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라
아 4:7-5:1
7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8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9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5:1 내 누이, 내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우유를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많이 마시라
아 4:7-5:1 / 어찌 그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찌 그리도 아리따울 수 있을까? 내 사랑 그대 흠 하나 찾을 길 없어. 8) [나와 함께 가요] (신랑) 나의 신부여 이리 오세요. 나와 함께 가요. 레바논산에서 내려오세요. 위험한 레바논산 위에서 내려오세요. 어서 내려오세요. 아마나 산꼭대기에서 내려오세요. 스닐산 꼭대기에서 내려오세요. 우뚝 솟은 헤르몬산 위에서 내려오세요. 그 사자굴에서 내려오세요. 표범이 우굴거리는 그곳에서 내려오세요. 어서, 우리 함께 가요. 9) [사랑의 묘약] (신랑)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내 마음 다 빼앗아갔어요. 그대 한번 나 쳐다보는 눈길 그 눈길에 홀려 나, 몸이 굳어 버렸어요. 그대 목덜미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그 목걸이에 나, 마음을 다 빼앗겨 버렸어요.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 사랑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으랴! 포도주보다 더 달콤한 사랑! 그대 사랑은 너무도 향기로워라. 너무도 싱그러워라. 그 어떤 향수보다 더 향기로워라. 11) 그대 내 사랑 그대 입술은 꿀맛 그대가 내게 입맞추면 그대 혀 밑에는 달콤하게 꿀 섞은 젖이 괴어 있구나. 그대 옷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는 레바논 삼림 향내처럼 향기롭구나. 12) [사랑의 정원] (신랑)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비밀에 싸여 있는 동산 담으로 둘러싸인 동산 비밀스런 샘물이어라. 13) 거기서 자라는 푸른 나무들 싱그럽기도 하여라. 석류나무 과수원처럼 푸르러 입맛 돋우는 열매 맺고 헨나꽃과 나르드 꽃 피고 14) 나르드, 사프란, 창포, 계수나무, 갖가지 향나무가 모두 자라고 몰약과 침향 같은 향료가 거기서 나는구나. 15) 그대는 동산을 적시는 샘물 생수가 흐르는 시내 레바논 산악에서 소용돌이치는 시냇물이어라. 4:16) (신부) 하늬바람아, 일어라. 마파람아, 불어라. 나의 동산 위에 불어 다오. 하여 온동산에 싱그러운 그 향내음 가득하게 하여라. 나의 임 나의 동산 여기로 오세요. 어서 오시어 여기서 더없이 맛있는 열매 따드세요. 5:1) (신랑)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이 동산으로 그대를 찾아 나 이렇게 왔다오. 나 향료와 몰약을 거두어들이고 나 꿀송이와 꿀을 따먹었다오. 나 포도주와 젖을 마셨다오. 친구들아 마시자, 먹자 사랑에 흠뻑 빠져 들 때까지.
솔로몬은 자기 신부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며 거듭 칭찬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7-11) 본문에서 솔로몬은 술람미 여인은 아무 흠이 없다고 거듭 칭찬을 합니다(7). 하나님의 눈먼 사랑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신부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얼굴은 검게 그을었고 오라버니의 꾸중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신랑의 눈에는 아름다웠습니다. 신랑은 신부에게 나와 함께 가자고 합니다. 신랑은 신부가 험한 산꼭대기에 머물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정결을 지켜온 신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이제 산에서 내려와 나와 함께 하자고 청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를 아름답게 보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고 의롭다하심을 받았지만 여전히 온전하지 못하여 주의 말씀에 따라 인도를 받습니다. 내 향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기까지 주의 사랑을 배웁니다.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12-5:1) 여인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아무에게나 자기 자신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동산’이 아니라 ‘잠근 동산’이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의 이런 아름다운 고백에 대해서 술람미 여인은 16절에 화답합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아주는 신랑 솔로몬 왕에게 모든 것을 주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가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 바울은 이런 마음과 자세로 사는 성도들을 축복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적용: 당신은 잠근 동산과 덮은 우물, 그리고 봉한 샘의 삶을 삽니까? 내 마음과 가정에 세상의 온갖 더러움이 들어오지 못하는 잠근 동산이 됩시다.
시편의 언어는 표면적이 아닌 내면의 언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어 벨트라는 학자는 “시편은 성경의 창자” 즉,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언어라는 뜻입니다. 14편에는 ‘하나님이 없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 하나도 없다.’ ‘없다’라는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없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김’입니다. 강조 용법으로 쓰는 없다는 ‘찾으신다’는 뜻입니다. 역설적 표현입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없다, 없다의 삶이지만, 이 말은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겨자씨만한 믿음의 사람을 찾으신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요 소망입니다.
< 설 교 >
사랑과 동행
아 4:7-16 / 조영식 목사
5월 가정의 달 마지막 주입니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의문>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왕이 세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였습니다. 왕은 세 가지 의문에 답을 찾기 위하여 전국에 포고령을 내렸고,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왔지만 답을 찾지 못하였습니다. 왕은 산 속에 묻혀 사는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왕의 질문에 현자는 아무 말도 없이 밭만 갈았습니다. 해질 무렵에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청년이 왕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왕은 옷을 찢어서 청년의 상처를 싸매주고 물을 떠다 주면서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치료한 이후에 그 청년은 왕에게 원한을 품고 죽이려 왔다가 호위병에게 부상을 당한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은 왕의 사랑에 감동하여 원한을 풀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왕은 다시 현자에게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하였습니다. 현자는 왕이 자신과 원수를 만나면서 이미 답을 찾아다고 하였습니다. 현자는 왕에게 말하기를 첫째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 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의문을 가족과 연결을 시켜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매일 마주대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가족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살아가는 가족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보편적 사랑을 가족 사랑으로 축소시킨 점도 있겠지만 사랑의 출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가서를 통하여 하나님과 가족 간의 사랑을 묵상할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사랑하는 자를 흠이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7절).
아가서에서 제일 먼저 말하는 사랑의 원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흠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라고 합니다. 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점이 있고 흠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감사를 드리며 흠이 있고 부족한 점은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살게 하시고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열매에 대해서는 감사하며 살고 주시지 않는 선악과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없는 선악과를 소유하려고 하였을 때 인간은 죄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두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거민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을 하면은 가나안 거민을 주님이 해결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을 하면은 가나안 거민이 옆구리에 가시가 되게 하였습니다. 인간이 부족함을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처럼 위대한 종에게도 모든 것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 안에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렸던 바울도 자신 안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세 번식이나 간구하였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한평생 육체의 가시 때문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없고 완벽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흠이 있음을 알고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에게 부족함과 흠이 있음을 알고 주님의 사랑으로 덮어주는 것이 이 땅에 천국을 이루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사랑하는 자와 함께하며 동행하는 것입니다(8절).
