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가문의 혼맥(婚脈)
박익정(朴益 )은 죽산박씨(竹山朴氏)이다. 죽산(竹山)의 별호(別號)가 죽주(竹州) 또는 연창(延昌)으로 죽산박씨(竹山朴氏)는 죽주박씨(竹州朴氏), 연창박씨(延昌朴氏)로도 불리운다. 박익정(朴益 )은 일작(一作) 박익선(朴益旋)으로 문림랑(文林郞) 문하성(門下省) 기거랑(起居郞) 지제고(知制誥), 중서사인 지제고(中書舍人 知制誥)를 역임하였으며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박휘(朴暉), 사위는 행주기씨(幸州奇氏)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 기홍석(奇洪碩), 안동김씨(安東金氏) 문하 시중 상락공 충렬공(門下侍中上洛公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이다. 박익정(朴益 )의 둘째 아들 찬성(贊成) 박훤(朴日宣)에 관련된 내용은 미상(未詳)이다.
[죽산박씨(竹山朴氏) 박익정(朴益 )의 계보]
박기오(朴奇晤)→박술(朴述)→박충숙(朴忠淑)→박온유(朴溫裕)→박형(朴衡)→박영후(朴永侯)→박정혁(朴挺奕)→박조개(朴肇開)→박현주(朴玄珠)→박익정
박익정(朴益 )의 아들 박휘(朴暉)는 1274년(원종 15) 8월 30일(계유) 대부경(大府卿)으로 있다가 부부사 대장군(部夫使大將軍) 최면(崔沔)을 대신하였던 인물로 전법 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부인은 경원이씨[慶源李氏=인천이씨(仁川李氏)] 이장용(李藏用)의 딸이다.
이장용[李藏用:1201(신종 4)∼1272(원종 13).01.28]은 이자연[李子淵:1003(목종 6)∼1061(문종 15)]의 6세손(六世孫=5대손)으로 추밀원 사(樞密院使) 이경(李儆)의 아들로 자(字)는 현보(顯甫)이며 초명(初名)은 이인기(李仁祺)이다.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고 1272년(원종 13) 1월 28일(정해)에 졸(卒)하였다. 추시(追諡)는 문진공(文眞公)이다. 이장용의 부인(夫人)은 동주최씨[東州崔氏:철원최씨(鐵原崔氏)] 최종준[崔宗峻:최종준(崔宗俊)]의 딸이다. 최종준(崔宗峻)은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수 사공 집현전 대학사 판예부사(守司空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를 지낸 문숙공(文淑公) 최유청[崔惟淸:1095(헌종 1)∼1174(명종 4)]의 손자이며 수 태부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 판이부사(守太傅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吏部事)를 지낸 문의공(文懿公) 최선[崔詵:?∼1209(희종 5).05.06]의 아들로 고려 신종(神宗) 4년인 1201년(신종 04) 5월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1246년(고종 33) 8월 11일(정유)에 졸(卒)하였다.
죽산박씨(竹山朴氏) 박익정(朴益 )의 첫째 사위인 기홍석(奇洪碩)은 문하시랑평장사(丁卯門下侍郞平章事) 강정공(康靖公) 기윤숙[奇允肅:?∼1257(고종 44).4.12]의 아들이다. 【※인명사전(人名辭典)에는 기윤숙의 졸년(卒年)이 1252(고종 44)년으로 오록(誤錄)되어 있다.】
기윤숙(奇允肅)은 기홍수(奇洪壽), 기홍영(奇洪穎), 기홍석(奇洪碩)의 세 아들과 횡성조씨(橫城趙氏) 조계순(趙季珣), 상서(尙書) 정준(丁俊)의 사위를 두었다.
