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모티브가 된 리퀘를 주신 독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본 글에 나오는 인물, 장소, 에피소드 등은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실재를 바탕으로 한 일부 내용은 당시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였습니다.
BGM을 꼭 재생해주세요!
BGM 아주 오래된 기억 (inst.)
소식을 듣고 서대문 형무소로 곧장 찾아갔지만 현진을 만날 수 없었다. 몇 번이고 찾아가 봤지만 매번 면회가 불가하단 답변만 돌아왔다. 옆에서 내 중얼거림을 들은 현우 선배가 딱 한 마디를 했다. 야, 어지간히 고문에 몸이 상했나 보다.
그 말을 듣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몇 날 며칠을 유성기만 끌어안고 있었다. 깜깜한 방 안에선 현진의 노랫소리만 하염없이 반복됐다. 그러다 노래가 끝나 소리가 끊기기라도 하면 무거운 정적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럴 때면 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더 깊은 어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정아. 자니?”
여느 때처럼 이곳의 어머니가 조심스레 방문을 두들겼다. 나는 가만히 숨소리만 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어머니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 연락은 꼭 전해야 할 것 같아서.”
“.......”
“사회부장 되시는 분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댁으로 좀 찾아와달라고 하시더구나. 꼭 전할 말이 있다고.”
“.......”
“이정아. 듣고 있니?”
“...알겠어요.”
목소리가 다 갈라져 나왔다. 며칠씩 무단결근을 했으니 부장이 호출을 할 만도 했다. 잘리겠구나 생각했다. 유성기에선 여전히 현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못다 핀 것들은 언젠가 타오를 테니
헤엄 作
간만에 단장을 하고 나섰다. 단장이라고 해봐야 깨끗이 씻고, 머리를 빗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도였지만. 마지막으로 뵙는 것일 테니 단정한 모습으로 뵙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인력거에서 내려 대문 앞에 섰다. 내 주먹에 벗겨진 칠이 그대로였다. 현진이 치료해준 손날의 상처는 다 나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괜히 손날에 진 딱지를 만지작대며 대문을 두들겼다.
“와줘서 고마워요.”
대문을 활짝 여는 부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쩐지 집안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의 부장이 나를 불렀다고 했는데, 잠시 나가셨나.
“저, 부장은...”
조심스레 묻자 거실로 향하던 걸음이 멈춘다. 뒤를 돈 부장이 가만히 나를 보다 입을 열었다.
“실은 남편이 아니라 내가 불렀어요.”
“...예?”
“진이가 믿는 이라면, 나 역시 믿어도 될 듯해서.”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나를 부장이 이끌었다. 집안 깊숙한 곳으로 향하던 그는 어떤 방문 앞에서 멈췄다. 위치를 보아 비밀리에 손님을 응대하는 응접실 같은 곳인 듯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그는 앉으라는 듯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이정 씨.”
맞은편 소파에 앉은 부장이 안경을 치켜올렸다.
“이정 씨가 우리와 뜻을 함께해줬으면 좋겠어요.”
“...‘우리’라니요?”
“내가 일 년 전쯤 뜻이 비슷한 이들을 모아 만든 단체예요. 따지자면 내가 수장이죠. 현진이 그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바람에 혼자 다 뒤집어쓰게 되었지만.”
“수장이요?”
“왜요. 여자가 수장이라?”
“아뇨. 그게 아니라...”
시대가 달라 자리만 다를 뿐이지 부장은 부장이구나 싶어서요. 하고픈 말은 꿀꺽 속으로 삼키고 대충 얼버무렸다. 부장, 아니 수장은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우리에겐 이정 씨가 필요해요.”
“제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상에 큰 목소리를 내줄, 우리 편의 똑똑하고 힘 있는 여성 운동가가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해요. 그 자리에 가장 부합한 사람이 이정 씨라고 나는 생각하구요.”
“저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정 씨. 이 땅의 수많은 여성 운동가들이 독립을 위해 무얼 하고 있는지 알아요?”
“...글쎄요.”
“빨래, 심부름, 설거지, 밥 짓기, 그 외 모든 뒷바라지. 물론 그 모든 일들 역시 보탬이 되는 건 맞지만, 여성들의 자리는 한정되어있는 게 사실이에요. 직접적으로 도움되는 일이라면 군자금 모집, 도피자 은닉, 비밀연락책, 아주 간혹 무력 투쟁에 가담하는 정도? 소위 ‘중대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항상 남성들이 도맡아 하지요. 독립을 바라는 마음은 모두 같은데 말이에요.”
