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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써진다고 울고불고 그 난리를 치고 서서히 회복 중입니다. 안 내던졌어요!)
(새로 유입되신 분들을 위해 한 번 더 설명하자면, '여성 선왕의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이 한자 문화권에 없기 때문에, 크루세이더 킹즈의 경우 부부는 동위서열로 대접받으므로 왕대비의 포지션에 해당하는 남성을 상왕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Queen Mother에 해당하는 경우는 왕대비, 동생이나 조카 등 자신의 아이가 아닌 계승이 이루어진 선왕의 왕비는 선왕비로 호칭합니다)
조금 특별한 신년이었다. 한밤에 눈이 내리면 오전 내로 다 녹아 가도가 질척거리곤 하던 날이 이어질 무렵, 보르도에 5천에 가까운 군세가 평화롭게 도착했다. 여느 군세가 그렇듯 흰 수염이 성성한 노병부터 뺨이 발그레한 소년까지 있었으나 다양한 것은 연령만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오크어를 몰랐다. 장미 용병대. 그것이 장미를 깃발로 건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다 죽일 필요는 없다. 전투 한 번 없이 이미 전력의 2할을 잃었다. 원래 농부들이고 탄압으로 말미암은 봉기가 아니니 예기가 꺾이면 바로 와해되겠지. 투항하거나 전의를 잃은 자는 절대 해치지 말게.”
처남은 아키텐 사람끼리 벌어진 일에 외국인 용병을 쓰는 걸 꺼려 적의 수가 급격히 불어났어도 국고를 열지 않았다. 나는 처남에게 내심 미안해하며 시종을 시켜 금화를 담은 상자를 건넸다. 되도록 죽이지 마라. 까다로운 의뢰의 값은 300두캇이었다.
“고귀하신 폐하. 폐하께서는 반년 내로 흡족하실 만한 결과를 들으실 겁니다. 실망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초로에 접어든 대장 귀도네는 오라드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고개 숙인 그의 듬성듬성한 머리를 무심한 눈으로 보던 오라드는 입만 살짝 움직인 미소를 지으며 행운을 빈다는 짧은 말만 남겼다. 이윽고 귀도네가 알현실에서 물러나자 오라드는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때 없이 냉정한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반듯하게 빗어넘긴 길고 새카만 머리카락, 가지런히 잘랐던 앞머리를 없애고 훤히 드러낸 하얀 이마가 올해 12세가 될 어린 여왕을 나이보다 더 차분히 보이게 했다.
“금화가 저보다 나아요.”
내가 또 아이 속을 상하게 했나. 어느새 나는 딸의 눈치를 살피며 달랠 말을 찾았다. 그러나 나보다 오라드가 입을 여는 게 더 빨랐다.
“지금은 절 위해서 싸우지만 다른 자가 돈을 더 얹으면 다음엔 제게 칼을 겨누겠죠. 아키텐의 왕을 위해 싸운다는 명분보다 돈이 더 확실하니까요. 탓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저 사람이었어도 그럴 거예요.”
나는 가끔 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아이의 나이를 헤아려보곤 했다. 물론 나와 생일마저 하루 차이밖에 나지 않는 딸의 나이를 부모로서 잊은 적은 없다. 내 나이는 종종 잊더라도. 무심결에 겹쳐 잡은 딸의 하얀 손은 아직 작았다.
“널 위해 싸우는 게 얼마나 이득이 되는지 알려주면 돼.”
“결국 재물이잖아요. 아버지를 빼면요.”
내가 한 말은 한 마디였건만 이제 오라드는 열 마디를 넘게 읽어냈다. 더 높은 값, 토지, 영예. 왕으로서 베풀 수 있는 것은 다른 귀족 따위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왕의 형편이 언제나 좋지는 않으며 칭왕만 하지 않았을 뿐 웬만한 왕국 수준의 동원력을 보일 수 있는 귀족도 있다. 그나마 아이가 아비를 조건 없는 자기 편이라 알아주는 것이 다행일까. 순간 오라드의 눈빛이 칼에 서린 은빛처럼 서늘해졌다.
“오베르뉴를 구한 다음에 저자를 그냥 돌려보내도 괜찮을까요?”
작은 새소리처럼 맑은 목소리가 섬뜩하게 살의를 담았다. 나는 순간 흠칫하며 내 딸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오라드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우물쭈물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아니에요, 잘못했어요.”
착한 아이다. 벌레 한 마리 허투루 죽인 적 없고 길 가는 짐승에게 발길질 한 번 하지 않았다. 이유 없이 잔인한 소리를 할 아이가 아니다. 나는 바깥에 들리지 않도록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딸에게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오라드는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위험할 거 같았어요. 저 사람은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알아요. 여기까지 들어왔으니 나중에 적이 된다면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단단히 심기를 거슬렸나 보군. 나는 딱하게도 웃는 낯으로 왔다가 미운털이 박혀버린 귀도네를 동정했다. 아무리 어린 나이라지만 고용주가 이런 계산을 했단 걸 알면 그는 아키텐 쪽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겠지.
“지금 아키텐에 병력을 가진 영주는 아무도 없어요. 만약 다시 영주들이 힘을 합쳐 제게 맞선다면 가장 먼저 오늘 온 병대를 부를 거예요. 삼촌 때도 반역자가 용병을 불렀다면서요.”
“오라드, 지금은 그때와 달라.”
플랑드르 공의 가계는 멸족이나 다름없는 참화를 입었다. 연달아 주인이 달라진 툴루즈를 제외한 모든 공작과 새 뤼지냥 백작, 가스코뉴 지방의 닥스 백작, 마르생 백작, 그리고 플랑드르의 아르투아 백작과 귀네즈 백작을 제외한 모든 영주들은 다 어린 아이들이다. 물론 10년만 지나면 그들 중 태반이 성년을 맞을 테고 5년이 더 흐른 뒤에는 모두가 청년이 되겠지. 그렇지만 그때 장미 용병대의 대장은 허리가 굽고 머리에 흰 눈이 내려앉은 노인이 될 것이다. 살아있다면.
“네게 맞설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리고 네가 지금 귀도네를 해치면 차후 아무도 널 돕지 않을 거야. 우리가 불러서 왔고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온 사람이야.”
내 말에 오라드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서서히 풀이 죽었다.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죽일 수 없다. 잘못할 것을 미리 짐작해서 죽여서는 안 된다. 4년 전 오라드는 내게 고양이들을 살려달라 부탁하며 그렇게 말했다. 겨우 4년 전. 지금 오라드는 장차 위협이 될 거란 이유로 무고한 사람을 살해할 생각을 품었다. 그것도 조금 전 웃으면서 인사를 나눴던 사람을. 해가 저물 때까지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남은 하루를 보냈다.
“당신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닐까요?”
프레브라나는 내 손목을 주무르며 대수롭잖은 듯 선선히 말했다. 힘을 잃은 손은 주무르는 사람의 안마에 맞춰 까딱까딱 움직였다. 모두 오라드를 사랑한다고 하나 이런 문제로 의논할 수 있는 사람은 프레브라나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처지가 다르니 공연히 주군의 역량을 저울질할 빌미는 줄 수 없다.
“아직 아이예요. 게다가 가족을 잃고 오랜 기간 갇혀있었어요. 오라드가 아니라 누구라도 예민할 수 있잖아요.”
