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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부활 제5주일 | 이민의 날(2013-04-28)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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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천주교회는 주교회의 2000년 춘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해외 원조 주일’의 바로 전 주일을 ‘이민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사도좌와 뜻을 같이하여 정한 이민의 날은 2005년부터 5월 1일(주일인 경우)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 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 이민의 날을 정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사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올해는 5월 1일이 주일이 아니므로 오늘 이날을 지낸다.
오늘의 전례 ▦ 오늘은 부활 제5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면서 제자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보여 주셨고,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는 당신의 사랑을 본받아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십니다. 과연 우리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얼마나 본받고 있는지 가만히 돌아다봅시다. <성 베드로 샤넬 사제 순교자와 성 루도비코 마리아 그리뇽 드 몽포르 사제 기념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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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미사 추천성가] : 입당 성가 : 134번 거룩하다 부활이여 예물준비 성가 : 213번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220번 생활한 제물 511번 미약하온 우리 제물 영성체 성가 : 153번 오소서 주 예수여 167번 생명이신 천상 양식 175번 이보다 더 큰 은혜와 파견 성가 : 132번 감사의 송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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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부활 제5주일 / 이민의 날(2013-04-28) | 미사전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입당송] : 시편 98(97),1-2 참조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 드러내셨네. 알렐루야. <대영광송>
[본기도] :
하느님, 성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과 만물을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가 사랑의 계명을 삶의 규범으로 삼아, 하느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신 것처럼 저희도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힘을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말씀의 초대] :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첫 번째 선교 여행을 한 뒤 안티오키아로 돌아와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에 대해 보고한다. 그들은 복음 선포가 늘 쉬운 것이 아니라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제1독서). 파트모스의 요한은 환시를 통하여 새 도읍 예루살렘이 이 세상에 내려오는 것을 본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사람들 가운데에 계시며 모든 이의 고통을 없애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상징한다(제2독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수난 전날 저녁에 당신의 죽음에 대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신다. 곧 당신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을 교회에 보고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4,21ㄴ-27 그 무렵 21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시편 145(144),8-9.10-11.12-13ㄱㄴ(◎ 1 참조)
◎ 저의 임금이신 하느님,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또는 ◎ 알렐루야.)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당신의 위업과 그 나라의 존귀한 영광, 사람들에게 알리나이다. 당신의 나라는 영원무궁한 나라, 당신의 통치는 모든 세대에 미치나이다. ◎
[제2독서] :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 요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21,1-5ㄴ 1 나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5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환호송] : 요한 13,34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알렐루야.
[복 음] :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31-33ㄱ.34-35 31 유다가 방에서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지향기도] :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 형제 여러분, 우리 모두 하루하루 삶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정성을 다하여 기도합시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의 주님,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를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어, 교회가 봉사와 친교의 정신으로 이 세상에 기쁨과 평화를 전하게 하소서. ◎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2. 우리나라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 이 나라를 주님의 빛으로 이끌어 주시어, 국민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언제나 진리와 참평화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소서. ◎ 3. 이민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조국을 떠나 살아가는 이들을 돌보아 주시어, 그들이 어려움을 이겨 내고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특별히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이들에게 외로움을 이기고 굳건하게 살아가도록 용기를 주소서. ◎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살아가는 저희를 굽어살피시어, 저희가 주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며, 진정한 이웃으로서 소외된 이웃을 찾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게 하소서. ◎
† 주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주님의 자녀들이 드리는 이 기도를 즐겨 들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예물기도] :
하느님, 이 거룩한 교환의 제사로, 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과 저희를 하나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룩한 진리를 마음으로 깨닫고 삶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부활 감사송 참조>
[영성체송] :요한 15,1.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몸소 사랑의 영약이 되시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신 우리도 그분께서 주시는 사랑의 힘으로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노력뿐 아니라, 그분께서 주시는 사랑에 힘입어 서로 사랑하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