“.......”
“이번에 현진이가 수감되면서 많은 여성 동지들이 분노했고, 다짐했고,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는 그들을 이정 씨가 이끌어줬으면 해요. 아니, 이정 씨만이 할 수 있다고 믿어요.”
현진의 이름이 나오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고 참았다.
“물론 결정하기 쉽지 않다는 거 알아요. 아마 수없이 각오를 해야 할 테고, 나뿐 아니라 가족의 생사까지 위협받을 테고, 언제 불시에 잡혀갈지 몰라 매일 속을 태우며 살아가겠죠.”
“.......”
“그런데요 이정 씨.”
“.......”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우리는 매일 수없이 각오를 해야 하고, 매일 불시에 검문을 당하고, 매일 죄 없는 동료들과 이웃들이 붙잡혀 가는 걸 보고 있어요.”
“.......”
“달라지는 건 두 가지뿐이에요.”
목소리를 낸다는 것. 그리고 동지들이 생긴다는 것.
말을 마친 수장이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틀을 줄게요.”
“아뇨.”
담뱃대에 불을 붙이려던 그가 행동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겠습니다.”
“그리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텐데.”
“일주일 전에 물어보셨으면 이틀간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답했겠죠. 아뇨, 전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할 수 있어요. 하고 싶어요. ...해야만 해요.”
“현진이 때문이라면,”
“아뇨. 현진 씨 때문이 아닙니다.”
“.......”
“온전히 제 선택이에요. 이틀 뒤에도, 일주일 뒤에도. 제 답변에 변함은 없을 겁니다.”
...이제야 알 것 같네요, 제가 여기에 온 이유를. 그간 갑갑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 이곳에 와야만 했던 이유. 그 모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얼굴을 보며 연기를 몇 번 피워내던 부장이 담배를 껐다. 그리고 결심한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잘 부탁해요, 최 동지.”
그 손을 맞잡자 진한 온기가 느껴져 왔다. 수장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왤까. 난 최 동지 그 눈이 참 마음에 드네.”
“여기서도 그 말씀하시네요.”
“여기서도? 내가 전에도 이런 말을 했었나...”
중얼거리는 수장을 보며 나는 옅게 웃었다.
“네, 백 년 후쯤요.”
“뭐?”
수장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따라 웃었다. 내 눈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 대단한 눈 나도 한번 보고 싶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장이 무슨 뜻인지 알려달라며 나를 보챘다. 나는 별말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저는 무얼 하면 되나요?”
“성급하게 생각 말아요, 차근차근 준비 중이니. 아마 앞으로 우리가 걸어갈 길은, 그동안 해온 운동들과는 좀 다를 거예요.”
어떻게 다르냐고 넌지시 묻자 그가 대뜸 물었다.
“직접 가서 볼래요?”
“지금요?”
“나는 일이 있어서 가지 못하고, 파고다 공원 입구에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그리로 가봐요.”
“...제가 하지 않겠다고 했으면 어쩌시려고 약속을 미리 잡아두셨습니까?”
“글쎄. 왠지 그러고 싶더라고.”
“아무튼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는 내가 해야죠. 고마워요, 최 동지. 기꺼이 청춘을 내어주어서.”
감히 내가 이런 말을 들어도 되는 걸까. 기꺼이 청춘을 내준 것은,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당신들 덕분인데. 괜히 죄짓는 기분이 들어 꾸벅 인사를 하고 부장 댁을 나섰다. 지나가는 인력거를 잡아타고는 파고다 공원으로 향했다.
한참을 달린 뒤 값을 치르고 내리니 휑한 공원이 나를 반겼다. 뭐야,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더니. 기다리다 가버렸나. 이 근처는 처음이라 지리를 몰라 입구만 기웃대던 그때, 조심스러운 손길 하나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제노 씨?”
“늦어서 미안합니다. 근처에서 사탕을 팔기에 좋아하실까 하여...”
그가 웬 종이봉투 하나를 건넸다. 얼떨떨하게 받아 들어 안을 보자 설탕이 묻은 사탕 여러 개가 담겨 있었다. 하나 드실래요? 하고 하나를 건네자 눈을 끔뻑이던 그가 조심스레 사탕을 받아든다. 곧 하얀 볼이 불룩해졌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옅게 웃으며 나도 사탕 하나를 물었다. 입안 가득 달콤함이 퍼졌다.