아가서의 두 번째 사랑의 원리는 사랑하는 자와 함께하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8절 말씀에서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라고 합니다. 서로의 흠을 덮어주는 사랑이 있을 때 먼 길 헤이지지 아니하고 함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은 좋은 일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일도 함께하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입니다. 제가 집사람과 다투는 일 중의 하나가 자녀문제입니다. 자녀들이 잘되면 제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 안되면 아내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려운 일일수록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들이 기쁠 때나 어려울 때나 항상 함께하여주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매일 반복되는 목회의 힘겨운 때문에 지쳐있을 때 굉장히 위로를 준 글입니다. 미국에 “조니 에렉슨 타다”라는 여성작가가 있습니다. 그녀는 1967년 다이빙 사고로 사지마비가 되었습니다. 그 뒤, 그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가 되었고,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지었습니다. 지금도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장애인의 인권과 복음사역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녀에게 누군가 물었습니다. “조니! 당신은 항상 행복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도 당신이 가진 기쁨을 가질 수 있나요?” 그때 조니가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거의 매일 일어날 때마다 탄식해요. ‘오늘도 늘 똑같은 날이구나!’ 그러면 매일이 너무 미칠 것만 같고 답답해요. 만약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저는 하루도 살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아침마다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님! 이제 저를 돌봐주는 친구가 와서 저를 목욕시켜주고, 옷을 입히고,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빗질하고, 이를 닦아주고, 저를 문밖으로 보내줄 겁니다. 저는 오늘 한 번 더 이런 똑같은 일상을 마주할 힘도 없고 미소도 없어요. 제게 당신의 미소를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영혼에 힘과 미소를 주시고, 그날 만나는 사람마다 다른 줄 것이 없어서 그 미소를 주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너무 은혜를 받아 그대로 적용하고 싶었습니다. 지쳐있는 제가 주님께 드린 기도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오늘도 저와 함께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함께할 수 있는 가족들이 있음을 감사했을 때 서서히 회복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3. 사랑하는 자에게 우물과 샘이 되어야 합니다.
아가서의 세 번째 사랑의 원리는 사랑하는 영혼을 위하여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우물이고 샘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에서도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라고 합니다. 또한 15절에서도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라고 합니다. 우리가 먼 길 가면서 서로의 갈증을 해결하여 주지 못한다면 지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의 방황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갈증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갈증이 해결되지 않을 때 어김없이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섯 번이나 결혼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갈증을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는 기쁨을 맛볼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구원의 생수가 되셔서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여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서로에게 우물이 되고 샘이 되어서 세상에서 지친 마음들을 위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사랑에 대한 결론을 상대방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라고 정리하고 싶습니다. 9절 말씀에서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라고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들을 사랑함으로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생명까지 희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 흠 없이 바라 볼 수 있고, 고난 속에서고 함께 동행 할 수 있고, 샘이 되어서 상대방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빼앗기는 사랑
아 4:7-16 / 조정헌 목사
며칠 후면 5월이 되는데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의 달을 맞아 가정을 돌아보고 가정을 바르고 건강하게 세워가는 은혜가 꼭 있어야 할 것입니다.
톨스토이의 <세 가지 의문>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어떤 왕이 세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두 번째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 번째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이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전국에 포고령을 내렸고, 많은 학자들이 찾아왔지만 답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왕이 산 속에 묻혀 사는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왕의 질문에 그 현자는 아무 말도 없이 밭만 갈고 있었습니다. 해질 무렵에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청년이 왕 앞으로 달려왔습니다.
왕은 옷을 찢어서 청년의 상처를 싸매주고 물을 떠다주면서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치료를 받은 후에 그 청년은 왕에게 원한을 품고 왕을 죽이려고 왔다가 호위병에게 부상을 입은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은 왕의 사랑에 감동해서 모든 원한을 풀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되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왕은 다시 현자에게 세 가지 의문에 대한 답을 구했습니다. 그러자 현자는 왕이 자신과 원수를 만나면서 이미 답을 찾았다고 말했습니다.
현자가 왕에게 말하기를 첫째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 뿐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셋째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의문을 가족과 연결을 시켜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매일 매일 함께 살아가는 가족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는 일입니다.
톨스토이의 보편적인 사랑을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축소시킨 부분도 있겠지만 사랑의 출발점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아가서를 통해서 하나님과 가족 간의 사랑을 묵상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사랑의 원리는, 상대방을 흠이 없이 바라보는 것입니다.
7절 말씀에 보면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라고 했습니다. 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해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부분이 있고 흠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드리면 되는 것이고... 흠이 있고 부족한 부분은 하나님을 더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살게 해주셨지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고 주시지 않는 선악과 열매에 대해서는 하나님 것임을 분명하게 인정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선악과를 가지려고 했을 때 우리 인간이 죄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면서 살아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주시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거민들을 남겨두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에 순종하면 그들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할 때에는 그들이 오히려 옆구리의 가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처럼 훌륭한 종에게도 모든 것을 다 주시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린 바울도 자신 안에 있는 육체의 가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세 번식이나 기도를 했지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평생 그 육체의 가시 때문에 교만하지 않을 수 있었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고, 더군다나 완벽할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흠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잘 알고 바울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서로에게 부족함이 있고 흠이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해주고 덮어주는 것이 이 땅에서 천국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의 원리는,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8절 말씀에 보면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합니다.
서로 흠을 덮어주는 사랑이 있을 때에 먼 길도 헤이지지 않고 함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일에만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도 함께 하는 것이 사랑하는 가족의 모습입니다.