기홍수(奇洪壽)는 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서 1209년(희종 05) 7월 29일(경신)에 졸(卒)하였다. 기홍영(奇洪穎)은 좌우위 보승 낭장(左右衛保勝郞將)이며, 기홍석(奇洪碩)은 지도첨의(知都僉議)이다. 기홍영(奇洪穎)의 증손녀(曾孫女)가 바로 원(元)나라 순제(順帝)의 제 2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이다. 기황후(奇皇后)의 부친은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奇子敖)는 서북면(西北面)의 선주[宣州:1413년(조선 태종(太宗) 13년) 계사(癸巳)년에 선천(宣川)으로 바뀜]의 수령을 지내고 63세로 졸(卒)하였다. 익주이씨[益州李氏:익산이씨(益山李氏)] 전서(典書) 이행검(李行儉)의 딸에게 장가 들어서 기식(奇軾:早死),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 ), 기륜(奇輪)의 다섯 아들과 세 명의 딸을 두었는데 첫째 딸은 평리(評理) 조희충(趙希忠)에게, 둘째 딸은 서원염씨[瑞原廉氏:파주염씨(坡州廉氏)] 령(令) 염돈소[廉敦紹:廉敦昭]에게 출가하였고 셋째딸이 원순제황후(元順帝皇后) 기황후(奇皇后)이다. 기황후(奇皇后)는 원나라 순제의 후궁으로 뽑혀가서 제 2황후가 되었는데 황태자(皇太子)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을 낳았다. 익주(益州)는 금마군(金馬郡)으로 불리워오다가 1344년[고려 충혜왕(忠惠王) 후(後) 5년] 갑신(甲申)에 원나라 순제(順帝)의 황후(皇后) 기씨(奇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익주(益州)로 승격하였으며 1413년(태종 13)에 예(例)에 의하여 익산군(益山郡)으로 고쳤다.
강정공(康靖公) 기윤숙(奇允肅)의 사위인 조계순(趙季珣)은 횡성조씨(橫城趙氏)로 평장사(平章事) 문정공(文正公) 조충[趙 :1171(명종 1)∼1220(고종 7).09.03]과 동주최씨[東州崔氏:철원최씨(鐵原崔氏)] 문의공(文懿公) 최선[崔詵:?∼1209(희종 5).05.06]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광정공(光定公)이다. 초실(初室)은 우봉최씨(牛峰崔氏) 최충헌[崔忠獻:1149(의종 3)∼1219(고종 6)]의 딸인데 원주 목사(原州牧使) 조진(趙진)이라는 아들을 두었고, 후실(後室)은 기윤숙(奇允肅)의 딸로서 3남 2녀를 두었으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조변[趙抃:?∼1288(충렬왕 14).07.19], 소경(少卿) 조해(趙日亥), 재신(宰臣) 조유(趙宥)의 세 아들과 우봉최씨(牛峰崔氏) 최항(崔沆), 평강채씨(平康蔡氏) 채인평(蔡仁平)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조변(趙抃)은 안동김씨(安東金氏)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사위이다.
강정공(康靖公) 기윤숙(奇允肅)의 아들이며 박익정(朴益 )의 사위인 기홍석(奇洪碩)은 1275년(충렬왕 01) 12월 24일(경신)에 군부판서 응양군 상장군(軍簿判書鷹揚軍上將軍), 1278년(충렬왕 04) 2월 14일 밀직부사(密直副使), 1279년(충렬왕 05) 2월 29일(병오) 동지밀직사 감찰 제헌(同知密直事監察提憲)에 올랐으며 관직(官職)이 재신 광정대부 지도첨의부사 상장군 판판도사사(宰臣匡靖大夫知都僉議府事 上將軍 判版圖司事)에 이르렀다. 기지원(奇之元), 기지을(奇之乙), 기지병(奇之丙), 기지정(奇之丁), 기지경(奇之敬)의 다섯 아들과 동주최씨[東州崔氏:철원최씨(鐵原崔氏)] 상서(尙書) 최원중(崔元中), 양천허씨[陽川許氏:공암허씨(孔巖許氏)] 상서(尙書) 허정(許程)의 사위(女壻)를 두었다.