“떼를 쓴 거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단편적이었지만 오라드는 논리가 있어서 얼핏 들으면 맞는 말로 들릴 정도였다. 명망이 높은 자들은 걸핏하면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무시하기 일쑤인데, 오라드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고 장차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미래까지 계산해냈다. 만약 내가 그 아이의 아비가 아니었다면 주군의 영민함에 감탄하며 장래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정히 걱정되면 아이를 그 사람과 한번 더 만나게 하는 건 어떨까요? 당신은 그 사람이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잖아요? 사람은 자기가 아는 사람이 불행에 처하는 건 바라지 않으니까요. 저도 예전에 알에서 태어난 것부터 보던 병아리가 자란 뒤 수프가 되었을 때 종일 운 적이 있어요.”
“당신이 예뻐하는 줄 알면서도 잡은 거요?”
“……오빠에게 울고불고 소리쳤더니 언니가 혼을 냈어요.”
아버지를 여읜 뒤겠군. 문득 나는 언젠가 프레브라나가 여기에서는 내 것이 사라지지 않는다면서 오라드에게 고마워했던 걸 떠올렸다. 파트리샤와 약혼하기 전 내 것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던 나와 달리 오라드는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다만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면 저도 좋다는 지극히 착한 말만 했을 뿐.
“처음 봤으니까 경계하는 걸 거예요. 누구나 다 그런걸요. 오히려 상대가 웃는다고 아무 의심 없이 훌쩍 받아들이는 게 저 아이에게는 더 위험할 거예요. 당신을 많이 닮았다고 하셨잖아요, 당신이 저 나이 때는 어땠나요?”
“땔감을 주우며 덫에 멧돼지가 걸리기만을 기다렸지.”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시잖아요.”
프레브라나는 내 손목을 주무르던 손을 움찔움찔 떨며 킥킥 웃었다. 나는 뒤이은 말은 하지 않았다. 계절은 다르지만 내가 오라드 나이 때 나는 파트리샤의 약혼자가 되었다. 전처 이야기라서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의 좁은 생각에 빠져 남이 호의로 다가왔는데 심술을 부렸던 과거를 말해주기가 낯뜨거웠다.
“오라드는 야히드도 바로 받아들였어요. 마음 넓은 아이예요. 당신이 괜한 걱정을 했던 걸 거예요.”
우리는 아키텐을 개방하며 급감한 의료 인력의 빈자리를 메꾼다는 명목으로 각지에서 의사와 약제사를 불러들였다. 가장 큰 목표는 오라드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사를 찾는 것이었다. 은밀히. 계절이 소득 없이 두 번이나 바뀔 무렵 새 툴루즈 공은 지중해와 맞닿은 멜게일의 항구에서 야햐 야히드라는 무슬림 의학자를 찾아 보르도로 올려보냈다. 의학서를 집필 중이었다던 그는 불과 35세였다. 오라드는 처음 온 프레브라나에게 살가웠던 것만큼이나 야히드에게도 친절했다. 대신 어린 국왕이 이교도 이방인을 아저씨라 부르며 따르는 것을 보는 보르도 사람들의 우려는 죄다 그이를 머물게 한 나한테 쏠렸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오라드가 뺨을 발그레 물들이며 햇살 아래를 활보하는 모습이 최고의 해명이었다.
날이 밝은 후 나는 오라드와 프레브라나, 야히드와 그 외 몇 사람들을 데리고 장미 용병대가 숙식하는 연병장을 찾았다. 장인이 바르셀로나 원정을 대비하려 첫 삽을 뜨고 파트리샤가 당시 대장군이었던 페리고르 백작 엔초와 함께 감독했었다. 공사는 처남이 즉위하며 내 손으로 넘어왔다. 비록 지금은 폐허가 되지 않도록 관리만 하는 신세로 영락했으나 원래 잡무를 보는 비전투원까지 합쳐 최대 7천 명 가까이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5년 만에 다시 사람을 가득 맞이한 연병장은 오랜만에 활기가 넘쳤다. 식사를 막 나누던 참이었는지 고깃국을 끓인 누린내가 짙게 풍겼고 연골까지 싹싹 갉아먹은 뼈다귀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나팔수를 대동하지 않은 조용한 방문이었기에 용병대가 우리를 인지하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들이 가장 먼저 인지한 대상은 이 자리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말쑥한 어린 소녀였다.
국왕께서 오셨다!
눈치 빠른 몇몇이 이탈리아어로 소리치자 어수선하던 연병장은 아예 소란스러워졌다. 무구를 정비하다가 화급히 달려 나온 귀도네는 어쩐지 익숙한 듯 고개를 조아리며 조속히 출발하겠다는 묻지도 않은 대답을 올렸다. 재촉하러 온 것이라 짐작했을까. 나는 그를 제지하고 장병 중 부상자를 추리게 한 뒤 야히드를 비롯해 함께 온 의사들에게 진료를 부탁했다. 프레브라나는 부상의 경중과 종류에 따라 환자들을 나눠 각 방에 대기시켰다. 오라드는 끔찍한 흉터나 아물지 못한 상흔을 보며 간혹 표정을 굳혔다. 환자 중에는 부러진 뼛조각이 잘못 박혀 살이 곪고 피고름이 흐르는 자도 있었다.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 일부가 텅 빈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어른들만 있는 줄 알았어요. 아니었네요. 저는 여기에 오지 말 걸 그랬어요. 제가 저 입장이었으면 절 보고 많이 속상할 거예요.”
귀도네와 몇 마디 말이 더 오간 후였다. 내게 말을 건네는 오라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반절은 작았고 무척 조심스러웠다. 눈썰미가 좋은 아이라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어린 소년이라도 발견한 모양이었다. 내가 무어라 아이를 달래기 전에 귀도네가 먼저 끼어들었다.
“폐하, 아닙니다. 모두 폐하께서 친히 왕림하심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 말한 것이 나였다면, 그리고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면 바로 받아쳤을 말이었다. 그럴 터였다. 그러나 오라드는 마치 어른처럼 먼저 귀도네의 손을 잡고 그에게 답했다.
“어제는 제대로 말을 못했어. 도와주러 와서 정말 고맙고 기뻐. 아키텐은 장미 용병대가 우리를 도와준 사실을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내가 덧붙일 것도 없는 훌륭한 대답을 하며 오라드는 예쁜 웃음을 지었다. 오라드는 그 외에도 간밤에 잠자리가 불편하진 않았는지, 하루에 식량이 얼마나 소모되며 모두가 충분히 고기를 먹을 수 있었는지 등을 물으며 대답에 귀를 기울였다. 귀도네는 오라드에게는 어마어마한, 그렇지만 내게는 재무관 시절의 그리운 숫자를 몇 번이나 읊었다. 다시 내가 이런 숫자를 관리하려면 10년으로도 모자랄지 모른다. 인명은 작물이 아니다. 잠시 아쉬운 감상에 젖는 사이 오라드는 귀도네에게 다치지 않기를, 오늘 만난 사람 모두 무사히 돌아오기를 재차 당부했다.
우리는 귀도네 없이 조금 더 걸었다. 내가 오라드를 데리고 연병장에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혹여 책이 잡힐까 내 실수로 사람이 상하지는 않을까 싶어 신발 밑창이 닳도록 이곳을 샅샅이 훑고 다니던 기억이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우리 부녀는 무기고에 둘이서만 들어갔다. 그때였다.