부부가 다투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자녀의 문제입니다. 자녀가 잘되면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 못되면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최고의 사랑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쁠 때도 어려울 때도 항상 함께 해주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힘들어서 지쳐 있을 때에 그런 저에게 큰 위로를 주었던 글이 있습니다. 미국에 조니 에렉슨 타다라고 하는 여성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1967년 다이빙 사고로 사지가 마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후로 희망을 잃지 않고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가 되었고, 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면서 장애인들의 인권과 복음사역을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루는 그녀에게 누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조니! 당신은 항상 행복해 보이는데, 어떻게 저도 당신이 가진 기쁨을 가질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조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거의 매일 일어날 때마다 탄식해요. ‘오늘도 늘 똑같은 날이구나!’ 그러면 매일 매일이 너무 미칠 것만 같고 답답했어요. 만약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하루도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아침마다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주님! 이제 저를 돌봐주는 친구가 와서 저를 목욕시켜주고, 옷을 입히고,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빗질하고, 이를 닦아주고, 저를 문밖으로 보내줄 겁니다. 저에게는 오늘도 이런 똑같은 일상을 마주할 힘도 없고 웃을 힘도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힘과 미소를 부어주시고, 그날 만나는 사람들에게 다른 줄 것이 없어서 그냥 미소를 주면서 살아간다. 라고 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너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똑같이 그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 때 제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하나님이 오늘도 함께 해주세요. 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함께할 수 있는 가족이 있음에 대해서 감사드릴 때에 다시금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랑의 원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물과 샘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사랑하는 영혼을 위해서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우물이 되어주고 샘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라고 했습니다. 또 15절에서도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먼 길을 가면서 서로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면 결국에는 지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동안에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갈증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갈증이 해결되지 않을 때에 그들은 어김없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도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 무려 다섯 번이나 결혼을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갈증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물가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인생의 갈증이 다 해결되는 놀라운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생명수가 되어주셔서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가족들은 서로에게 우물이 되어주고 샘이 되어줌으로써 세상에서 피곤하고 지친 마음들이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사랑에 대한 결론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9절 말씀에 보면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고 자신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함으로써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때에 흠이 없이 바라 볼 수 있고, 고난 속에서도 함께 동행 할 수 있고, 우물이 되어주고 샘이 되어서 상대방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이런 마음을 빼앗기는 사랑을 통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랑 이야긴 여전히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가 4:7-10, 16, 시 18:1-2, 요 21:17 / 인명진 목사
• 시인의 사랑 이야기
한때 우리도 누군가에게 한 아들이었고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이제 누군가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자라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얼마 전 출판된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라는 책에서 시인 정호승 씨가 한때 아버지의 아들이었다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뒤에 썼다는 “아버지의 나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아버지는 숲의 아름다움과 강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려고 어린 아들을 지게에 태우고 숲으로 갑니다. 강으로 갑니다. 어릴 적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숲의 아름다움과 강의 아름다움을 어린 아들에게 맛보게 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이었음을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습니다.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와 아들의 감격을 시인은 그렇게 시에 담아냅니다.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시인은 이 시를 쓰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정호승 시인의 시에는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참 많이 나오지만 아버지 이야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2007년에 발간한 시집, 『포옹』(창비)에는 그의 부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습니다. 한 평론가는 “병으로 허물어진 아버지, 아들의 시 속으로 들어왔다”라고 말하더군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당시 그의 부친의 나이는 88세였는데 노환으로 한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치매 예방을 위해 아버지는 아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일본어로 된 책을 번역 작업을 하셨는데 무리가 되어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답니다. 쓰러진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시인은 부모가 사는 집으로 작업실을 옮겼고, 거동이 불편하신 부친을 돌보면서 드디어 아버지는 아들의 시가 되었습니다. 시인은 아버지를 화장실에도 모시고 가고, 밥도 떠먹여 드리고, 목욕탕에도 모시고 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 시집에 나오는 “노부부”라는 시에서 아버지는 배변도 어려울 정도로 나이가 드셨고, ‘나팔꽃’이라는 시에서는 나팔꽃 씨를 환약으로 알고 잡수시기도 했으며, ‘못’이라는 시에서는 인생의 힘든 무게를 견디다가 빠져나오면서 구부러진 못과 같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특별히 그 시집에 나오는 “못”이라는 시는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가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사랑에 감격한 아들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벽에 박아두었던 못을 뺀다/
벽을 빠져 나오면서 못이 구부러진다/
구부러진 못을 그대로 둔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억지로 펴서/
다시 쾅쾅 벽에 못질하던 때가 있었으나/
구부러진 못의 병들고 녹슨 가슴을/
애써 헝겊으로 닦아놓는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늙은 아버지/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가서/
때밀이용 침상 위에 눕혀 놓는다/
구부러진 못이다 아버지도/
때밀이 청년이 벌거벗은 아버지를 펴려고 해도/
더 이상 펴지지 않는다/
아버지도 한때 벽에 박혀 녹이 슬도록/
모든 무게를 견뎌냈으나/
벽을 빠져나오면서 그만/
구부러진 못이 되었다.”
아버지도 한때 잘 박혀있던 건장한 못이었습니다. 가족들을 위해 밤을 지세우고, 온갖 난관을 뚫고 달리던 강한 못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의 안위와 자녀 양육 등의 온갖 짐을 어깨에 걸머지고 애쓰다가, 이제는 녹이 슬었고 다시는 펴질 기약이 없는 구부러진 못이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아들의 가슴 속에 아버지를 향한 사랑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아들이 이제 구부러진 못과 같이 된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사랑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랑 이야기를 만듭니다. 사랑 노래는 또 다른 사랑 노래를 만듭니다. 그렇게 사랑 이야기는 ‘이어지는 특성’을 갖습니다.
•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
오늘 우리는 본문 아가서에서 한 사랑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술람미 여인을 향한 솔로몬 왕의 순수한 사랑 노래입니다. 본래 아가서의 히브리어 표제는 쉬르 하쉬림인데 “노래들 중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표제처럼 아가서는 여러 편의 사랑 노래로 묶어져 있습니다. 이런 에로틱한 사랑 노래가 어떻게 성경에 들어올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가서는 사랑 노래의 특성을 잘 알려줍니다. 한 사랑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랑 이야기를 낳게 만드는 특성 말입니다. 아가서에 울려 퍼지는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아가서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노래로 이해했고 신약에 들어와서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노래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아가서는 술람미 여인을 향한 왕의 사랑의 노래입니다. 누구나에게 그렇듯 사랑이 시작되면 그의 마음은 꽃피는 봄동산이 되고 아름다운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되지요.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달리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내가 너를 사랑하였구나.” 왕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이름 없는 무명의 여인이었습니다. 아가서 여기저기에 설명이 조금씩 나오긴 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이름도 나와 있지 않고, 어떤 가문의 여인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1장에는 그녀에 대해 묘사하는 몇 가지 표현이 나옵니다. 1장 5절에는 그녀를 외모가 “게달의 장막 같았다”고 묘사합니다. 게달의 장막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연결하여 만든 까맣고 볼품없는 유목민들의 텐트였습니다. 그의 거친 피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들에서 포도원을 가꾸고 양을 치던 여인이어서 외적으로 중동의 햇볕에 그을려 피부가 검고 아주 거칠어서 예루살렘의 왕궁의 있는 여인들과는 사뭇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런 여인이 어떻게 왕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의아함을 갖게 하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에 빠진 왕은 그를 향해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2:1).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2:10). 오늘 말씀에 들어오면 그 사랑의 이야기는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4:1)”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낯이 간지럽지만 아름답습니다. 조건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이야기는 이제 7절과 10절에 오면 정점에 이릅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7)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더 향기롭구나”(10). 이거 완전 콩깍지 아닙니까?
이것이 사랑하는 여인을 향한 신랑의 사랑 노래였다면 그 사랑의 노래를 들은 신부가 화답하는 노래가 이어집니다. 16절입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이렇게 아가서는 한 사랑 노래가 울려 퍼지고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감격하여 자신의 사랑 노래를 부르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한 사랑 이야기는 다른 사랑 이야기가 터져 나오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너도 이런 사랑 받았잖아? 그런 사랑 받는 너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데? 하늘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 이제 너의 사랑 이야기가 터져 나와야 한다고 재촉하는 것 같습니다.
