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宗 廟"와 "昌 慶 宮" 둘러보기
宗 廟
종묘(사적 제125호)는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神位)를 모신 사당으로 가장 절제되어 있으면서도
장엄한 건축물 중의 하나이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10월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 9월에 완공 하였으며, 곧이어 개성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환조(桓祖)의 신위를 모셨다. 현재 정전(正殿)에는 19실에 49위, 영녕전(永寧殿)에는 16실에 34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정전 뜰앞에 있는 공신당(功臣堂)에는 조선시대 공신 83위가 모셔져 있다.
종묘의 정문격인 외삼문(外三門) 또는 외대문(外大門)이라고도 한다.
정문은 다른 궁궐 정문과는 달리 구조 형태가 아주 간결하고 단순하다.
종묘 안내문
종묘의 안내도
망묘루(望廟樓)
망묘루는 임금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망묘루라는 이름은 제향시 임금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 한다. 언제 어떻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현재 건물 가운데 1칸이 누마루로 되어있다.
망묘루 옆에 있는 연못은 세종 25년(1443)에 조성된 것으로 사각형의 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 :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함) 사상에 의한 것이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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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신당 (恭愍王 神堂)
이곳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이다. 공민왕은 고려 31대 왕으로 원나라 세력을
내몰고 나라의 자주권뿐만 아니라 잃었던 북방 영토를 회복하였다.
또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 천선대렵도(天山大獵圖) 등 훌륭한 그림을 남겼다.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 하였다. 신당에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함께
그린 영정, 준마도(駿馬圖)를 모셨는데 ,현재는 복제품이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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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대청 (香大廳)
향대청(香大廳)은 제사 전날 궁궐에서 왕이 친히 전한 향. 축문, 흰모시의 폐백을
보관하는 곳이자, 제사에 참여하는 헌관과 집사자들이 머물면서 재계(齋戒)를
하는 공간으로, 사실상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향대청에는 제사에 사용되는 향, 축문, 폐백을 보관하는 향청(香廳)외에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의 헌관들이 대기하던 재실(齋室)과 제례에 참석하여 의식을 맡아
행하던 집사자들이 대기하던 집사청(執事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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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숙실 (御肅室)
어숙실은 왕이 제례를 올리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제례를 준비하던 곳이다.
종묘의 정전 동쪽에 자리한 어숙실은 재궁(齋宮) 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불린다.
담으로 둘러진 이 구역의 북쪽은 어재실, 동쪽은 세자재실(世子齋室),서쪽은 어목욕청(御沐浴廳)이다.
제례시 왕과 세자는 어숙실 정문으로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서협문으로 나와 정전과 영녕전으로 들어가
제례를 올렸다. 이 건물은 태조 4년 (1395)에 정전과 함께 지었으나, 임진왜란 중 불에 탄 것을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지었다. 정전의 규모가 커질 때 마다 이 건물은 동쪽으로 옮겨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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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전 (正殿)
국보 제 227호
정전은 매칸마다 신위를 모신 신실인 감실 열아홉 칸, 신실 양 옆으로 각각 두 칸의 협실, 그리고 협실
양 끝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와 마치 신실을 좌·우에서 보위하는 듯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동·서월랑
다섯 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문인 신문에서 보면 동서 109미터, 남북 69미터나 되는 묘정 월대가 넓게 펼쳐있고,
월대 가운데에는 신실로 통하는 긴 신로가 남북으로 나 있으며, 그 북쪽 끝에 상월대와 기단이 설치되어있다.
종묘제례의 모습
정전 남문 - 혼백이 출입하는 곳이므로 사람은 다닐 수 없는 곳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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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
공신당(功神堂)
조선시대 공신 83위의 신위가 모셔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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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 (永寧殿)
보물 제 821호
영녕전은 신실 하나하나의 구성은 정전과 크게 다름이 없지만 부재의 크기가 정전보다 약간 작고
전체 건물 규모도 정전보다 작기 때문에 정전에서와 같은 장대함을 느끼기에는 뒤지는 감이 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쉽게 들어와 친근감을 더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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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공청(樂工廳)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아악사(雅樂師)들이 대기하고 연습도
하던 건물이다. 연주 장소에 드나들기 편하게 한적한 터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한 채의 건물만 남아있으며 개조된 것이어서 원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기둥을 깎은 기법이 특이한데 둥구리 기둥(圓柱)을 15모로 접었으며
8모 기둥도 몇개 있으나 대부분 16모 기둥을 썼다. 집 가운데에 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기둥머리가 건물의 제일 위에 설치한 마룻보를 떠 받치게
목재를 짠 것 도 흔히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원래 12칸 중 가운데 2칸만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깐 툇간(退間)이었고 나머지 10칸에는 방을 들였었다.
