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한보루 주세요 !! "|정자나무아래
" 담배 한 ‘보루’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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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사용하는 ‘보루’라는 단어에 대해 의심을 기울인 건 한참 전의 일로 생각이 든다.
왜 ‘보루’라 부를까?
모든 말의 어원을 캐기란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담배가 지금처럼 궐련의 형태로 만들어져 애연가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겠기에 나름대로 쉽사리 풀릴 것도 같았다.
10갑들이 한 상자를 일컫는 말임이 분명한데
왜 상자나 박스, 줄이나 포 같은 묶음의 단위를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알까 싶어 한국 담배 인삼 공사에 전화로 문의를 했더니
관계자라는 분께서는 이렇게 설명했다.
“ 20가치 담배 = 한 갑이고,
10갑의 담배 = 한 포이며,
500포의포장 = 한 상자이니,
혹시 10갑의 담배 상자를 가리키는 ‘포’가 변형되어 ‘보루’가 되지 않았겠느냐“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포’가 변형되어
‘보루’가 되었다는 설명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기억을 더듬어 생각을 해보니 어려서 ‘종이상자’를 뜻하던
변형된 일본식 외래어인 ‘보루-박스’ 또는 ‘보루-바꼬‘라는 말이 생각나기에 이르렀다.
책꽂이가 귀하던 시절 책 담아 보관하던 상자가 바로 ‘보루-바꼬’였으며
지금이야 이삿짐 센터가 다 알아서 해주지만
전에는 이사 갈 때 요긴하게 쓰이던
골판지(Corrugated Cardboard)로 만든 각종 종이상자를
그때는 다 ‘보루-박스’라고 불렀던 희미한 기억을 되살려 낸 것이다.
그 골판지의 ‘골(Corrugated/물결 모양으로 골이 진)’을 빼고
줄여서 부르는 우리말의 ‘판지-상자’가 ‘보루-바꼬‘라면
’판지-박스‘는 ’보루-박스‘인 셈인데,
상자를 뜻하는 ’하꼬(箱)‘라는 일본말이 ’보루‘와 붙어
탁음화 되면서 ’바꼬‘로 변형된 것이다.
‘하꼬방’에서 알사탕을 사 먹던 기억이 있는 세대들은
‘하꼬’의 뜻은 물론 ‘보루-바꼬’의 의미도 알 것으로 생각되지만
정작 상당수의 많은 분들이 '하꼬방'을 일본어라고 알고 있고
또 그렇다고 설명하는 많은 한글 사이트도 있으며
인터넷 사이트의 지식인에서도 다들 그리 답변 하고 있던데
일본국어대사전에는 “하꼬(箱)”는 있지만
“하꼬방”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렇게 올리시는지는 모르겠다.
‘하꼬(箱)’에 대한 일본국어대사전의 풀이를 보면,
はこ(箱/函/匣/筐)1木・紙・竹などで作った, 物を入れるための器.多くは方形
2 列車などの車両.「前の―に移る」라고 되어있다.
이를 옮기면
‘하꼬 [箱·函·匣·筐] 1 나무, 종이, 대나무 등으로 만든, 물건을 넣기 위한 그릇. 대부분 사각 형임.
2 열차 등의 차량. 「앞 차량으로 옮겨가다」정도로 될 것이다.
즉, ‘하꼬방’은 오늘날의 피씨방, 노래방처럼
일본어 ‘하꼬(箱)’에 우리가 즐겨 붙이는 ‘방’을 붙여 만들어낸 일종의 신조어인 셈이다.
‘하꼬방’이 일본 본토에도 없는 일본어가 아닌 이상,
‘하꼬방’이라는 말도 일제 강점기에 생긴 말이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가신 많은 분들이 부산의 판자 촌 등에 모여 살면서
당시 30만에 불과했던 부산 인구는 갑자기 120만으로 늘게 된다.
당연히 주택의 수요가 급증했음은 물론이지만,
당시 전쟁의 혼동 속에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던 가난한 피난민들은
미군들이 쓰다 버린 골판지 상자와 빈 맥주 캔 등을 활용해 급조한
비 가림 수준의 작고 허름한 ‘상자만한 집’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그나마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종이 골판지’는 벽체가 되고,
빈 깡통을 편 철판(?)은 지붕재가 되어 만들어진,
그런 집들이 바로 ‘하꼬(箱)방’이었던 것이다.
우선 그렇게 급조한 ‘하꼬(箱)방’에 기거하면서
틈틈이 주어온 판자 등을 여기 저기 덕지덕지 붙여 만들어진 곳이
바로 피난민들의 판자촌인 것이다.
그렇다면 ‘보루’는 뭘까?
이것은 우리말의 ‘판지’를 나타내는 영어의 ‘Card Board'가,
그것으로 만든 상자를 가리킬 때 ‘Card Board-Box'로 되는 것을,
일본식으로 표기 할 때 ’카드보드-박스‘를 줄인 ’보드-박스‘가 되고,
다시 이것이 일본인 특유의 발음 속성으로 인해 ’보루-박스‘가 되고,
이것은 다시 ’보루-하꼬‘를 거쳐 ’보루-바꼬‘로 까지 변형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 ?
우리는 한술 더 떠서
‘보루바꼬’나 ‘보루박스’에서
‘바꼬’와 ‘박스’를 다 떼고
오늘날 ‘보루’라 부른다.
오늘도 용감히 ‘담배 한 보루 주세요 !! ’를 외치며...
WELLUP/1999/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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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도에 하이텔 큰마을(Plaza)에 올렸던 글인데 최근 정리해 다시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