• 하늘 아버지의 사랑 이야기
흔히 이야기에는 ‘미메시스 기능’이 있다고 하지요. 모사 기능, 본뜸 기능입니다. 사랑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낳습니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아가서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 하나님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아들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놓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이 바로 성탄 사건이요, 십자가 사건이지요. 십자가의 보혈로 덮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장래에도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람을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줄을 세우신다면 제일 먼저 내보내셔야 할 사람이 저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로 감싸 안으셨습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그 사랑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부활사건에는 우리 주님의 그 사랑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릴 찾아오신 주님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몇 년 전 장신대 ‘해외석학초청 설교학 강좌’에 토론토대학교 설교학 교수인 폴 스캇 윌슨 박사가 초청받아 온 적이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강의와 학교 채플에서 설교가 있었습니다. 채플 설교 본문은 마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였습니다. 설교는 평범하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설교 중간 부분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군요. “만약 예수님께서 오늘 이 자리에 오셔서 양과 염소 편으로 나누신다면 장신대 채플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양의 편에 총장님이 계시나 보았더니 안 계셨습니다. 혹시 통역하는 김운용 교수가 있나 보았더니 김교수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염소 편에서 와글와글하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 비싼 돈 들여서 초청했더니 실수하고 있었습니다. (반주자/ “그 사랑 얼마나” 찬양 반주 시작) ‘양의 편에는 딱 한사람이 서있는데 자세히 보았더니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와글대는 염소 편으로 다가오셨습니다. 뿔도 달려 있고, 뒷발질도 잘하고, 성질도 못된 완전 염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이 입고 있던 양의 옷을 벗어서 염소에게 입혀 주시고는 ‘너는 이제부터 양이다...’ 저는 그 부분을 통역하다가 울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종종 우는 일이 있지만 통역하다가 울어본 적으로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는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던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스러운 모습도 아니요, 조건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성립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를 정말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전부를 내놓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그 사랑을 받고서도 오늘도 방황하고 있는 나를 변함없이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조용히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외면하고 있는 우리에게 사랑의 눈길로 덮으십니다. 오늘 그늘지고, 춥고, 답답하고, 외롭고, 상처투성이인 주름진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셔서 사랑의 햇살을 비춰주십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받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 서 있습니다. (찬양 시작)“...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이 사랑에 감격한 한 시인은 감격하여 한 편의 시를 쓰지요. 평생 섬진강 유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시를 썼던 김용택 시인은 그 사랑을 그렇게 노래합니다.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이 아름다운 사랑의 글귀를 남자 분들 안 써놓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과 같은 글귀는 써놓으셨다가 생일 때, 결혼기념일에 카드에 적어 보낸다면 밥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텐데... 춥고 외롭고 응달지던 우리의 인생의 뒤란에 햇빛을 비춰주시고 사랑의 불가로 가만히 불러내 주신 주님, 그 좋으신 주님을 만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작은 섬김에도 들꽃처럼 웃으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아침,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너 그럴 줄 몰랐다. 어쩜 사람 새끼가 그럴 수가 있느냐? 나는 뒤통수치면서 배신하는 놈이 제일 싫더라. 나 솔직히 너에게 실망했다. 그래도 사람 새끼가 그렇지. 그렇게 무너진다는 것이 말이 되냐...?” 충분히 따질 만한 잘못을 한 제자입니다. 그런데 책임추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과 부활의 축복을 다시 그에게 덧입혀 주셨습니다. 그 제자를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말없이 지켜보는 제자에게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가슴에 채워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감격하는 제자에게 한 가지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의 아침 상처투성이인 베드로에게는 사랑스러운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없이 그를 품에 다시 안으십니다. 상처투성이인 그의 멍든 가슴을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셨습니다. 주님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에 그에게 또 물으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사랑 이야기로 감격한 그가 주님을 향한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을 때 그는 죽는 자리까지도 아름답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섬길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 사람들의 가슴에는 그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대단한 조건을 갖추었고 세상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가슴에 사랑 이야기가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걸고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면 쉬워집니다.
• 이젠 우리 차례입니다
사랑하면 쉬워집니다. 사랑하면 할 수 없는 일도 가능해집니다. 사랑하면 거리도, 시간 없는 것도, 거리가 먼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박용재 시인의 말이 옳습니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사랑한 만큼 삽니다. 그만큼이 우리 인생이고, 그만큼이 우리 신앙생활입니다. 사랑 이야기는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전부를 주셔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주일을 지키면서, 예배를 드리면서 주님 미소 지으실 정말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이야기를 써가는 것입니다. 대충 쓰는 사람도 있고, 적당하게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사랑 이야기를 쓰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충 쓰는 사람도 있구요, 아무렇게나 휘갈기듯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면 우리의 최고의 정성이 들여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그렇게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멋지게 쓰면서 교회를 세웠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본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승리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일이 잘되고, 잘 살았기 때문일까요? 많이 배웠기 때문이었을까요? 종말론적 자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오늘이 마지막 예배인 것처럼, 오늘 만나는 사람이 마지막인 것처럼, 오늘 드리는 찬양이 마지막인 것처럼, 올 한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올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해입니다. 이 예배가 마지막 예배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예배할까요?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할 수 있었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겼고, 아름다운 교회로 세웠습니다. 우리 사랑 이야기도 정말 잘 써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평생 갚아도 깊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 진해의 한 교회 집회를 인도하던 중에 저는 잠시 마산에 있는 호주 선교 기념관을 찾을 적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이 땅에서 울려 퍼졌던 사랑 노래를 다시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127년 전 4월, 한국 땅에서 그의 마지막 사랑 노래를 힘껏 부르고 세상을 떠난 그의 사랑 노래를 다시 들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는 누이 메리 데이비스 선교사와 함께 고향 멜본을 떠나 시드니에서 증기선을 타고 1889년 8월 28일 시드니 항을 떠났습니다. 40여 일간의 길고도 지루한 항해 끝에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에 입항하였습니다. 한국에 온 최초의 호주 선교사였습니다.
먼저 온 미국 선교사들의 배려로 서울에서 수개월 간의 적응과 언어훈련 기간을 보냈습니다. 6개월 정도 한국말을 배우고 난 후에 빨리 한국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 1890년 3월 14일, 어학 선생 1명과 조사 1명을 동반하고 자신에게 배정된 선교지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과천 고개를 넘고, 수원을 지나 경기도 지방을 답사하고 공주 등의 충청도 지방을 거쳐 470km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20여 일만에 도착했습니다. 4월 4일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날,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의 건강이 어려웠습니다. 무리한 도보여행으로 여행으로 몸은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졌고, 오는 길에 천연두에 걸렸고 비를 맞아 폐렴이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걸었습니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게일의 도움으로 일본인 의사의 치료를 잠시 받았지만 4월 5일 오후 1시경에 눈을 감습니다. 한국에 온 지 정확히 183일 만이었습니다. 33살의 젊은 나이의 미혼이었습니다. 그는 부산 초량 언덕에 묻혔고 그 지역이 개발되면서 무심은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데이비스 선교사의 주님과 이 땅을 향한 사랑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의 죽음의 이야기가 호주에 전해졌을 때 호주교회의 한국선교 개척은 중단의 위기를 맞았습니다. 함께 내한했던 누이 메리 선교사도 동생을 잃은 슬픔과 건강악화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로써 호주교회의 한국선교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 소식이 호주교회에 전해졌을 때 그 사랑 이야기를 계속 써가겠다고 나선 수많은 젊은이가 나섰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국 땅에 건너온 선교사가 12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의 사랑 이야기는 짧았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달려왔으나 그는 크게 이룬 것도 없이 짧은 시간을 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땅에서 불렀던 그의 사랑 이야기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그의 놀라운 사랑 이야기를 전해 들은 사람들이 일어나 조선 땅으로 달려왔고 척박한 땅에서 그들의 사랑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래로 부산 땅을 덮었고, 김해, 창원, 마산, 진해, 거제, 함양, 거창, 진주, 통영, 의령, 밀양, 양산 땅을 덮었습니다. 1900년도 초기에 이 지역에 세워진 대부분 교회는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세워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 이야기는 이어져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사랑 노래는 이어져야 합니다. 우린 지금까지 주님을 향한 우리 사랑 이야기를 써왔습니다. 우리 사랑 이야긴 여전히 아름다워야 합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아름답게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도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엎드려 비는 말 들으소서/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찬송을 작사한 분은 미국 장로교 목사의 아내였습니다. 몸이 약하여 많은 시간을 누워지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가정에 귀한 자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자녀들이 그녀에게 큰 행복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유행하던 전염병에 두 아이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 충성하며 살려고 노력했는데 가정에 임한 큰 아픔 때문에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의 순간에 “More love to Thee, O Christ, More love to Thee...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인생의 아픔의 순간에도 주님을 신뢰하기에, 사랑하기에 주님을 더욱 사랑하면서 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나중 이것은 찬송으로 만들어져서 많은 그리스도인의 몸부림이 되었습니다. 미국 유니온신학교 설교학 교수가 되었던 조오지 프렌티스(George L. Prentiss)의 아내 엘리자베스 프렌티스(Elizabeth P. Prentiss, 1818-1878)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고백할 수 있을까요?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More love to Thee, O Christ, More love to Thee...”
