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가요무대에는 명곡 <목포의 눈물>이 등장합니다. 목포에는 근대문화유산들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목포는 유명한 대중 가요 <목포의 눈물>의 무대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목포의 눈물>은 일제 시기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소재라 보입니다.
<목포의 눈물>은 일제 시기 최고 히트곡이라 할 수 있는 명곡입니다. 이 곡은 일제 시기 호남 지방은 물론 한반도 전체에서 신드롬 현상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모았습니다. <목포의 눈물>이 대대적으로 히트했던 것은 민족 정서가 담긴 가사 외에도 목포 출신의 가수 이난영 님(이하 존칭 생략)의 걸출한 가창력이 큰 호응을 얻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이난영은 바이브레이션이 가미된 발성법, 깨끗한 목소리 등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입니다.
<목포의 눈물>의 빅 히트는 한국 가요계에서 트로트시대의 개막을 알린 터닝 포인트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여느 곡과는 달리 기획으로 만들어진 곡입니다. <목포의 눈물>이 만들어진 계기는 1934년부터 시작된 조선학 운동이었습니다.
조선학 운동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조선의 역사, 전통을 발굴, 계승하자는 민족주의 운동이었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글보급운동을 벌였고, 조선의 영웅, 고적 등을 소개하는 운동도 대대적으로 전개했지요. 조선학 운동에 맞춰 오케레코드와 신문사는 1935년 1월 전국 10대 도시를 대상으로 <향토찬가 신지방민요> 가사를 공모합니다. 8개월 동안의 공모 과정을 거쳐 <목포의 노래>를 비롯한 몇 편의 시가 우수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오케레코드는 <목포의 노래>를 <목포의 눈물>로 바꾼 뒤 곡을 만듭니다. 이후 오케레코드는 1935년 9월 SP 음반 <목포의 눈물>을 제작, 판매합니다.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소재로 지어진 노래였지만 조선 민족의 폭발적 공감을 얻습니다. <목포의 눈물>은 공 식적으로 5만장이 판매됐지만 실제로는 더많은 음반이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5만장은 인구 수와 경제 수준으로 보아 일본에서 30만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한 것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목포의 눈물>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악씨 아롱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2.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3.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는가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
<목포의 눈물>은 유달산, 영산강, 삼학도 등을 등장시켜 목포의 지리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곡이 목포를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작사가 문일석 선생이 목포 출신의 문학청년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유달산은 시인들이 자주 올라 바다를 보며 시를 지었던 곳이고, 영산강은 호남 평야를 굽이굽이 돌다가 목포 앞바다로 흘러드는 강입니다. 삼학도는 세 마리의 학이 바다에 앉은 모습과 같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는데, 현재는 매립되어 옛날의 자취를 찾아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최근 삼학도의 옛 모습을 복원하려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지요.
<목포의 눈물>은 전반적으로 항구에 나온 한 새악시가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새악시는 새색시의 사투리로서 갓 결혼한 여인을 의미합니다. 이 여인은 부득이하게 외국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노래는 부두에 서있는 여인을 절개가 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곡은 얼핏 보면 일제 시기 흔했던 조선인들의 이별 장면을 묘사한 노래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곡이 주목을 끈 것은 바로 2절 가사 때문이었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님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라는 가사가 크나큰 주목을 끌었습니다. 결국 이 가사로 인해 <목포의 눈물>은 향토가에서 민족가로 격상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가사를 음미해 보겠습니다. 2절에 보이는 ‘삼백년 원한’이란 300년전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임진왜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요. 