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잔(金盞)
홍 성 순
찬장 안에 두 개의 황금빛 잔이 있다. 번쩍번쩍 빛을 내는 탓에 다른 그릇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그곳에만 시선이 머문다. 둥그런 받침대까지 갖추고 있어서일까. 여느 잔보다 고급스럽고 아름답다. 찬장 문을 열 때마다 잔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그 잔에는 아버님과의 오래된 사연이 담겨 있다.
아버님은 6.25 세대다. 젊은 나이에 전쟁터로 나갔던 일을 어제 일어난 일처럼 기억을 하고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아버님은 포탄이 날아오고 부대장이“엎드렷”하는 소리에 모두 쓰러지듯 엎드렸다고 하는 대목부터는 목소리를 높이셨다. 뒤 따라 오던 동료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면 쓰러지는 광경을 이야기할 때는 얼굴빛까지 변했다. 아버님의 되풀이 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가족은 아무도 없다. 밥상머리에 앉아 똑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지간한 인내력이 없으면 듣기 어렵다. 여자는 애 낳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고, 남자는 군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고 했던가. 아버님의 군대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아버님의 다리에는 총알이 스쳐간 흔적이 있다. 그 후유증으로 평생을 힘들게 사셨다. 그렇다고 다리를 절룩거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먼 길을 걸을 수 없었고 일을 많이 한 날은 밤새도록 신음소리를 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나라를 지킨 증표라며 당신의 인생에 크나큰 자랑거리처럼 여기셨다.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있고 나라가 튼튼해야 국민이 잘 살 수 있다고 열변을 토해 낼 때면 나라를 위해 반공 교육을 하러 나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어느 해 유월, 보훈청에서 선물로 금잔 두 개를 보내왔다. 아버님에게 내린 선물이었다. 아버님은 그 잔을 애지중지하셨다. 군대 생활로 다쳐 국가 보훈자로 지정된 사람에게 나온 선물이라는 걸 가족들은 다 알고 있었다. 벙거지 모자도 나왔고, 뺏지도 선물로 나왔지만 아버님은 그 중 금잔을 제일 아꼈다.
술을 드실 때도 금잔으로 드셨고, 커피를 마실 때도 금잔을 사용하고는 손수 씻어 마른 수건으로 닦아 얼룩을 지우셨다. 손님이 올 때 금잔을 자랑삼아 더 사용하곤 했다.
어느 날, 찬장을 정리하다가 금잔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충격이 간 잔이 찌그러들었다. 덜컥 겁이 났다. 시아버님이 애지중지하는 물건을 내가 찌그러뜨렸으니 어떻게 해야 하나. 말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았다. 그래도 두 개 중의 하나여서 다행이긴 했지만 두 개가 쓰이는 날은 탄로가 나고 말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걱정 속에 며칠이 지났다. 아버님은 친구분을 모시고 집으로 오셨다. 커피를 끓여 내야 하는데 찌그러진 잔 때문에 걱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다가 하는 수 없이 커피 두 잔을 끓였다. 찌그러진 잔을 아버님 앞에 놓고 성한 잔을 친구분 앞에 놓았다. 친구분이 계셔서 인지 아버님은 아무 말씀이 없었다.
아버님은 성격이 매우 급하신 분이었다. 시집을 와서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옥상에서 일하시던 아버님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래층에서 잘못 들은 나는 빗자루만 들고 저벅저벅 옥상으로 올라갔다. 빗자루를 받아든 아버님은 다짜고짜 아래층으로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멍하니 아버님의 얼굴만 바라봤던 적이 있다. 그 후로는 눈을 마주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서웠다.
아버님의 성격으로 봐서 찌그러진 잔을 봤으면 분명히 호통을 쳐야 하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니 더 걱정이 앞섰다. 먼저 말씀을 드려야 하나, 그냥 지켜보고 있어야 하나. 나의 가슴은 애간장이 탔다.
해 질 무렵, 아버님이 술 생각이 나셨는지 “아가, 술 한 잔 다오.”하셨다. 나는 야단 들을 각오를 하고 평소처럼 찬장 속의 찌그러진 금잔을 꺼내 술을 따르고 안주를 곁들여 아버님 앞에 가져다 놓았다. 아버님은 금잔을 요리조리 훑어보시고는 "술맛 좋다"는 말씀만 하실 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차라리 혼을 내면 좋으련만 긴장 속의 시간들은 더디게 흘러갔다. 두렵고 애타는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이튿날 아침, 나는 아버님에게 말씀드릴 요량으로 커피 두 잔을 탔다. “아버님, 커피 한 잔 드세요.”하면서 아버님 앞에 잔을 놓았다. 큰마음 먹고 나는 조심조심 말을 이었다. “아버님 제가 실수를 하여 금잔이 찌그러졌어요” 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버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괜찮다 찌그러지면 어떻냐”고 하는 것이었다. 크게 혼이 날 걸 예상한 나는 아버님의 말씀에 또 한 번 놀랐다.
그 일로 불편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는 돈독한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미리 아버님의 성격을 짐작하고 마음 조렸던 일을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아버님은 시집살이에 어설픈 며느리를 이해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알고 보니 아버님은 성격은 급했지만 자상한 분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며느리를 위해 꼭 손에 무엇인가를 사들고 오셨다. 과일, 아이스크림, 과자, 군것질거리를 내밀곤 하셨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님의 군대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지만 예전처럼 듣기 싫지는 않았다.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면 아무리 듣기 싫은 이야기도 명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버님은 지금 영천 국립원에 계신다. 명절이나 시간이 나면 우리 가족은 아버님을 만나 뵈러 간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분들은 군복에 새긴 이름표만큼이나 비석에도 이름을 달고 있다. 사열하는 군인처럼 비석들도 반듯하게 줄 서서 있는 모습이 아버님의 군 생활을 상상하게 한다.
손길을 받지 못한 금잔이 찬장을 지키고 있다. 금잔의 찌그러진 부분에 눈길이 더 간다. 내 실수가 잔에 새겨져 있다. 새댁시절, 모든 것이 다 서툴고 어설펐다. 며느리의 실수를 이해 해준 아버님의 사랑이 금잔위에서 빛난다. 금잔은 오늘도 내게 부탁의 말을 건넨다.
“아가, 술 한 잔 다오” ,
“커피 한 잔 다오”.
첫댓글 🙏🙏🙏
🙏🙏🏻🙏🏼
-()()()-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
훈훈한 사랑이 이 아침을 행복하게 합니다.
인내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기를 다짐해봅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