봉한 샘
아 4:12; 잠 5:15-23 / 김홍도 목사
인간의 본능 중에 가장 강한 본능이 성욕(性慾)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성(性)을 잘못 사용하고 잘못된 애정생활을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고 고난과 비극이 많이 발생하 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간음하지 말라"(출 20:4)는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애정과 성욕을 제멋대로 기분내키는 대로 잘못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인격을 파괴하고, 신앙을 팔아 먹고, 가정적으 로는 어느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그 가정이 암초에 부딪쳐서 불행에 빠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 아내를 비참한 운명으로 몰아넣습니다. 자녀를 불량자나 고아아닌 고아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 이 성도덕이 문란해질 때 그 사회질서가 파괴되고 그 나라가 붕괴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로마가 붕괴한 것들이나 소돔 고모라성이 멸망한 것은 다 이러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퀘이커(Quaker)교파의 설교자인 엘톤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는 말하기를 "부패한 문명이 취하는 가장 분명한 형태는 실제에 있어서나 문명에 있어서 성적 쾌락에 대하여 가장 부조리한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세 가정이 결혼하면 그 중에 한 가정 이상이 이혼한다고 합니다. 또 중고등학생들의 절반 이상이 성경험을 가지고 있고 15, 6세 된 여학생들이 임신해서 유산하거나 사생아를 낳아 미혼모가 날 로 늘어나서 중고등학교에 미혼모 아기엄마들이 공부하는 교실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제가 미국에 갔을 때 들어보니까 어느 학교나 중고학생들이 학교에서 쉬는 시간만 되면 남녀학 생들이 공공연히 포옹하고 키스하는 것은 보통이라고 합니다. 제가 로스엔젤레스에서 몇몇 목사님과 함께 어느 여자 집사님댁에 초대를 받아 갔었습니다. 그 집사님은 미국 남자와 결혼했던 분인데 이혼하 고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혼 동기가 무엇인가 하면 남편이 파티에 함께 가자고 해서 준비를 했더 니 그 남편이 말하기를 오늘 파티는 특별히 아내를 전부 바꾸어서 침실에 드는 파티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여집사님이 "당신은 대학을 나온 지성인이요, 또 교회에 다니는 크리스챤이 어떻게 그런 일 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절대로 그 파티에 갈 수가 없습니다"하고 반대를 했더니 끝내 고집을 부린다고 결국 이혼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요사이 세상은 부패하고 말았습니다.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요사이 여름에 피서지에서 제일 잘 팔리는 것이 중고등학생들이 사먹는 피임약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는 딸들이 파티에 놀러 나간다고 하면 밀크에 피임약을 타 먹여 보내야 부모가 마음을 놓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성도덕은 말할 수 없이 문란해지고 영적으로 보면 음란케 하는 더러운 귀신이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을 사로잡아서 인격과 신앙을 파괴하고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와 국가를 붕괴시키려는 위 험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말 자체 이러한 설교자체를 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이런 말 하는 자체가 마음에 검은 생각을 가져다 주고 별로 명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 득이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말씀에 솔로몬이 그 신부에 대한 사랑을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다"고 한 것 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애정생활이 마치 덮은 우물 봉한 샘과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잠근 동산이란 허락된 사람 외엔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개나, 짐승 어느 누구도 들어가 뛰놀 수 없 는 성결한 동산이란 말입니다. 덮은 우물이란 아무 사람이나 뚜겅을 열고 퍼 마실 수 있는 그런 우물물 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꼭 덮은 우물처럼 나의 애정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상대 외에는 아무에게나 쏟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봉한 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주인만이 문을 열고 마실 수 있는 꼭 봉해둔 순결 한 애정이라는 말입니다.
일편단심 한 애인, 자기 남편이나 자기 아내만을 사랑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가정의 즐거움과 거룩한 애정생활을 장려하는 말씀입니다. 잠언 5:15에 보면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 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을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 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악인 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 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첫째 애정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법칙을 생각해 봅시다.
<1. 애정생활에 대한 하나님의 법칙>
여러분, 남녀의 사랑에 대한 본래의 하나님의 뜻과 법칙은 한 남자와 한 여자와 사랑하고 결혼하여 사 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이 여자, 저 여자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처럼 한 여자가 이 남자, 저 남자를 사 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5-6에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 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①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결혼한 부부는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이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밉다는 핑계로나, 살림을 못한다는 핑계로나, 음식을 잘못한다는 핑계로나 성격이 나쁘다고 아이를 못 낳는다고 결코 이혼하거나 다른 여자와 다른 남자를 넘보거나 탐 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음행한 연고외에 아내를 버리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남편이나 아내가 간음죄를 지었어도 꼭 이혼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할 수 있는대로 용서하고 같이 살라는 뜻입니다.
[② 결혼은 기도하는 중에 신중히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내키는대로 기분내키는대로 대번에 사랑한다고 하고 결혼하자고 하는 것은 철없는 짓입니다. 특 별히 크리스챤은 크리스챤과 결혼하는 것이 성경말씀의 법칙입니다. 결혼 후에 믿게 하겠다는 것은 원래 취할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6:14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 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 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 전이라" 말씀했습니다. 결혼 후에 믿게 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교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하지만 자기 신앙까지 팔아먹을 모험을 하는 것보다는 믿는 사람과 결혼해서 힘을 합하여 선교 사업하는 것이 수십배 더 낫습니다.
빌리그래함 박사는 말하기를 "내가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한다면 나는 언제나 그녀를 신 뢰할 수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항상 무슨 죄라도 지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종교가 달라도 안 됩니다. 개신교와 개신교끼리는 무방하지만 개신교와 카톨릭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일치해서 영적인 구심점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아예 결혼할 때 기도하는 중에 믿음으로 해야 되는 것입니다.
[③ 가급적 결혼 전에도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요사이 많은 사람들이 결혼 전에 많은 경험들을 가지기를 원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이 남자, 저 남 자, 이 여자, 저 여자 교제를 많이 한 사람은 실상 그 만큼 결혼 생활에 불행이 오고 그 가슴에 아픈 일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 앞에도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잠근 동산, 덮은 우물, 봉 한 샘처럼 애정을 잘 간직해야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3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디모데전서 5:14에 젊은 과부가 정욕이 불같이 일어나서 사탄의 훼방거리가 될 바에는 차라리 시집을 가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2에 보면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애정생활에 순결을 지켜야 됩니다. 오늘날 이 런 모든 면에 문란하고 부패한 세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할 것입니다.
<2. 음행죄와 그 벌>
그러면 음행죄가 왜 무서운가 하는 것을 다윗의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윗 왕은 무용이 뛰 어난 사람이요 덕이 높고 시를 잘 쓰고 또 정치도 잘해서 통일국가를 이룩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 러나 그가 통일국가를 이루고 이젠 자기가 싸움터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부귀영화를 누릴 때였습니다. 하루는 모든 부하들이 전쟁터에 나가고 자기는 사치스러운 침상에 누워서 오후 늦도록 잠을 자고 일어 나서 옥상에 올라가 기지개를 켜며 내가 이룩한 예루살렘 도성이 이렇게 훌륭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내려다 보는데 하필 가까이에서 어느 여자가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으로부터 그 장면을 보게 될 때에 좋지 못한 짐승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불러 들여다가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범죄하고 말았는데 그 여자가 잉태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면 숨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그 여자의 남편인 자기의 충신인 우리아 장군을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하였습니다.
