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
엡1:3-12
최근 미국에서 리메이크되고 있는 벤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에도 이미 들어와서 상영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50년전 1962년 처음 이 영화가 제작될 때에 무려 1500만달러를 들어서 제작기간 10년동안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출연진만 하더라도 12만5천명이 훌쩍 뛰어넘습니다. 8번이나 재개봉되었던, 아케데미 11개 부문을 수상했던 영화입니다.
벤허 허씨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그 당시에 벤허라고 하는 부자 가문의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신임 총독이 부임을 하는데 축하 행렬에 참석을 했다가 벤허의 여동생이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총독의 머리에 큰 상처를 내게 되었습니다.
총독을 수행하던 메살라라는 장교가 있는데 벤허의 옛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메살라는 벤허의 어머니, 여동생, 연인을 옥에 가두고 모든 재산을 압수하고 벤허를 군용선 갤러리선을 젓는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어느 날 이 갤러리선이 해적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벤허의 기지와 용맹으로 아리우스라는 사령관이 구사일생 살아납니다. 아리우스 사령관의 눈에 띄어서 아리우스 가문에 아들이 됩니다. 아들이 되는 반지를 그에게 끼워주고 아리우스 가문의 모든 권한과 신분을 가지게 됩니다.
벤허는 자기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곳으로 막은 내려집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 본문 아들이 되었다. 양자됨의 교리입니다.
죄의 노예가 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이제는 사단의 노예가 되어서 사단의 갤러리선이라는 노 젖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더더구나 범죄하여 하나님의 동산에서 쫓겨나서 살 수 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수님이 구원해 주시고 성령님이 도장을 찍으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신분상승, 신분의 변화가 있다고 한들 이것과 감히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높은 하늘에 올라가서 발견한 기가막힌 진리 가운데 가장 귀한 진리 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하는 감격을 에베소서를 통하여 기록해 가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의 귀족이나 부자의 눈에 띄어서 벤허처럼 노예가 부잣집에 양자로 들어가는 일이 왕왕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최고의 뉴스거리 하나가 있었습니다.
한 노예가 황제 아들이 됩니다.
아들이 성장하여 황제가 되는 것입니다.
주후 284년부터 무려 25년동안 로마를 통치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입니다.(로마의 황제 285-305 재위?)
모르긴 하지만 가장 인생 밑바닥에서 가장 인생의 절정을 경험 한 최고의 변화, 최고의 신분상승을 경험했던 인물이 있다면 이 황제가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황제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하는 것 이 훨씬 더 어마어마한 신분 상승, 신분 변화가 아니겠습니까?
죄의 노예, 마귀의 자식, 영원히 지옥에서 살수밖에 없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성령이 우 리를 사랑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다.
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이냐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죄의 노예가 예수님의 보혈로 씻겨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어쩌면 천지창조보다도 더 엄청난 사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저주, 허물, 죄악, 모든 우리의 징벌이 내게서 다 벗겨졌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신분, 새로운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하는 이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 이게 여러분 부자 되는 일과 비교할 수 있는 일이 겠습니까?
내 자식들이 성공하는 일과 비교 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일과 내 병이 낫는 일과 그 귀한 일 들이지만 감히 비교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노예보다도 더 비참한 존재였던 우리들이 멸망 받을 수 있고 저주를 덧입고 살아 갈수밖에 없는 지옥의 권세에 휩싸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영생을 얻어서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우리가 이 사실이 엄청난 것인가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사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하는 에베소서 말씀을 읽을 때에 화들짝 놀라 야 합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야 됩니다.
가슴이 벅차올라야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오지요.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 나로 보소서 하리라”(눅15:19).
아버지를 버리고 가족들을 떠나서 먼 나라에 가서 살던 이 아들이 허랑방탕 거지 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면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할 수가 없습 니다.
그때 아버지가 말씀합니다. 아들이 돌아왔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다. 배신자가 돌아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다. 목욕을 시켜라. 새 옷을 입혀라. 송아지를 잡아라. 아들이란 것을 가리켜 주어라. 반지를 끼워라. 잔치를 벌이자. 그 아들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 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 이 즐거워하더라”(눅15:22-24)
아버지가 목욕시켜라. 새 옷을 입혀라했던 것처럼 본문 4절“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우리는 우리자신들을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흠이 없다니요. 흠투성이입니다. 많아도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흠이 없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가장 선한 일을 할 때도 악이 내 심장 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령하고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더러운 생각이 내 머릿속에 지나갑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순간에도 문득 문득 분노가 미움이 이기심이 자기 자랑이 꿈틀거리고 올라옵니다. 그게 우리입니다.
여기“흠이 없다”는 이 말은 헬라어에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아모무스(amomous) 이 말은 구약에서 백성들이 제사를 지내러 제사장에게 나아 갑니다. 성전에 나아갑니다.