건물 규모가 큰데 비하여 무늬를 넣지 않고 붉은 색(朱色)만을 칠하였으며
짧은 서까래를 달지 않고 처마 서까래만 걸어 꾸민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칠사당 (七祀堂)
칠사당은 일곱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여기서의 일곱 신이란..
인간의 운명, 문의 출입, 음식의 일, 거주하는 곳, 성문의 출입, 죽임과 형벌, 도로의 왕래 등을 관장하는 7신이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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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 慶 宮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들의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종묘에서 창경궁으로 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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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정(涵仁亭)
이 정자는 본래 함인당(涵仁堂)이었는데, 인조(仁祖) 11년(1633)에 이곳에 옮겨 세우면서 함인정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원래 성종(成宗) 15념(1484)에 지은 인양전(仁陽殿)이 있었는데 선조(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인조가 인경궁(인경궁)의 함인당(함인당)을 이곳에 옮겨 세운 것이다.
그 후 순조 30년(1830)창경궁에 큰 불이 나 타버린 것을 3년 뒤(1833)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함인정은 영조(英祖)가 문무과거(文武科擧)에서 장원급제(壯元及第)한 사람들을 접견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처마의 무게를 받치도록 기둥위에 짜 맞추어 올리는 공포(공包)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을 2개 설치한 이익공식(二翼工式)이며 처마는 처마 끝의 서까래 위에 짧은 서까래를 잇대어
달아낸 겹처마이다. 네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으로 평면이 좁아 지붕 규모는 작으나 팔작지붕의 모습을 제대로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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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층석탑... 그런데 이 탑은 어째서 여기 있는지~?., 설명문도 없습니다.
환경전(歡慶殿)과 경춘전(景春殿)
환경전 (歡慶殿)
환경전은 성종(成宗) 15년(1484)에 창경궁을 창건할 때 지은 건물이다.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光海君) 8년(1616)에 중건하였으나 인조(仁祖) 2년(1624) 이괄(李适)의 난(亂) 때 다시 불타 버렸고
난이 평정된 후 곧 중건하였다. 순조(純祖) 30년(1830)에 다시 화재를 입은 것을33년(1833)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창경궁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임금이 생활하던 곳으며 베11대 중종(中宗)이 이곳에서 승하하였고,
그 후 순조(純祖)의 효명세자(孝明世子) 익종(翼宗,추존)이 승하하였을 때는 발인 때까지 관을 두던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길게 다듬은 돌을 쌓은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처마의 무게를 받치도록 기둥 위에
짜 맞추어 올리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이 2개 사용된 전형적인 이익공(二翼工) 형식의 집으로
지붕이 네 귀에 모두 추녀를 한 팔작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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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전(景春殿)
경춘전은 성종(성종) 15년(1484)에 창경궁을 창건할 때 내전(內殿)으로 지은 건물인데 , 선조(宣祖) 15년(1592)
임진왜란 때 불 타 버린 것을 광해군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그 후 순조(純祖) 30년(1830)에 불탄 것을
3년 뒤인 1833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춘전 현판(懸板)은 순조의 글씨[御筆]이다. 경춘전은 제22대 정조(正祖)와 제24대 헌종(憲宗)이 탄생한 곳이며
성종(成宗)의 생모인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를 비롯하여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사도세자비인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 홍씨(洪氏)등이 돌아가신 곳이다.