후에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회개는 했지만 그 가정에 평생 동안 칼이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 여자 에게서 나온 아들은 앓다가 갑자기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일주일 동안이나 금식하며 회개했지만 죽 고 말았습니다. 또 다윗의 아들 중에 암논이라는 아들과 또 다른 여자를 통해서 난 다말이라는 예쁜 딸 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암논이 이복 누이동생이 되는 다말을 욕을 보였습니다. 그러다 다말의 친 오 빠가 되는 압살롬이 그 말을 듣고 암논을 불러다 잔치를 차리고 대접하는 체 하다가 암논을 죽여버렸습 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도망쳐서 자기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가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으려고 반란을 일 으켜서 다윗이 쫓겨다니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압살롬은 상수리 나무에 목이 걸려 죽고 말았지만 일 평생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고 환난이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이와 같이 음행죄는 자신과 가정과 국가를 불행케 만듭니다. 이 죄는 무엇보다도,
[① 몸 안에 있는 죄입니다.]
고린도전서 6:18-19에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몸 안에 있다는 말은 그 죄의 성질이 한 번 들어오면 몸 안 에 오래 남아있어서 웬만큼 철저한 회개가 없이는 그 죄를 또 짓게 되고 평생 고치지 못하는 버릇이 되어서 자기도 망치고 남도 망치고 좀체로 끊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본능이 가장 강한 본능이기 때 문에 이 마귀도 한 번 들어오면 좀체로 내어쫓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범죄했다면 철저히 회 개해야 하고 또 아예 범죄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② 이것은 성전을 더럽히는 죄입니다.]
고린도전서 3:16-17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 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③ 이 죄는 개인의 몸과 혼과 영을 다 멸망케 하는 요인이 됩니다.]
이런 죄를 회개치 않고 계속하면 결국은 지옥의 형벌을 면치 못한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9-10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회개치 않고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가 지옥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6:11에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에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했습니다.
[④ 이 죄는 가정을 파괴합니다.]
건강을 파괴하고 경제적인 파탄을 가져오고 애정생활에 파탄을 가져와서 온 식구가 다 불행에 빠지고 맙니다.
[⑤ 교회를 더럽히고 파괴합니다.]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가 성전에서 수중드는 여인과 더불어 좋지 못한 죄를 지었습니 다. 그 때 엘리는 그 사실을 말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영영 그 실로의 성막에서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엘리는 목이 부러져 죽고 두 아들은 다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하고 법궤 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에베소서 5:3에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 의 마땅한 바니라"고 했습니다.
[⑥ 부도덕한 음란죄가 관영하던 그 나라와 민족은 멸망합니다.]
소돔 고모라성도 폼페이도 모든 역사가 증명하는 것은 이러한 죄가 관영한 까닭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가 평화롭고 안전하려면 그 국민이 특히 성도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죄를 멀리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만일 이러한 죄를 범했거나 계속하는 자가 있 다면 철저히 회개하십시오. 회개를 해야겠는데 회개가 안 되고 끊을 수가 없으면 그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죄를 끊어버릴 용기를 달라고 기도 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죄를 미워하고 애통하며 회개하고 끊을 수 있게 하는 때를 주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눈이 만일 범죄하거든 그 눈을 떼버리라. 한 눈만 가지고 천국에 가는 것 이 두 눈 다 가지고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눈과 같이 귀한 것이라도 버리 라는 말씀입니다. 또 아무리 쓰린 아픔이 있어도 죄는 용감히 끊어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 속에 먼저 이 죄를 버려야 되겠다는 안타까운 마음, 회개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원 이 있어야 그 소원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 님께 자백하는 것이요, 죄를 버리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사야 55:6-7절 말씀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 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요한일서 1:9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아무리 큰 죄라도 우리가 진실하게 자복하고 회개하면 우리 하나님은 용서못할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 니까?
<3. 죄를 범치 않으려면>
[① 여러분이 눈과 마음과 생각을 지킬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28절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그랬습니다. 다윗이 짐승같은 마음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욥기 31:1에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14에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여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했습니다. 시편 19:14에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했습니다.
다윗은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시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옵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옵소서" 했습니다.
[② 유혹의 범주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좋지 못한 책이나 영화나 친구, 위험한 자리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 여인의 유혹을 피하여 도망쳐 나오듯이 유혹받을 책이나 사람이나 장소는 피해야 합니다.
[③ 말씀충만 성령충만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이 모두가 마귀의 역사요, 귀신의 장난이므로 악령을 대적해야 됩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귀신은 떠 나갑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 이러한 죄가 얼마나 많고 마귀가 꽉 찼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러한 때 일수록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그 사람을 귀한 그릇으로 만들 고 크게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아멘-
아름다운 동산
아 4:13-14 / 김남준 목사
아가서는 솔로몬이 실제 어느 여인을 사랑했던 경험을 토대로 적어 내려간 책입니다. 그래서 사전 지식 없이 성경을 보면 이 책이 정말 성경일 수 있는가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한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과 당신의 백성들과의 애정 어린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신랑 신부 된 관계로 솔로몬의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가서처럼 훌륭한 복음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구약성경도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가서를 깊이 연구하면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해야하고 주님과 어떻게 하나된 삶을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공허한 신앙생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복음으로 밝혀 주는 데 커다란 유익이 될 것입니다.
본문의 앞에서는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이것은 신부가 단지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내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혈육과 같이 느껴지면서도 연인의 사랑을 느끼는 친근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지 따로 존재하는 개체로서 사랑을 나누는 관계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뜨겁게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이면서도 또한 혈육과 같이 느껴지는 관계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이것은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커다란 산의 중심부로 점점 들어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큰 산에는 동산이 있고 그 작은 동산에는 우물이 있고 우물에는 샘이 있습니다. 그래서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산이 잠겨져 있고 우물은 덮여져 있고 샘은 봉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마치 정원과 같아서 실제로 그 정원을 거닐어 본 사람이 아니면 누구도 그 신앙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모두 신앙 밖에 있었을 때는 신앙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신앙의 세계를 알게 하셨습니다.