그때에 양을 관찰하던 제사장이 이것은 흠이 없다.
이 제 제사 지내도 좋다. 아모무스. 그런 얘기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완벽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믿었을 때에 온전해 졌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한 예수님이 어린양 대신 그분이 아모무스. 흠이 없더라는 것이지요. 흠없는 그분의 사랑을 입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 흠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죄악은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103:12) 더러움으로 가득찼던 우리의 영혼이 흰눈보다 양털보다 더 깨끗하게 씻겨졌다는 것입니다.
흠없는 예수 안에서 우리가 흠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칭의(Justification). 여전히 죄인이지만 의롭다고 거룩하다고 흠이 없다고 깨끗하다고 하나님이 선언해 버리는 것입니다.
에베소 주변에 신들이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신이 모무스 신입니다. 정죄의 신입니다. 비난의 신입니다. 조롱의 신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을 때에 모무스 신이 정죄하는 것입니다. 비난합니다. 조롱합니다. 사단이 비웃습니다.
그런데 흠이 없다는 말은 아모무스 이제는 모무스의 신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무스의 신이 너를 조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죄할 수 없다는 겁니다.
모무스의 신이 너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그의 사랑 안에 있을 때에, 보혈의 은총이 내 죄 를 덮어버릴 때에 아모무스. 모무스의 신이 너에게 아무런 영향력이 없어지게 되 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 누가 너희를 비난 하리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가 너희를 정죄하리요.
사단이 너희를 조롱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 심판이 나에겐 없네 주의 피는 내 죄 가리네
예수님 날 위해 돌아가셨으니 심판이 나에겐 없네
정죄가 나에겐 없네. 조롱이 나에겐 없네.
사단의 비난이 나에겐 없네.
이렇게 구원한 나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고 하니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 는 거예요. 이 말을 비교적 자주 쓰는데 교인들이 목사님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얘기이겠거니 생각을 해요. 멋있는 말을 목사님이 한번 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받아 들이지를 않아요. 아니 이 세상에 예수 믿는 사람이 나 혼자도 아닌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 밖에 없는 사람인것처럼 나를 사랑한다? 말이 안된다고 생각해서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를 않아요.
이것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집안에 자녀들이 열명쯤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맏아들에게 10분의1로 사랑해요.
둘째 아들에게 10분의 1.... 10분의 1씩 나누어서 사랑하다가 막내에게 나머지 10분의 1로 그를 사랑해요. 여러분 그렇게 사랑합니까? 아들이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그 맏아들을 사랑해요. 그 막내아들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어머니는 온전히 사랑한다구요.
한국의 성도님들이 천만명쯤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의 성도님들을 사랑하는데 나에게 1천만분의 1, 너에게 1천만분의 1, 우리 모두를 천만분의 1로 사랑하시겠습니까? 한국의 하나님의 자녀 예수 믿는 사람이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한다구요. 이 지구상에 인구가 약 75억 정도 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구원받은 백성들이 약 30억 정도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데 30억분의 1로 갈라서 나 를 사랑할까요? 여러분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나를 사랑한다는 이 사실을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그만큼 우리가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 당신은 소중한 사람 당신은 존귀한 사람
이 세상에 하나뿐인 당신은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거예요.
그렇게 사랑하기로. 그렇게 속량하기로. 그런 자녀 삼으시기로. 그런 은혜를 베푸시기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 삼기로. 오늘 성경 본문에 보면 예정하셨다.
5절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정하사
9절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예정 11절 “우리가 예정을 입어” 예정
짤막한 본문 속에 “예정”이란 말이 세 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 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언제 예정하셨다구요. 4절 창세 전에 나를 선택했다고 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창1:3)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온 우주를 만들고 지구상에 모든 생물들을 만들기 이 전에 하나님의 창조계획 속에 내가 있었대요. 네가 있었고 여러분이 있었대요. 얼 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 한분 한분은 어쩌다가 이 땅에 태어난게 아닙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결혼해서 아버지 어머니 밑에 어쩌다가 태어난 존재가 아 니라는 말이예요. 내 아버지, 내 어머니의 육신을 빌려서 태어났지만 그 영혼, 창 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안에 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정입니다.
그래도 눈물이 안나지요. 그만큼 완악한 것입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교리입니다.
예정론 교리는 너무너무 신비합니다.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신학생이 교회 여자청년에게 근사하게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이 여학생이 딱지 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신학을 안답시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당신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곁에서 떠날 수 없어요. 당신은 내 아내가 되도록 하나님이 예정하셨어요.” 이렇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써 먹으라고 하는 교리가 아닙니다.
한 집안에 공부를 잘 하는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원해서 어릴 때부터 기도했습니다. 아들이 크면서 공부도 잘하지만 그림을 잘 그려요. 미대를 가겠다는 겁니다.
