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장 강력반 9
대부분의 형사들이 외근활동을 나갔지만 강력4반 직원들은 이장후 반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리에 있었다. 아직 점심시간이 되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만 나갈 생각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그들의 분위기는 묘했다. 이정민은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있었고 김철웅과 장문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 지 흐흐 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은 예의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는 듯 팔짱을 끼고 앉아 이정민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눈썹을 꿈틀거리며 인상을 쓰던 이정민이 표정을 풀더니 한에게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야! 솔직히 너밖에 없잖냐! 이중에 너 말고 서른 안 넘은 사람이 누가 있어? 네가 가장 젊잖아. 네가 해라!"
"젊다는 건 미숙하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말씀하시던 분이 형님 아닙니까. 노련한 형님들 두고 왜 접니까?"
한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어조의 말이 흘러 나왔다. 고참이 시키는 일에 거의 토를 달지 않는 그의 평소 태도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정민이 쓰게 입맛을 다셨다. 한은 일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군소리를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정말 상대하기 힘든 후배였다.
옆에서 이정민이 한을 설득하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던 장문석이 끼어 들었다.
"김형사가 다 꼬셔 놨잖아! 임형사, 네가 해라. 사람 입 여는 데는 네가 우리 중에 최고잖아.
구워먹든 삶아먹든 네가 해 봐라. 시간이 없어. 약속 시간 두 시간 남았다."
"그래, 사람 다루는 건 네가 최고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없다. 네가 해야 해. 너밖에 없다."
김철웅도 끼어 들었다. 입가에 웃음이 매달린 채여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다. 장문석과 김철웅이 거들자 이정민도 기운이 난 듯 다시 한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철웅이가 사흘이나 인터넷에 매달려서 꼬신 애다. 애들 상대하는 게 강도 잡는 것보다 더 힘들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단속기간인데 한 건도 못하면 반장님뿐만 아니라 우리 반도 망신이다. 그리고 너도 그런 놈들 싫어하잖아. 잡아야지!"
이정민의 말이 맞다는 듯 김철웅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한이 이 일을 맡는 것이 당연하다는 표정도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고집 부리지 말어. 죄진 놈들은 네 앞에 오기만 하면 쥐약 먹은 쥐새끼처럼 시들시들해지면서 다들 입 열잖어. 그런 꼬마한테도 먹힐 지는 잘 모르겠다만 그나마 네가 우리 중에서 제일 부드럽게 생겼으니까 그 꼬마가 덜 불안해할 거 아니냐."
창밖에 두었던 시선을 거둔 한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하죠."
"후하하. 잘 생각했다. 시간 별로 없으니까. 슬슬 움직이자."
이정민이 환하게 웃으며 일어나 손으로 한의 어깨를 쳤다. 삼십분간에 걸친 설득이 통한 것이다.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삼십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그만큼 이런 사건은 직접 나서기가 민망한 사건이었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돈을 주고 성을 사는 성매매, 속칭 원조교제 사범을 집중 검거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이 사흘 전이었다. 경찰은 주기적으로 조폭과 같은 사회적으로 관심이 큰 특정 범죄에 대한 집중단속기간을 설정해 일을 한다. 이번에 한달 동안 집중 단속하라고 떨어진 것이 성매매사범이었다.
그러나 단속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고 바로 범인을 검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성매매를 한 자들이 나 잡아가슈하며 자신의 인적사항을 드러내고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죄를 지은 자를 검거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범죄행위를 밝혀내야 한다.
성매매 사범을 검거하려면 우선적으로 돈을 받고 성을 판 여자아이의 진술을 확보해야 한다. 돈을 주고 미성년 여자를 샀다고 자백하는 남자가 있어도 상대 여자가 없다면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진술을 해 줄 여자를 찾아내기 위해 강력4반에서 적임자로 뽑힌 사람은 김철웅이었다.
김철웅은 생긴 것은 곰 같아도 유머감각이 있는 데다가 컴퓨터도 곧잘 만지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터넷의 채팅 사이트에서사흘을 헤엄치고 다니며 성매매를 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고 돈만 준다면 자신과 기꺼이 성매매를 하겠다는 여자아이를 한 명 찾아냈다. 그 여자아이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오후 한 시였다. 두 시간이 남은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침 조회가 끝나고 나서였다. 아무도 그 여자아이와 만나는 자리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장소가 여관이었다. 아무리 수사상 필요하다고 해도 대낮에 여관에서 열일곱 살짜리 여자아이와 만나는 자리에 나가고 싶은 생각들이 있을 턱이 없었다.