건물은 주춧돌의 면과 면을 맞추어 3단으로 쌓은 세벌대 기단(基壇) 위에 지었다. 네 귀에 모드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처마의 무게를 받치도록 기둥 위에 짜 맞추어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이 2개인 이익공(二翼工)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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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명정 (通明殿)
보물 제818호
통명전은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연회를 열기도 하던 곳이다. 조선(조선) 성종(成宗) 15년(1484)에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光海君) 8년(1616)에 다시 지었는데 그 후 여러 차례의 화재를 당하여 현재의 건물은
순조(純祖) 34년(1834)에 다시 지은 것이며 현판은 순조(純祖)의 글씨[御筆]이다
통명정은 창경궁의 내전 건물 중 규모가 크고 꾸임이 화려하여 내전을 대표할 만한 건물이며 네 귀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에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翼工) 집으로 지붕에 용마르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전면에는 길게
다듬은 돌을 높고 넓게 쌓은 월대(月臺)를 두어 격식을 높였으며 서쪽에는 연못과 돌다리등을 두어 주위 공간도 아름답게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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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당 (養和堂)
양화당은 왕비의 생활공간으로 성종(成宗) 15년(1484)에 지었다. 임진왜란과 이괄(李适)의 난(亂 1624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불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 순조(純祖) 30년(1830) 또 다시 불에 탄 것을 1834년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仁祖)는 남한산성으로 피난 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이 곳에 거쳐하기도 하였으며.
철종비(哲宗妃)인 철인왕후(哲仁王后)는 고종(高宗) 15년(1878)에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현판은 순조(純祖)의 글씨[御筆]이다.
양화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규모의 단층집으로 네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얹었고,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翼工) 양식이다.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
영춘헌은 정조(正祖)가 거처하던 곳으로 재위 24년(1800) 6월 이곳에서 승하하셨다.
집복헌은 영춘헌의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 중 서 행각(西行閣)으로 영조(英祖) 11년(1735) 정월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태어났으며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순조)가 태어난 곳이다. 순조 30년(1830) 8월 환경전(환경전)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하여 여러 건물과 함께 타 버려 순조 34년(1834)에 다시 지었다. 그 후 건물의 퇴락으로 1999년5월 부터 2000년 7월까지
대대적인 보스 및 복원공사를 시행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이 건물은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翼工)양식이 사용되었으며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다.
성종 태실비 (成宗 胎室碑)
이 태실은 성종(성종)의 태를 모신 태실(태실)로소 원래 경기도 광주 경안면에 있었는데 1930년 5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역대 임금의 태실을 서삼릉(서삼릉)으로 옮기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태실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종 모양의 몸체를 놓고 팔각형의 지붕돌을 얹졌고 윗부분은 구슬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태실 주위에는 팔각형의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안에는 화강석으로 된 부채꼴의 넓적한 돌을 깔았다.
동쪽에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를 갖춘 성종태실비(成宗胎室碑)가 있는데 뒷면에는 성화(成化) 7년(1471) 윤9월에
세우고 그 후 3번에 걸쳐 다시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종은 조선 제9대 왕으로 1469년 13살의 어린나이에
즉위하여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반포 등 조선의 문물제도를 완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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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대 (風旗臺)
보물 제846호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기 위해서 조선시대에는 풍기를 사용했는데 이 유물은 풍기를 세웠던 받침대이다.
화강석으로 만든 이 풍기대는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네모꼴 아랫단과 그 위에 세워진 팔각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윗면 한가운데 지름 4.8cm, 깊이 25.4cm의 구멍이 있는데 그 속에 풍기를 꽂았다.
아랫부분이 92.4cm, 그 위의 팔각기둥이 135.7cm로 전체 높이가 228.1cm이고 위에서 33cm 되는 곳에
구멍을 뚫어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구를 만들었다.
이 지역을 그려 놓은 <동궐도(東闕圖)>에는 아주 작은 그림이지만 풍기대 위에 풍기가 길게 나부끼는 모양이
그려져 있다. 우리 역사에는 언제부터 풍기를 써서 바람을 관측했는지 확실한 연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이 풍기대가 정확하게 창경궁의 어디에 있던 것 인지도 알려져 있지않다. 그러나 늦어도 18세기 초까지는
이런 풍기대가 주요 궁궐과 관상감에 세워졌던 것으로 밝혀져있다. 그 중 지금 남아있는 풍기대는 이것 이외에
경복궁에 거의 똑같은 것이 하나 더 있다. 풍기를 쓰면 바람의 방향은 상당히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그 속도는
깃발의 흔들리는 모양으로 짐작 할 수 있을 뿐이다.