또 삼백년 전에 노적봉에 완연한 자취를 남긴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병사들, 백성들을 연상시키지요. 유달산 중턱에 있는 작은 봉우리 노적봉은 이순신 장군이 이 봉우리에 볏짚을 쌓아서 거대한 노적가리로 위장하여 일본군의 사기를 떨어뜨렸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또 목포 자체가 이순신 장군과 긴밀한 연관이 있던 고장이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명량해전에서 승전한 직후 목포의 고하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다수의 전함을 만들어 일본군과의 전투에 대비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2절 가사에 나오는 ‘님’은 과거의 이순신 장군, 현재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절에 보이는 ‘새로워지는 옛 상처’는 왜란의 상처가 부활한다는 것으로서, 당시 자행되고 있던 일제의 조선 침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요. 이 곡이 지어진 1930년대 중반은 조선총독부의 수탈정책인 산미증식계획으로 조선 농민의 몰락이 가속화할 때이지요. 더구나 목포는 개항 이래 일본인의 집중적 침략을 받은 곳입니다. 즉 대한제국은 1897년 무역을 확대하고자 목포를 개항했지만 개항 직후부터 일본인들이 이 고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지요.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이듬해인 1906년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사실상 한반도를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고자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한 뒤 수단 방법을 가리지않고 한국의 토지를 긁어모았습니다. 한국의 농민들은 생활이 어려워지자 동척에 토지를 저당잡히고 자금을 빌리지만 대부분 갚지 못합니다. 그 결과는 토지의 몰수입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토지가 일본인에게로 넘어갔고, 한국인의 원한은 쌓여갔습니다. 한국인들은 한국의 토지를 빼앗아가는 동양척식회사를 증오했고, 그에 동양척식회사 사원들은 권총을 차고 일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에게서 긁어모은 토지에 대한 경영을 맡기고자 일본인의 자유도한을 장려합니다. 그 결과 일본인들이 대거 한반도에 몰려와서 거주하기 시작합니다. 동양척식회사는 비옥한 호남 평야의 쌀에 지대한 관심을 보입니다. 그리고 일본인을 집단적으로 이민시켜 이 곳을 지배하려 합니다. 그에 따라 목포라는 개항장을 배후지로 가지고 있는 영산강 주변의 토지를 집중 매수했지요.
그 결과 기름진 목포의 토지가 일본인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옥토를 장악하자 목포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산기슭에 올라가서 초가집을 짓고 살 수밖에 없었지요. 이난영의 집안도 일제에 밀려 산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거주했습니다. 여러모로 목포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한편 일제는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을 강행하고, 증산된 조선미의 상당 부분을 일본으로 실어 나릅니다. 특히 호남 곡창지대의 쌀이 일본으로 많이 유출됩니다. 목포는 군산과 함께 호남의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주요 항구였습니다. 이후 일제의 수탈이 강화됨에 따라 생계가 어려워진 조선 농민들은 일본에 노동자로 가야 했습니다. 그 뒤 일제가 중국, 미국과의 전쟁을 확대하자 수많은 조선인들이 징병, 징용 등으로 외국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제 목포항은 이별의 항구로 전락하지요. <목포의 눈물>에서 부두에 서있던 여인은 바로 남편과 이별을 겪은 심정을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특히 3절의 ‘님’은 남편에 절개를 바친 여인을 부각시킵니다. 그 결과 2절에서 ‘님’을 나라에 충성했던 이순신에 비유한 것과 짝을 이뤄 목포를 충절의 고장으로 각인시키는 효과를 보입니다.
<목포의 눈물>은 바로 이같은 은유성으로 인해 일제의 감시곡이 됐고, 출시 과정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요. 일제 검열 당국은 2절 가사의 ‘삼백년 원한품은’이라는 가사는 누구를 원망하는 것이냐며 따져 묻습니다. 이 때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은 기지를 보여 원한은 원안을 인쇄과정에서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해명합니다. 또 원안은 발음이 비슷한 원앙을 뜻하며, ‘원안풍은’은 ‘원앙품은’이라는 뜻이라고 강변합니다.
그는 이 가사는 원앙새처럼 깊은 애정을 가진 연인들이 서로 헤어짐을 원망하는 것이라고 둘러댑니다. 결국 오케레코드가 출판한 가사지에는 ‘삼백연(三柏淵) 원안풍(願安風)은’이라고 기재됩니다. 한편 이철 사장은 조선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노이즈 마케팅’ 전략으로서 <목포의 눈물>이 총독부의 제지로 발매금지될 것이라는 소문을 유포시킵니다. 그리고 그 작전대로 조선인들은 이 음반을 너도나도 서둘러 구입해 엄청난 판매실적을 올렸지요.