성과 관련된 사건을 할 때마다 여형사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남자형사들도 모자라는 판국에 꿈같은 일이다.
커피숍에서 만나자는 김철웅의 제의에 아저씨와 연애할 생각 없으니 여관에서 볼일만 보자고 하는 여자아이의 대답은 황당함의 극치였지만 칼자루를 쥔 쪽은 여자아이 쪽이어서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정해진 장소가 여관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안 간다고 하면 갈 사람은 정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막내가 가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은 한도 정말 내키지 않았다. 근사한 여자와 한 밤중의 은하수를 보며 걸어 들어가는 여관도 아니고 한 여름의 찌는 듯한 태양을 보며 열 일곱 살짜리 여자아이를 보러 여관에 들어가야 하다니.
그리고 김철웅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그의 선 굵은 용모는 압박감을 느낄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만 강력4반 직원들 중에서 그나마 가장 평범하다 싶은 사람은 그라고 할 수 있었다. 이정민조차 작은 몸매이긴 해도 눈매가 너무 사나워 처음 보는 사람도 살벌함을 느낄 정도인데 거구의 장문석과 김철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경찰신분증 없으면 조폭과 구별이 불가능한 부류가 그들이었다.
이정민이 한의 어깨를 다시 한 번 치고 김철웅과 장문석을 돌아보았다.
"임형사 밥은 먹고 들여보내야지. 김형사 채팅하는 거 옆에서 봤잖아. 나이는 어린 여자아이지만 말하는 건 산전수전 다 겪은 복부인 저리가라다. 기력이 없으면 임형사도 당할지 몰라. 어린것이 도대체 어디서 그런 말들을 주워 배운 건지......"
한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이정민이 말하는 내용은 걱정하는 것이었지만 말투는 놀리는 투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겠다고 말을 한 이상은 내키지 않아도 해야 했다. 이것은 일이었다.
형사계 사무실을 나서던 한의 걸음이 멈췄다. 그의 기색에서 이상함을 느낀
김철웅이 한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미국인으로 보이는 사내 두 명이 휴게실 쇼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그 외국인들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키가 크고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잘 생긴 젊은 외국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이 멈추었던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그 젊은 외국인도 한의 향해 걸어왔다.
휴게실 가운데에서 두 사내가 서로를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리 스톡턴을 응시하던 한이 김철웅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형님. 먼저 나가 계십시오. 곧 나가겠습니다."
"알았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볼 일 보고 천천히 나와도 돼."
김철웅은 한과 마주서 있는 외국인을 잠시 살펴보다 고개를 흔들고는 경찰서 건물을 나섰다. 어디선가 본 듯한 외국인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먼저 주차장에 나가 있던 이정민이 혼자 나오는 김철웅을 보며 물었다.
"임형사는?"
"휴게실에 있던 외국인들 보셨어요? 그 중에 젊은 남자와 일이 있나 보던 데요. 조금 있다가 나올 겁니다."
"그래? 임형사가 언제 외국인을 사귀었지?"
이정민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 이상 생각하지는 않았다. 형사라는 직업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지낼 수밖에 없는 직업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중에 외국인이 끼어있지 말란 법은 없었다.
이정민 일행이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한은 리와 헨리를 데리고 경찰서 건물 뒤편으로 갔다. 경찰서 뒤편은 방범순찰대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 앞은 전경들이 사용하는 작은 공터였다.
공터에서 걸음을 멈춘 리는 자신의 맞은편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사내를 차분한 시선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일 년 수개월 만에 만나는 사내였다. 스물이 넘고 나서 자신을 패배시킨 유일한 사내이기도 했다.
"오랜만이군. 나를 기억하나?"