“아버지, 이렇게 하면 되는 거죠?”
허락을 구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라드의 목소리는 내게만 들릴 만큼 작았으나 무척 싸늘했다. 아이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누구 생각이에요? 절 이리 데려가라고 한 사람이요. 안 해치겠다고 했잖아요. 이젠 저도 안 미더우세요?”
나보다 한참 작은 내 딸은 마치 높은 곳에서 날 내려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엄정한 눈으로 쏘아붙였다.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오라드는 잠시 기다리더니 이내 토라진 양 고개를 홱 돌렸다.
“…오기 싫었니?”
겨우 입 밖으로 나간 궁색한 말에 아이 눈이 더 날카로워졌다.
“싫었으면 오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오라드는 더 추궁하지 않고 먼저 나갔다. 나도 더 대답하지 않고 뒤따라서 나갔다. 연병장 곳곳을 돌며 호기심 많은 어린 국왕이 질문을 던지면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나와 핀 기스킹 등이 대답을 하는 흐뭇한 구도만이 반복되었다. 신실한 이는 신께서 가호하시는 국왕께 축복을 청하기도 했다. 오라드는 먼지가 내려앉은 그들의 머리에 기꺼이 손을 얹고 무사와 무운을 기원했다. 나는 오라드를 보조하는 것 외에는 거의 손을 쓰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막대기 하나조차 제대로 휘두르기 어려운 상태라는 걸 알릴 수는 없었으므로.
장미 용병대는 하늘이 맑은 날 보르도를 떠나 오베르뉴로 향했다. 5월이 되자 보르도에는 귀도네가 처음에 장담했던 대로 승전보가 올라왔다. 그 사이 150명이 더 병으로 죽거나 탈영해 2200명 남짓으로 감소한 반란군은 5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내며 무너졌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을 때 나는 3년 전 어려운 길을 자원해 가 준 57명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안아보았다. 그중에는 오베르뉴 백작 오누이에게 정이 들었거나 짝을 찾아 보르도에서의 퇴역을 요청하는 사람도 있었다. 다시 잘 부탁한다는, 혹은 잘 지내길 바란다는 짧은 인사가 송별회를 겸한 환영회에서 간간이 오갔다. 인원이 많았고 또 날씨가 좋았기에 푸른 하늘 아래에서 열린 소소한 연회는 서쪽 하늘에서 반달이 하얗게 빛나도 그치지 않았다. 오라드는 고단함을 꾹 참으며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 호위를 맡은 위병 둘만 데리고 살며시 빠져나왔다. 내 발은 오늘과 가장 어울리지 않을 이슥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네들만 먹고 있었나 보군.”
얼근히 취해 발간 얼굴들이 내 목소리에 화들짝 소스라쳤다. 왕성에서 일하는 이는 아무리 위치가 낮아도 내 얼굴과 목소리를 기억했으니. 지하 감옥의 입구를 지키던 위병들은 뜯던 고기를 허겁지겁 내려놓고 번들거리는 손으로 예를 갖췄다. 상왕 폐하. 명백히 방해꾼이 되어버린 난 그들이 먹던 것에서 1인분을 따로 더 가져오게 시킨 후 지하로 내려갔다. 반역자 외드 드 부르고뉴가 공위를 유지하는 자비를 받으며 생명을 다한 후로 텅 비었던 지하 감옥은 오랜만에 손님을 맞았다. 내가 그 손님에게 말을 걸려 창살에 손을 짚으려는 찰나였다.
“폐하, 안 되십니다! 이 자는 저주받은 이단자입니다!”
따르던 이가 소리를 친 덕분에 내가 그를 깨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불빛을 보았다. 전투 중에 입은 부상인지 혹은 구타의 흔적인지 얼굴을 얼룩덜룩하게 덮은 울혈과 상처가 주홍빛 불빛에 비쳐 거무튀튀했다. 찍찍. 가까이서 쥐들이 바삐 달아나는 발소리가 돌벽을 타고 타닥타닥 울렸다. 어둠이 짙은 불빛 아래 피딱지가 내려앉은 메마른 입술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달싹였다.
“……이 성의 성주 되시나?”
어디로 압송했는지 알려주지도 않았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내 딸이지. 난 그 대리에 지나지 않아.”
그는 무언가 골몰하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그렇다면 당신이 왕의 이방인 아비겠군.”
저 자식이! 내 뒤에 선 이가 소리를 높이며 그를 끌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발을 굴렀다. 거의 동시에 내가 손을 들고 그 옆에 선 동료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잽싸게 그이를 잡아챘다. 그나저나 내가 아키텐 태생이 아니라는 건 잊을 만할 때쯤 꼭 누군가가 이렇게 상기시켜주곤 하는군. 그는 눈두덩이 부은 눈으로 창살 밖의 소요를 흘끗 보더니 깊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날 처형하기엔 적합한 시간이 아닌 걸로 아는데.”
그 말에 감옥 속의 공기가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내 성격을 익히 아는 이들이니 내가 밤중에 몰래 사람을 끌어내 없애려 들 것이라는 예상은 꿈에서조차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일개 잡범 따위가 아닌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오베르뉴와 국왕을 위협한 반란수괴가 아니라면. 더군다나 아무리 이단자에 반역자라도 어린 오라드에게 사람을 처형시키게 하는 무게를 떠올린다면야. 모두 내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들은 내 지시를 듣기 전에 발소리 하나를 더 듣게 되었다. 나는 심부름을 보낸 이가 내 곁에 도착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병사들이 먹던 걸 나눠서 가져왔다. 독은 없으니 안심하도록.”
나는 불을 더 가까이 대게 해 그의 시야를 밝히고 내 말에 대해 증명을 하려 그릇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음식을 가져온 이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이 앞서 음식을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나는 그릇이 멀쩡히 수감자의 묶인 손 앞에 놓이는 걸 확인하고 발길을 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히 죄인의 처우를 살피러 온 것은 아니었으나 무엇을 캐묻고 추궁하기가 영 마뜩잖았다. 그때였다.
“기다려, 이 더러운 학살자! 어째서 이방인 칼잡이들을 보내 오베르뉴를 도륙했나!”
그가 몸을 일으켰는지 묵직한 쇠사슬이 흙바닥을 긁으며 끌리는 껄끄러운 금속음이 났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대꾸했다.
“넌 나보다 더 많이 죽이지 않았나.”
“뭐야?!”
“571명. 내가 보고받은 이번 진압의 전사자 수다. 부상자는 2배 가까이. 네 세력은 처음엔 3천이 넘었으나 3년이 흐르는 동안 2천200명대로 줄었다. 틀림이 있나?”
소리가 멎었다. 내 목소리만 좁은 통로 사이에서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천 명 가까운 장정들이 칼 한 번 부딪히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그들을 이끌었던 네 탓이지. 그리고 또 네가 초행길을 나선 이방인들보다도 무능해 대패하고 말았다. 난 너희들이 다시 아키텐의 신민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살 기회를 3년이나 줬다. 온몸이 불탄 장작처럼 시꺼멓게 썩어들어가는 이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나? 모두 널 믿고 모였을 터. 그런 사람들이 네 독단과 오기 때문에 절반 가까이 죽고 말았다.”
