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은 더 바쁘군.
하루의 일을 반나절에 해치워야 하니까.
오후에 종로 여울에 가야 하는데
지인이 동양화 개인전을 인사동에서 하기에
화랑에 들러 축하를 해주고 차 한 잔 나누려면 서둘러야 해.
그림, 동양화, 한국화, 산수화, 수묵화.
번잡함을 덜고 질박함을 숭상하되
형상을 지나 내면을 지향하지.
여백(餘白)의 의미, 여백의 깊이. 여백의 형상.
사전에는 “그림이나 글씨 따위의 내용이 없이 비어 있는 부분”
- 이라고 적혀 있는데 한국화의 여백은 이와는 완전 반대 개념이야.
“내용 없이 비어 있는 부분”이 아니라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부분”이지.
언어 밖의 언어, 허상이 아닌 실상.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에 사랑이라 부르는 것.
여백은 여백이 아니기에 여백이라 부르는 것.
그러니 사랑한다고 말하지 마, 사랑일진대 어떻게 언어로 그려내겠니.
침묵이거나, 눈빛이거나, 파르르 떠는 꽃잎이거나, 가파르게 뛰는 새의 심장을,
인간의 언어가 어찌 형용할 수 있겠니? 그냥 두렴 – 여백으로, 사랑이니까.
그 여백 속에 무한의 우주가 있고 팔만사천의 언어가 담겨 있는 거야.
무한의 뜻을 담은 침묵의 언어.
악기에서의 여백은 무엇일까.
음과 음 사이의 숨과 쉼으로
여백이라는 무음이 생명을 주지.
숨을 쉼으로써, 숨을 쉬는 생명력.
맥박과 맥박 사이, 고요의 긴장이 오고
바람과 바람 사이, 흔들릴 기다림으로 설레고
햇살과 햇살 사이, 그늘에서 그리움이 일렁이지.
침묵을 두려워 말게, 여백의 무한을 즐기게.
그대의 숨이 짧은 건, 쉼의 여백이 부족한 것.
그대의 가락이 흔들리는 건, 숨의 여백이 없는 것.
일주일 남았군, 홍주의 꽃으로 필 날이.
숨표로 숨 조절하며 천천히 음미하며 타시게.
쉼표로 쉬면 눈으로 그려지는 악보, 무음으로 흐르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