한은 일년 수개월 전 용산에서 만난 적이 있던 젊은 미국인의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서 있는 상대를 보며 리는 곤란한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무언가 잊고 있었다는 것처럼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치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 소개도 하지 않았군. 저번에 만났을 때도 인사를 나눌 틈이 없어서 자네는 내 이름도 모를 텐데. 난 용산에서 근무하는 군인이네. 어디 소속인지는 말해주기 어렵고 리 스톡턴이라네. 그리고 이분은 자네를 찾는 데 도움을 주신 헨리크레인이라는 분이고."
"내 소개는 필요 없는 듯한데."
"임한 경장. 동부경찰서 강력반 형사. 당연히 자네에 대해 알고 있으니 찾아오긴 했지만 너무 건조하군. 한국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부드럽던데."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용건을 말해. 시간이 많지 않다."
한의 말에 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대의 분위기에 변화가 없으니 그 혼자 좋게 말한다고 나아질 것도 없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남영동에서 사고를 냈던 우리 군인을 잡은 사내가 자네라고 생각하고 있다.맞는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한은 무심한 눈길로 리를 응시했다. 리는 자신의 말을 듣는 사내의 표정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내고 싶었지만 곧 포기해야했다. 상대의 표정은 돌과 같았다.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상대의 표정에서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은 리의 옆에 묵묵히 서 있던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그와 같은 전문가도 상대의 내심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심문하는 것 같군."
담담한 말투였다. 그리고 어떤 감정도 실려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말투이기도 했다. 리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딱딱하군. 나는 자네가 남영동에서 우리 군인을 잡은 사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 왔다."
"대답? 내가 그 사내라면?"
"우리와 함께 용산에 가주었으면 한다."
리를 바라보는 한의 눈길이 강해졌다. 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그 사내가 아니라면? 그리고 나는 용산에 갈 일이 없다."
"남영동의 그 사내는 자네가 맞다. 나는 자네와 직접 상대했던 사람이야. 나를 속일 수는 없다. 자네는 나와 함께 가야만 해."
리의 음성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한의 시선과 마주치는 그의 두 눈에도 불똥이 튀는 듯 했다. 리의 눈길이 강해질수록 한의 눈은 차분하고 깊어졌다. 그의 입술 사이로 무심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심증만으로?"
"때로는 그걸로 충분할 때가 있다. 그리고 자네가 그 사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있다."
"난 자네 확신 따위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자네가 가잔다고 내가 갈 이유도 없다. 용산에 가는 것보다 더 바쁜 일도 많아."
말을 마친 한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걸어갔다. 더 이상 대화를 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을 그는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거침없이 돌아서 가버리는 상대의 행동에 잠시 멍했던 리는 옆에 있던 헨리가 튀어나가 한을 잡으려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헨리의 팔을 잡았다. 헨리가 고개를 돌려 리를 보자 리는 머리를 내저었다.
"잡는다고 잡을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이대로 보내자는 이야긴가? 여기까지 와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저자는 말로 해서 될 자가 아닙니다. 느끼셨잖습니까?"
헨리가 한숨을 내쉬고는 리에게 잡혀 있는 팔을 뺐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그의 눈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드문 모습이었다. 그가 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말로 해서 안 되면 힘으로 저 자를 끌고 가자는 말인가? 그게 힘들다고 말했던 건 자네였잖아?"
리가 고개를 끄덕여 헨리의 말을 긍정했다. 리는 헨리의 부하들이 수집한 자료에서 전경국의 아들이 연루된 사건을 해결한 형사들의 얼굴 중 낯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이었다.
자료대로라면 스물 몇 명의 사내들을 모두 병원에 입원시킨 형사가 한이었다.
그는 헨리와 함께 한을 만나러 오면서 헨리에게 힘으로 그를 데리고 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쿠퍼가 그를 선택한 것은 잭슨과 매든을 잡은 사내가 무술을 하는 사내라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고, 만일의 경우 힘으로라도 상대를 데리고 오라는 의미였지만 그 상대가 한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는 공무원 그것도 형사였다.
그와 헨리는 먼저 상대를 말로 설득해보기 위해 찾아 온 것이다. 그의 신분을 밝히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이 풀릴 수도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씨도 안 먹힌다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생각한대로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겠네."
"그럴 것 같습니다."
리는 자신을 쓰러뜨릴 정도의 고수에게 사용하고 싶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헨리가 사용하겠다는 방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공무원이었고 헨리의 방법은 그 직업에 있는 사람에게는 직효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