나는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그를 비웃었다.
“하지만 난 오히려 널 칭찬하겠다. 덕분에 내 수고가 많이 줄었으니. 내가 5천 군사를 데려와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네가 해냈다.”
쾅! 쇠문에 주먹이 꽂히는 끔찍한 울림이 지하 감옥을 진동시켰다. 그는 야수처럼 울부짖으며 외쳤다.
“저 혼자 살겠다고 형제와 마누라를 사지로 내몬 개자식아! 분명 지금 여왕도 네 새끼는 아니겠지! 모든 아이가 죽어버렸다! 정말 네 새끼라면 왜 5년이나 사람 눈을 피해 숨겨뒀나!!”
뭐?
순간 세상이 덜덜덜 흔들리며 뿌옇게 흐려졌다. 어지러이 뒤섞여 사라져가는 감각에서 싸늘하게 식어버린 손의 촉감만이 오싹했다. 덜컹덜컹, 덜컹덜컹! 이미 소음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린 충돌음과 악다구니가 이 사람 저 사람 말이 토막토막 합치고 또 나뉘어 귀를 뚫어버릴 듯 찔러댔다. 대신 죽였다. 이미 죽었다. 참칭자. 이방인. 닥쳐, 이 미친 새끼야! 그때 어둠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은빛이 눈높이까지 치켜 올라가 반짝였다. 난 다급히 소리쳤다.
“멈춰라!!”
날붙이를 치켜든 이는 주춤거리다가 손을 내렸다. 그사이 얼마나 격앙했는지 위병으로 오래 봉사한 이마저 성난 멧돼지처럼 가쁜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쾅, 쾅! 그러나 그만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죽여, 이 잔인무도한 놈아! 마누라도 자식새끼도 다 죽인 독사 같은 살인마야!”
그를 제외한 모두가 이를 갈며 한 치의 동요도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죽여라. 내가 그 한마디만 하면 기꺼이 죄인의 혀를 자르고 심장을 꿰뚫을 기세로. 주위가 열을 내니 오히려 난 바로 침착해질 수 있었다. 아니, 그들이 날 믿어주는 덕분이었다. 난 굳어버린 혀를 움직여 이 자리의 누구도 바라지 않았을 말을 죄인에게 건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알았다. 생각은 해보도록 하지. 그렇지만 기대 말고 기다리는 게 좋을 거다.”
그는 치켜든 주먹을 내리고 성난 파도 같던 분기를 가라앉혔다. 나는 그를 뒤로하고 날 따른 이들과 함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진 지상으로 돌아갔다. 하얀 달은 내가 지하로 들어가기 전보다 손가락 한 마디만큼 서편을 향하고 있었다. 후우. 무기력한 입술이 속절없는 한숨을 뱉었다.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건 포기해야 하나. 복귀한 병사들은 오베르뉴 백작을 호위하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 성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장미 용병대는 진열을 가다듬자마자 바로 임무를 수행했으니 지난 3년간 오베르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기 어렵다. 그리고 내게 그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어서 죽기만을 바란다.
다음날 알현실의 왕좌에는 오라드가 없었다. 제 또래 하나 없는 어른들 사이에서 늦게까지 버텨낸 탓에 아이는 제 새엄마의 손을 꼭 잡고 곯아떨어졌다. 홀로 출석한 나는 반란수괴의 처분을 결정했다.
“오베르뉴의 광인 프랑수아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아키텐 밖으로 추방한다. 아울러, 오베르뉴의 패잔병들은 궁핍한 처지에 판단력을 잃고 광인에게 선동되었을 뿐이니 모두 방면한다.”
복명하겠다는 대답은 예상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대놓고 거스를 수도 없는 터이니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몇 사람이 흙물을 잘못 마신 양 떨떠름한 눈을 할 뿐이었다. 주교 등 교회에 소속된 이는 더욱 그러해 흡사 소리 못 내는 물고기처럼 입을 다물지 못하고 뻐끔거렸다. 나는 그들이 반대하기 전에 다음 말을 이었다.
“그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어제 내가 직접 확인했고 오래전부터 광증을 보였다는 증언도 있었다. 아키텐의 법은 미친 사람을 처형하지 않는다.”
케케묵은 구법이다. 실제로 이런 자비를 받아 목숨을 건진 사람이 있었던가 사서를 한참 뒤적여야 할 만큼. 수긍도 불응도 나오지 않은 채 침묵이 길어졌다. 가을을 앞두고 수로를 재정비하는 것이나 성벽의 보수 등 다음 안건을 진행하는 건 내 몫이 되었다.
내 면전에서 반대할 용기 있는 사람은 그래도 아직 하나 남아있었다.
“제가 자는 동안 아버지가 반역자를 풀어주셨다고 들었어요. 왜 그러셨어요?”
공복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점심에 오라드를 깨우게 했다. 그러나 식사를 마친 아이는 산책도 독서도 동물과 노는 것도 제쳐두고 가장 먼저 내게 와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오랜 경험으로 오라드가 단순히 내게 질문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견을 묻지 않고 내 독단으로 결정한 사실이 불만임을 추측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었니?”
오라드는 주저 없이 바로 대답했다.
“법에 따라 처형하라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널 깨우지 않은 거야.”
아버지. 날 부르는 딸의 목소리가 새되어졌다. 여전히 날 많이 닮았으나 점점 파트리샤의 모습도 드러나는 얼굴이 성을 내자 제법 그 나이에 맞게도 보였다. 나는 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쉽게 물러설 아이가 아니었다.
“작년에는 대주교가 고발한 사람도 풀어주셨어요. 올해에는 3년이나 우리를 거스른 이단자들을 수괴까지 다 살려주셨고요. 작년 것은 혐의일 뿐이었으니 아버지 결정이 옳아요. 그렇지만 이번에는 왜요? 그자보다 더 고귀한 자들도 5년 전에 죽음을 피하지 못했잖아요.”
작년 가을 대주교가 마을 주민들이 요술쟁이라 고발했다며 한 사내를 붙잡아 온 적이 있었다. 겁에 질린 이를 두고 화형을 시키라는 둥 배교자의 낙인을 찍으라는 둥 아이의 귀를 막고 싶은 끔찍한 소리가 오고 갔다. 나는 다른 이들의 우려를 일축하고 그를 축복한 뒤에 풀어주었다. 꽤 소란스러웠으니 그때를 인상 깊게 기억한 모양이었다. 나는 대답을 하기 전에 손짓으로 주위를 물렸다. 그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윽고 우리 부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비켰다. 이어 나는 되도록 소리를 낮추고 입을 열었다.
“네 삼촌이었다면 나는 나서지도 않았다. 네 삼촌이 프랑수아를 처형해 경계로 삼았다면 사람들은 공정한 왕이라고 평가했겠지. 설령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가담한 이단자 전원의 목숨을 거둔다 해도 사람들은 왕의 신실함을 높이 샀을 거다. 그렇지만 넌 안 돼. 네가 프랑수아의 죄지은 팔 하나만 취해도 사람들은 어린 여자아이가 잔인하다며 널 싫어할 거야.”
잠자코 아비의 말을 듣던 아이 얼굴에 점점 노기가 차올랐다. 화가 나면 표정이라 할 것이 싹 굳어버리고 한설북풍이 쌩쌩 부는 건 엄마를 그대로 닮았다.