기홍석(奇洪碩)의 첫째사위 최원중(崔元中)은 동주최씨[東州崔氏:철원최씨(鐵原崔氏)]로 문숙공(文淑公) 최유청[崔惟淸:1095(헌종 1)∼1174(명종 4)]의 증손(曾孫)이며 잡직서령(雜職署令) 최양(崔讓)의 손자(孫子)로 부지밀직사사 문한학사(副知密直司事文翰學士)로 치사(致仕)한 최옹[崔雍:?∼1292(충렬왕 18).07.27]의 아들이다. 상서(尙書)에 이르렀으며 슬하에 배천조씨(白川趙氏) 조운경(趙雲卿)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조운경(趙雲卿)은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조(朝)에 삼사우좌사(三司右左使), 밀직부사(密直副使),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른 인물이다. 조운경(趙雲卿)의 아들은 은천군(銀川君) 조하(趙瑕)이며, 딸은 현풍곽씨(玄風郭氏) 포산군(苞山君) 곽원진(郭元振)에게 출가하였다. 곽원진(郭元振)은 충렬왕(忠烈王)조에 군부 판서(軍簿判書) 및 감찰 대부(監察大夫)를 지내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른 곽응(郭膺)의 손자이다. 곽원진(郭元振)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곽충관(郭忠貫)이며, 안동김씨(安東金氏)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천(金천), 전주최씨(全州崔氏) 최전(崔佺)에게 출가한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천(金蕆)은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손자이며 첨의 정승(僉議政丞)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의 아들로서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사형(金士衡)의 아버지이다.
기홍석(奇洪碩)의 둘째사위 허정(許程)은 양천허씨[陽川許氏:공암허씨(孔巖許氏)]이며 허공[許珙:1233(고종 20)∼1291(충렬왕 17).08.08]의 아들이다. 허공(許珙)은 파평윤씨(坡平尹氏)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평공(文平公) 윤극민(尹克敏)의 사위이다. 윤극민은 문숙공(文肅公) 윤관(尹瓘)의 현손(玄孫)이며, 예부시랑(禮部侍郞)과 예빈 경(禮賓卿)을 지낸 윤위(尹威)의 아들이다. 윤위(尹威)는 남원윤씨(南原尹氏)의 시조(始祖)이다.
윤극민(尹克敏)은 아들 전리좌랑(典理佐郞)과 낭중(郞中)을 지낸 윤돈(尹敦)과 양천허씨(陽川許氏) 허공(許珙), 동주최씨[東州崔氏:철원최씨(鐵原崔氏)] 최징(崔澄)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최징(崔澄)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으며 1268년(원종 09) 3월 9일(경신)에 졸(卒)하였다. 최징(崔澄)의 아들은 시랑(侍郞) 최충약(崔沖若)이며 사위는 경주김씨(慶州金氏) 재신(宰臣) 김인(金寅戈), 상서(尙書) 박연(朴涎), 시중(侍中) 허공(許珙)이다. 최충약(崔沖若)의 사위는 순흥안씨(順興安氏) 찬성(贊成) 문순공(文順公) 안우기[安于器:1265(원종 6)∼1329(충숙왕 16).09.12(병인)]이다. 안우기는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아들이다.
허공(許珙)은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역임하였으며, 윤극민(尹克敏)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1229(고종 16)∼1268(원종 09).12.10]와 혼인하였는데 부인(夫人)이 죽은 후에 동서(同壻) 최징(崔澄)의 딸인 철원최씨(鐵原崔氏)와 혼인하였으니 허공(許珙)에게는 바로 처제(妻弟)의 딸이었다.
