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욱 목사
성령운동이란 운동이 있습니다. 성령운동이란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그런데 성령운동이란 말이 도무지 성립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운동(運動) 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대표적인 뜻 세 가지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사람이 몸을 단련하거나 건강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일.
②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 또는 그런 활동.
③ 일정한 규칙과 방법에 따라 신체의 기량이나 기술을 겨루는 일 또는 그런 활동을 말한다.
이런 뜻을 가진 운동이란 말에 성령을 함께 쓸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운동이란 단어의 뜻은 몸을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므로 첫째 의미를 성령 운동에 적용시키면 성령운동이란 ‘성령이 움직이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령님께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지 사람이 성령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성령운동을 한다는 의미가 어색한 말이 됩니다.
사전의 세 번 째 뜻은 운동 경기를 말합니다. 성령운동은 특정한 운동경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의 운동경기/ 성령의 스포츠라는 말은 성립이 안됩니다.
사전에서 운동의 두 번 째 뜻은 어떤 무브먼트를 말합니다. 무브먼트는 사람들이 의식의 확대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마치 새마을 운동이 새마을 정신을 실천하는 운동이듯이 성령운동은 성령을 목적으로 삼는 운동, 즉 성령 무브먼트라고 이름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뜻을 성령운동에 적용시켜보면 성령의 목적을 이루려고 사람들이 힘쓰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과연 인간들이 성령을 무브먼트로 삼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이 대상과 목적물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인 성령님께서 인간의 무브먼트의 대상과 목적이 될 수 있는가가 의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주체가 되시는 분이지 객체가 되기를 거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목적물이 되기를 거부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한 무브먼트가 성립되려면 고정된 이미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철저하게 고정된 이미지가 되시기를 거부하시는 분입니다. 십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형상을 고정화 하여서 하나님을 우상화 하는 것을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성령운동의 다른 이름은 은사운동입니다. 은사란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인데, 선물을 받는 사람 마음대로 요구하고 그대로 받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응답받는 기도의 법칙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 받는 법칙이 있고, 부자되는 원리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은 은사운동은 예측가능성, 조작가능성을 통해서 반복가능성을 강조합니다. 즉 성령을 다루어서 훈련시키고 연습시키겠다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인간들의 욕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도록 길들이겠다는 의도인 것입니다. 길들이는 방법은 주로 인간의 경건 훈련을 통한 기도응답과 신비체험, 병의 치유, 사업의 성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말 그대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을 마음대로 받고 말고 합니까?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대해서 전혀 반성없이 하나님께 내놓으라고 떼쓰기 식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성령운동을 통해서 인간에게 오신다면 성령님은 분명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하인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를 가지신 분입니다.
성령운동에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신뢰가 없습니다. 존재론적인 충만함이 없습니다. 자기 욕구실현을 위한 구호만 만연합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이, 하나님의 영으로 인한 만족이 없는 공허함을 인간의 노력과 자기 암시와 자기 도취로 극복해 보려는 시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의존하지 않는 사람은 불안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불안한 어린아이는 도무지 안정이 없습니다. 혼자 있지 못합니다. 조용히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의존하는 사람은 만족한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믿고 편안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이런 절대적 신뢰 속에서 성숙한 인격으로 발달됩니다.
사람들의 삶을 얼음집을 지어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얼음집을 지어갑니다. 아주 정교하게 벽을 쌓아 올리고, 천장의 아치를 쌓아 갑니다. 이것이 완성 되는 순간 이 얼음집 속에서 신나게 공놀이를 합니다. 공은 밖으로 튀어 나가지 못하고 얼음집 안에서 바닥과 천장과 벽을 오가며 아주 힘있게 튀어 오릅니다. 사람들은 이 공놀이에 열광적으로 몰두해 갑니다.
이 때 사람들은 자신의 얼음집 안에서 새를 키우기 시작합니다. 외부로 나가는 창도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막힌 얼음집이기 때문에 새를 잃어 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새는 얼음집 안에서 철저하게 길들여집니다.
때로는 집단적으로 큰 얼음집을 짓고서는 그 안에서 함께 공놀이를 하고 함께 새를 키우기도 합니다.