[파견] : <부제 또는 사제가 백성을 향하여 말한다.>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 하느님 감사합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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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부활 제5주일(2013-04-28) | 미사 강론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 [주일강론-1] :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오래전 선배 신부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본당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활동하시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아침 일찍부터 매일같이 새벽미사에 오셔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성당의 여러 봉사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성당의 모든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살아 있는 성녀’라고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할머니의 장례미사를 치르고 난 후 며느리에게 말했습니다. “시어머니께서 성당의 모든 사람들이 존경할만큼 열성적인 신앙인이었으니 며느님도 그분의 뜻을 받들어 예비자 교리에 나오세요.”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흔들며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신부님, 말씀은 고맙지만 저는 싫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겠습니다. 제가 성당에 나가게 되면 죽어서 천국에서 시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될텐데, 생각만 해도 정말 싫습니다.” 집 밖에서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되었던 그 할머니가 정작 함께 살고 있던 며느리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과 봉사의 행위는 사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말씀은 없지만, 이것만큼 실천이 어려운 말씀도 없습니다. 미움과 증오에 빠지기 쉬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 입니까? 그래서 사랑에는 의지가 필요하고 노력이 중요합니다. 이웃 사랑은 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질 때에 비로소 완성됩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사랑에 대해 분명하게 가르쳐주십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말처럼 쉬운 것은 없습니다. 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사랑은 불완전한 사랑이며 거짓 사랑입니다. 또한 사랑의 마음과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 어떤 사랑의 행위라도 올바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시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강요되는 계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결과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당신들, 그리스도인이 우리와 다른 점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의 삶,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으로 보여 줄 수밖에 없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리스도처럼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행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간디가 남긴 유명한 말을 한번 쯤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말씀자료 : 허영엽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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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2] :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
학교에는 신앙을 가진 아이들보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아이들이 훨씬 많고, 심지어 태어나서 신부를 처음 본 아이들도 많다. 그래서 신입생들은 늘 나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 많다. “어떻게 신부님 되실 생각을 하셨어요?” “왜 혼자 살아요?”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긴 옷(수단) 입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이런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는 게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의 관심이라 생각하고 성실하게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처음엔 검은 수단을 입고 수업하는 나를 보고 경계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고 편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 사제로서, 또 교사로서 보람을 느낀다.
작 년엔 이런 일도 있었다. 개신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학생이었고, 장래희망이 ‘목사’인 친구가 있었다. 우연한 기회로 메일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처음 우리학교 왔을 때는 종교가 달라서 많이 불편했고, 특히 신부인 내가 하는 철학 수업을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매주 수업을 들으면서 나에 대한 경계심과 의심이 사라지고, 나중에는 내 수업을 너무 기다리게 되었다면서 “중요한 청소년 시기에 정신적인 멘토가 되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 는 얘기를 들었다. 이렇게 일상적인 만남에서든, 교육 현장에서든 관계의 질을 높이려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 상대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어떤 변화도 어떠한 발전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바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가장 좋은 사람, 더나가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믿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일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연대를 이루고 그 안에서 더 큰 사랑의 결실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도 바로 이것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다른 사람이 감히 하지 못하는 놀랍고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 - 그 사람이 낯선 이방인이라면 더욱 더 - 에게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장 따뜻한 사랑의 미소를 한 번 건네주는 것은 어떨까?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자료 : 강진기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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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3] : '이민의 날'
오늘은 세계 이민의 날입니다. 고국을 떠나 낯선 나라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이주민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관심을 갖고 격려하는 날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우리나라의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사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로 하고 ‘이민의 날’을 지내고 있습니다. 주교회의 2000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는 해마다 ‘해외 원조주일’의 전前 주일을 ‘이민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으나, 2005년부터는 5월 1일(주일인 경우)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 오고 있습니다.
올해가 아흔아홉 번째 해를 맞고 있으니, 이민은 그만큼 우리 삶에서 중요하고 실질적인 문제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구의 이주사목은 걸어온 햇수에 비해서 아직은 걸음마 단계이며, 이주민과 이주사목에 관한 신자들의 인식 역시 부족한 실정입니다.