“정말 수장 말이 맞았네요.”
“뭐가요?”
“기자님은 반드시 올 거라고 했거든요.”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예. 이쪽입니다.”
얼마 걷지 않아 평범한 양장점 앞에 도착했다. 입구로 들어가 주인으로 보이는 이에게 인사를 건넨 그는 양장점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깊숙한 곳에 숨겨진 방으로 들어간 그가 익숙하게 융단을 걷어내고 바닥에 숨겨져 있던 문을 열었다. 그 안으로 나무계단이 이어졌다. 나무계단을 밟고 내려가자 밀실이 나왔다. 잠시 나를 힐끔대던 이들은 제각기 할 일을 하기 바빴다.
“여기가 본부입니다. 다카포 마담이 카페 문은 닫았어도 본부는 계속 사용해도 된다고 했지만... 이제 그 곳은 더이상 안전하지 않아서요.”
제노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곧 무언가를 제조 중인 사람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이 친구는 중국에서 왔습니다. 헝가리에서 건너 온 기술자에게 폭탄 제조를 배워 왔고요. 제조뿐 아니라 군자금 방면으로도 도움을 많이 주는 동지입니다.”
“인준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최이정입니다.”
장갑을 벗고 내미는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놓았다. 그는 다시 장갑을 끼고 폭탄 제조에 열중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이 폭탄들은 며칠 뒤 평남도청, 평양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서 터질 겁니다.”
“세 곳이나요?”
“예. 3개 조로 나누어 거사를 전개할 예정입니다. 아마 기자님은 우리 둘과 제2조, 평양경찰서로 향할 겁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만세가 아닌 폭탄을 던지기로 했구나.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폭탄을 만들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찬찬히 밀실 안의 사람들을 눈에 담다 제노를 따라 계단으로 향했다. 나무계단을 올라 문을 닫고 융단까지 덮은 그가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이제 보니 입술에 아직 피딱지가 진 상태였다. 제노 씨도 분명 고초를 겪고 나왔겠지. 마음이 쓰렸다.
“직접 보니 겁나지 않습니까?”
“제노 씨는 어떤데요?”
“저는 납니다. 아주 많이.”
“.......”
“이렇게 했는데 성과가 없으면 어떡하지. 폭탄이 불발이면 어떡하지. 동지들의 희생이 헛되이 되면 어떡하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날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무섭습니다. 두렵기도 하고요. 밤마다 잠을 쉬이 이루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
“그래서 나는 처음 수장이 기자님 얘기를 꺼냈을 때 반대했어요. 기자님은 기자님대로 그 자리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습니다. 나는 기자님이 저번처럼 자리를 박차고 나가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지그시 나를 보던 그가 걸음을 떼었다. 양장점을 나서며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저 신문사까지 걸어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옆에 나란히 걸었다. 발맞춰 걷는 신 두 쌍을 내려다보던 나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요, 아버지가 밤낚시를 좋아하셨어요.”
“예?”
“밤낚시요. 밤에 하는 낚시.”
“아... 그렇습니까.”
“물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날에도 아빠는 함박웃음을 지은 채 돌아오셨어요. 저는 그 모습이 이상해서 물었죠. 아빠, 물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했는데 속상하지 않아? 그랬더니 아빠가 뭐라는 줄 아세요?”
“...글쎄요.”
“아빠는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게 아니야, 이정아.”
“.......”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아빠의 목적은 물고기가 아니었구나. 결과가 따라오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구나.”
“.......”
“세상 그 어디에도 헛된 일은 없어요, 제노 씨.”
“.......”
“그날 역시 반드시 올 거고요.”
이건 제가 장담해요. 손가락도 걸 수 있는데, 걸어볼래요? 내가 새끼손가락만 곧게 편 손가락을 내밀자 덩달아 멈춰선 그가 물끄러미 내 손을 보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도 한 번 해보자구요. 밤낚시.”
그의 손을 끌어와 억지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도장까지 꾹 찍고 나니 얼떨떨한 얼굴이다. 손을 풀고 다시 걸음을 떼자 잠시 멈추어 서 있던 그가 금세 옆에 붙어 걸었다.
“아, 단성사가 이쯤 있구나. 이제 길을 좀 알겠네요. 지난번 제가 드린 표로 영화는 보셨어요?”