이 얼음집은 자기 고집과 편견 속에서 폐쇄적이 되어가는 일반인들을 의미합니다. 또한 신앙의 이름으로 점점 더 폐쇄적이 되어가는 종교인들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서 공놀이에 몰두해 가는 것은 자신들의 능력에 도취되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서 새를 키우는 것은 성령을 길들여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도 자기 식으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단적인 큰 얼음집은 집단적 자기 최면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집단을 의미합니다. 한 이익집단, 한 정치집단, 한 교회는 다른 집단과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자신들의 신념에 점점 몰두해 갑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들, 집단들, 종교인들로 가득차 있지는 않습니까?.
자기 논리의 폐쇄 회로
사람들은 자기 논리의 폐쇄 회로에 갇혀 있게 됩니다. 자기 식의 논리 밖에 모릅니다. 삶의 다른 영역들을 보지 못합니다. 다른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지 못합니다. 이럴 경우의 지식은 사람에게 도리어 화를 가져오는 지식입니다.
감정의 폐쇄 회로
사람들은 자기 감정의 폐쇄회로에 갇혀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자기 흥분의 연습이나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깊은 진리의 감격과 자기 감정의 흥분은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과연 다른 형편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감동을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가 진정코 존재의 심연과 맡닿는 심오한 감동입니까? 아니면 감상적인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었습니까?
지식의 폐쇄 회로
사람들은 자기 지식의 폐쇄회로 속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만약 한 설교자가 성도들이 원하는 것만 설교하고, 성도들이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고 즐거워하는 차원에서 설교를 한다면, 이 설교자는 아이들에게 단 것만 주는 어른과 같습니다. 아이를 생각지 않고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는 베이비 시터는 아이가 단 것을 달라고 할 때, 쉽게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직업정신에 충실한 베이비 시터나 아이의 어머니는 결코 쉽게 단 것을 줄 수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폐쇄회로 속에 갇혀서 사는 사람들의 예를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율법주의’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주의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리화합니다.
☛두번 째로 자기 경험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절대화합니다.
☛세번 째로 자기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기 감정의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생각합니다.
☛네번 째로 자기 철학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소위 지성인 집단에서 있는 다소 세련된 형태의 자기 도취인 것입니다.
☛다섯번 째로 사람들은 교회, 제도, 법 등으로 성령을 길들이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자신들의 제도와 기구 안에서만 활동한다고 믿습니다. 교황무오설을 주장합니다. 총회에서 제정된 법이 무오한 것처럼 남을 정죄하는 데 씁니다. 제도 안에서 유익을 얻는 기득권층은 하나님의 권위를 이용해서 자신을 실현합니다.
이처럼 성령을 길들여 가는 현상은 교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곳에도 역시 적용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 쪽에서는 개인의 열광으로 성령을 길들여 가지만, 기성 종교와 기성 교단은 개인의 권력과, 교권과, 교회법과 제도와 전통 속에 성령을 가두어 버립니다. 역시 자기 집단의 방식으로 성령을 길들여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은 기득권 층의 이익의 수호자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유화 하겠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 시도입니다. 우상은 한 개인, 집단, 한 시대의 사람들이 만드는 산물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우상을 만듭니까?
왜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야 만족을 얻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처럼 높아지고자 하는 인간 욕구를 실현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절대자의 이름을 빌려서 정당화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우상화에서 예배의 타락이 옵니다.
예배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교회 사람 만들기 위한 한 입교의식으로 전락합니다.
또한 우상화는 설교의 타락을 가져옵니다.
설교가 자기 교회 성도들의 자부심과 소속감을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합니다. 마치 온 세상에 자기 교회만 깨끗하고, 자기 교회만 하나님께 올바로 서 있으며, 자기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세상을 섬기는 유일한 길은 자기 교회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으로 극단화 합니다. 설교 시간에 “우리 00 교회”를 외치는 사람들은 방송 설교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기 교회 사람들에게만 설교하는 내용을 왜 방송으로 퍼지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재정의 타락도 우상화에서 나옵니다.
교인들의 공개적 동의도 없이 형식적인 절차를 거쳐서 백억 이상의 예산을 지출하여 자신의 노후와 아들의 미래를 보장하는 교회를 짓습니다. 폐쇄된 사고 방식의 말장난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은 거기서 성공신화를 통한 대리만족을 얻습니다.