이같이 <목포의 눈물> 가사지는 ‘삼백연 원안풍은’으로 기재했지만 실제 가수가 노래할 때는 ‘삼백년 원한품은’으로 부른 것 같습니다. 1935년 8월 오케레코드에서 출시한 SP 음반을 통해 이 부분을 세밀히 들어보면 ‘삼백년 원한품은’으로 들립니다. 주의깊게 청취하지 않으면 ‘삼백년 원한품은’과 ‘삼백연 원안풍은’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마치 <처녀 뱃사공>(1958) 노래에서 ‘군인간 오라버니’라는 가사가 ‘그님과 놀아보니’로 들리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요. 하물며 일본인이 ‘삼백년 원한품은’과 ‘삼백연 원안풍은’을 구분하기는 더더욱 어려웠을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목포의 눈물>은 전국 10대 도시를 상대로 공모한 애향가입니다. 그런데 이 곡과 함께 다른 도시를 노래한 애향가 음반도 발매되었지만 큰 반향을 얻지 못했습니다. 유독 이 곡이 인기를 끈 것은 바로 이난영이 이 곡을 멋지게 소화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원래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은 전년도에 <타향살이>를 히트시킨 고복수 선생에게 <목포의 눈물>을 취입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목포가 고향인 가수가 이 곡을 불러야 생생한 느낌이 살아날 것이라고 주장하여 이난영으로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이난영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역정도 <목포의 눈물>의 빅 히트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난영은 지극히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밑바닥 생활을 전전해야 했고, 공연차 건너갔던 일본에서도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지요. 그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서 오빠가 운영하는 악기점에서 많은 노래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난영은 집안 사정으로 보통학교를 중퇴해야 했고, 12세에 고향을 떠나 제주도에 가서 식모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그러던 중 가극단에 들어가서 막간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하지만 무대보다는 부엌일을 도맡습니다. 이후 가극단이 일본 공연 도중 불경기로 해산하자 오사카 변두리의 허름한 공연장에서 근근히 노래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레코드회사 경영문제로 오사카를 방문한 이철 사장을 만나 오케레코드 전속가수가 됐고, 1933년 <불사조>라는 노래로 데뷔합니다. 온갖 고생을 겪은 이 소녀 가수는 곧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조선인들은 밑바닥 정서를 잘 표현하는 이 소녀 가수에게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녀의 유행가에 열렬한 응원을 보냈습니다.
이난영은 만19세에 <목포의 눈물>을 불렀고, 이 곡의 히트로 가요계 여왕에 등극했고, 이후 <해조곡>, <다방의 푸른 꿈>, <목포는 항구다>, <울어라 문풍지> 등의 히트곡을 남겼습니다. 또 오케그랜드쇼, 조선악극단 소속으로 조선 전통을 소재로 한 악극들에서 주연으로 활동합니다. 악극은 노래, 연기, 댄스 등이 결합된 음악극으로 현재 뮤지컬과 유사했지요. 또 이난영은 우리나라 최초의 걸그룹이라 평가받는 ‘저고리시스터즈’의 멤버로도 활약했습니다. ‘저고리시스터즈’는 가창력, 연기, 외모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난영은 해방 이후 무대에서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곤 했지요.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1950년대 후반 이난영이 기타와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보더라도 그 가창력에 감탄을 하게 만듭니다. 특히 3절의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지는가 못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의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을 부를 때는 굳은 절개를 지닌 여인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목포의 눈물>은 1969년 유달산 중턱에 그 노래비가 세워졌지요. 대중가요로서는 최초의 일이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국민가요로 평가받았기 때문이 아닌가 보여집니다.
고전 가요들은 그 가사의 시대적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감동을 주지 못할 수도 있지요. <목포의 눈물>은 이미자, 조용필, 남진, 나훈아, 문주란, 주현미, 심수봉 등의 명가수들이 리메이크했습니다. 이렇게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다투어 리메이크했다는 것은 이 곡이 불후의 명곡이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