이민移民은 사전적인 의미로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주민移住民은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사는 사람. 또는 다른 지역에서 옮겨 와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140만이 넘는 이주민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경남지역에는 경기도와 서울에 이어 전국에서 세번째로 많은 이주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목적과 이유로 한국에 온 이주 근로자들과 한국인 남편과 결혼한 이주 여성들이 대부분입니다.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이주민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요사이 본당에서도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다문화가족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자신들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물설고 낯설은 이 땅에 와서 힘들고 고달픈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주민들을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수난전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스승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이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당부는 당연히 제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힘들게 살아가는 이주민들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듯이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어떤 도움을 주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이주근로자들과 다문화가족들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부터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가족이고 형제자매라는 넓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존중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이주민들이 하나같이 바라는 것도 거창한 도움이 아니라 바로 편견 없는 따뜻한 환대입니다.
오늘 이민의 날을 보내면서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주민들이 주어진 시간과 삶의 자리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좀 더 많은 기도와 관심 그리고 따뜻한 환대를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했으면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자료 : 임효진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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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4] : 서로 사랑하여라
겉으로 보기에는 참 잘 어울리고 정이 넘치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같이 맞벌이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서로를 위해 주는 모습에 다들 부러워하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게 되면서부터 두 사람의 이야기에 맞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한 분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봐도 다들 전혀 그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여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게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느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어느 날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한 형제님께서 찾아와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들 자기들을 부러워하고 참 행복한 것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오늘도 아침부터 심하게 다투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이렇게 사제관으로 찾아 왔다는 겁니다. 뭐가 문제인지 이야기를 들어보니 갈등의 시작은 아주 단순하고 작은 것이었습니다. 형제님은 모든 것을 아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데 아내는 단 한 번도 고마워하지 않고, 심지어는 자기가 큰 맘 먹고 해준 선물들조차도 그냥 버려둔다는 겁니다. 오늘 아침에도 반찬 때문에 싸웠다는 겁니다. 자기는 생선이 싫은데 아내는 생선을 너무 자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꼭 생선 머리는 자기를 준다는 겁니다. 그동안은 참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또 생선구이를 해서 머리를 주기에 안 먹고 있었더니 혼자서 다 먹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밥도 안 먹고 싸움만 하고 출근했다는 겁니다. 사소한 이야기 같긴 한데 너무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기분이라도 풀어주려고 내가 자매님께 잘 이야기 해보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달래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미사 후에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자매님 이야기는 달랐습니다. 결혼하기 전부터 남편은 생선 머리가 제일 맛있다고 잘 먹기에 자기는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양보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편은 뭐든지 자기 식으로 한다는 겁니다. 옷을 사도 자매님께 색이나 모양을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비싼 것을 사오고, 또 그것을 바꾸면 자기가 한 선물을 성의도 모르고 바꾸었다고 뭐라고 하면서 자기가 사준 것을 입고 다니라고 강요하니 미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맞벌이를 하다 보니 주말에는 같이 외식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가족이 함께 하면 좋은데 남편은 주말만 되면 성당에서 살다시피 하니 싫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교우들 앞에서 화를 낼 수도 없고 답답하다는 겁니다. 결국은 두 사람을 같이 불러서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두 분이 서로 배려해 주는 것은 좋은데 무엇인가를 해 주기 전에는 반드시 이게 좋은지 저게 좋은지, 어떻게 하는 게 당신 마음에 드는지 꼭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두 사람이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단 한 번만이라도 이게 좋은지 물어보기만 했어도 다툴 일이 없었을 텐데 그게 문제였던 겁니다. 서로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맞춘 사랑을 한 것이지 결코 상대방을 배려하는 사랑을 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랑은 반쪽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나만의 희생으로 사랑이 될 수는 없습니다. 상대방을 위한 나의 희생이 있어야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상대방을 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랑이 감사하는 마음과 함께 또 다른 사랑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을 하도록 합시다............◆
[말씀자료 : 김원현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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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5] : 영광이.. 이주민과 함께....