이제 대학을 선택해야 될 때에 아들은 꼭 미대를 가겠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의대를 가라고 합니다. 토의를 하고 논쟁을 하고 아옹다옹 하다가 아버지가 하는 말이 “야 이놈아 너는 아버지의 기도를 벗어날 수 없어.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너를 의사 만들기 위해서 기도했어. 너는 의사가 되도록 예 정되었어.” 그렇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예정 교리는 반드시 구원을 말할 때만 써야 됩니다. 구원론에서만 쓸 수 있는 말 입니다. 예는 미리 예정에 그런 말입니다. 예는 미리 이전에 그런 말입니다. 시간 적인 얘기가 아니고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훨씬 이전에~ 내가 예수를 믿기 훨씬 이전에~ 내 공로가 있기 훨씬 이전에~ 내 선행이 있기 훨씬 이전에~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은 혜에 의하여~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을 받았다. 이게 예정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창조를 하실 때에 이 세상에 누구와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 이 세상의 누구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만 우주 만물이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일들도 누구와 의논한 것이 아니고 어떤 조건을 보고 하 신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내가 하 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정, 이전이라는 것입니다. 100%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 이게 예정입니다.
예정론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이상해집니다. 예정론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미 다 선택을 해 놓았어요. 이미 예정해 놓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필요도 없고, 예수를 잘 믿을 필요도 없고, 우리가 선행할 필요도 없고, 교회 다닐 필요도 없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할텐데 뭐~ 쾌쎄라 쎄라 우리는 마음대로 놀기만 놀면된다. 그 얘기가 아닙니다. 운명론 이지요. 숙명론입니다.
예정론은 반드시 도착점으로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내가 나 같은 것이 어떻게 구원받았지~ 나 같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내 공로 때문에 구원받은게 아니란 말이예요. 내가 잘 나서 구원받은게 아니란 말이예요. 내 선행이 쌓여져서 구원받은게 아니란 말이예요. 아 이거 하나님의 은혜구나. 하나님의 사랑이구나.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고 예정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구나. 이것이 바로 예정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출발점으로 삼으면 숙명론이 되지만 도착점으로 삼으면 예정론이 되는 것입니다. 예정론은 성도들의 신앙고백이다 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으로 구원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을 펼치면 1절과 2절 서론을 쓰고 나면 이 교리가 너무 감동스럽고 너무 귀해서 사도 바울이 붓을 들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시고 우리를 속량하시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다. 성령이 책임지고 인을 치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의 백성,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다. 이게 너무 벅차서 너무 감사해서 막 쓰다 보니까 자그마치 3절부터 14절까지 12절을 쉼표도 없이 단숨에 써 내려갑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헬라어 문장 가운데 가장 긴 문장이 이 본문입니다. 12절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12절 안에 엔크리스토 =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이 12번이나 나옵니다. 평균 4절에 1번씩 나온다는 것입니다.
선택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치심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속량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됨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엔크리스토가 12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전도를 안해도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예정한 사람, 선택한 사람 저절로 구원받을 텐데 뭐~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이 복음전도를 통하여 전 달되어지고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교회 와서 신앙생 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모든 과정 신앙고백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확인되 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엔크리스토. 내가 선택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내가 예정을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모를까요? 알 수 있습니다. 어느날 누군가 복음을 전했는데 아버지 어머니가 교회 가자고 예수 믿자고 말했는 데 자연스럽게 교회를 가게 됩니다. 예수가 저절로 믿어집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러는데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늘 죽어도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언젠가부터 내 마음에 속에 딱 자리가 잡혀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저절로 믿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인 것이 저절로 믿어지는 거예요.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이 조금도 의심이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제게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벅찬 일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1:7)
7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의 노예나 우리는 공짜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바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은혜로 공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귀족이나 부자들은 돈 주고 노예들을 사서 자유를 주기고 하고 아들 삼기 도 합니다. 그런데 사단의 노예가 되고 죄의 노예가 되고 지옥의 저주 안에 우리 는 돈으로 살 수 있는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 무엇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 다.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 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게 은혜요 공짜!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은혜라고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 다.
공짜! 공짜라는 말은 싸구려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공짜로 선물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너무나도 엄청난 희생을 하셨습니다. 너 무나 어마어마한 희생을 하셨습니다. 너무 엄청난 독생자 예수님을 죽이고서야 우 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라는 말입니다.
