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산(道德山, 183.1m) 고대의 광명은 동으로 관악산, 서로 목감천, 남으로 수리산, 북으로 한강을 경계로한 "잉벌노현" 이었다. 도덕산(183.1m)은 광명동, 철산동, 하얀동에 걸쳐있는 산으로 남쪽의 끝자락에 옛날 사신들이 산봉우리에 모여 도(道)와 덕(德)을 나누었다고 하여 "도덕산" 이라 불리어 졌다고 한다. 사신이 다니던 시기는 통일신라시대이며, 학식이 깊고 인격이 높은 선비들이 머물면서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하여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 지도에도 오늘날과 같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전부터 불리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구름산(雲山, 237m) 운산(雲山)은 높이 237m의 산으로 소하동과 노온사동의 경계에 솟아있는 광명시 주산이며, 일명 아방산이라고도 한다. 원래 아방리(阿方里)에 소재한 산이라 해서 아방봉(阿方峯)이라 불렀는데 조선후기에 구름속까지 산이 솟아 있다고 해서 구름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산세는 남쪽으로 능고개를 지나 가학산, 서독산으로 뻗어있고 북쪽으로는 도덕산까지 이어져 있으며 이산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영회원에는 조선조 16대 인조대왕 장자 소현세자 빈(嬪)강씨의 묘가 있다.
가학산(220m) 가학산은 과거 학의 서식처로 학들이 멍에처럼 마을을 둘러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마을 뒷산이 풍수지리로 볼 때 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높이는 220미터로 광명시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며 가학산의 동쪽으로는 오리동계곡이 발달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크게 두 개의 산줄기가 뻗어 있어 산을 찾는 방문객이 증가하고 있다.
서독산(書讀山, 221.8m) 서독산(221.8m)은 일명 서덕산 또는 청덕산이라 불리웠는데 과거 많은 선비들이 이곳에서 과거 급제를 위해 책을 읽고 공부에 몰두 했었기에 글서(書)자와 읽을 독(讀)자를 써서 서독산이라 이름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연환경은 전반적으로 우수하며 떡갈나무와 팥배나무, 때죽나무 등 교목활엽이 서식하고 있다.
최근 복원의 노력으로 반딧불이의 서식 환경이 갖추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산행일ː2023년 12월 18일(월)
▶산행지ː 도문산(183.1m) 도덕산(200.7m) 서산(128.1m) 구름산(240.8m) 구름산(239.8m) 가학산(220.2m) 서독산(214.4m)
▶코스ː 철산역정류장-야생화단지(화유정)-도문산-출렁다리-도덕산-서산-생태육교-한치고개(육교)-구름산-장절리삼거리-가학산-도고내고개-서독산-무의공이순신장군묘-무의공만남의광장-광명역
▶난이도ː B+
▶누구랑ː번개 팀 6명(큰형님 한덤 뉴해운대 산마루 철인)
▶시 간ː11:43∼16:36(휴식.점심.목욕포함 04ː53분)
▶거 리ː약 12.07㎞ (오르내림포함 약 13.1km)
▶날 씨ː흐리고 구름(구름조금/
☞대성빌라.앞(들머리)ː경기 광명시 철산동 467-128
☞광명역(날머리)ː경기 광명시 광명역로 21
대우푸르지오 4동에서 엘리베이트 타고 6.7동으로 올라간다,
무의공이순신 장군묘
1.개요ː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2], 자는 입부(立夫). 시호는 무의공(武毅公), 봉호는 완천군(完川君)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한글 발음이 같지만 이름의 한자가 다르고 본관도 다르다. 충무공은 덕수이씨다.
충무공 이순신의 부하였는데 흔하지도 않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모두 동시대의[3] 무신이며 심지어 충무공과 사적으로도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심지어 전시에도 같은 부대에서 상관과 부하로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 그야말로 엄청난 인연이다. 그래서 둘을 구별할 때는 보통 시호인 '충무공'과 '무의공'으로, 또는 자를 앞에 붙인 '여해 이순신'과 '입부 이순신'으로 구분한다. 다만 충무공쪽이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보니 일반적으로는 충무공은 그냥 '이순신'이라 칭하고 이쪽에 시호를 넣어서 구분한다. 비슷한 예시가 초한쟁패기에도 있었는데, 바로 회음 후 한신과 한왕 한신이다.