신앙생활의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은 서로 영광을 주고받는 관계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일상생활 또한 이와 같아야 하겠다. 나의 영광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이는 예수님의 유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유언과 같은 새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나의 영광을 위한 사랑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 사랑 실천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의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여주신 방법으로 사랑 실천을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제1독서에서 만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수님의 사랑의 유언을 충실히 실천한 참된 신앙인들이다. 이들은 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7곳의 도시를 순례하며 자신들의 영광과 방법이 아니라, 예수님께 받은 사랑을 전하였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사랑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처럼, 그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많은 환난을 겪어야’함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교회 신자들에게 하느님께 의탁하고 믿음에 충실하라고 가르쳤다. 이들의 생활은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는 제2독서의 예언처럼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 신자들을 보고 당시 안티오키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으로 불렀다고 한다. 자신들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모습으로 보여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 은총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복음 말씀이 실현된 것이다.
오늘은 ‘이민의 날’이다. 내가 예수님께 받은 사랑처럼, 이주민들에게 사랑을 실천한다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거룩한 일이 실현된다는 것을 묵상해본다. 기쁜 맘으로............◆
[말씀자료 : 이해일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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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6] : 예수님 사랑의 모습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같은 새 계명을 잘 준수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들을 사랑하셨는지 그 사랑의 방법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그 사랑의 방법들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던 중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의 발도 닦아주셨습니다(요한 13,1-20 참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제자들 사랑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도 일상에서 서로의 발 씻음 예절을 자주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또 다른 사랑의 방법은, 한 여인이 다가와 당신의 발에 비싼 순 나르드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드리도록 허락한 것입니다(요한 12,3 참조). 사랑을 잘 베풀기 위해서는 사랑을 잘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마리아의 선행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자 하는 생각에 불을 지핀 동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얘들아”(요한 13,33)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부모와 자녀 간의 가장 친밀한 호칭입니다. 이 같은 호칭은 복음서에 세 번 나옵니다(마르 10,24; 요한 13,33; 21,5). 희랍어 성경에는 세 번 다 다른 유사 단어가 사용되나, 세 단어 모두 예수님의 자애로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친밀함의 표현을 부부 사랑의 모습에 견주어 보았습니다. 부부가 만나 서로 사랑하는 과정에는 세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느끼는 열정의 기간은 불과 2년(혹은 30개월) 정도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사랑의 화학물질이 더는 생성되지 않고 오히려 사라지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이 식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감정과 이성적인 매력을 느끼는 열정이 점차 사그라질 즈음,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는 다음 두 단계는 친밀감과 책임감을 서로 나누는 단계입니다. 의지적인 노력으로 친밀감(예수님의 제자 사랑처럼)을 계속 유지하고, 서로 책임감을 느끼며 행동할 때 부부 사랑이 지속될 것입니다.
오늘은 ‘이민의 날’입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사목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날입니다. 이방인들까지도 사랑의 품에 끌어안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이방지역 복음 선포를 위해 제1차 선교여행을 다녀 온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열정(오늘 제1독서)과 열매들에 대해 묵상해 보게 됩니다.........◆
[말씀자료 : 이석재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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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7] : 고단하고 가혹한 사랑
때론 어떤 사랑이 의심받을 수는 있어도, 사람의 삶에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대와 세대가 달라져도 여전히 사랑은 관심의 대상이 되어 노래로 불리고 행복과 불행을 빚어내는 동기가 되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돈이 있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는 요즘의 ‘사랑’과 요한의 ‘사랑’이 같은 말일까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동기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말로써 자신의 복음을 시작한 요한은 예수님을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으로 그립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요한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를 되새기며, 우리가 나누는 서로의 사랑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언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에게 ‘사랑’은 또한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의 그 지극한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영상매체와 쇼비즈니스에 익숙한 우리가 기대함 직한 볼거리로서의 광채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일깨워 주어 삶을 밝혀주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요한이 전하는 그 ‘사랑’은 단순히 느낌이나 열정이 아닌 (도로시 데이의 말처럼) ‘고단하고 가혹한’ 행동입니다.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그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은 절망하거나 저항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도 가끔 묻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걸까요?” 이 물음을 이렇게 바꿔 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있기는 한 걸까요?”, “우리가 지금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그 가치는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외로운 일이지만 사소한 일상조차도 사랑으로 채우려 부단히 노력했던 도로시 데이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은 ‘사랑’이며 그 사랑은 공동체와 함께 온다고 확신했습니다. ‘사도들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구성원들인 오늘의 우리는 어떤 확신으로 살고 있는 걸까요?.............◆
[말씀자료 : 이성균 신부/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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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8]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이 노래 가사의 뜻은, 눈물 없이는 즉 아픔 없이는 사랑하기 어렵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유다가(스승을 팔아넘겨 죽게 하려고)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왔다.” 당신 죽음의 시간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영광의 시간이라고 하십니다. ‘영광’ 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사전에 보면 ‘찬란하게 빛날 정도로 영예로움’ 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인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영광과는 거리가 먼 치욕스런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게 영광이라고 하시는 것은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그것은 십자가가 당신의 참모습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하고 말씀하신 바로 그 사랑을 십자가에서 몸소 보여주심으로써 말씀과 행적을 통해서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온 인류에게 더없이 확실하게 증언하셨던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4~35).