“...아니요. 아직 쓰지 못했습니다.”
“그럼 저랑 오늘 볼래요?”
“오늘이요?”
“싫음 말고요.”
“아, 아닙니다! 좋습니다, 저야 좋지요.”
“그럼 이따 일곱 시에 이 앞에서 만나요.”
“알겠습니다.”
“오늘 여러모로 고마웠어요, 제노 씨. 소개도 해주고, 데려다주기도 하고. 아, 사탕도 잘 먹을게요.”
“저야말로 단언해주어 고맙습니다. 사실 조금 흔들리고 있었거든요.”
“흔들려도 괜찮아요. 안 흔들리면 그게 사람인가요. 그럼 저 갈게요!”
“어, 신문사까진 아직 더 가야 하는데요.”
“괜찮아요. 저 엄청나게 혼날 일이 있어서 좀 부끄럽거든요.”
일부러 더 손을 크게 저으며 돌아섰다. 힐끔 뒤를 돌자 작게 손을 흔드는 그가 보였다. 나는 씩씩하게 신문사로 향했다. 부장이나 편집국장을 보거든, 무릎부터 꿇자. 그것만이 살길이다.
*
“최이정. 너 이 녀석!”
불같이 눈을 켜고 선배가 쿵쾅쿵쾅 걸어왔다. 보나 마나 꿀밤을 날리겠지 싶어 두 눈을 질끈 감는데, 꿀밤이 아닌 웬 따뜻한 포옹이 나를 발겼다.
“...선배?”
“걱정했잖아, 이 자식아. 연락도 없이 말이야. 어? 나는 너 죽은 줄 알았다고! 부장도 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죄송합니다.”
“어디 봐. 이런, 피골이 상접했네. 안 되겠다. 국밥부터 두 그릇 말고 오자. 어? 밥은 먹고 다닌 거야?”
“...선배 저한테 뭐 잘못한 거 있으세요?”
“아니? 내, 내가 너한테 잘못할 일이 뭐가 있니?!”
“최 기자. 김 기자가 자네 쉬는 동안 자네 이름을 아주 알차게 팔아먹었어.”
“제 이름을 팔아먹어요?”
재밌는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투로 말하는 정치부 선배를 의아하게 보다 현우 선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려 가며 눈을 피하던 그가 아, 마감이 몇 시였더라? 어색한 연기를 펼치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성큼성큼 따라가 그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제 이름을 어디에 팔아 드셨는데요?”
“명월관 인터뷰 말이야. 글쎄 소월이가 자네 아님 인터뷰 안 하겠다고 했다는 걸 이자가 꾸역꾸역 자네 이름 팔아서 따왔다네. 어제 신문 못 봤나?”
“선배. 진짜예요?”
“어? 아니, 그게...”
자리에 놓여있는 어제자 신문을 펼치자 명월관 명기 소월 씨에 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박혀있었다. 이 사람이 내 인터뷰라고 탐내지 말랬더니, 자리 좀 비운 틈에 고새 가서 인터뷰를 뺏어?
“더불어 사는 인생 모르냐. 어?”
“더불어 살기는 개뿔. 더블로 맞아보실래요?”
“아이, 이정아. 아, 아, 어, 부장! 오셨어요!”
“안 속거든요?!”
“진짠데.”
속는 셈 치고 고개를 돌리자 진짜 부장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선배의 머리채를 놓고는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당장 해고되어도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께 소식 들었네. 많이 아팠다고.”
“아, 그게...”
“그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자네 성격에. 다만 두 번은 없네. 알았나?”
“...넵. 감사합니다.”
바닥에 머리칼이 닿을 기세로 꾸벅 인사를 하는 나를 보며 부장이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명월관 소월이 인터뷰가 원래 자네 것이었다며? 김 기자에게 홀랑 빼앗겨 어쩌나.”
“그렇지 않아도 멱살을 잡고 있던 참입니다.”
“그럼 그자는 어때?”
“그자요?”
“왜, 요즘 인기 많다는 영화배우 있잖나. '총희의 연'에서 조역으로 얼굴을 알린 사내 말이야.”
“이제노 말씀이십니까?”
현우 선배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부장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자.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서 아주 인기라며? ...제노 씨가 인기 많은 배우였어? 눈을 끔뻑이고 있으니 엿듣던 정치부 선배가 주위를 살피다 소곤거려왔다.
