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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의 철학(帽子 哲學)
On the Philosophy of Hats
알프레드 조지 가드너(Alfred Geoge Gardner)
일전(日前)에, 나는 모자에 다리미질을 하려고 어느 모자점에 들어간 일이 있다. 그 모자는 비바람에 시달려서 털이 부수하게 일었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새것처럼 반들거리게 보이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광을 내는 것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모자점 주인(主人)은 자기가 정말로 흥미(興味)를 가진 문제(問題) -모자와 머리의 문제- 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습니다.”
그는 내가 한 어떤 말에 이렇게 대답을 하더니,
“머리의 모양이나 크기에는 놀랄 만한 차이가 있습니다. 선생의 머리는 보통(普通)이라 하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나의 보통의 얼굴에 언뜻 그만 실망(失望)의 빛이 어리는 것을 보았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제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선생의 머리는 비정상(非正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머리에 따라서는 -자, 저기 있는 저 모자를 보십시오. 저것은 머리가 매우 우습게 생긴 분의 것입니다. 길고, 좁고, 혹투성이의- 아주 비정상적인 머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크기로 말하면 참 놀랄 만큼 차이가 심합니다. 저희는 변호사들과의 거래(去來)가 많습니다만, 그분들의 머리는 참 놀랄 만큼 큽니다. 아마 선생께서도 놀라실 것입니다. 그분들의 머리가 그렇게 커진 것은 아마 생각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기 저 모자는 ○○씨(유명한 변호사의 이름을 대면서)의 것인데, 엄청나게 큰 머리입니다. 7인치 반, 이것이 그분의 머리 크기입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에는 7인치 이상 되는 분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말을 계속했다.
“제가 보기에는요, 머리의 크기는 직업(職業)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전에 어느 항구도시(港口都市)에 있었는데요, 그때 많은 선장(船長)님들의 일을 해 드렸지요. 그분들의 머리는 보통이 아니었어요. 아마 그것은 그분들이 많은 걱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겠지요. 조수(潮水)며 바람이며 빙산(氷山)이며, 기타 여러 가지를 걱정하자니…….”
나는 필경, 그 모자점 주인(主人)에게 빈약한 인상(印象)을 주었으리라는 사실(事實)을 의식(意識)하면서, 나의 보통의 머리를 떠받들고 모자점을 나왔다. 그 모자점 주인에게는, 내가 겨우 6⅞인치 크기의 인간(人間)밖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따라서 대단치 않은 인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속에다 보석을 지닌 머리는 반드시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 주고 싶었다. 물론, 위인 중에는 머리가 큰 사람이 왕왕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비스마르크의 크기는 7¼인치, 글래드스턴도 그러했으며, 캠벌배너먼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와 반대(反對)로 바이런은 머리가 작았고, 뇌가 대단히 작았다. 그런데 괴테는 말하기를, 바이런은 셰익스피어 이래 유럽에서 나온 가장 우수(優秀)한 두뇌의 소유자(所有者)라고 하지 않았던가? 보통의 경우라면 동의(同意)할 수 없지만, 작은 머리를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이 문제(問題)와 관련하여 괴테의 말을 주저 없이 받아들인다. 홈스의 말과 같이, 중요(重要)한 것은 뇌의 크기가 아니고 그 회전의 빠름이다(지금 생각해 보니, 홈스는 머리가 작았던 모양이다).
하여간, 나는 그 모자점 주인(主人)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내 머리는 비록 작을망정 내 뇌의 회전 속도는 최상급(最上級)이라고 믿을 수 있는 충분(充分)한 이유(理由)가 있다고.
나는 물론 그렇게 말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지금 그 일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특유(特有)의 창구멍으로 인생(人生)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든 것은 모자(帽子)의 크기를 통해서 세상(世上)을 들여다보는 사람의 경우였다. 그는, 조운스가 7인치 반을 쓴다 해서 그를 존경(尊敬)하고, 스미드가 6¾인치밖에 안 된다고 해서 무시(無視)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이러한 직업적(職業的) 시야(視野)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재단사는 제군(諸君)의 의복(衣服)을 훑어보고서 그 재봉 솜씨와 광택의 정도에 따라 제군을 측정(測定)한다. 그에게 있어서 제군은 다만 옷걸이에 불과(不過)하고, 제군의 가치는 제군이 입고 있는 의복에 정비례(正比例)한다. 제화공(製靴工)은 제군의 신을 보고서 그 신의 질과 손질을 한 상태에 따라 제군의 지식(知識)이나 사회적(社會的), 경제적(經濟的) 정도를 잰다. 만일, 제군(諸君)이 굽이 닳은 신을 신고 있으면, 제군의 모자가 아무리 번들거려도 제군에 대한 그의 평가는 변하지 않는다. 모자는 그의 시야(視野)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평가(評價) 기준의 일부(一部)도 되지 않는 것이다.