허공(許珙)은 초실(初室) 파평윤씨(坡平尹氏)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동주사(東州事) 허정(許程), 양천군(陽川君) 허평[許評:허숭(許嵩)으로 개명(改名)], 찬성사(贊成事) 허관(許冠)의 세 아들과 언양김씨(彦陽金氏) 도첨의(都僉議) 김변(金 賆), 안동김씨(安東金氏) 삼사사(三司使)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후실(後室) 철원최씨(鐵原崔氏)와의 사이에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허총(許寵)과 허부(許富)는 아들이고 충선왕(忠宣王)의 계비(繼妃)인 순비(順妃)와 흥위위 보승 별장(興威衛保勝別將) 조연(趙璉)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허공의 첫째 아들인 허정(許程)은 동주사(東州事)를 지냈으며 부인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치사(致仕)한 행주기씨(幸州奇氏) 기홍석(奇洪碩)이다. 둘째 아들인 허평(許評)은 허숭(許嵩)으로 개명(改名)하였는데 검교 정승(檢校政丞) 양천군(陽川君)에 이르고 량숙(良肅)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부인은 서원염씨[瑞原廉氏:파주염씨(坡州廉氏)]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 충정공(忠靖公) 염승익[廉承益:?∼1302(충렬왕 28)]의 딸이며 아들은 허종(許悰)이다. 허종(許悰)은 충선왕(忠宣王)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와 혼인하였으며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에 봉(封)해졌다. 허공의 셋째 아들 허관(許冠)은 충렬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호부산랑(戶部散郞)에 이르렀고 찬성사(贊成事)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부인은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한 여산송씨(礪山宋氏) 양의공(良毅公) 송분[宋王分:?∼1318(충숙왕 05).06.21(경술)]의 딸이다. 허관(許冠)의 아들인 허백(許伯)은 양천군(陽川君)의 봉작(封爵)을 받았다. 허백의 아들 허경(許絅)은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고 허경의 아들은 허금(許錦)이다. 허금은 공민왕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상시(左常侍), 전리판서(典理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허금의 아들은 허기(許心耆)이다. 허기의 아들은 부사(府使) 허비(許扉)이다. 허비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중추원사(中樞院使)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의 딸과 혼인하여 허손(許蓀), 허훈(許薰), 허지(許芝), 허형(許형)의 네 아들과 이명민(李命敏), 이계정(李季貞)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는데, 이 후손들에게서 우의정(右議政) 허종[許琮:1434(세종 16)∼1494(성종 25)], 좌의정(左議政) 허침[許琛:1444(세종 26)∼1505(연산군 11)], 찬성(贊成)을 지낸 동애(東崖) 허자[許磁:1496(연산군 2)∼1551(명종 6)],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찬집(撰集)한 허준(許浚), 미수(眉수) 허목[許穆:1595(선조 28)∼1682(숙종 8)], 영의정(領議政) 묵재(默齋) 허적[許積:1610(광해군 2)∼1680(숙종 6)]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허공의 넷째 아들 허총(許寵)은 판관(判官)과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허공의 다섯째 아들 허부(許富)는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이르렀으며 부인은 교하노씨(交河盧氏)로서 양효공(良孝公) 노영수[盧穎壽:노영수(盧英壽):?∼1385(우왕 11)]의 딸이다. 노영수는 우왕(禑王)의 비(妃)인 의비(毅妃)의 아버지이다. 허부의 아들은 허신(許信), 허순(許順), 허유(許猷), 허저(許 ), 허완(許完)이다. 허유(許猷)는 공신(功臣)으로 양천군(陽川君)에 책봉(策封)되었다. 허유의 아들은 허서(許瑞)이다.
허공의 셋째 딸은 충선왕(忠宣王)의 계비(繼妃)인 순비(順妃)이다.
순비는 1271년(원종 12)에 태어났으며, 고려 제 24대 원종(元宗)의 친조카인 왕현(王日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두었다. 왕현이 죽자 홀로 지내던 허씨가 조카인 허종(許悰)의 집에 있었는데, 허종의 장인 충선왕(忠宣王)이 허종의 집에 들렀다가 눈에 띄게되니 충선왕이 그녀를 맞아 들여 순비(順妃)로 봉하였다. 순비(順妃)로 인해 충선왕의 외동딸 수춘옹주와 혼인한 허종(許悰)에게는 충선왕(忠宣王)이 고모부이면서 장인이 되었다. 순비(順妃)는 왕현(王日玄)과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딸이 원(元)나라의 황태자비가 되어 그 영향이 컸다. 순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65세로 졸하였다.