앞으로는 어떤 사람이 정말 그리스도인인지 이 한 가지만을 기준으로 판가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완벽하게 보여준 예수님을 따라 그분의 제자들도 오로지 사랑을 기준으로 스승의 참된 제자인지 아닌지를 사람들이 식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랑해 본 사람은 압니다. 어렵사리 내민 사랑의 손길이 외면당하거나 무시당했을 때의 그 쓸쓸함에 대해, 다시는 섣불리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며 차츰 굳어져가는 내 마음을 말입니다. 그만큼 사랑은 지켜내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거듭 사랑을 고백시키신 것도 험난한 세상에서 사랑을 지켜내고 이루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아셨기에 그리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그 쓸쓸함을 뛰어넘는 사랑을 합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쫀쫀하게 하다보니 그리 쓸쓸한 것이다, 훌쩍 뛰어넘는(사랑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로) 사랑을 하면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이 정말 영광스럽게 여겨질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시다.
우리 신앙인들의 뛰어 넘는 사랑이 이 땅의 수많은 이주노동자들을 비롯한 약자들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굳게 결심하고 실천합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요한 4,16).............◆
[말씀자료 : 오세민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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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강론-9] : 서로의 사랑이 기적을 일으킬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넘치는 시선으로 교회는 오늘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의 신앙인공동체를 원하시는가? 오늘 말씀은 그 답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오로의 1차 선교 여행의 결론 부분입니다. 바오로는 각 공동체에게 그리스도 신자로 사는 삶이 부분적으로 또는 상당히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은 올바른 길로 가는 표지임을 전합니다. 그 길이야말로 바로 예수님 자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동안 걸어간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도 바오로도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사도 14,22).
오늘 제2 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나라에서 우리의 것이 될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요한은 땅과 바다의 소멸을 알리면서 시작합니다(묵시21, 1 참조). 이는 죄나 사탄이 있을 여지가 없는 하늘나라를 알리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 울면서 집에 오는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어머니처럼, 하느님께서 하늘나라에 당도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요한에 의해 묘사된 이 빛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모습이 정말로 현실이 될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힘든 노력은 계속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매우 쉽게 유혹을 당하고 자주죄에 떨어지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우리는 어떻게 지금 하늘나라에 있는 우리 형제들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막 떠나시려 할 때, 이러한 변화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서로의 사랑이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기를 배워라. 하느님께서는 조건없이 사랑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사랑하는 것이 그분의 유일한 일이다. 너희도 그처럼 사랑해야 한다.”
오늘 말씀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나서야 우리는 처음 설명할 때 우리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 신자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시는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세례때 당신과 우리가 맺은 계약에 충실하라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아끼지 말라고, 어떤 희생이 있더라도 모든 이를 사랑하는 데 헌신하라고, 우리 신앙인형제들과 기쁨과 슬픔을 나누라고, 머지않아 영원히 천국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삶을 착실하고 기쁘게 살라고...........◆
[말씀자료 : 서용석 신부 / 편집 : 까따꿈바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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