치과 의사(齒科醫師)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세상(世上)의 모든 일을 이로써 판단한다. 제군의 입속을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고서도, 제군의 성격(性格)이나 습관이나 건강 상태, 지위(地位), 성질(性質) 등에 대하여 확고부동(確固不動)한 자신(自信)을 가진다. 그가 신경(神經)을 건드리면 제군은 몸을 움츠린다.
그러면, 그는
‘아하, 이 친구, 술과 담배가 차나 커피를 지나치게 하는군.’
하고, 속으로 생각한다. 그가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것을 보면,
“가엾게도 이 사람은 아무렇게나 자랐구나.”
하고 혼자 말한다. 또, 치아가 등한시(等閑視)된 것을 보면,
“칠칠치 못한 친구로군, 쓸데없는 데에 돈을 다 써 버리고 식구(食口)는 돌보지 않은 것이 확실(確實)해.”
한다. 그리고 제군(諸君)에 대한 진찰이 끝날 무렵에는 제군의, 이에 나타난 것만으로 해서도 제군의 전기(傳記)를 쓸 수 있을 것같이 생각한다. 그리고 아마 그것은 대부분(大部分)의 전기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것이 될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그릇된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업가(實業家)는 회계실(會計室)의 열쇠 구멍으로 인생(人生)을 내다본다. 그에게 있어서는 세계(世界)가 하나의 상품시장(商品市場)이고, 그는 이웃 사람들을 그들의 가게 문 유리의 크기로써 평가한다. 그리고 금융업자(金融業者)도 마찬가지다. 로드차일드 집안의 한 사람이, 그의 친구 하나가 죽었을 때, 백만의 돈밖에 남기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는,
“저런 저런! 그 친구, 꽤 잘 사는 줄 알았더니…….”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일단 유사시(有事時)를 위해서 겨우 백만밖에 저축(貯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일생(一生)은 실패(失敗)라는 것이다.
대커리는 그의 한 작품(作品)에서, 이런 생각을 아주 잘 나타냈다. 오즈번 영감은 조지에게 “수완이 있고, 부지런히 일하고, 판단이 현명(賢明)하고,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나와 나의 예금 통장을 보아라. 돌아가신 불쌍한 세들리 할아버지와 그분의 실패를 보아라. 그렇지만, 20년 전에는 그분이 나보다 나았단다. 아마 2만 파운드는 우세(優勢)했겠지.”
하고 말했던 것이다.
생각건대, 나도 또한 사물(事物)을 직업적(職業的)인 눈으로 보는 모양이어서, 사람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행동을 가지고 하지 않고, 언어(言語)를 사용하는 기교(技巧)를 보고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화가(畵家)가 우리집에 오면 벽에 걸린 그림으로 나의 인물(人物)을 평가하고, 마찬가지로, 가구상(家具商)이 오면 의자의 모양이나 양탄자의 질(質)로써 그 위치를 결정(決定)지으며, 미식가(美食家)가 오면 요리(料理)나 술로써 판정(判定)을 내린다. 만일 그에게 샴페인을 내면 우리를 존경(尊敬)하고, 만일 호프를 내면 평범(平凡)한 사람 속에 넣고 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요컨대, 우리들 모두가 인생(人生)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각자(各自)의 취미나 직업(職業)이나 편견(偏見)으로 물든 안경을 쓰고 가는 것이고, 이웃 사람들을 우리 자신(自身)의 자로 재고, 자기류(自己流)의 산술(算術)로 그들을 계산(計算)한다 하겠다. 우리는 주관적(主觀的)으로 보지, 객관적(客觀的)으로 보지는 않는 것이다. 곧, 볼 수 있는 것을 보는 것이지,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실(事實)이라고 하는 그 다채(多彩)로운 것을 알아보려고 할 때, 수없이 실패(失敗)를 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수변의 조약돌(Pebbles on the Shore)》(1916년 作) 中에서
해설과 감상
영국의 수필가 알프레드 조지 가드너(Alfred Geoge Gardner.1865∼1946)의 널리 알려진 수필 중 하나. 「모자의 철학」은 1916년 단행본으로 출간된 수필 모음선 《수변의 조약돌(Pebbles on the Shore)》에 실린 가드너의 대표 수필이다. 영국인들에게 모자는 전통적으로 패션의 완성이자 예의의 표현이다. 그만큼 생활에서 꼭 필요한 품목이다. 가드너는 모자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과 나눈 대화를 화두(話頭) 삼아 평범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식과 판단의 기준에 대해 짧지만 예리한 성찰(省察)을 제시한다.