허공(許珙)의 첫째 사위 김변(金賆)은 언양김씨(彦陽金氏) 문하 시랑 평장사 위렬공(門下侍郞平章事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의 손자이며 문하 시랑 평장사 익대공(門下侍郞平章事翊戴公) 김전(金佺)의 아들이다. 김전(金佺)은 조봉대부 위위윤(朝奉大夫衛尉尹)로 치사(致仕) 김저[金貯:김양감(金良鑑)], 광정대부 도첨의참리(匡靖大夫都僉議참理)로 치사(致仕)한 김석[金碩:김군(金君頁)?∼1299(충렬왕 25).11], 봉익대부 밀직부사 판도판서(奉翊大夫密直副使版圖判書)로 치사(致仕)한 김중보(金仲保), 화엄업(華嚴業)의 승통(僧統) 탄여[坦如:?∼1299(충렬왕 25).08], 김변[金 貝+幷:1248(고종 35)∼1301(충렬왕 27)04.02)]의 아들 다섯을 두었으며, 첫째 딸은 염주이씨[鹽州李氏:연안이씨(延安李氏)] 낭장(郎將) 이분양(李汾陽)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경주김씨(慶州金氏) 중대광 도첨의시랑 찬성사 상장군(重大匡 都僉議侍郞 贊成事 上將軍) 김혼(金琿)에게, 셋째 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소부소윤(小府少尹) 김유지(金由祉)에게 시집갔다.
김양감(金良鑑)의 아들이 언양군(彦陽君)에 봉(封)해진 영신공(榮信公) 김문연(金文衍)이며 딸은 충렬왕(忠烈王)의 후비(后妃)인 숙창원비(淑昌院妃)이다.
김변(金 賆)은 1248년(고종 35)에 태어나 1301년(충렬왕 27) 4월 2일에 졸(卒)하였으며 도첨의참리 문신공(都僉議參理文愼公)으로 허공(許珙)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으니 도첨의 좌정승 정렬공(都僉議左政丞貞烈公) 김윤(金倫)과 대언(代言) 김우(金禑), 유가업(瑜伽業)의 삼중(三重) 현변(玄변), 이름 미상인 넷째 아들을 두었고, 첫째 딸은 청주이씨(淸州李氏) 낭성군(琅珹君) 이계함(李季 王+咸)에게 시집갔다가 1300년(충렬왕 26) 5월에 졸(卒)하였다. 둘째 딸은 1288년(충렬왕 14) 의관(衣冠)의 동녀(童女)로 뽑혀서 원(元)나로 들어갔고, 셋째 딸은 충선왕, 충숙왕 조(朝)에 좌부대언(左副代言), 밀직부사(密直副使),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지내고 재신(宰臣)에 오른 원주원씨(原州元氏) 원선지(元善之)에게 시집갔다. 원선지(元善之)의 손자인 원상(元庠)은 조선 태조(太祖)∼세종(世宗) 연간에 벼슬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렀는데, 원상의 딸 원주원씨(原州元氏)가 조선 태조의 후궁(後宮)인 성비(誠妃)가 되었다.
언양김씨(彦陽金氏) 김변(金 賆)의 첫째 아들인 좌정승(左政丞) 김윤(金倫)은 봉익대부 밀직부사 문한학사(奉翊大夫密直副使 翰學士)로 치사(致仕)한 대녕최씨[大寧崔氏:해주최씨(海州崔氏)] 최서(崔瑞)의 딸과 혼인하였다. 최서(崔瑞)는 전서(典書) 최중유(崔仲儒), 최숙유(崔叔儒), 최계유(崔季儒)의 아들과 언양김씨(彦陽金氏) 도첨의 좌정승 정렬공(都僉議左政丞貞烈公) 김윤(金倫), 정당문학(政堂文學)과 참지문하정사 집현전대학사(參知門下政事集賢殿大學士)를 지낸 횡성조씨(橫城趙氏) 조문근(趙文瑾)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조문근(趙文瑾)은 조변(趙抃)의 아들로 안동김씨(安東金氏)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외손(外孫)이다.
전서(典書) 최중유(崔仲儒)의 사위는 언양김씨(彦陽金氏) 판소부사(判少府事) 김경덕(金敬德)으로, 김경덕은 김우(金禑)의 아들이다.