“혹시 절 일부러 피곤하게 만드신 거예요? 오늘 못 일어나도록?”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드는 여전히 찬바람을 거두지 않고 마저 추궁하듯 물었다.
“지금 아키텐을 다스리는 사람은 아버지예요. 다들 아버지 판결이란 걸 알 텐데 사람들이 왜 저를 미워해요?”
“사람들은 네 치세라는 것만 기억하니까.”
오라드는 석연찮은 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나는 아이가 마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오라드는 더 따지지 않고 “알았어요.”라 짧은 말을 남기며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때 불현듯 어제 지하 감옥에서 들은 말이 송곳으로 찌르듯이 머리에 박혔다. 나는 무심결에 관자놀이께를 손으로 짚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파트리샤를 일부러 죽였다니? 진짜 오라드는 이미 죽고 내가 왕의 아비라는 자리를 놓지 않으려 닮은 가짜를 데려왔다니?
파트리샤가 나와 오라드를 탑에 격리했던 일은 왕성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바깥사람들이 보기엔 잠깐이나마 내가 아니라 파트리샤가 군을 이끈 것이 이상해 보였을 수 있다. 그러나 오라드는 선왕의 몸에서 태어난 틀림없는 푸아티에 왕손이다. 처음 생을 받은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걸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켜본 이가 아비인 나 말고도 여럿이 있다. 누가 또 내 딸을 흔들려 드는가? 농부에 불과한 그놈이 되는대로 떠벌린 소리는 아닐 터. 퍼트린 자가 있다. 그러나 이익을 볼 만한 자가 없는데 대체 누가?
“오라드, 잠깐만.”
나는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오라드를 불러세웠다. 오라드는 여전히 쌀쌀맞은 표정으로 날 돌아보았다. 우리 딸을 지켜줘요. 아이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전하려던 말이 다시 그녀의 목소리로 생생히 귓가에 맴돌았다. 그제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후다닥 머리를 짚은 손을 내리고 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아빠가 한번 안아봐도 될까?”
“싫어요.”
오라드는 다시 홱 고개를 돌리고 휘적휘적 씩씩하게 걸어갔다. 나는 그 아이를 붙잡지 못했다.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 그걸 알려주기에 국왕은 아직 어렸고 또 자존심이 강했다. 갑자기 잊고 있던 손목 통증이 재발해 욱신거렸다. 아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번 일로 세상 사람들이 본 것은 인구 절반이 죽어 국토가 황폐해졌음에도 변함없이 거금을 쓸 수 있는 아키텐 국왕의 재력일까. 아니면 병든 농부들을 상대로 외국인 용병까지 불러 진압한 잔인함일까. 암초가 가득한 물 위를 밤중에 조각배 하나로 지나야 하는 우리 부녀는 모든 것이 불안정했다. 태양이 뜨기까지는 아직 한참이나 더 노를 저어야 한다.
이 문을 나갈 때까지 조금만 쉬었으면 좋겠다.
여름이 흘러 가을을 앞뒀으나 태양이 좀처럼 구름을 걷지 못했다. 흐린 날과 비, 그리고 폭풍이 이어지자 과수는 열매를 다 키우기도 전에 가지가 부러지고 밭에서 자라던 곡식들은 흙탕물에 드러누워 썩어버렸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왕조를 개창한 이래 가장 큰 흉년이라 일컬었다. 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속죄를 청하는 기도회를 열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나는 관자놀이를 커다란 뼈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답했다.
“비가 조금 더 왔을 뿐 이미 예상했던 바이다. 농지가 황폐해져도 잡풀을 뽑고 밭을 고르게 갈 농민이 없으니 걷을 것이 없을 수밖에. 신께서 가호하시는 아키텐의 국왕을 믿고 헛된 망상에 동요하지 말라.”
나는 조세를 일부 감하기로 했다. 개방 이후 조금씩 불어나는 성내 인원, 그리고 역병 이전과 비교해 딱히 줄어들지도 않은 한 해 예산을 고려하면 좋은 판단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율이 무거우면 반절밖에 남지 않은 영민들마저 살던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내 딸에게 흙 묻은 날붙이를 들이댈 것이다. 창고 조금 채워보겠다고 그런 위험을 불러들일 수는 없다. 아마 그 정도로 인적이 끊기고 수풀이 자라났으면 자연히 산짐승들도 불어났을 터. 감소한 식량 보충과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사냥 부대 재편을 구상하면서 나는 여러 봉신에게 조세 감면 권고를 보내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오라드는 무언가 골몰하는 게 있는 모양인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신께서 절 지켜주신다고 생각하세요?”
옆에 바짝 붙어 내 방으로 졸졸 따라오던 오라드는 주위를 확인하고 나직이 물었다. 나는 웃으며 아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당연하지.”
“제가 왕이라서요?”
나는 딸의 입에서 다음에 나올 말을 어렵잖게 예상했다. 오라드가 태어나 겪은 왕은 제 삼촌과 엄마였다. 풍문으로 들은 것까지 합치면 이렇다 할 치적도 남기지 못하고 27세로 허무하게 병사한 프랑스 선왕과 혈통 단절 및 영토 침략으로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나바라의 히메나 왕가까지. 장인의 고모를 황후로 맞았던 신성로마제국의 잘리어 가문은 역병으로 가주를 차례로 잃어 황위를 내놓은 후 자기 터전조차 지키기 어려운 지경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세상도 오라드가 아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그렇게 믿지 않으면 누구도 너를 신성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내 얼굴은 더 웃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를 봐주고 사랑받길 바라는 건 아지랑이보다 더 허무한 허상이다. 적어도 통치자에게는. 그들이 그들의 왕을 사랑한다면 그건 왕이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동질감으로 느낀 애정은 아닐 것이다. 자신과 같은 이가 자신의 위에 올라서길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제게 도움이 되나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널 제외한 다른 아키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왕좌에서 내려오기 전까지, 아마도 평생 비범한 사람을 연기하며 살아야 한다. 심성이 곱고 솔직한 아이이니 내가 지나온 길보다 더한 가시밭길이 될 것이다. 물론 국왕에게 신성성이 더해지는 건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가 평범한 농부였어도 사랑했을 거예요.”
오라드는 샐쭉하니 입술을 삐죽였다. 나는 새어나가려는 말을 갈무리하고 어떤 화제를 꺼내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내가 왕족이 아니었다면 내 딸은 지금쯤 제 엄마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었을 거다. 어쩌면 7년 전에 내가 더 먼저 묻혔을지도 모르고. 다행히 딸의 어리고 해끔한 얼굴이 성마른 내 혀를 멈추게 했다. 아키텐 국왕은 아직 아이다. 소녀조차도 되지 못한.
“오라드, 잠깐만.”
아이가 솔개를 본 노란 병아리처럼 흠칫 놀랐다. 나는 그 변화를 의아하게 여기면서 딸의 작은 머리에 대뜸 손을 얹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아닌 하얀 베일과 그 위에 얹은 금관. 일반 알현을 허가하고 외부 활동이 많아지면서 오라드는 성년 군주와 비슷한 차림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저 착하다고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오라드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럼. 착한 아이지.”