앙부일구 (仰釜日구)
앙부일구는 조선시대에 사요완 해시계로 그림자가 비치는 면이 오목한 가마솥과 같은 반구형(半球形)으로 되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를 13선위 위선(緯線)으로 나타내어 절기를 알게 하였으며
수직으로 시각선(時刻線, 子午線)을 그었고 영침(영침)은 북극을 향하여 꽂았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글자 대신에 짐승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세종(세종) 13년(1434)에 처음 만들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7세기
후반에 제작 한 것이다. (규격 : 직경 35.2cm., 높이 14cm <보물 제845호의 모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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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지
팔각칠층석탑 (八角七層石塔)
보물 제1119호
창경궁 안의 춘당지 연못 옆에 세워져 있는 팔각평면의 7층 석탑(七層石塔)으로,
중국 명나라 때에 만들어졌던 것을 우리나라로 옮겨와 조선시대 성종 때 세운 것이라고 한다.
기단부는 가장 아래에 네모진 바닥돌이 놓이고 그 위로는 8각으로 된 2단의 댓돌이 놓여 있다.
여기에는 각 면마다 무늬곽이 얕게 새겨져 있으며 그 위로는 기단 몸돌을 받는 연꽃장식
받침돌이 놓여 있다. 팔각의 기단 몸돌에는 각 면마다 꽃무늬들이 장식되고 가장 윗돌인
덮개돌에도 역시 연꽃무늬와 무늬곽이 장식되었다. 그 위로는 높직한 연꽃잎 장식 괴임돌과
2단의 낮은 괴임대를 두어 모두 3단으로 된 탑신괴임대가 별도로 놓여 탑신(塔身)을 받치도록 하였다.
탑신부는 1층탑신이 불룩하고 돌을 짜맞추는 기법도 벽돌탑쌓기식으로 되어 있어 그 형태가 중국에서
유행한 라마탑에 가까운데 탑신 뿐만 아니라 팔각형의 기단부, 그리고 2층 이상의 지붕돌의 모양 등
탑신부 전체에 흐르는 조형성도 역시 라마탑의 형태에서 응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석탑은 한국 전통의 석탑이 아니라 중국의 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석탑의 1층 탑신에는 4각형의 대리석이 끼워져 있고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3자씩의 글귀가
넉 줄로 새겨지고 다섯째 줄에는 만들어진 해가 기록되어 이 석탑이 중국에서 제작된 것과 그 시기를 밝히고 있다.
“요양중(遼陽重), 개산도(開山都), 강연옥(綱挻玉), 암수탑(巖壽塔),
대명성화육년경인세추칠월상한길일조(大明成化六年庚寅歲秋七月上澣吉日造)”
이 글귀 가운데 성화 6년은 조선시대의 성종 원년(1470)에 해당되므로 이 석탑은 중국 명나라 때의 석탑임이 확실하다.
또한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창경궁 안에 조선왕궁박물관을 만들면서 만주에서 가지고 온 상인으로부터
사들인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중국 석탑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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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문 (明政門) 및 행각 (行閣)
보물 제 385호
명정문은 창경궁의 중문이며, 명정전(명정전)의 정문이다. 명정전과 부속 건물들이 모여있는 일원[一廓]은
임금이 나랏일을 하던 곳이며 국가적인 의식을 거행하던 곳인데 이 구역은 담 역할을 하는 긴 집채인
행각(행각)으로 둘러싸여있다. 이 건물들은 창경궁 창건 당시(1484)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光海君)이 다시 지었으며 남쪽 및 북쪽 행각 일부는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어 1986년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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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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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전 (明政殿)
국보 제 226호
명정전은 창경궁의 중심 건물[正殿]로 성종(成宗) 15년(1484)에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광해군(光海君) 8년(1616)에 다시 지었다. 동쪽의 명정문을 위시하여 암쪽에 광정문(光政門), 북쪽의 광범문
(光範門)이 있었으니 지금은 명정문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궁중 건물이 대부분 남향인데 명정전만은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은 길게 다듬은 돌로 쌓은 2단의 넓은 월대(月臺) 위에 따로 기단(基壇)을 두고 세웠다. 목조각으로
짜여진 구조 형식은 처마를 받치도록 기동 위에 짜 맞추어 올리는 공포를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사이에도
배치한 양식이고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팔작지붕 단층집이다. 건물 뒤쪽에 햇빛을 가려주는 벽이 없는
긴 집채가 달려있는 것과 건물 내부 앞쪽으로 놓은 기둥이 있는 것은 특이한 예이다. 건물 앞에는 다른 궁의
정전(正殿)서와 같이 품계석(品階石)이 좌우 양측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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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문당 (崇文堂)