좌정승(左政丞) 김윤(金倫)은 김해 부사(金海府使) 김가기(金可器),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김경직(金敬直), 개성 판관[開城判官:혹은 개성 윤(開城尹)] 김숙명(金淑明), 군부판서(軍簿判書), 서해도 도지휘사(西海道都指揮使),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지낸 김희조(金希祖), 감찰장령(監察掌令), 전의령(典儀令), 강릉도 존무(江陵道存撫), 집의(執義) 등을 지낸 김승구(金承矩), 한성 윤(漢城尹) 김유서(金惟서)와 불가(佛家)에 귀의(歸依)하여 선사(禪師)가 된 달령(達山+令)과 종훤(宗훤) 등 8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사위는 3명으로 여흥민씨(驪興閔氏) 찬성사(贊成事) 여흥군(驪興君) 민사평(閔思平), 광산김씨[光山金氏:화평김씨(化平金氏)] 종부 령(宗簿令)과 상시(常侍)를 지낸 김휘남(金輝南), 군사(郡事) 김선(金宣)이다.
김희조(金希祖)의 처부(妻父)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문하 시중(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다. 민사평(閔思平)의 사위(女壻)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이다. 김휘남(金輝南)의 사위는 순흥안씨(順興安氏)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문간공(文簡公) 안종원(安宗源)이다.
김묘(金昴)는 3남 9녀를 두었다. 아들은 삼사 좌사(三司左使) 등을 지낸 재신(宰臣) 김구용[金九容:1338(고려 충숙왕 복위 7).12.1 ∼ 1384년(우왕 10).7.11], 전교령(典校令) 김제안[金齊顔:?∼1368(공민왕 17)],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1428(세종 10).3.10]이다. 김제안(金齊顔)의 사위는 전의이씨(全義李氏) 판사(判事) 이준(李儁)이다. 이준은 전성군(全城君) 이사의(李思義)의 아들이다.
김묘(金昴)의 딸은 9명으로 김사안(金士安), 이창로(李彰路), 최유경(崔有慶), 허호(許灝), 허의(許誼)/서해(徐日亥), 이존사(李存斯), 김첨(金瞻), 김수천(金壽千), 최자하(崔自河)에게 시집갔다.
첫째 사위 김사안(金士安)은 안동김씨(安東金氏) 첨의 정승(僉議政丞) 상락후(上洛侯) 김영후(金永煦)의 손자이며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천(金천)의 아들로 재신(宰臣)이며, 둘째 사위 이창로(李彰路)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문하 시중(門下侍中) 문충공(文忠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과 춘천박씨(春川朴氏) 사복시 정(司僕寺正) 박거실(朴居實)의 딸과의 사이에서 태어나 재신(宰臣)에 이르렀고, 셋째 사위 최유경(崔有慶)은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평도(平度)이다. 넷째 사위 허호(許灝)는 양천허씨(陽川許氏)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1233(고종 20)∼1291(충렬왕 17).08.08]의 현손이며 허공의 첫째 아들인 동주사(東州事) 허정(許程)의 증손(曾孫)으로 허유(許儒)의 아들인데, 부윤(府尹)을 지냈다. 다섯째 딸은 양천허씨(陽川許氏)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증손이며 허공의 다섯째 아들 선부전서(選部典書) 허부(許富)의 손자로 허순(許順)과 청주이씨(淸州李氏) 낭성군(琅珹君) 이계함(李季 王+咸) 딸 사이에서 태어나 부령(副令)을 역임한 허의(許誼)에게 출가하였다. 다섯째 딸의 후부(後夫)는 이천서씨(利川徐氏) 대장군(大將軍) 서해(徐日亥)이다. 서해(徐日亥)의 아들은 서효남(徐孝男)으로 승(丞)을 역임하였고, 딸은 경주최씨(慶州崔氏) 지군사(知郡事) 최징(崔澄)에게 출가하였다. 최징은 화숙공(和淑公) 최현우(崔玄祐)의 증손이며 최안준(崔安濬)의 아들이다.
여섯째 딸은 경주이씨(慶州李氏) 교감(校勘) 이존사(李存斯)에게, 일곱째 딸은 광산김씨(光山金氏) 총제(摠制) 김첨(金瞻)에게 출가하였다. 여덟째 딸은 사윤(司尹) 김수천(金壽千)에게 출가하였다. 김수천의 사위는 감찰(監察)과 좌랑(佐郞) 등을 지낸 선산김씨(善山金氏) 김여덕(金餘德)과 오척[吳水+條:또는 오조(吳條)]이다. 김수천은 문도공(文度公) 이거이[李居易:1348(충목왕 4)∼1412(태종 12)]의 아들인 지울산군사(知蔚山郡事) 이백신(李伯臣)의 처부(妻父)로도 추정된다.