우선 「모자 철학」에서 모자 가게 점원이 뇌의 크기에 따라 사람의 능력(能力)을 분류하는 대목은 흥미롭다. 19세기 중반 이후 과학 연구의 성과가 하나둘 빛을 발하면서, 실증 학문인 과학(科學)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사회 전반에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골상학(骨相學, phrenology)은 19세기 말 영국 식자층에게는 꽤 알려진 분야이다. 물론 골상학 자체가 유사과학(혹은 사이비과학)의 일종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과학의 범주로 진지하게 인정되진 않았지만, 머리 생김새 혹은 크기와 개인의 지능, 기질, 또 성격과의 연관성을 다루기 때문에 당시 골상학은 마치 요즘의 혈액형(血液型) 성격 테스트나 별자리 운세(運勢)처럼 ‘과학’ 비슷한 태도를 취하면서 대중들의 호기심을 끌어들이기 쉬운 분야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뇌와 관련된 개인의 지적 능력을 굳이 따지자면, 뇌의 크기보다는 ‘뇌핵’ 혹은 ‘뇌주름’의 면적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가게 점원의 머리 크기에 따른 분류법은 대중들이 골상학을 이해하는 손쉬운 방식의 한 가지 사례라 할 수 있다. 가드너는 점원과의 일화를 통해 속류 과학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가 자칫 오류로 이끌릴 수 있음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이 점을 개개인이 겪는 경험이란 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이 글의 요지와 재미있게 연결시키고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눈에 맞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살아간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일을 ‘내 눈의 안경’을 통해 보고 또 나만의 잣대로 판단 내리기 때문에 인간들은 모두 안경 렌즈만큼의 주관적 한계를 지닌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과 사물,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서로 구구한 억측(臆測)을 내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줄거리
나는 어느 날 단골 모자 가게에 들렀다가 우연히 그 가게 점원과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다. 그 점원은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모자와 사람의 머리 크기를 유심히 보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람을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방식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 따르면 모자 둘레 즉, 머리통의 크기는 뇌의 크기를 보여 주고, 따라서 큰 모자를 쓰는 사람은 그만큼 큰 뇌를 덕에 뇌의 활동이 활발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모자만 봐도 그 사람이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지 혹은 머리를 써야 할 고민이 많은 사람인지, 아니면 저자처럼 보통의 머리 크기를 지닌 평범한 부류의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사를 보면 치과의사는 사람의 치아만 보고, 구두공은 신발만으로, 또 재단사는 외투만으로 타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단번에 판단해버리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식의 판단 기준은 그 기준들끼리 서로 상충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많은 예외와 오류를 낳는다고 평한다. 예를 들어, 모자의 경우만 해도 작은 머리로도 최고의 지성을 지녔던 위대한 인물들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드너는 개인 각자에게 주어진 경험의 범위가 서로 각양각색이고 또 제한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 인간들은 모두 객관적으로 보기보다는 주관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만 볼 뿐이라고 인정한다. 따라서 저자 가드너는 완벽하고 절대적인 인식이나 가치 판단은 어차피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좀 더 여유 있는 태도로 타인의 생각과 생활 방식을 존중해주면서 각자 자기 나름의 삶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가면 된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글입니다. 해설과 감상을 쓴 이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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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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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소설가의 <여덟 개의 모자오 남은 당신>이 생각납니다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
세상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업식대로 주관적으로 본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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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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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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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