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경성제대 교복 입은 가짜 대학생, 절도 사기에 여성 능욕
조선일보 2022. 11. 19
[뉴스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 고학력 선망의 그림자
1924년 설립된 경성제대 본부와 법문학부 건물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본적을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에 둔 고희도는 경성제국대학 학생의 정복정모(正服正帽))를 가짜로 만들어서 쓰고 대학생으로 가장한 후 경성,개성의 두어 곳에서 이십여 회의 절도 사기를 범행하였고, 또 대학생을 빙자하야 양가처녀를 유인 능욕한 것이 오륙인이라고한다.
이러한 대학생의 정복과 정모를 입고 썼음으로 세상에서는 다소 그를 학생의 신분으로 신용하였기 때문에 그 범죄가 용이하게 된 것이요, 더구나 어린 양 같은 처녀들이 그가 대학생이라는 것을 존경하여 그에게 친하다가 유인되어 능욕까지 당하였다 한다’(‘대학생이란 무엇’, 조선일보 1929년 10월25일)
◇ 연애하려고 가짜 대학생 행세
일제시대 신문에는 ‘가짜 대학생’기사가 자주 등장한다. 일본 유학생 또는 경성제대생이라고 속인 사기꾼이 줄을 이었다. 절도나 성폭행 같은 중대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연애를 하려고 가짜 대학생 행세를 했던 이들까지 있었다. 고학력 선망이 부른 일탈이었다.
아현동에 사는 스무살 김경길이란 젊은이는 집 앞에서 자주 마주친 여자전문학교생의 미모에 반했다. 관심을 끌어보려고 예과생 정복, 정모에 망토까지 사서 입고,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그러다 하필 진짜 예과생에게 걸렸다. 미심쩍은 진짜 경성제대생은 신고했고, 김경길은 서대문 경찰서에 끌려갔다.(‘이번엔 연애에 성공코저 가짜 대학생 노릇’, 조선일보 1938년 4월8일) 제대(帝大)생이라면 우러러보던 시절이었다. 경성제대(당시 城大로 줄여 불렀다)는 1945년 광복 때까지 조선에 단 하나밖인 정규대학이었다.
여학생과 연애하기 위해 가짜 대학생 행세를 한 청년이 경찰에 붙잡혔다는 조선일보 1938년 4월8일자 기사.
◇ 朝鮮帝大가 원래 명칭
조선에 최고학부인 대학을 세우자는 운동은 3.1운동 직후인 1920년 조선교육회 설립발기회가 발족하면서 시작됐다.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했다. 전국에 지부를 잇따라 설치하고 대학설립을 위한 모금에 나섰다.
조선의 교육열에 놀란 일제는 민립대학 설립을 탄압하고 경성제대 설립으로 맞불을 놓았다.1924년 5월 예과, 1926년 5월 본과가 출범하면서 경성제대가 탄생했다. 첫 입학생 원서교부 때만해도 이름이 조선(朝鮮)제국대학이었다. 이렇게 부르면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라 하나의 제국으로 인정해주는 꼴이 된다고 해서 서둘러 경성제국대학으로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합격자 발표 때는 ‘경성제대’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 전문학교 졸업생이 최고 지식인
당시엔 2년제인 예과(豫科)를 졸업해야 대학 본과에 들어갈 자격이 생겼다. 문과, 이과 각 80명씩 160명을 뽑기로 했는데(실제론 170명 합격), 조선인 합격자는 45명 밖에 안됐다. 식자들은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의 3분의1밖에 안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당국의 교육정책이 조선인을 도외시하고 일본인만을 본위로 하는 괴상한 현상을 볼 때에 당국의 교육정책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는 동시에 돌이켜 교육의 보장이 없는 우리 민중의 장래를 위하여 통탄을 말지 아니한다.’ 조선일보 사설(‘조선대학 시험전말을 듣고’,1924년4월3일)은 입학시험의 민족차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일본 역사 문제가 출제되고, 일본식 한자 훈독과 영어 발음 문제가 조선인에게 불리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 경성제일고보, 15명으로 최다 합격
입시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고등보통학교(고보)는 물론 보통학교 입학경쟁도 극심하던 시절이었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성제일고보(훗날의 경기고)가 15명의 합격자를 내, 조선인 전체 합격자의 3분의1을 차지했다. 평양고보(6명) 대구고보(5명)순이었다. 사립 명문에서도 10명의 합격자를 냈다. 휘문 3명과 중앙, 보성, 배재에서 2명씩, 그리고 양정고보에서 1명의 합격자를 냈다.
◇ 일선융화의 결실? 웃기는 소리
1924년 5월 성대(城大) 예과 시무식엔 당시 총독부 2인자인 아리요시(有吉忠一) 정무총감이 참석했다. 성대 설립은 ‘일선융화’의 결실을 거두기 위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조선인도 일본인처럼 인재를 배출하게 하기 위한 시책이라고 자랑까지 했다. 곱게 넘길 수 없었다. ‘하필 일본인을 표준할 것 무엇있나. 유길 총감의 안계(眼界)도 몹시 협착(狹窄)하군’(‘民聲’, 조선일보 1924년5월17일) 신문은 대놓고 정무총감을 비아냥댔다.
◇ 둥근 교모의 예과생, 본과생은 사각모
성대 예과생은 흰 테를 두 줄 두른 둥근 모자에 느티나무 잎사귀가 세갈래로 갈라진 모표를 붙였다. 일본 고등학교 교모를 본땄다. 본과생은 사각모를 썼다. 검은 색 교모와 교복, 그리고 망토를 걸친 제대생은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았다. 지방 대도시는 물론 경성에서도 경성제대생을 볼 일이 많지 않아 교복을 번듯이 입고 나타나면, 깜빡 속을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입학생과 졸업생 명단이 매년 신문에 실렸고, 졸업 후 진로가 주요 잡지의 기획으로 나올 정도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경성제대를 졸업한 조선인 학생은 810여 명에 불과할 만큼 희귀했다.
경성제대 2회 졸업생인 이효석은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 총독부 검열계에 취직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극소수 엘리트가 들어간 경성제대 출신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조선일보 DB
◇ 총독부 검열계 취직했다가 지탄받은 이효석
경성제대 졸업생은 관리, 의사, 교수 등 전문직으로 진출했다. 법과 출신은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총독부 고위관료로 진출한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문학, 사학, 철학 등 인문학 출신은 진로가 마땅찮았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이름난 이효석이 대표적이다. 이효석은 1925년 법과 진학이 보장된 문과 A조로 경성제대 예과에 들어갔다. 예과에 입학하던 해 매일신보 신춘문예에서 선외가작에 뽑혔다. 이효석은 문학의 꿈을 키웠고, 본과에 올라가면서 문학으로 바꿨다.
대학을 졸업한 이효석은 결혼까지 했으나 취직을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대학 스승의 주선으로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했다. 동료들의 글을 검열하는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문단의 기대주 이효석이 검열관이 되자 비판이 쏟아졌다. 낙담한 이효석은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으로 내려가 경성농업학교 영어 교사로 일했다. 일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평생 큰 상처로 남았다. 입시철에 문득 떠오른 100년 전 경성제대 후일담이다.
◇ 참고 자료
이충우, 최종고 지음, 다시보는 경성제국대학, 푸른사상, 2013
최병택, 예지숙 지음, 경성리포트, 시공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