2.생애ː입부 이순신은 1554년 경기도 금천현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서 양녕대군의 5번째 서자인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완원군(完原君) 이진(李眞)과 안동 김씨 성균관 진사 김구수(金龜壽)의 딸인 정경부인 김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나이는 이억기보다 7살 많지만 항렬상으론 이억기가 할아버지뻘이 된다. 선조와는 14촌 형제간이다.
1578년(선조11) 무과에 급제하여 온성판관·의주판관 등을 거쳐 잠시 귀향했다가 혜산진 병마첨절제사(惠山鎭兵馬僉節制使:종3품)가 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는 방답진 수군첨절제사(종3품)였으며, 칠천량 해전 이후에는 도망간 배설의 후임으로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정3품)로 승진하였다. 전쟁 기간 내내 충무공 휘하에서 수군 지휘관으로 일했다. 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합포·적진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 등에서 활약하였고 9번을 선봉으로, 1번을 중군으로 임해 큰 공을 세웠다. 충무공이 특별히 그의 군공을 적시하여 포상을 주라고 조정에 올렸을 정도였다. 이후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적의 총탄에 전사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부대를 이끌고 개선하여 전투를 마무리지었다. 그 공으로 명나라 제독 진린에 의해 충무공의 후임 통제사로 천거 받았다.
1599년 1월 수사 직에서 물러나 포도대장 겸 도총관 총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년 뒤 충청수사· 수원부사 경상부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지만 뇌물을 받은 혐의로 파직되었으며, 이후 다시 복직하여 1604년 첨지부사가 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같은 해 1604년부터 전라 방어사·수원부사·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등을 역임하였고 1607년에는 완천군(完川君)에 봉직되었다. 이후 전라병마 절도사,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611년 9월 2일에 58세로 별세하여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 장사되었다. 인조 때 증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으며, 1679년에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 받았다.
보통 기록에서 이순신의 무예가 뛰어났다는 이야기는 바로 무의공 이순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충무공도 보통 이상의 무예이기는 했지만 무의공은 무예도 우수하고 충무공을 보좌해 여러 가지 전공을 세운 능력있는 장수라고 볼 수 있다. 나름대로 준수한 장수였지만 이름이 같은 상관의 명성이 워낙 높은지라 초라해 보이는 인물. 다만 오히려 이름이 같아서 나대용 정도를 제외한 충무공의 부관 중에는 제법 유명한 편이다.
다만 청렴한 충무공과 달리 무의공은 청렴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는데, 충무공 이순신 휘하의 장수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뇌물 수수 혐의로 탄핵받아 사임한 적도 있다. 이외에도 뇌물 수수 및 부정을 저질러 여러 번 탄핵받은 기록이 있어서 본인의 명성에 흠이 많이 있는 편.
충무공과는 공적으로는 상관과 부하의 관계였으나 사적으로는 허물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그래서 2명의 이순신은 전투가 없는 날은 같이 승경도를 하거나 활쏘기를 하면서 같이 놀았다. 특히 충무공이 백의종군을 하게 되자 무의공이 제일 먼저 술을 들고 찾아와 밤새 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적힐 정도. 아무래도 본인들이 흔치 않은 이름의 동명이인 겸 무관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만났다는 우연에 대한 의식, 그로 인한 친밀감이 상당히 깊었을 가능성이 높다.
묘는 광명시에 있는 서독산에 위치하고 있다. 고속철도 광명역 근처이다. 향토 유적 제4호이며, 산 아래에서도 잘 보인다.
♣.너무 슬픈 일과 너무 기쁜 일.♣
평화로울 땐 불안도 오겠구나. 괴로워도 또 행복이 오겠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너무 슬픈 일과 너무 기쁜 일의 경계가 많이 사라졌다.
세상은, 자연은, 내 마음은, 지금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
생동하는 큰 흐름 안에서 모든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면 그저 경건해진다.
오늘도 많이 웃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