말로 열심히 신앙의 세계를 설명하지만 신앙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모든 원동력이요 힘의 기초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산에서 우물, 우물에서 샘으로 산의 핵심부를 향해 점진해 가고 있는 묘사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잠근 동산과 같고 하나님만을 향해 열 수 있는 덮인 우물과 같은, 그리스도만을 위해 개봉할 수 있는 봉한 샘과 같은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열매맺는 삶
오늘 성경은 여러 가지 과실과 나무의 이름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봐도 이 나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유대인들조차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이것들은 아무 동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잡목이 아니라 매우 귀하게 쓰여지는 나무들이고 또 그 열매가 매우 아름답고 유익한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15장에서 당신이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열매를 맺는 삶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사람들이 너희의 그 실과를 보고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너희들이 나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요 그 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 열매를 보고 너희가 나에게 속한 자임을 세상이 보고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가 무엇인지 알리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오늘 우리들이 가슴에 새기고 이 본문을 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나무의 이름으로 가득 찬 13절과 14절이 12절과 연결을 지으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많은 나무를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열매맺은 것처럼 흉내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열매를 맺는 것, 진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비원에서 자라는 열매
오늘 성경이 "네게서 나는 것은..." "그 동산에서 나는 것은..."이라고 말할 때, 그 동산은 어떤 동산입니까? 모든 사람이 아무 때나 들어가서 짓밟고 유린하고 놀다가 쓰레기를 버리고 오는 곳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정원과 같이 오직 한 사람,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동산의 주인인 신랑만이 들어와서 다닐 수 있고 즐길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동산에서만이 진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고 각양 향기로운 수목들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주 지나다니는 길에는 열매들이 남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인적이 끊어진 곳을 가면 열매들이 매달렸다가는 저절로 떨어지고 다시 나무가 자라고 열매를 맺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잠근 동산에서 열매가 맺힌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나 와서 유린할 수 있는 그러한 동산에서는 정말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확정되고 주님을 향해 준비되어지고 주님을 사랑하는 신앙의 내면의 세계를 소유하고 사람들의 삶 속에서만 주님이 진정 기뻐하시는 열매들이 맺힐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잠근 동산과 같은 마음을 갖지 않고 오가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도 어쩌면 열매가 맺힐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라고 하는 그럴싸한 열매가 맺힐지 모릅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그러한 모습들이 열매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균형 잡힌 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신앙의 열매가 자신의 삶 속에 맺힌 사람들은 남이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내면 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이러한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잠그고 우리의 내면의 세계가 오직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지배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단속된 마음
또 하나 보여주는 진리는 이러한 아름다운 열매와 진기한 수목들이 모두 잠근 동산에서 생겨나게 되는데 이 사실은 모든 신앙의 열매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격의 열매이든지 삶의 열매이든지 생활 속에 맺히는 모든 아름다운 열매이든지 모두 하나님과의 은밀한 관계에서 감화 받는 것이 있을 때에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관계의 감화가 없이 삶의 열매만을 맺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노예적인 삶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맺는 삶을 허락해 주실 때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이 열매에 몰두할 때는 오히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히려 열매가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신부로 불러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관계를 즐기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혹은 목양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표에 미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결과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시는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매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열매를 맺어야 하겠다는 열망보다,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끝없는 은혜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실패의 근원을 더듬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비밀스러운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마음을 단속하고 하나님께만 그 마음을 드리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구제를 하든지 복음을 전하든지 교회를 섬기든지 마음속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삶의 동기가 되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즐거움이 되어서 세상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즐거움과 하나님 앞에서의 정겨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면서 섬김을 행하고 있을 때가 얼마나 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인의 사랑
오늘 이 동산에 맺힌 아름다운 과목과 과수와 수많은 열매들은 이 동산의 주인으로 하여금 동산에 대한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솔로몬의 입장이 되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이 이제 너울을 쓰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여인을 맞이하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고 있는데 그가 인격적으로나 삶에 있어서나 점점 더 이 신랑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삶의 열매를 자신의 삶의 정원에서 자라가게 하고 있다면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겠습니까? 얼굴만 아름다울 뿐 아니라 놀라운 삶의 열매가 있고 신랑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인격의 좋은 열매들이 신랑과의 관계 속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자라서 신랑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솔로몬에게 있어서 이 여인을 향한 사랑은 육체에 매혹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도 곧 지나가고 훌륭한 몸매도 모두 사라지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 동산에서의 아름다운 과목과 열매 때문에 솔로몬이 이 여인을 더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산을 사고 팔 때 땅의 넓이만으로 계산하는 산은 잡목들로 가득 차고 쓸모 없는 악산이나 그렇게 합니다. 거기에 아름다운 열매가 자라나고 있고 훌륭한 열매가 자라나고 있으면 법 상으로도 따로 계약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산에서 자라나는 백향목과 나도초와 번홍화와 석류나무와 모든 아름다운 나무와 과목들이 그 토지의 가치를 높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너무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그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해 주셔서 주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삶 속에서 더 많은 열매들을 맺어 간다면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 기쁜 존재가 될 것입니다.
한 주인을 위한 열매
세 번째로 살펴볼 진리는 이것입니다. 이 열매가 누구를 위한 열매였습니까? 동산은 잠겨졌습니다. 그 동산에서는 때를 따라 내리는 비와 아름다운 햇살을 머금으면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저는 누구도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낙원과 같은 그러한 동산에 들어가 보고 싶은 욕망을 많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산에서 맺힌 아름다운 과실에 대해서 한 번 눈을 감고 그려보십시오. 백향목이 하늘을 찌를 듯 위엄 있게 자라고 귀한 열매들이 모두 자라서 동산 전체가 그야말로 자연의 보화 덩어리 같은 동산이 되었을 때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감탄할 만한 동산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동산은 잠겨있습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있는 이 동산은 수많은 사람들의 방문을 받으면서 감탄과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위치에 있고 싶었을 것입니다. 동산의 입장에서는 말입니다. 그러나 신랑의 기쁨은 그 아름다운 과목과 열매들이 이 동산에 가득 자라고 있는데도 그 동산 앞에 와서 오래 전에 자기가 잠그어 놓은 그대로의 상태를 보면서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도 그러하십니다. 누구든지 와서 앉아갈 수 있는 더럽고 순결하지 않은 마음의 자리에 주님을 앉으라고 한다면 주님이 정말 기뻐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동산입니까?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마음입니까? 이렇게 그 동산에서 맺힌 수많은 과목과 열매는 오직 한 사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동산의 주인입니다. 여인의 마음에서 자라고 있는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는 모두 한 사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이 성경에서 신부가 신랑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처럼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시집을 가기 위해 너울을 쓴 새색시가 신랑을 기쁘게 하지 못하면 그것은 실패한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면 세상에서 아무리 번창해도 그 교회는 실패한 것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삶의 목표는 오직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오늘 이 동산에서 자란 모든 아름다운 과목과 아름다운 실과는 오직 한 시선만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관계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과 관계를 갖고 있는 한 사람의 시선을 기다리면서 그렇게 아름답게 자라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도 사람을 기쁘시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실과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싶어하는 모든 이유는 우리 자신이나 혹은 우리 이웃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열매가 얼마나 주님께 기쁨이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우리는 시시때때로 열매를 사모하고 신앙의 과목과 아름다운 실과가 가득한 삶을 영위해 나가기를 하나님 앞에 바라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이번에는 내가 정말 주님을 위해 열매를 많이 맺어서 주님이 나의 동산의 문을 열고 들어오실 때 이처럼 열매맺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주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삶과 인격과 마음과 신앙의 세계가 되기 위해 노력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비밀 속에서 자라는 아름다움
우리는 이 모든 말씀을 통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아름다운 것은 비밀 속에서 자라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위대한 능력을 맛본 사람들은 기도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승리한 사람들은 복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남들이 알 수 없는 고통을 뛰어넘고 황폐한 삶을 낙원으로 바꾸게 된 놀라운 경험을 가지게 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신앙의 삶이 풍요로운 삶이 되도록 하나님 앞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살아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의 정원은 어떻습니까? 황폐하게 되어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놀라운 사랑과 지식은 우리의 삶에 뿌려진 씨앗입니다. 이것들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많이 맺도록,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만 독점되도록 힘쓰며 살아가야 합니다. 매순간 우리의 마음이 다른 것들에 의해 지배되고 전념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아뢰고 부르짖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맺는말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뜻을 세워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일이 성을 지키는 일보다 더 힘들기 때문에 우리는 매순간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만 바쳐진 삶이 되도록 우리의 마음을 세상을 향해 잠그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러한 우리의 신앙의 정원이 풍성한 정원으로 바뀌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황폐했던 우리 내면의 삶, 신앙,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교회의 모습이 이렇게 돋아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시대의 조국교회를 보시면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향해 마음을 여는 교회, 그래서 주님이 문을 열고 들어가실 때 아름다운 실과와 수목들로 향기가 진동하는 그러한 풍요로운 나무들의 정원이 있고 그 속에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신앙의 세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열려진 문을 통해 세속주의와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이 와서 한번씩 밟고 지나가고 교회에 있는 높은 보좌에 한번씩 모두 앉아버린 그런 짓밟힌 교회 속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이 세상의 사람들과 세상의 우상들이 소유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은 오직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 자신이 지배하시는 임재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늘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향기
아 4:16 / 백구영 목사
모든 생명체에는 각기 나름대로 냄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냄새는 생존을 위한 자기 방어적 냄새와 유인하기 위한 냄새입니다.