숭문당은 제20대 경종(景宗) 때에 세운 건물인데 순조(純祖) 30년(1830)의 큰불로 아 머린 것을 그해 가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숭문당의 현판(현찬)과 일감재자(日監在玆)라고 새긴 게판(揭板)의 글은 영조(英祖)가 쓴 것이다
영조는 특히 학문을 숭상하고 영재를 양성하였는데 이곳에서 친히 성균관의 학생들을 접견하여 시험하기도 하고
때로는 주연(주연)을 베풀어 그들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단층집으로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단 팔작지붕을 얹었고 공포가 새 날개 모양인 익공식
(翼工式)이나 간결하여 둥그런 굴도리와 모가 난 장여 밑에 접시받침만 끼워 장식하였다. 처마는 덧 서까래를 달지않고
처마 서까래만 걸어 꾸민 홑처마이고 지붕 마루도 양성을 하지 않고 욤머리 장식만을 놓아 전체적으로 검소한 모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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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천대 (觀天臺)
보물 제 851호
관천대는 숙종(肅宗) 14년(1688)에 세운 천문 관측대이다. 높이 22m 관측대 위 한가운데에 99cm의 받침대를 만들고
그 위에 당시 널리 사용하던 천문 관측 기구인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했다. 이것은 원래 당시의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창덕궁(昌德宮)의 금호문(金虎門) 밖에 세웠던 것인데 일제 강점기에 한번 이전하였다가
1970년대 후반에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관천대 위에 있던 소간의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때문에 이 유물에는 소간의대 떠는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도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훨씬 큰 관천대가 당시 천문관서인 관상감(觀象監)과 경복궁(景福宮)의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유물로 보아 당시 다른 궁궐에도 작은 규모의 관천대가 몇 곳데 더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복궁 안에 있던 관상감에서는 매일 밤 5명의 천문관이 하늘을 관찰하여 혜성 같은 천문 현상이
나타나면 한밤중이라도 즉각 임금께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여기 남아 있는 궁궐의 관천대에서는
매일 밤 관측이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제일 중요했던 경복궁안의 관천대인 간의대(簡儀臺)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이 유물은 관상감 자리의 관천대와 더불어 옛 관천대의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과학 문화 유산이다.
옥천교 (玉川橋)
보물 제 386호
궁궐의 중심 건물인 정전(正殿)에 들어갈 때는 풍수사상(風水思想)에 의하여 정전의 정문과 궁궐 정문 사이를
흐르게 한 명당수(明堂水)의 개울을 건너 들어가게 만들었다. 옥천교는 바로 그 명당수 위에 놓인 다리로서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과 정전인 명정전(明政殿)의 정문인 명정문(明政門)사이에 있는데
성종(成宗) 14년(1483)에 만들었다.
이 돌다리는 무지개 모양의 구조물[홍예:虹霓] 위에 길게 다듬은 돌로 모양의 틀을 짜고 멃적한 돌을
끼워 넣어 바닥을 만들었으며 아름다운 돌난간을 세웠다. 또 옥천교의 양끝에는 짐승의 모습을 돌로
깎아 세웠는데 [석수:石獸] 이런 양식은 창덕궁(昌德宮)의 금천교(錦川橋)나 경복궁(景福宮)의
영제교(永濟橋)에서도 볼 수 있다. 15세기 조선의 뛰어난 석조 미술을 보여 주고 있다.
홍화문 (弘化門)
보물 제 384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으로 성종(成宗) 15년(1484)에 처음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버렸다. 현재의 문은
광해군(光海君) 8년(1616)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이 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규모이다. 지붕 옆면이
경사져 있어 합각이 없는 우진각 지붕의 건물이며 기둥 위에 짜여진 공포를 기둥 위뿐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배치한 다포식(多包式)으로 조선 초기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특이하다. 건물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굳세고 장중하면서도 친근감을 갖게한다.
선인문
창경궁에 있던 동궁의 정문인 선인문이다. 창경궁의 동궁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고,
이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연산군이 쫓겨 날 때 이 선인문을 통해 쫓겨났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조에 가둔 곳도 바로 이 선인문 근처의 뜰이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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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 역사의 자료 감사합니다
감사 ,,,잘보고..퍼감니다 ,,꾸벅,,,
좋은글 잘보구 감니다
잘보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