’ 자리가 ‘이 시대 불문율로 몰아가는 벼랑 끝’에서 가차 없이 무너져 가는 현실을 재현한다. 무너지는 우상의 이미지는 ‘짓밟혀’, ‘피 흘리는’ ‘일그러진’, ‘무너지고’와 같은 ‘우상’을 수식하는 거친 시어들의 결합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난다. ‘날선 시선’들이 ‘교전’하는 ‘거리’의 풍경은 찬바람 지나가는 살풍경한 도심의 이미지와 비루한 작년 여름의 뜨거운 현장을 증언한다. 누리고 다지는 동안 꿈꿔왔을 푸른 댓잎의 욕망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히고, 우리는 피 흘리는 우리의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가 지나왔을 자리를 더듬어 본다.
이러한 되새김은 곧 화자의 지켜주지 못하고 믿어주지 못했던 미안함과 반성으로 이어진다. ‘진창의 풀잎 위’에 ‘찬바람’ 일으켰던 존재와 ‘시린 손 매섭게 뿌리쳤’던 주범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무너져가는 우상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과 지켜내지 못하고 외면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은 마지막 수 초장의 ‘돌아보면 그리운 길’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 그리운 기억과 그를 둘러싼 ‘푸르던 전설’까지도 ‘이 시대 불문율로 몰아가는 벼랑 끝’에서 이미 존재감을 상실한다.
‘한 발짝 물러설 곳도 앉을 곳도’ 없는 벼랑의 시간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며 출구를 찾을 것인가 하는 의미와 겹쳐진다. 무너진 우리의 우상을 기억하며, 지도자를 잃고, 방향 감각을 상실한 이곳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조차도 내던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게 한다. ‘한 발짝 물러설 곳도 앉을 곳도 이제 없’는 벼랑 위에 선 시간은 네거리에 서서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할지 모르는 소시민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신도시 도로 옆 공원이 들어선 자리
언젠가 새마을운동 표지석 세워졌다
무심히 지나쳐 갈 뿐 눈여겨보지 않았다
세 잎의 문양 문신으로 베어나는
늦저녁 부는 바람, 산책로 함께 걸어
기억을 거슬러 가면 아버지가 떠오른다
외진 섬에 혁명처럼 다가온 새마을 운동
깡마른 몸 하나로 꼿꼿하게 일어섰던
그 땀의 흔적 감싸듯 도시의 밤 바라본다
방바닥 등진 겨울 뼈마디가 아린다
사백만 미취업시대 바람은 현(絃)을 울리고
네거리 어디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할까
- 김윤숙, 「네거리에서」, (시와문화 2010 봄호)
네거리에 선 화자의 모습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삶의 기로에 놓인 오늘의 현실을 반추하게 한다. 이 작품의 출발은 신도시 도로 옆에 들어선 공원을 산책하다, 그간 무심코 지나쳤던 새마을운동 표지석을 보고 아버지가 살던 시대를 떠올리는 것에서 비롯된다. 과거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현재를 잇는 ‘새마을운동 표지석’은 ‘신도시’의 분위기와 함께 시의 주제의식을 부각시킨다. 신도시는 공해가 없는 안락한 공간시설 및 환경을 추구하는 도시 개발 측면과 낙후지역인 위성도시의 인구 및 산업시설의 분신을 목표로 하는 개발도상국의 형태로 구분된다. 화자에게 새마을운동은 ‘외진 섬에 혁명처럼’ 다가왔다. ‘깡마른 몸’으로 일으켜 세운 땀의 흔적은 여전히 축축하게 젖어 있다.