비교할 또래가 없어서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오라드가 무척 왜소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이 나이 즈음에 아이가 몸집이 커질 걸 가늠하며 일부러 큰 옷을 지어 입히곤 한다. 특히 여자가 남자보다 더 이르게 성장한다. 로스를 떠나기 전, 어릴 때 나보다 더 컸던 또래 여자아이들이 어느 순간 나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지금은 비 맞은 갈댓잎처럼 쑥쑥 자랄 때여야 한다.
‘살아만 있어 준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분명히 그랬지. 여자이니 키가 작은 게 흠이 될 것도 없다. 그렇지만 10년 뒤에는? 역병으로 막대한 상속을 받은 소년 영주들이 모두 청년이 된 후에도 낙관을 가질 수 있을까? 후계자로 공인받은 행사조차 없었던 왜소하고 병약한 여왕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할 거라고? 태어나자마자 아키텐의 후계자가 되었고 보헤미아의 프르셰미슬 왕가를 처가로 가졌던, 키가 웬만한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던 건장한 이도 반발하는 세력을 억누르지 못하고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군주의 용모 따위는 통치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결론을 낼 참이라면 그건 잘못되었다. 그렇게 흠결이 없던 왕이라도 위기를 맞이할 수 있는데, 내 딸은?
나는 그날 저녁 내가 뽑은 궁의 야히드를 불렀다. 그는 짧은 수염을 기른 구릿빛 얼굴에 난색을 보이더니 내게 파트리샤의 용모를 간략히 묻고는 최선을 다하겠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언제나 나보다 작았던 작은형의 여윈 모습이 묵직한 추가 되어 날 바닥없는 늪으로 가라앉혔다. 나는 스물셋에 돌아가셨던 기억 없는 내 아버지를 떠올려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록 신께서 일찍 데려가셨을지언정 딸 하나와 아들 셋을 연이어 보셨다면 예전 내 생각처럼 병약하셨던 분은 아니셨을 터. 내 탓이 아니다. 내 탓일 리가 없다.
“비께서 종종 다녀가십니다.”
야히드는 지나가는 소리처럼 넌지시 말을 건네고 입을 닫아버렸다. 나는 그 어색한 침묵으로 그가 못한 말을 짐작했다. 부부가 되고 꽤 시간이 흘렀으나 우리에게 아이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자식을 가졌으니 지금에 와서 아들을 원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가 처음 아키텐에 왔을 때 겪어야 했던 분위기를 되짚어보면 그이가 어떤 마음으로 친자를 원하는지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여의를 좀 더 보충하도록 하겠네.”
프레브라나는 부친에게는 셋째이나 모친에게는 외동딸이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념을 생각해 볼 때 아이가 적은 가계라는 걸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궁정을 개방한 이래 다시 쓸데없는 말을 옮기는 입이 많아졌다. 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 이상은 남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다.
예상대로 병충해가 창궐했다. 야생화된 농지에서 알을 깐 벌레가 천적 없이 불어나 민가를 습격했다. 내전 이래 겨우 구색을 갖출 만큼 채워 넣은 수비병들이 연락을 담당할 인원만 남기고 농민들과 함께 벌레를 쫓으며 미처 거두지 못한 작물을 부랴부랴 정리하는 형편이었다. 돌풍까지 불어 낡은 건물을 무너뜨렸다. 왕성의 성벽도 바람이 비켜 가지는 않았다. 연이은 보고를 들으며 나는 비단옷을 입은 채로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피해 규모가 어느 정도 되는지 직접 살피고 싶다. 상심한 사람들의 손을 잡고 함께 대책을 강구하고 싶다. 나는 지금 아키텐에서 재무관으로 가장 숙련된 경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지만 섭정으로서 오라드를 홀로 두고 자리를 비울 수는 없다. 내게 공백이 생기면 왕의 결정이 필요한 모든 일이 다 미뤄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피레네 남쪽에서 심각한 비보가 올라왔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조부에게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의 공위를 상속받은 소년 대공이 신을 저버리고 알모라비드에 투항했다. 이로써 이베리아반도에 홀로 있는 아키텐령 알바라신은 절해고도처럼 알모라비드에 갇혀 고립되고 말았다.
“절 축하해주고 싶지 않을 것 같아요.”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오라드는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만 남은 자리에서야 아이는 어른 흉내를 거둔 자신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번 가을은 좋은 일이 하나도 없어요. 이런 때 제가 즐거워하면 속상한 게 겹쳐 아예 화를 낼 거 같아요. 화를 내지 않아도 자신이 힘든데 남은 부유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 무척 서글플 거예요.”
영주의 자제들은 열두 살이면 준성인으로 인정받는다. 역병이 창궐한 이래 살아남은 어린 영주 중 가장 먼저 12세를 맞는 아키텐 국왕을 위해 다들 많은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임시로 세울 단상의 규모나 장식으로 쓰일 천의 색상까지 여러 사람의 검토를 거쳤다. 당연히 오라드도 그 수고를 안다. 프레브라나는 내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는 양 말없이 나를 보았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오라드가 그다지 원하지 않았을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하고 싶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가 아니라.”
“이미 큰 비용이 쓰인 걸로 알아요.”
오라드는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모든 행사를 취소하자고 하면 지금까지 준비한 게 다 성과 없는 소모가 되겠죠. 아버지 생신도 같이 있는데 너무 소박하게 하면 연이은 피해로 우리가 부담이 크다고 의심할 테고요. 반감을 사지 않도록 아버지가 조절해 주세요. 비용은 더 들어도 괜찮아요.”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나 대답이 늦어졌다. 그게 원래 내가 하던 일이긴 하다. 10년도 더 전부터.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남매의 모습이 순간 아스라이 겹쳐지며 스쳐 지나갔다. 부탁이 아닌 지시를 곱씹어보며 나는 다른 질문을 건넸다.
“왜 조금 전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니?”
“모두 모인 자리에서 제가 말하면 되돌릴 수 없다고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덧붙일 것도 고칠 것도 없는 훌륭한 대답이다. 떼를 쓰지 않는 조숙한 아이라는 점은 어린 국왕의 언행에 한층 더 무게를 실었다. 내가 생부이자 섭정으로서 오라드의 의견을 막을 수는 있으나 그러면 우리 부녀 사이가 갈등을 빚고 있다며 성가신 유언비어가 생겨난다. 사람들이 내 말을 우선하다가 자연스레 오라드를 제치고 친정을 시작한 후에도 경시할 수 있다. 그걸 이해했다면 내가 더 할 말은 없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애초 계획을 훌쩍 상회하는 예산이 다시 책정될 것이다. 반년은 긴축재정이 될지도 모르겠다. 왕의 이름으로 여러 사람과 생일의 기쁨을 나누는 것 외에도 손실이 큰 사람들을 위로하는 부수적인 비용이 지금까지 쓰인 규모 이상 들어갈 테니. 영주에게 자비는 중요한 덕목이다. 다만 오라드가 설 위치에서는 확실하게 유용한 내 편이 되어줄 한 사람의 호의를 얻는 게 십만 명의 인심을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나는 마지막 말은 나중으로 아껴뒀다.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다.
나보다 훨씬 더 말을 아끼고 때를 가늠하던 사람은 밤이 이슥한 후에야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
“……저 아이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어둠이 내 표정을 감췄다. 내 곁에 누워 나를 보는 프레브라나에게 나는 천장을 보며 누운 채로 돌아보지 못했다. 프레브라나는 가만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아주 명석한 사람이었소. 뭐든지 남들보다 앞서 생각해냈지. 용감해서 겁도 없었고.”