대부분, 자기 방어적 냄새는 독성이 있고 악취가 나며 공생을 목적으로 유인하는 냄새는 향기가 납니다. 이것을 자연의 향기라고 합니다.
또한 사람의 언행을 냄새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정과 부패가 있는 사람에게서는 악취가 난다하고 의혹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구린내가 난다하며 지식과 선행이 있는 사람에게서는 교양과 인격의 향기가 난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도덕적 향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향기도 아니고, 도덕적 향기도 아닌 또 하나의 생명의 향기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의 향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 향기라고 합니다.
성경에도 향기라는 용어가 많이 있으나 그 대표적인 것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는, "보셈"이란 말로서 자연적인 향기이며 또 하나는, "로카흐"란 말로서 거룩한 관유를 의미하는 도덕적 향기이고, 다른 하나는 "크토레트"란 말로서 제단에 타오르는 제물의 향기로서 영적 향기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인위적으로 가공된 향기는 많으나 자연의 향기는 생태계의 오염으로 악취가 되고, 도덕적 향기는 인성의 부패로 악취가 되며, 영적 향기는 영적 지식의 빈곤으로 악취를 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생성 중기 이전에는 지구상에 향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석송과 양치류 숲은 늘 침침하여 꽃한송이 피지 못하고 바람이 스쳐도 향기가 흘러나오는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향기로운 꽃이 출현하기 시작한때는 바로 인류의 발생직전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꽃향기 그윽한 동산에 살게 하신 것입니다. 후각보다 영혼의 영역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감각은 없습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인간이 드리는 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을 냄새 감각으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노아가 홍수후에 처음 제사를 드렸을 때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창8:21)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제사의 향기가 하나님이 흠향하신 제사의 상징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영원한 구원의 향기가 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주제는 "향기"입니다.
아가서 4:16의 말씀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왕을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는 신부가 신랑을 부르는 노래이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상징입니다.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와서 실과를 먹기를 원하노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람에 날리는 향기뿐 아니라 그 실제 열매로 준비 되어있는 준비된 교회의 모습, 준비된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고린도 후서 2:14-17의 말씀은 성도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의 개선행진을 연상하며, 로마의 신전에서 피어오르는 향은 개선장군과 개선군에게는 승리와 환희와 큰 상급의 냄새이지만 포로가 된 왕과 장군들과 군사들에게는 죽음의 냄새인 것처럼, 복음의 개선 소식을 받아드리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냄새가 되지만 거역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가운데서 신부의 향기, 성도들의 향기라는 주제를 발견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향기가 성도들을 통해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향기는 섬김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고린도 후서 2:14 하반절에 보면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오신 목적을 설명하실 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을 주려 함이라"(막10:45)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도 "섬김"이 복음과 함께 전해진 중요한 메시지가 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위로 하나님을 섬기고 아래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생활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요, 아래로 사람을 섬기는 것이 봉사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영어로, 예배와 봉사가 "Service"라는 한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에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예배란 제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제사에는 반드시 희생의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흠향하십니다. 이와같이 봉사에도 희생의 향기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섬김을 하나의 덕목으로만 생각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이란 선행이기 이전에 그리스도인의 향기, 즉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이 말은 섬김의 향기가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섬김"은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섬김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사항입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이고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섬김의 향기를 풍기는 성도가 되기시를 바랍니다.
둘째, 예수님의 향기는 겸손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여기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인 두번째 향기는 겸손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빌립보 2:5 이하에서 "너희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제1의 덕은 겸손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겸손은 비천함의 뜻보다 비이기심의 뜻입니다. 이타심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겸손이 없이는 섬김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성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한때 하나님의 선물이 높은 곳에 있어 그리스도인의 성품이 자랄수록 그것을 얻기가 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사실은 선물은 낮은 곳에 있어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더 낮게 엎드려 겸손해야 함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어느 성인이 일생을 걸처 깨우친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겸손"이 마음 먹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한 삶을 살려면 먼저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의 무서움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만은 인간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원죄성입니다.
권세가 있으면 교만이 권세를 따라 오고, 재물이 있으면 교만이 재물을 따라 오고, 지식이 있으면 교만이 지식을 따라 오고, 은혜를 받으면 교만이 은혜를 따라 옵니다.
그러므로, 다른 죄들은 하나님앞에서 도망치는 죄들이지만 교만은 하나님께 대드는 죄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죽기까지 복종케 하는 예수님의 향기입니다. 가장 고급향수일수록 가장 작은 병에 담긴다고 합니다. 허세와 자만과 오기로 가득한 세상에서 겸손한 향기를 풍기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섯째, 예수님의 향기는 변함이 없는 불변의 향기입니다.
아가서 4:16 상반절에 보면,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하였습니다.
향기는 바람이 불어야 더 멀리 퍼져갑니다. 북풍과 남풍은 서로 상극인 바람입니다. 북풍이 불면, 찬바람이 불어 눈보라가 몰아치고, 남풍이 불면 따뜻한 바람이 불어 꽃이 핍니다. 이 술람미 여인은, 아니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두렵지 않다고 합니다
북풍이 불어오면 북풍에 더 멀리 멀리 향기를 날리고 남풍이 불어오면 조용하고 은은하게 향기를 풍길 것이니 북풍도 남풍도 불어오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약해서 조석으로 마음이 바뀌고 하루에도 12번 생각이 바뀝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시니라"(히13:8)하였고, "알파와 오매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올 자는 전능한자"(계1:8)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는 성도는 북풍이 불어도 남풍이 불어도 변함없이 향기를 나타내야 합니다. 이익이나 편의에 따라 말과 행동을 바꾸거나 시시로 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한덩어리의 진흙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진흙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났습니다. 나그네는 물었습니다. "너는 바그다드의 진주냐?" 진흙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너는 인도의 사향이냐?" 진흙이 또 대답하였습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너는 무엇이냐?" 진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진흙일뿐입니다.""그런데 어디서 이런 향기가 난단 말이냐?" 이때 진흙이 대답하기를 "그 비결을 가르켜 드릴까요? 나는 오랫동안 백합화를 심을 밭의 흙이기 때문입니다."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조석으로 변하는 인심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복종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셔서 섬김과 겸손과 불변의 향기가 풍기는 성도로 변화시켜실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기억해야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연의 향기도, 도덕적인 향기도 영적 향기도 죽어야만 영원한 향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희생이 없이는 영원한 향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섬김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으로, 겸손은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영원함은 주님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영원한 향기가 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대강절기에, 북풍이 불고 남풍이 불지라도 예수님의 향기를 풍기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