“그자도 금번에 만세를 불렀다면서요? 종로서로 끌려가는 모습을 봤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 소문 덕에 인기에 가세가 붙었지.”
“예?”
“곧은 얼굴에 곧은 정신이 깃든다나 뭐라나. 요즘 젊은이들 생각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 그래도 왜놈들 쪽에 붙어 빌어먹는 놈보다야 수백 배는 낫지. 안 그래?”
“그럼요. 여하튼 흠모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니 인터뷰가 실리면 최소 몇십 부는 더 나갈 겁니다.”
“들었지, 최이정이?”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인터뷰 따올 수 있겠나? 독자들이 퍽 좋아할 듯한데.”
제노 씨 인터뷰를 따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괜히 망설여졌다. 신문에 인터뷰까지 뜨면 얼굴이 더 알려져서 운동에 어려움이 많아질 텐데. 한편으론 또 너무 오지랖인가 싶기도 하고.
“제가 하겠습니다!”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번쩍 손을 드는 선배를 밀어내고 결의에 찬 주먹을 쥐어 보였다. 선배가 할 바엔 내가 하고 말지. 제노 씨가 거절한다면... 좀 울고 다른 배우 인터뷰 대신 따오지, 뭐. 곧 덧붙여진 오늘까지 따올 수 있겠냐는 말에 말을 더듬었다. 오, 오늘이요?
“못하나? 그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지금 갑니다! 허겁지겁 편집국을 나서려다 백스텝으로 돌아왔다. 멀뚱멀뚱 나를 보는 선배의 품에 사탕 봉지를 안겨주곤 그 안에서 사탕 하나를 빼내 입에 물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리고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 신입 기자 시절 내 좌우명을 되새기며 편집국을 나섰다.
혹시나 싶어 단성사로 향했으나 역시나 없었다. 집이 어딘지도 모르고, 어디서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혹시? 인력거를 잡아 파고다 공원으로 향했다. 왠지 본부로 곧장 갔을 것 같지는 않고.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공원을 거닐던 그때,
“...어.”
툭. 툭. 일정한 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소리를 따라가 보니 공원 안쪽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제노 씨였다. 무얼 하나 싶어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계속해서 돌멩이를 던지고 있었다. 꼭 무슨 연습을 하는 것처럼.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아, 거사를 위해 연습 중인 거구나. 그가 연습을 쉴 때까지 나무 뒤에 서있던 나는 그가 돌멩이를 더이상 쥐지 않는 것을 보고 걸음을 뗐다.
“제노 씨!”
“기자님? 여긴 어쩐 일로...”
“지나가다가요. 땀 봐, 연습을 얼마나 한 거예요?”
“얼마 안 되었습니다.”
그가 옷소매로 땀을 닦고는 내 앞에 섰다. 지나가다 들렀을 리는 없고, 무슨 용무냐는 얼굴이었다.
“그게 사실... 곤란한 부탁이 좀 있어서요.”
“곤란한 부탁이라면...?”
“인터뷰를 좀 해줄 수 있을까요? 물론 흔쾌히 거절하셔도,”
“저기 마침 앉을 곳이 있네요.”
턱 끝으로 근처의 벤치를 가리킨 그가 싱긋 웃었다. 나는 가방에서 수첩과 연필을 꺼내며 얼른 벤치에 앉았다. 내 옆에 앉은 그가 멋쩍은 얼굴로 눈썹을 긁적였다.
“헌데 전 인터뷰를 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마땅히 찍은 작품도 아직 없고요.”
“부장이 그러던데요. 조역으로 출연한 영화로 아주 인기가 많다고. 요즘 젊은이들은 다 제노 씨 좋아한다던데, 아니에요?”
“...아닙니다.”
“귓불 터지겠어요. 그럼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
“예.”
시뻘건 귓불을 만지작대는 제노를 귀엽게 보다 연필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제노 씨. 본인 소개를 좀 부탁드립니다.”
“영화배우를 꿈꾸는 이제노입니다. 연기와 글 쓰기를 좋아하는 흔한 젊은이지요.”
“출연한 작품도 있으신데 ‘꿈꾸는’이라는 말을 붙이신 이유가 궁금하네요.”
“아직 이렇다 할 작품을 찍지 못한 까닭입니다. 물론 작품이나 배역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저의 연기가 그렇다는 뜻이지요.”