“당신에게 그런 찬사를 받을 정도면 얼마나 대단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아요.”
나는 무심코 피식 웃었다.
“난 평범한 사람이잖소.”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대단한걸요.”
뺨에 축축한 온기가 소리 없이 부드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프레브라나는 수줍은 듯 내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고 나직이 속삭였다.
“저런 아이를 낳은 엄마는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어요. 오라드는 여느 아이들하고 달라요. 여러 면에서 당신을 닮았지만 무척 섬세하고 사려 깊어요. 아마 엄마를 많이 닮았을 것 같아요.”
후우. 낮은 한숨이 공기에 스며들었다. 나는 시큰해진 콧날과 차오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대답을 아끼고 대신 손을 뻗어 그이를 토닥였다. 제가 잘 돌볼 수 있을까요. 프레브라나는 먼저 한 말의 반절도 안 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퍽 의기소침해진 그이에게 나는 조금씩 내가 기억하는 파트리샤의 모습을 풀어놓았다. 16세와 20세로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아키텐의 첫 여성 재무관으로 분주히 활약했던 과거를. 오자마자 물갈이와 성장통이 겹쳐 자리보전해야 했던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신부의 방문을 기다리게 되었다. 왕태자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데릴사위를 얻으려는 정략결혼이라는 것도, 어서 일어나야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큰형이나 병약한 작은형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비록 그녀가 들려주는 아키텐 내의 정세나 교역에 관한 이야기를 내가 다 알아들을 수는 없더라도.
“당신이 처음 여기로 올 때 겪은 감정을 내가 그대로 겪었을 거요. 내게는 얼굴도 모르는 날 4년이나 기다려 준 그이밖에 보르도에서 믿을 사람이 없었으니까.”
“선왕은 과묵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다고 들었어요. 선왕도 당신을 많이 좋아했나봐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거지. 파트리샤가 과묵했던 게 아니라 말을 터놓을 상대가 마땅찮았을 뿐이오. 부왕께서 승하하신 뒤 파트리샤가 하던 일은 내게 떠맡겨졌고 그 사람은 첫 왕손을 무사히 낳아야 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쌓은 모든 것에서 물러나야 했소. 오라드가 태어난 뒤 선선대왕의 왕비가 왔지만 아직 아키텐에 적응해야 했기에 파트리샤가 계속 궁정 살림을 맡았고. 그러다 반역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선선대왕이 전장으로 나가니 사람들 관심이 자연히 이쪽으로 쏠렸소. 나는 생각이 짧아서 피곤하게 여기고 말았지만…….”
순간 목이 메어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닫았다. 당신은 바라던 대로 살고 있나요.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허락되었던 휴식을 함께 보낸 아침 강가에서 파트리샤는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내게 세상 모든 남자가 부러워할 만한 지위를 안겨줬다. 나는 그녀에게 내 아내로서 갖게 해준 것이 자식 외에는 없다.
떠나자고 말했어야 했다. 파트리샤가 가족을 지키고 싶어했기에 기꺼이 국왕을 보좌하는 자리를 받아들였다. 후사 없는 왕의 가장 가까운 후계자를 왕성에서 떨어뜨려 놓을 수도 없었다. 국왕이 날 형제라 부르며 믿어주는데 차마 저버릴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이라도, 비록 평생 그리하지 못할지언정 단 한 번만이라도.
“당신에게 무척 고마웠을 거예요.”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프레브라나가 날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서로 가족으로 살다 갈 수 있었잖아요.”
나는 프레브라나가 삼킨 말을 여러 마디로 읽어냈다. 권력 앞에는 부자도 없다는 비정한 말이 명제가 되고 말았다. 어미가 보는 앞에서 공동 황제의 관을 쓴 친아우를 난도질한 미치광이 형에게서도 어느새 광인의 명명이 희석되었다. 처남과 매부 사이에 창검을 겨누는 건 놀랄 일이 아니다. 아키텐이 그렇게 독립한 것처럼. 내 입에선 속절없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 사람에게 좋은 가족이 되어주지 못했소. 당신에게도 그렇고.”
프레브라나는 내게 기댄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가족이에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렇지만 이 사람도 고를 수만 있었다면 키예프를 떠나고 싶지 않았겠지. 고운 피륙과 기름진 음식이 타향살이에 온전한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방인. 지난 여름 내가 추방한 농부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들에게 프레브라나는 이방인의 후처가 된 또 다른 이방인이다. 프레브라나가 바라는 대로 우리에게 아이가 찾아온다면 그 아이는 아키텐 국왕의 왕제로 온전히 존중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요?”
내가 말이 없자 프레브라나가 재촉하며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였다. 나는 조금 전에 내가 무슨 말을 하다가 말았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가.
“……생지옥을 보았지.”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들. 내전과 미증유의 역병이 연이어 겹쳐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무너져가던 영화. 나는 지금도 생생히 떠오르는 우리의 마지막 시간을 최대한 담담히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결국 파트리샤가 나와 오라드 앞에서 눈물을 감추며 달아나던 부분부터 옆에 기댄 이를 울리고 말았다. 창문 아래 바로 앞에 두고서도 잠든 딸을 깨우지 않으려 소리를 억누르며 하염없이 바라보던 모습. 오라드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꿈과 생의 마지막 순간 나를 불렀던 유언까지. 프레브라나는 내 어깨를 적실까 싶었는지 몸을 돌려 바로 누워 흐느꼈다. 내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고여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난 당신이 싫어요. 난 당신을 믿어요. 현실과 꿈의 상반된 두 말이 쐐기로 박혀 여전히 가슴에서 피를 흘린다. 소리 없는 통곡만이 한참이나 자리하다 달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다음날 나는 하루 일정을 불참했다. 차라리 칼자국이 난 얼굴을 보이는 게 낫지, 큰일도 없는데 추억을 곱씹다 울어서 부은 눈을 보일 수는 없었다. 졸지에 홀로 알현을 받으며 왕의 의무를 하다가 잠시 짬을 내서 돌아온 오라드는, 늦게까지 정무를 보는 나는 그렇더라도 왜 어머니까지 눈이 부었냐며 의아해했다. 프레브라나는 말없이 오라드를 껴안고 한참이나 토닥이며 쓰다듬었다. 나는 내가 없어도 사람들이 지금의 오라드가 어른처럼 국정을 진행할 수 있으리라 짐작하는 점에 섭정으로서 안도했다. 하나 어린아이에게 벌써 그런 부담을 지우는 게 아비로서는 탐탁잖았다.
피객까지 한 것은 아니었기에 오후에 손님이 들었다.
“편찮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아르투아 백작은 해득하기 어려운 눈빛으로 조용히 안부를 물었다. 겨우 하루 쉬었다고 병문안을 온 것은 아닐 터. 모처럼 대낮까지 홀가분하게 있던 탓에 서둘러 정제한 의복이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아키텐에 금역이 없는 첩보관이지만 가족도 시종도 아닌 여성을 침실에서 잠옷 차림으로 맞이할 수는 없었다. 비록 독대가 아니더라도. 내가 그이를 아르신드라 이름으로 부르는 사이여도.