아홉째 딸은 화순최씨(和順崔氏) 부정(副正) 최자하(崔自河)에게 출가하였다.
언양김씨(彦陽金氏) 김변(金 貝+幷)의 둘째 아들인 김우(金禑)는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승지(奉翊大夫 知密直司事 版圖判書 文翰學士承旨) 천안전씨(天安全氏) 전승(全昇)의 딸과 혼인하였다. 전승(全昇)은 대녕최씨[大寧崔氏:해주최씨(海州崔氏)] 낭장(郞將) 최유비(崔有土卑)의 사위이다. 최유비는 보한집(補閑集)을 저술한 최자[崔滋:1188(명종 18)∼1260(원종 1)]의 아들이다.
김우(金禑)의 아들 판소부사(判少府事) 김경덕(金敬德)은 대녕최씨[大寧崔氏:해주최씨(海州崔氏)] 전서(典書) 최중유(崔仲儒)의 딸에게 장가들어 파평윤씨(坡平尹氏) 상서(尙書) 윤인선(尹仁善)과 성주이씨(星州李氏) 성산군(星山君) 이원구(李元具)의 사위를 두었다. 이원구(李元具)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의 아버지이다.
허공의 둘째사위는 안동김씨(安東金氏) 삼사사(三司使)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이다. 판삼사사(判三司事)로서 1258년(고종 45)에 태어나 1321년(충숙왕 08) 08월 21일(임술)에 64세로 졸(卒)하였다. 양천허씨[陽川許氏:1265년(원종 06)∼1332년(충혜왕 02) 7월 24일(신묘)]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김영돈(金永暾), 김영휘(金永暉), 사순(思順) 선사(禪師), 김영후(金永煦)이며, 첫째 딸은 서원정씨[西原鄭氏:청주정씨(淸州鄭氏)] 정책(鄭心+責)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남포백씨[藍浦白氏=상당백씨(上黨白氏)=청주백씨(淸州白氏)] 백이정(白이正)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다.
첫째 아들 김영돈[金永旽:?∼1348(충목왕 4).07.13(무신)]은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서 1348년(충목왕 04) 07월 13일(무신)에 졸하였다. 둘째 아들 김영휘(金永暉)는 상서(尙書)이며, 셋째 아들은 출가(出家)하여 승려가 된 사순(思順) 선사(禪師)이며, 넷째 아들 김영후[金永煦:1292(충렬왕 18)∼1361(공민왕 10).05.12(임술)]는 상락후(上洛侯)로서 1361년(공민왕 10) 05월 12일(임술)에 졸(卒)하였다.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첫째 사위 정책[鄭心+責 :1274(원종 15)∼1328(충숙왕 15).08.12]은 서원정씨(西原鄭氏) 대장군(大將軍) 정의(鄭豈頁)의 증손(曾孫)이며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정해[鄭王皆:1254(고종 41)∼1305(충렬왕 31).06.05(경진)]의 아들로 판선공(判繕工)을 지냈으며 청하군(淸河君)에 봉(封)해졌다. 정해(鄭王皆)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책(鄭心+責)과 판도판서(版圖判書) 정이(鄭怡)이며 사위는 청주경씨(淸州慶氏) 대언(代言) 경사만(慶斯萬), 동주최씨(東州崔氏) 최광(崔廣)이다. 경사만(慶斯萬)은 안동김씨(安東金氏)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사위인 경수[慶綏:경수(慶綬)]의 아들이다. 경사만(慶斯萬)의 아들은 정렬공(貞烈公) 경복흥[慶復興:?∼1380(우왕 6)]이다. 동주최씨(東州崔氏) 최광(崔廣)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최징(崔澄)의 손자(孫子)이다. 최징은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평공(文平公) 윤극민(尹克敏)의 사위이다.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둘째 사위 남포백씨[藍浦白氏=상당백씨(上黨白氏)=청주백씨(淸州白氏)] 백이정[白頤正:1247(고종 34)∼1323(충숙왕 10)]은 문헌공(文憲公) 백문절(白文節)의 아들이다. 문헌공(文憲公) 백문절[白文節:?∼1282(충렬왕 08)]은 1278년(충렬왕 04) 4월 사의대부(司議大夫)로 있었고, 1280년(충렬왕 06) 3월에는 사신(詞臣)으로서 심양(沈양)의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여 석방하게 하도록 하였으며, 1280년(충렬왕 06) 4월 대사성(大司成)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 이백기(李伯琪) 등을 뽑기도 하였다. 국학 대사성 보문각학사(國學大司成寶文閣學士)에 이르렀으며 1282년(충렬왕 08)에 졸(卒)하였다. 백문절은 문장이 뛰어나서 붓을 잡고 쓰면 비 쏟아지듯이 줄줄 나와 당시 세인(世人)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자신이 스스로 자랑하지는 않았다. 백이정(白 正)과 대호군(大護軍) 백효주(白孝珠) 두 아들을 두었다.