“어쩌다 배우를 꿈꾸게 되셨나요?”
“우연히 극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 안에선 하고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모습이 참 부러웠습니다. 멋져 보였고요. 저도 배우가 되면 그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글씨를 쓰는 속도에 맞추어 느릿하게 대답했다. 여러모로 배려가 몸에 벤 사람이구나 싶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픈 지 궁금한데요, 우선 독자분들이 궁금해하실만한 가벼운 질문부터 할게요. 취미가 무엇인가요?”
“글쎄요. 마땅히 취미랄 것이 없습니다. 장기, 바둑도 둘 줄 모르고 담배도 할 줄 몰라 촬영장에서 선배들에게 혼 좀 났습니다. 그저 흥미 있는 일이라곤 글짓기와 연기뿐이에요. 근래엔 극본 말고도 시 짓기에 흥미를 붙여 조금씩 끄적이고 있습니다. 물론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고요.”
“멋진 취미네요. 그러면 독서도 많이 하시겠네요?”
“예. 틈만 있으면 책을 읽으려 노력합니다.”
“색은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자줏빛깔을 퍽 좋아하지요.”
“좋아하는 날씨는요?”
“특정한 날씨보다는, 특정한 시간대를 좋아합니다. 동이 트기 직전의 아주 어두운 새벽이요. 본디 해가 뜨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거든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하시던데, 인기를 실감하시나요?”
“전혀요. 처음 듣는 소식입니다. 종종 편지를 받기는 하였으나, 잘못 온 편지인 줄 알고 모두 돌려보냈어요.”
정말요? 내가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둥근 눈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와, 그 사람들 속 좀 태웠겠네요. 웃으며 말하자 그가 눈을 깜빡였다. 속을 왜 태웁니까? 그야 공들여 쓴 편지를 돌려받았으니까요. 당사자는 자기가 인기 많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이 남자 사람 여럿 울렸겠네. 장난스레 고개를 젓자 그가 아니라며 허겁지겁 손을 내저었다.
“농이에요. 그럼 이제 영화 얘기로 들어가 볼게요. 동양, 특히 조선에서는 어떤 배우를 좋아하시나요?”
“글쎄요. 제가 감히 누가 어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모두 좋아합니다.”
“극본에 주연까지 맡은 영화가 개봉 예정이란 소문을 들었어요. 언제쯤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요?”
“빠르면 올해 안. 늦으면 영영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요?”
“제목도 여러 번 수정되었고, 커트도 많이 당하였어요. 다행히 다시 촬영할 정도는 아니지만... 여하튼 아직 심의 중에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간단히 이야기 좀 해주세요.”
“나라 잃은 유랑민의 비극을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를 하면서 자신만의 신념이 있나요? 앞으로는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가요?”
내 말에 그가 고민하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답했다.
“내 신념을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는 영화를 찍는 것이 꿈입니다. 언젠가 그러한 날이 오겠지요. 우선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우리의 이상과 멀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진실하고 무게 있는 그런 영화를요.”
“그 꿈을 이루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바랍니다. 갑작스러운 인터뷰인데도 꽤 능하시네요. 전에도 인터뷰 경험이 있나요?”
“아니오, 처음입니다. 능하다 해주시니 부끄럽네요. 떨려서 아무 말이나 뱉은 것 같은데...”
“전혀요. 기자 생활 5년 동안 이렇게 알찬 답변들은 오랜만입니다.”
“...5년이요?”
그 말에 아차 싶었다. 여기선 5년 차가 아니었지. 나는 능청스레 웃으며 말이 헛나왔다고 정정했다.
“아무튼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급하게 오게 되어 질문이 알차지 못해 속상하네요. 다음에 또 하게 되거든 그때는 열심히 준비 해올게요.”
“또 해주신다면 저 역시 성심껏 준비해오겠습니다.”
수첩을 덮고 수첩과 연필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그가 물었다.
“만년필이 아니라 연필을 쓰시네요?”
“만년필은 영 무거워서요. 손에 익지 않네요. 원고 쓰다 보면 팔도 좀 아프고.”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 문을 완전히 닫고 보니 벌써 다섯 시였다. 내가 손목시계를 보며 경악하자 그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리 일곱 시까지 보기로 했죠?”
“네. 아직 다섯 시네요.”
“아직이 아니라 벌써예요! 저 원고 후딱 내고 후딱 올게요. 연습 적당히 하시고 이따 봬요. 인터뷰 고마워요, 제노 씨!”