니고데모
니고데모라고 하는 바리새인이 밤에 예수을 찾아왔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을 시작했습니다. 니고데모가 질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고 대답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서 ‘거듭난다’고 번역된 그리스어 낱말은 ‘위로부터 난다’를 뜻합니다. 즉 “사람이 ‘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위로부터 난다(von oben her geboren)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다(aus Gott gezeugt)는 의미입니다. 홀로 하나님만이 인간의 진정한 태어남을 주시는 분입니다(1:12; 요일3:9).
사람의 새로워짐은 인간의 의지나 감정이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계획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믿음은 인간적인 가능성이 아니고, 최고로 높은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놀라우신 선물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인간의 아래로부터의 회개보다는 위로부터 사람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강조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사람을 하나님 나라의 높은 현실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로부터(von oben)’ 난다는 그리스어는 ‘처음부터(von Anfang an)’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니고데모의 질문은 생물학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답을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가 말씀하시는 거듭남은 세례(물)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서 일어나게 됩니다(행2:38; 딛3:5-6).
예수님께서 계속 대답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사람의 거듭남, 새로워 짐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출발점이 아니라, 신적인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 출발에서 마지막까지 피동적인 존재입니다.
자기의 생명의 시작과 끝을 어떻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며, 그 과정 역시 자기가 선택한 길 대로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와 뜻에 죽고 하나님의 뜻에 다시 사는 것이 인생의 본질에 서는 길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하나님이 가능하게 하시는 그 인생을 새롭게 출발합시다.
우리는 예배를 드려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에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가 경건 훈련의 결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구원을 받았기에 경건하게 살아갑니다. 거룩한 생활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았기에 거룩하게 생활합니다. 육적인 것,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절대적 은총을 힘입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모세의 시대에도 전염병이 퍼졌을 때, 인간들이 알지 못했던 방법, 즉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나음을 입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도무지 생각하지도 못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통해서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주도적인 구원의 계획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새로이 창조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워집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자유 속에서, 인간을 향한 절대적 은총 속에서 인간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절대적 자유를 맛보며 점점 더 자유한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것들을 극복해 나갑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현실의 일부분을 전체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실의 일부분을 바라볼 때 부분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이미 비진리인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특히 먹을 것을 살수도 없을 만큼 가난할 때, 또한 나이 들어서 돈이 없을 경우에, 돈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생에 있어서 돈이 제일이다’ 라고 주장하게 되면 이것은 잘못된 황금만능주의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인간의 의식에 있어서 많이 저질러지는 문제점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의 범위 안에 들지 않는 현실은 없는 것처럼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해 범위 안에 들지 않은 현실이 자기 권리를 주장할 때 힘으로 억압해 버립니다.
그러나 자유한 사람은 현재 자신이 파악한 현실이 전체적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자유한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는 현실이 있을 때도 이를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유익이 오지 않을 때도 진리를 진리로 인정할 줄 압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자유를 가진 사람은 총체적 현실을 발견해 나갑니다.
“역사와 사회가 무슨 소리인가? 우리의 삶에 성령충만이 제일이지” 하고 말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때 성령 충만이 무슨 의미입니까? 삶의 모든 문제들이 자신이 받았다고 하는 소위 개인적 성령충만으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외치지만 정작 세상의 참된 현실을 향한 성령의 음성에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아버리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개인의 실존적 삶을 백안시 하는 폐쇄된 사회관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실존에 갖혀서 사회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감옥에서 구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생이 현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도 모른채, 자신의 인생이 현재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자신의 생명이 환경 속에서 얼마나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는지도 모른채 살아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사회를 이야기 하는 것이 공허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아야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인생의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참된 성령 충만은 우주와 인생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고, 이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아갈 때 인간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사회적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을 처음 창조하셨을 때,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므로 돕는 배필을 또 다시 지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 헛된 욕망을 절대적인 것으로 합리화하지 맙시다. 그리고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자아에서 세계 현실을 향한 자아로 발전되어 갑시다. 우리는 자폐적 신앙에서 하나님의 자유를 보는 신앙으로 발전되어 갑시다. 우리는 자기 중심적 자아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총체적, 우주적 자아로 나아갑시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