시인의 걱정은 다분히 새마을운동의 기억을 빌려 깡마른 몸으로 꼿꼿하게 일어섰던 아버지의 젖은 땀을 그리워하는 것에 있지 않다. 문명의 발달로 재개발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요즘, 곳곳에서 일어나는 신도시의 열기는 과거 새마을운동에서 일으켰던 그 시절 아련한 기억을 지나 ‘사백만 미취업시대’라 불리는 오늘의 현실을 비판하는데 있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를 비롯하여 실업률의 증가 등의 문제들은 개발 후의 후유증으로 우리 사회가 고스란히 떠맡고 있는 문제들이다. 화자가 서 있는 네거리는 목표 하나 없이 방향을 상실한 소시민의 모습을 그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마치 일제 식민지 시절 박해받는 민중을 노래했던 조선의 시인 임화의 「네거리 순이」를 연상케 한다. 화자인 오빠가 종로 네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는 누이동생 순이에게 하소연하는 독백체 형식으로 쓰여 진 작품이다. 다소 선동적이며 격정적인 호흡과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계급투쟁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면서도 이데올로기적 성격에 서정성을 가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이러한 방향상실과 현실 비판 의식이 다분히 현실에 대한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내지 않고 서정적으로 승화되는 지점에 김윤숙 시인의 장점이 있다.
외진 섬에 혁명처럼 일던 새마을 운동의 후유증은 우리에게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 대신 뼈마디 아린 겨울과 실업의 고난을 안겨준 것이다. 문명의 발달 앞에서 개인의 행복과 안위, 욕망을 저당 잡힌 우리의 현실은 대상의 부재 속에서 살아 남아 있는 오늘을 바라보며 과거로부터 끌고 온 개인의 체험을 드러낸다.
누군가 날 지켜본다
고요하고 투명한 방
울다 잠든 간밤에는
벽에 기대 꿈을 꾸며
이마에 소름처럼 돋는 빗소리를 들었다
기침처럼 널 보내고
밤새 비는 쏟아지고
삐져나간 머리카락
아침마다 쓸어모은다
등뼈를 따라 내려오는 거미줄이 내 몸인 방
반어법처럼 웃는 밤엔
추억에도 피가 돌지만
돌아오리란 믿음도 조약돌로 말라가고
희망은 덧니 같은 것, 시리게 저리는 것
그 날 나는 죽었다
철장 속에 나를 두고
빗방울은 식은땀처럼 더욱더 굵어진다
혼자서 울음이 되는 빗소리를 듣는다
- 박성민, 「삼십 센티미터 자에 내리는 빗소리」, (시조21 2010 상반기호)
삼십 센티미터 자의 크고 작은 눈금을 각각 철장과 빗줄기의 형상에 빗대어 표현한 이 시에서 우리는 한때 뜨겁게 타올랐던 화자의 경험적 시간을 곱씹어 볼 수 있다. 삼십 센티미터 자로 빗금을 치면서 과거를 오늘로 끌어와, 온 몸에 흐르는 식은땀과 울음으로 체감하면서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을 보여준다. 빗줄기는 과거의 슬픔을 그대로 몰고 화자의 주변을 배경처럼 두른다. 화자는 스스로 만든 빗줄기에 자신을 가두고 거미줄로 자신의 몸을 감는다. ‘거미줄이 내 몸인 방’이라는 상징에서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이 시의 분위기를 주도해 가는 첫 수의 ‘누군가 날 지켜본다’는 부분은 과거를 현재로 끌고 오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살아가기 위해 누군가가 지켜본다고 믿는 것, 그러한 믿음이야말로 자신이 만든 감옥 속에서도 실존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고요하고 투명한 방’이라는 공간과 ‘울다 잠든 간 밤’이라는 시간 설정은 ‘이마에 소름처럼’ 돋을 빗소리와의 결합 하여 그날의 기억을 온 몸으로 체감한 화자의 고통을 재현한다. 아침마다 ‘삐져나간 머리카락’을 쓸어 모으며 ‘기침처럼’ 보냈던 너와의 추억을 한 올 한 올을 곱씹었을 화자의 현재를 반추하게 한다. ‘반어법처럼 웃는 밤’과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으로 몸을 가두지만, 희망이 덧니 같은 것이며 시리게 저리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화자에게 결코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네가 떠난 날, ‘그날’의 그는 이미 죽었지만, 오늘의 그는 스스로 몸을 가두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시인은 삼십센티미터 자에 내리는 빗소리라는 상관물로 구체화한다.