“예? 예. 고생하셨습니다, 기자님.”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그에게 손을 휘휘 저어 인사를 건네곤 공원 입구를 향해 내달렸다. 신문사까지 그냥 뛰어갈까 하다 인력거 한 대가 지나가기에 냉큼 잡아탔다. 암만 뛰어봐야 돈이 최고다, 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착한 인력거꾼에게 값을 지불하고는 얼른 신문사로 튀어 들어갔다. 앉자마자 원고지를 펴는 나를 보며 현우 선배가 혀를 내둘렀다.
“이러니 네가 단번에 뽑혔지. 대단하다, 대단해. 대체 어디서, 어떻게 따왔냐?”
“인생은 학연, 지연, 그리고 우연입니다.”
“우연?”
“그럴 일이 있어요. 저 일곱 시까지 다 써야 하니까 말 걸지 마십쇼!”
귀에 연필을 꽂고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제출용 원고이므로 연필이 아닌 만년필을 들었다. 묵직한 무게감에 괜히 비장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수첩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막힘없이 인터뷰를 써 내려갔다. 시간은 벌써 다섯 시 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BGM Be My Light (inst.)
“미안해요, 너무 늦었죠.”
부장의 요구에 맞춰 수정을 좀 거치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다. 최대한 달린다고 달렸는데, 벌써 일곱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담벼락에 기대서있는 그의 앞에 서서 헉헉대자 눈을 크게 뜬 그가 나를 보았다.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내가 민망하지 않게 해주려는 것인지 자신도 방금 왔다는 말을 덧붙이며 그가 손수건을 건넸다. 잠시 내가 숨을 고르는 걸 기다려주던 그를 붙잡고 극장 안으로 향했다. 저녁 먹고 영화를 보기 좋은 시간대에 사람이 많은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사항인가보다. 북적한 틈을 비집고 자리에 앉자 잠시 후 실내의 불이 꺼진다. 상영관까지 들어온 건 처음이라 이리저리 신기하게 둘러보는 나와 달리 제노는 많이 와본 사람처럼 익숙한 자세로 앉아 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일 층엔 객석이, 이 층엔 소규모 악단이, 삼층엔 영사실이 있는 듯 보였다. 스크린 옆 무대에 서 있던 변사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단번에 잡음이 줄었다. 무성 영화라 변사가 대신 해설해주는구나. 그는 화면이 나오는 시점에 맞춰 배우들의 목소리를 대신 연기하기도 하고, 때때로 줄거리를 요약해주기도 했다. 원래 보던 영화와는 완전히 달라 좀 낯설기는 했지만 나름 그만의 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꽤 인기 변사인 모양인지 처음인 내가 봐도 연기와 해설에 능했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관객들이 울고 웃었다.
“변사가 아닌 배우의 목소리가 나온다면 어떨까요?”
은은한 미소를 짓고 극을 보는듯하던 제노가 불쑥 속삭였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자 그는 여전히 스크린을 응시한 채 말했다.
“영화를 찍을 때부터 목소리도 함께 담을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뭐지. 이 사람도 미래에서 온 거 아냐? 멀뚱멀뚱 그를 보고 있으니 그가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을 본 그가 멋쩍게 웃으며 뒷목을 긁적였다.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소리인가요.”
“아니요!”
순간 주위의 시선이 집중됐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꾸벅이며 입술을 꾹 닫았다, 시선이 분산될 즈음 그를 향해 속삭였다.
“엄청 좋은 생각이에요. 아마 미래엔 의자도 막 움직이고 냄새도 날걸요? 바람도 불고, 눈도 내리고.”
“...예?”
이번엔 그가 나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한 백 년 후쯤은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안될 것도 없잖아요. 그리 말하며 웃자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백 년 후라면 안될 것도 없겠다는 얼굴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니 배가 고팠다. 주린 배를 움켜쥐자 근처에 새로 연 경양식 식당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꽤 걸어야 한다더니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걸으니 금방이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창가에 자리 잡은 우리는 돈가스와 오므라이스를 하나씩 시켰다. 일제 강점기에 와서 경양식을 다 먹어보고, 호강한다 싶었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잘 먹었어요 제노 씨. 원래 제가 사야 하는데, 인터뷰 값으로.”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대접해야지요.”