보혈의 피. 내 어머니가 별세하시던 날 밤, 어머니 천국 가다가 사단에게 조롱을 받을까봐서, 어머니가 구원의 확신이 분명하셨지만 그래도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찬송을 하루종일 불러 드렸는데 십자가 보혈에 관한 찬송을 많이 불러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찬송 속에 예수님의 보혈에 관한 찬송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죄씻음 받기를 원하네 ♪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내의 구주의 보혈은 ♪ 속죄함 속죄함 주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 ♪ 이 세상에 모든 죄를 맑히시는 주의 보혈 ♪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참 깊고 넓도다 ♪ 죄에서 자유를 얻게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하루 종일 불러도 보혈의 찬송이 끝이 나지 않더라구요. 그 피가 너무나도 소중해서 찬송가 작사자들은 그 피를 노래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어마어마한 진리를 말하면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엡1:3)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14)
3절 찬송하리로다 6절 찬송하자 14절 찬송하자
이 보혈을 하나님의 아들된 것을 찬송하자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를 구원하는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예요. 지구상에 있는 75억 인구가 나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다 죽었어요. 그 죽음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구원받을 수 없어요. 그들 모두 다 죄인이니까 나도 죄인이니까. 각자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하나님의 외아들이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시고 돌아가 셨습니다. 이 일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게 영단번죽음입니다. 한번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는데 그 효과가 영원히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보혈의 피 한 방울 이면 이 지구상에 모든 인간들의 죄는 사해 집니다. 사단은 두려워 떱니다. 지옥의 문은 닫혀집니다. 천국의 문을 열려집니다.
그 피의 은총을 덧입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어릴 때 우리 딸이 참 예뻤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딸 보다 예쁜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 자기 딸은 예쁜 거예요. 코 는 서양에서 수입한 것처럼 오똑했습니다. 눈은 이 세상에 의사들이 매달려서 다 듬어 놓은 것처럼 아주 초롱초롱하고 크고 예뻤습니다. 하도 예쁘니까 친구 녀석 이 그 딸 팔아라 그럽니다. 내가 1조를 줘도 팔지 않겠지만 얼마줄래? 물었더니 수산시장에 있는 고기를 다 사줄테니 팔아라~ 그럽니다. 그따위 고기 가지고 내 딸 팔겠습니까? 그것도 모자라면 수산시장에 파리를 잡아주겠대요. 그것도 안되면 이 지구상에 있는 파리를 모두 다 잡아주겠대요. 똥파리 쇠파리 왕파리 다 잡아 주겠대요. 딸 팔겠어요? 똥파리나 수산시장에 물고기 한 마리나 우리 딸이나 나나 다 피조물이예요 물론 값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차이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대신해서 죽었다. 예수님과 나의 값어치 차이가 크겠습니까? 우리 딸과 물고기 한 마리의 값이 차이가 크겠습니까? 비교할 수 없을만큼 우리 하나님, 우리 예수님은 존귀하신 분 아닙니까? 그분이 헌신하고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거예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예요. 그 효력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것인지. 오고 오는 세대에 누구든지 그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겁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효력이 있지만 아무에게나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어마어마한 신비한 차이를 알아야 하는데~ 누구에게나 효력은 있을 수 있지만 아무에게나 효력이 있는게 아닙니다. 신학에서는 보혈의 피에 무한성과 유한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효력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효력에 능력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지만 독생자를 믿는 자만 구원을 얻습니 다. 십자가 능력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이 신비한 교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영적이 날개를 달고 저 높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이 세상을 보니까 귀한 것이 많아요. 빌딩도 많고 보석도 많고 좋은 옷도 많고 진귀한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니까 이 세상에 존귀하고 존귀한 것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다른 하나는 피로 값주고 세운 교회입니다. 에베소서의 주제는 존귀한 성도 영광스런 교회라는 것입니다. 나 하나 하나님의 존귀한 성도 하나님의 자녀 만들기 위하여 창세전에 선택하셨다. 예수님이 피 흘려 돌아가셨다. 성령이 역사하셨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너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총동원했다는 그 말씀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 귀한 진리들이 많습니다. 어릴때부터 나를 감동시키고 나를 울리고 나를 행복하게 했던 교리 진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가 없이 살아야 했던 나는 하나님이,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적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것도 없는데, 잘난 구석도 없는데, 왜 그렇게 당당했을까? 제 키를 보세요. 2m가 조금 안됩니다. 이 키를 가지고 세상 어디에 가나 왜 그렇게 당당했을까? 가진 것도 없는데 먹을 것도 없는데 왜 그렇게 기죽지 않 고 살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하나를 하나님의 아들 삼으시기 위하여 ♪ 하나님이 선택하셨고 예수님이 구속하셨고 성령님이 인치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 찬양~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기가막힌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 다. 이것 때문에 절망하면 안됩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낙심하면 안됩니다. 인 생 포기하면 안됩니다. 죄짓고도 일어나야 됩니다. 조롱받지 말아야 합니다. 당당
하게 살아야 됩니다. 품위있게 살아야 됩니다. 자신감 있게 위엄있게 이 세상에 살 아야 됩니다.
선포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