개인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과분한 감정노출에 휘둘리지 않고 지울 수 없는 상처의 기억을 구체적 이미지와 비유들로 끌고 가는 점에서 이 시의 매력을 찾을 수 있다. 고요함과 투명성, ‘밤’과 ‘거미줄’, ‘빗소리’의 속성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화자의 내면으로 이어가는 구체적 장치로 기능하면서 어두운 주제를 명징하게 떠받친다. 명징한 이미지와 구체적인 감각의 텃밭에 세워지는 서사의 축이 이 시의 완결성을 더한다.
꽃들이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서있다
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도열
언제나 벽을 등진 채 배경이 되고 만다
관계를 맺지 못한 사자(死者)와의 시든 동행
한 번도 저를 위해 피고지지 못했던
목 잘린 꽃들의 장례, 순장(殉葬)은 진행형이다
- 이달균 「근조화(謹弔花)」 (나래시조 2010 봄호)
이 시는 영안실에 부동자세로 서서 언제나 무엇의 배경이 되는 근조화의 속성을 빌려 한 번도 자신을 위해 피고지지 못했던 삶을 위로한다. 근조화는 망자가 아닌 산 자의 이력과 인간관계를 상징한다. 또한 근조화는 죽은 자와 아무런 인연도 없이 그들과 동행해야 하는 희생제의적 존재들이다. 시인은 이 근조화를 목발에 의지한 덧없고 창백한 형상과 ‘목 잘린 꽃들’로 인식하면서 자신을 위해 피고지지 못했던 근조화의 운명을 환기한다. ‘목 잘린 꽃들의 장례’, ‘순장(殉葬)’의 현장은 늘 진행형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은 근조화의 모습 속에서 발견한다.
장례식에서 망자와 관련도 없으면서 그들과 함께 순장되어야 하는 근조화의 운명은 자신의 이름으로 올곧게 살아가지 못하고 늘 누군가의 무엇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소수자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타인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했던 어머니들의 삶이나, 소외된 자들의 희생된 삶을 근조화의 모습에 비유하는 시인의 사유가 단단하다. 시인이 세운 이 단단한 사유는 근조화처럼 배경이 되고, 희생이 된 영혼들을 위로하며 강도 높은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의미 있는 작품이다. 강렬한 이미지 속에 탄탄한 서사구조를 세우는 그의 활달한 감각이 돋보인다.
3.
산업자본주의의 영향 아래서 독자의 눈과 귀를 자극하며 코드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학은 자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에 시대의 진정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어느 장르보다 성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정형시가 독자와 소통하는 전략은 자본주의 시대 문학의 변화나 문학의 위기, 아우라의 상실과 같은 일종의 담론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아주 가까이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시대적 고민과 열망들을 적은 언어로 직조하는 가운데 구체화한 이미지 속에 명징한 서사를 빚어 들어앉히는 것이다. 직설적인 화법이나 서정의 축대에 세우는 섬세한 이미지들을 그려내는 기법에서 뛰어넘는, 진정 현대의 ‘시조(時調)’라는 이름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그러한 사유의 단단함으로 굴곡진 시간들과 숨 가쁘게 호흡하며 기억을 재현하는 몇몇 작품들에 대한 독서는 진정 사회와의 소통을 꿈꾸며 결연한 심지들을 밀어 올리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몸속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현실에 대한 비판과 순수한 열정을 알레고리의 기법으로 표현하고 이미지의 활용 속에서 구체적이며 활달한 감각으로 서사를 압도하는 지점에 이들 작품의 자존이 빛난다.
-발췌 《다층》2010년 여름호
이송희: 시인, 문학박사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단,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수상,
2010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받음, 시집 『환절기의 판화』『아포리아 숲』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