“그대가 심려할 정도는 아니네. 잠을 조금 설쳤을 뿐이니 하루 쉬면 괜찮겠지.”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내 말을 받아치는 듯한 아르투아 백작의 말에 나는 부연하는 대신 잠자코 그이를 보았다. 의아한 침묵이 이어지자 아르투아 백작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주제넘었습니다. 작은 목소리였다. 나는 그이와 목소리 크기를 맞췄다.
“설령 그렇게 보여도 말은 하지 말게. 지금 왕성에는 사람이 많지 않은가.”
오늘 그이가 굳이 휴식 중인 나를 찾은 이유도 이와 무관하진 않을 것이다. 국내외로 국왕의 눈과 귀가 되어줄 이들을 보내 놓았으니 보르도에도 누군가의 세작이 이미 들어왔을 터. 진실한 호의로 건넨 말이 어둠 속에서 자신의 발판을 서서히 갉아 무너뜨릴 수도 있다. 나는 더 나무라지 않았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젊은 사람이고 또 우리 가족을 돕는데 보는 눈이 없더라도 무안을 더 줄 필요는 없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베리아인가?”
내 질문에 아르투아 백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프랑스입니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죽었습니다. 계승자는 올해 여덟 살 된 장자 로베르입니다.”
카페 왕가에는 이제 성년 왕자가 없다. 역병과 연거푸 닥친 악재로 프랑스 국왕이 같은 세대의 마지막 왕족이 되고 말았다. 왕제가 살아남았더라도 자식이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다만 지금 이 말이 사실이라면 프랑스는 이제 조타수를 잃은 배가 되었다.
“필리프가 관에 들어가는 모습을 직접 봤다던가?”
“벌써 반년 가까이 그자가 살아 움직이는 걸 본 이가 없습니다. 필리프가 모습을 감추고 얼마 후 은밀히 석공이 드나들었다 합니다. 확실합니다.”
사후에 벌어질 동요를 피하려 아직 국왕의 승하를 발표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선례를 떠올려보면 십 중에 팔구는 그럴 터. 나는 과부와 어린 고아들의 불행을 동정할 마음이 없었다. 내 딸이 성년을 맞아 친정을 선포해 군주로서 입지를 다지더라도 프랑스 국왕은 30대 중반의 젊고 원숙한 통치자일 것이라는, 아키텐에 있어서 가장 큰 근심거리가 저절로 사라졌다.
“올해 듣던 소식 중 가장 반가운 소식이군.”
아키텐 국왕은 누구보다도 먼저 성년이 된다. 왕을 대신할 걸물이 프랑스에 없다면 아키텐은 적어도 8년이라는 긴 시간을 번다. 왕자가 셋이라도 차남과 삼남은 각각 프랑스 왕이 제 형수인 선왕비와 궁정의 시녀를 간음해 얻은 사생아이니 상속권이 없다. 장남마저 불운하게도 요절한다면 왕좌를 놓고 진흙탕 싸움이 벌어질 터. 다행히도 프랑스 왕비는 이탈리아 태생으로 자국에 세력이 없는 한미한 집안 출신이다. 신이 아키텐을 위해 내려주신 기회다. 내 입은 어느새 호선을 그렸다.
“오라드는 알고 있는가?”
“지금 보르도에서 저 외에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오직 폐하 한 분이십니다.”
“잘했네. 그 아이에게는 내가 나중에 알려줄 테니 그대는 알리지 말게. 심성 고운 아이이니 이웃 나라에 아비 잃은 고아들만 남겨졌다 하면 괜히 안쓰러워할 테니까.”
할머니의 친정. 그것만으로도 오라드는 카페 왕가와 우호를 바란 적이 있다. 부모를 잃고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한다는 게 어떤 부담으로 와닿을지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 아이다. 하물며 그 상대가 자신의 친척임에야. 그러니 차라리 알려주지 않는 게 낫다. 아키텐 국왕의 열두 살 생일까지 이제 겨우 열흘 남았다. 한 치의 그늘도 드리워선 안 된다.
갑자기 머리가 다시 찌르듯 아프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선 낮은 신음이 터져 나오고 내 손은 저절로 관자놀이께를 억눌렀다. 폐하, 폐하. 마치 세워둔 장식품처럼 묵묵히 있던 시종과 아르투아 백작이 동시에 나를 부르며 부축했다. 나는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으나 이미 하얗게 질려버린 그들의 낯빛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은 이제 쉬게 나가달라고 그들을 내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잠시 뒤 프레브라나가 들어와 침대에 누운 내게 목과 이마에 넓은 물수건을 얹어 억지로 눈을 감게 하고는 살며시 손을 잡았다. 시야가 닫혀 내려온 어둠 속에서 나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냉혈한.
어떤 지옥 속에서 살고 있을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게임 시스템상으로 별 일이 없는 게 제일 쓰기 힘들…… 다음 챕터는 드디어 딸내미가 약혼을 합니다.
올해 내로 연재 재개가 목표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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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돌아오셨군요. 1부터 다시 정주행하고 읽어야겠습니다. 내용에 대한 기억이 흐릿하군요.
반가움에 일단 댓글부터 달고 봅니다. 돌아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앗, 콤콤님 ㅇ<-< 제가 면목이 없어서 새 챕터를 쓰고도 보내드리지 못했습니다. 기억해주셔서 죄송하고(도게자) 고맙습니다.
아빠가 저 시대 기준으로도 일찍 아빠가 된 터라 저 시점에도 겨우 한국 나이 33세 청년인데………
@디아나 흐아.. 이전 것들도 다시 보다보니 이제 다봤네요. 냉소적 트레잇이 달리기 너무 좋은 환경...(말잇못)
@콤콤 그치만 오라드는 시니컬해지진 않았답니다 :D 대신 애가 성년에 달린 게 근면 딱 하나 뿐이었……… 그리고 아빠도 섭정 기간 동안 근면과 스트레스가 생겨버리고……
ㄷㄷㄷ;;
무슨 반응이십………… (긴장)
ㅜㅠ 아키텐 연대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군요.
한국 크킹연대기 중에서 가장 스토리성이 좋은 거 같아요.
저도 언젠가는 플레이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해 보고 싶네요.
크킹3쪽은 아직 플레이할 계획은 없으신거죠?
제 노트북이 2015년에 중고로 산 어르신이라 (어흐흑 어흐흑)
그래도 크킹3 작년에 로얄 에디션 구매하면서 가동이 되는 걸 확인했습니다. 노을금빛 끝나면 돌려보려고요 :D 그런데 제가 대략 예상독자 중학생으로 잡고 쓰는데 내게 월급 받아먹는 놈들 중 내 후계자랑 안 잔 놈이 없다거나 자식놈이 부모에게 추파 보낸다거나 하는 자연스러운(?) 내용이 나오면 이거 어쩌나 벌써부터 고민 중입니다ㅋㅋㅋㅋㅋㅋ ㅇ<-<
게임 상으론 아무것도 없는 부분을 채우는 게 제일 힘들어요 잉잉……
괜찮아요... 요새 아가들은 저희가 상상하던 것보다...엄... 조숙하답니다. :)
@Normandie_CaT 그렇게 크킹 연대기는 강제 삐--가 되고……… (필력을 본다)(대답이 없다 그냥 시체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