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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강동면 양동민속마을 서백당, 향나무. 김우수기자 woosoo@kyongbuk.co.kr |
옛 조상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수백 년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온 양동마을.
그곳에 가면 능선과 골짜기 따라 보석같이 펼쳐진 500여년의 '살아있는 역사' 를 만날 수 있다.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룬 명당마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등 두 집안이 서로 협조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오랜 역사를 이어온 유서깊은 전통마을로 온갖 귀중한 문화재도 넘쳐난다.
국보, 보물, 민속 자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됐다. 마을의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 볼거리가 많아 1993년 영국의 찰스왕세자도 이곳을 방문했다.
특히 이곳은 옛 명문대가의 영광스러운 자취와 선조들의 삶이 배어 있는 200년 이상된 고가 54호가 보존돼 있어 조선 중기 이후의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양동마을에 두 성씨를 대표하는 가옥은 서백당과 무첨당.
무첨당은 이씨의 종택, 산중턱에 자리잡은 서백당은 손씨의 종택이다.
'서백'은 '하루에 참을 인(忍) 자를 백번 쓴다' 는 뜻으로 대쪽같은 선비정신이 오롯이 배어 있다.
설창산의 혈맥이 집중된 곳인 서백당은 예부터 삼현지지(三賢之地)의 명당으로도 알려져 왔다. 세분의 현인이 나는 땅이란 이야기다.
실제 청백리 손중돈 선생과 동방 5현에 꼽히는 회재 이언적 선생이 모두 이 곳에서 태어났다. 이후 남은 1명의 인물이 손씨여야 한다며 손씨 집안에선 며느리 출산 때는 방을 내줘도 딸에게는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두 현인은 이미 태어났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나타날한 명의 현인을 기다리고 있다.
서백당은 행랑채, 살림채, 사당으로 구분돼있는데, 'ㅡ'자 형으로 길게 서있는 행랑채가 가장 앞에 자리 잡았고, 그 뒤로 한 단 높은 곳에 살림채가 'ㅁ'자 형으로 배치돼 있다. 또한 위쪽에는 사당이, 아래쪽에는 오랜 향나무가 위엄한 모습으로 서백당을 지키고 서 있다. 때문에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택으로 손꼽힌다.
월성손씨가 양동마을에 살게 된 것은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계천군이란 작위와 양민공이란 시호를 받은 손소 때부터다. 청송에서 살던 손소는 풍덕류씨 류복하의 사위로 1458년 입향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마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씨들이 계속 바뀐 원인은 당시의 상속제도 때문.
처가의 재산을 시집간 딸에게도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이른바 '남녀균분상속제'가 일반적인 관행이었고, 결혼한다는 것은 남자가 처가 동네로 이거해 '장가를 드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처가에 손이 끊기면 모든 재산이 사위에게 상속돼, 처가동네에 터를 잡고 세거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손소의 장인 류복하 역시 장씨 집안에 장가들어 자리를 잡았고, 무남독녀만을 두었기에 모든 재산을 사위 손소에게 넘겨주었다. 현재 풍덕류씨의 자손들은 이마을에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월성손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는 '외손봉사' 풍습만 남아있다.
손소는 풍덕류씨 여식과 혼인을 했고 그 슬하에 장자인 백돈과 차자인 증돈·숙돈·계돈·윤돈 등 5형제를 낳았는데, 장자인 백돈은 처가로 장가를 갔고, 차자인 중돈이 실질적인 상속자 역할을 했다. 그는 문장과 경륜에 탁월해 1489년(성종 20) 문과에 급제한 이후 중외요직을 역임했으며, 청백리에 녹선돼 크게 명성을 떨쳤다. 손중돈의 여동생은 여강이씨 번과 혼인한 이후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이 회재 이언적이다. 그후 풍덕류씨들은 인근 마을 소평 일대에 살았는데, 자손이 번성지 못해 몰락했고, 마을도 지금 양동마을 위에 있는 포스코 공업용수원지인 안계댐 밑에 수몰됐다.
2명의 걸출한 인물, 손중돈과 이언적이 배출된 것은 양동마을 최고의 영광이긴 하지만, 그럼으로써 양동마을의 정착사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됐다. 대대로 외손들이 주인을 차지했던 전통은 손소-손중돈 대에 와서 단절되는 듯하다가, 이언적이란 걸출한 외손이 배출됨으로써 다시 외손정착의 전통이 부활됐다. 결과적으로 손소의 후예인 월성손씨 가문과 이언적의 후예인 여강이씨 가문이 한 마을에 동거하는, 드문 양성 마을이 됐다.
양동의 월성손씨는 조선후기까지 문과급제와 사환이 이어졌으나 오늘날까지 명문가로서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20대 종손은 손성훈(55년생), 종부는 조원길(56년생)대구에 살며 주말에는 종가에서 주로 지낸다. 조원길종부는 종부로라서의 삶에 대해 '일체유심조'라 말한다.
서백당에는 사랑채 옆 정침의 동북쪽에 사당이 있는데, 사당에는 양민공 손소를 국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사당 안마당의 향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 이상 된 것이며, 이 향나무는 종가의 제사 때마다 분향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사당으로 오르는 길에 있는 백일홍 한 쌍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데, 이 나무의 붉은 꽃잎으로 화전을 만들어 제상에 올린다고 한다.
'조상에서 욕됨이 없게 한다' 는 뜻의 '무첨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성균생원 이번 공이 살던 집.
1460년경 지은 여강 이씨의 종가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마치 비밀정원으로 들어가는 듯 그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사랑채의 날아갈 듯한 처마와 정밀하게 조각된 난간 등이 세련된 솜씨의 주택임을 보여준다.
무첨당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의 풍류와 학문' 이라는 말로, '무릇 선비란 풍류를 알고 책을 읽어야 한다' 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첫댓글 자랑스런 전통 마을입니다
李世貞-宗衍-稇-培-允芳-春彦-權-崇禮-壽會-蕃-彦迪(晦齋)-應仁(守庵)-宜潤(無忝堂)-皗-垷(慵軒,敎官,出)-德純(月湖)-徵中-憲國(禁窩)-鼎宇-驥祥-在欽(弦窩)-能容(五柳)-壻 南孝永(妻曾祖)
孫敬源-玄儉-登-士晟-昭(松齋,讓敏公)-仲暾(愚齋,景節公)-曔-光曙-時-宗老(樂善堂,丙子胡亂,殉節)-鐩-汝發-是楨(芝亭)-應杰-熹一(印溪)-星建(溪隱)-鍾儉(香窩)-永濬-壻 南有秀(妻 5代祖)
양 가문과 처가댁 혼맥입니다.
貴門도 名門이지만 妻家(영양南氏)도 참 名門입니다.
@류현우 귀한 말씀 고맙습니다.
晦齋는 外叔인 愚齋의 품에서 자랐고 영향을 받았겠지만 훗날 후손이나 제자들에 의해 이와 관련된 갈등이 생기지요.
孫李是非입니다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