부른 배를 통통 두들기며 걷는데 양옆으로 학생들이 급하게 뛰어갔다. 늦겠다, 얼른 가자! 벌써 시작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그들의 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도 점차 걸음을 빨리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일까요?”
“아, 불꽃놀이 때문일 겁니다.”
“불꽃놀이요?”
“예. 여름철만 되면 하나비라고 불꽃놀이를 하는데, 한강 다리가 휘청일 정도로 인파가 몰립니다.”
“저리들 뛰어가니 그럴 만도 하겠네요. 어디서 하는데요?”
“사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창경궁에서도 보일까요?”
“글쎄요. 워낙 크게 해서 보일 것도 같습니다.”
“우린 거기서 볼까요?”
거절하지 못하도록 웃으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처에 창경궁이 있던 터라 오래 걷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불꽃놀이를 제대로 보려는 인파는 모두 한강으로 빠졌는지 창경궁엔 드문드문 연인들 혹은 여인들 무리만이 거닐고 있었다. 높지 않은 구두인데도 발이 영 불편해서인지 발볼과 종아리가 당겼다. 걸음이 어설퍼질 무렵 제노가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벤치에 나를 앉힌 그는 물끄러미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 시선의 끝은 내 발을 향해 있었다.
“부었습니다.”
“안 신던 걸 신어서 그래요. 오늘 마지막일 줄 알고.”
“마지막이요?”
“그럴 일이 좀 있었어요. 근데 제노 씨 인터뷰 덕에 목숨을 연명했네요!”
“근처 신 가게는 다 닫았을 텐데...”
“아유, 괜찮아요. 집까지도 금방인걸요. 그리고 좀 앉아 있다 보면 금방 괜찮아져요.”
다 진 벚꽃잎들이 바닥에 짓물러 뒹굴었다. 벚나무가 이리 많으면 봄에 절경이겠구나, 구두 끝으로 벚꽃잎을 툭툭 건들였다.
“봄에는 벚꽃놀이하러 사람들이 많이 오겠어요. 제노 씨도 봄에 와봤어요?”
“아니오. 저는 창경궁에 잘 오지 않습니다.”
“왜요?”
“빼앗겨 이름도 바뀌고 타국에서 온 나무를 품어야 하는 이곳이, 어쩐지 서글퍼서요.”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아,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네. 괜히 마음이 무거워져 입술을 깨물고 있으니 그가 손을 저으며 변명했다.
“순전히 저만의 생각이니 괘념치 마세요. 그냥 저의 생각이 그러할 뿐이지, 창경궁을 즐겨 찾는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 제가 보수적인 탓이지요.”
“아니에요. 제노 씨 말이 맞아요. 하여튼 이 원숭이 새끼들이 문제야.”
“예?”
“아니에요. 어, 불꽃놀이 시작한다!”
까만 밤하늘 위로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올랐다. 그를 시작으로 하나, 둘 크고 작은 불꽃들이 펑펑 터졌다. 멀리서 터지는 모양인지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분위기는 낼 수 있었다.
“우리가 던지는 것도 저렇게 펑펑 터졌으면 좋겠다. 그쵸.”
불발 없이 펑펑 터져서 다 성공하면 소원이 없겠네. 펑펑 터지는 불꽃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러게요, 하며 같이 웃을 줄 알았는데 들려오는 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왜요? 하고 입 모양으로 물으니 작은 피딱지가 진 입꼬리가 한참 후에야 호를 그리며 휘어졌다.
“이정 씨가 그리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라서요.”
그러면서 그가 내 볼을 간지럽히던 잔머리를 귓가에 꽂아주었다. 아주 조심스러운 그 손길에 괜히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캄캄한 하늘 위로는 여전히 불꽃들이 소박하게 터지고 있었다. 펑. 펑.
꼭 여기서 끝내고픈 마음에 평소보다 분량이 길어졌습니다!
제가 못다 핀은 아마 6편 내외일 거라고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있는데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좀 남아있어서.. 아마 10편 내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자줏빛깔을 퍽 좋아하지요.”는 <조선 영화의 길>에 실린 실제 인터뷰 답변을 인용하였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라서 꼭 넣고 싶었어요 ^___^ 퍽 좋아하지요. 라는 저 말투와 ‘자줏빛깔’이라는 단어가 너무 좋아서 몇 번이고 곱씹어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뜬금없는 포인트죠 ㅎㅎ
11월 달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여러분♡ 늘 진심으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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