백이정(白 頤正)은 첨의평리상의회의도감사(僉議評理商議會議都監事)를 지내고 상당군(上黨君)에 봉(封)해졌다. 백이정은 1298년(충렬왕 24) 왕을 호종하여 중국 연경(燕京)에 가서 10여 년간 체류하며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돌아와 이제현(李齊賢)·박충좌(朴忠佐) 등의 제자를 양성하여 성리학(性理學)을 전파하는 데 공헌하였다. 백이정의 사위는 경주이씨(慶州李氏)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아들인 이달존(李達尊)이다.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셋째 사위 별리가불화(別里哥不花)는 원(元)의 좌승상(左承相) 아홀반(阿忽反)의 아들로 사인(舍人)이다.
[고려사(高麗史)에 출전(出典)하는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의 기사(記事)]
▶1279년(충렬왕 05) 6월 11일(정해)에 과거에 차석(次席)으로 급제하다.
상락군(上洛君) 김순(金恂)은 조간(趙簡)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 제2인으로 급제한 사람이었다.[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19-조간(趙簡)]....................조간(趙簡)은 1279년(충렬왕 05) 6월 11일(정해)에 과거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따라서 김순(金恂)은 이때 아원(亞元:2위/차석)을 차지한 것이 확인된다.
▶1295년(충렬왕 21) 10월 정가신(鄭可臣)이 지공거(知貢擧), 김순(金恂)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 강훤(姜喧) 등 27인에게 급제를 주다.
▶1297년(충렬왕 27) 12월 13일(임인)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다.
▶1298년(충렬왕 24/충선왕 재위) 05월 06일(신묘) 광정 부사 승지 성균 좨주(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가 되다.
▶1298년(충렬왕 24/충선왕 재위) 07월 14일(무술) 우승지 성균 제주 보문각 학사 지 민조사(右承旨成均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가 되다.
▶1298년(충렬왕 24/충선왕 재위) 8월 10일(갑자)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다.
▶1298년(충렬왕 28) 09월 12일(병신) 좌우승지(左右承旨)가 되다.
▶1298년(충렬왕 28) 11월 27일(경술)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다.
▶1312년(충선왕 04) 06월 28일(임진) 상락군(上洛君)이 되다.
▶1320년(충숙왕 07) 02월 28일(무인) 왕이 상락군(上洛君) 김순(金恂)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다.[移御上洛君金恂第]
▶1321년(충숙왕 08) 01월 30일(갑진)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다.
▶1321년(충숙왕 08) 04월 29일(임신) 삼사사(三司使) 김순(金恂) 등에게 명(命)하여 권한공(權漢功), 채홍철(蔡洪哲)을 먼 바다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다.
▶왕이.....(중략).....삼사사(三司使) 김순(金恂) 등에게 명(命)하여 감찰헌부관(監察 部官)들과 함께 권한공(權漢功), 채홍철(蔡洪哲), 이광봉(李光逢), 최정지(崔廷芝)에게 장형을 가하고 먼 섬으로 귀양보내게 하다.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39-권한공(權漢功)]
▶1321년(충숙왕 08) 08월 21일(임술) 판삼사사(判三司事) 김순(金恂)이 졸(卒)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