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개인이나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구성하는 요소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성명(姓名)이나 성(姓)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성(姓) 한 글자와 명(名) 두 글자로 구성되는 성명으로 호칭되고 기억된다. 이러한 성명의 표기는 언뜻 보면 중국인의 성명과 같아 보이지만 구체적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국인이 사용하는 성명(姓名)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실시되어 오고 있는 성씨 제도를 형식적으로 모방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인은 상대방이 자신과 같은 성(姓)을 쓰더라도 자동적으로 자신과 같은 혈족(血族)이나 씨족(氏族)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한국인은 자신과 동일한 성을 가졌지만 본관(本貫)이 다른 상대방을 자신과 같은 혈연 집단에 소속되었다고 여기지 않는다. 한국인은 비록 성(姓)의 한자 표기가 같더라도 본관(本貫), 즉 성(姓)의 발상지가 다르면 같은 씨족(氏族)으로 동일시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은 시조(始祖)를 공유하는 씨족(氏族)보다는 중시조(中始祖)로부터 씨족에서 갈라져 나온 종족(宗族:宗中)에 대한 소속감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유난히 강하다.
여말선초, 특히 조선 중·후기부터 주자학의 보급에 따라 한국인은 혈족 집단을 구별할 때 씨족이라는 개념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더욱 세분한 종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왔다. 종족은 부계(父系) 장자(長子), 즉 종손(宗孫)을 중심으로 중시조(中始祖)에 대한 제사를 공동으로 거행하는 혈족 집단이다. 종족 집단의 동질성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방법 중 하나가 본관지에 소재하는 종족 시조의 묘소를 비롯한 유적(遺跡), 유지(遺址), 유물(遺物)에 공동으로 참배하는 것이다. 씨족 집단의 시조에 대한 제사조차도 그 내부의 개별적 종족 집단을 기본 단위로 참여하는 경우가 더 보편적이다. 심지어 종족 집단이 예전과 같이 성(姓)을 유지하되 본관을 달리 붙임으로써 씨족 집단과 구별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하나의 종족(이나 宗中)은 내부적으로 다시 개별적인 문중(門中), 즉 계파로 갈라져 나가며 거주지를 확산함으로써 내부적으로 계파와 거주지에 대한 차이가 확대된다.
현재의 경주시 일대는 신라의 왕도‘서라벌’의 구역을 포함하는 바, 현재와 같은 성(姓)에 대한 호칭과 표기가 전국에서 가장 일찍이 사용된 곳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되어 있는 경주부(慶州府)의 9개 성(姓)은 그 기원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고려 초에 편찬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박(朴), 석(昔), 김(金)이 신라의 종성(宗姓)으로, 이(李), 최(崔), 정(鄭), 손(孫), 배(裵), 설(薛)이 육부성(六部姓)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한국인이 사용하는 성(姓) 중에서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경우는 다른 경우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의 명칭에 본관의 명칭이 결합된 형태로 특정한 종족 집단을 지칭하는 경향은 최소한 고려 말에나 시작되었다. 신라시대 최초로 출현한 박, 석, 김, 이, 손과 같은 씨족 집단은 모두 고려 말 이후에 밀양 박씨, 경주 석씨, 경주 김씨, 경주 이씨, 경주 손씨 등과 같은 종족 집단으로 분파되어 나갔다.
조선시대에는 종족 집단들이 전국적으로 자기들 시조의 발상지, 즉 본관에 소재하는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의 묘소에 공동으로 제사지내는 행위, 즉 제례가 사회적 관습으로 정착하였다. 또한 사당, 묘우(廟宇), 능묘(陵墓), 비각 등과 같은 유교적 시설물들은 유교적 제례가 거행되는 대상이나 무대가 되었다. 현재 경주시 일대의 왕릉 자체는 신라시대의 산물이지만 그 주위의 유교적 시설물들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건설되고 유지되어온 것들이다. 이러한 시설물들은 대부분 조선 왕조가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는 가운데 밀양 박씨, 경주 석씨, 경주 김씨, 경주 이씨 같은 종족 집단들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기 위하여 건설한 것들이다. 신라의 고도가 있었던 경주는 신라시대라는 한국의 역사를 대변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종족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표상하는 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현재의 경주시 일대에서 종족 집단들이 지금까지 보존하고 관리해 오고 있는 유적(遺蹟)과 유지(遺址)들은 남산 서쪽 기슭, 계림(鷄林) 일대, 소금강(小金剛) 서쪽 기슭에 집중되어 있다. 남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한 경주시 탑동 남간마을 진입로에는 밀양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의 탄강지(誕降地)인 나정(蘿井)이 남아 있다. 여기에서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육부촌장(六部村長)의 묘우인 양산제, 경주 최씨의 비조 소벌도리공의 유허각, 경주 김씨의 참봉인 계림김공의 행적비, 경주 배씨 비조의 묘우인 경덕사, 밀양 박씨 소속 일성왕릉의 재실인 숭성재 등이 남산 기슭으로 이어지면서 연속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남산 기슭으로부터 평지 방향으로는 밀양 박씨 소속의 오릉(五陵)을 비롯한 11기의 왕릉과 숭덕전(崇德殿)이 분포한다. 계림을 중심으로는 경주 김씨 소속의 계림세묘, 미추왕릉, 내물왕릉, 숭혜전(崇惠展), 숭신전(崇信殿) 등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소금강산의 표암봉을 중심으로는 경주 이씨 소속의 유허비, 표암재, 옥강묘, 경모비, 광림대 등이 순차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경주시 전체가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종족 집단을 결속시켜주는 장소가 되기까지에는 종족 집단끼리 경쟁적으로 시조를 비롯한 조상들의 유적(遺蹟)과 유지(遺址)를 인위적으로 치장하는 과정이 있었다. 조선시대 유교적 시설물을 조성하는 주체는 처음에 교화 정책을 추구하는 왕조나 국가였지만 나중에는 씨족이나 종족 집단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성리학이 더 이상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유교적 시설물은 주로 종족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강화하는 물적 기반으로 이용되었다.
오늘날에도 유력 종족 집단은 친목의 도모와 사회적 결속의 강화를 위해 전국적 규모의 조직을 구심점으로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종족 아이덴티티의 구축을 추구해 오고 있다. 이러한 조직은 지역과 종족에 따라 종친회(宗親會), 화수회(花樹會), 대종회(大宗會), 종문회(宗門會), 동종회(同宗會), 종회(宗會)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되고 있다. 다양한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중요한 활동의 하나는 시조나 중시조의 유허, 유적, 유물 등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시적인 물질적 요소들은 종족 집단의 근원을 구체적으로 입증함으로써 다른 종족 집단과 차별되는 종족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의 종성에서 출자한 밀양 박씨, 경주 석씨, 경주 김씨는 전릉(殿陵)의 수호를 위해 보존회를 구성하고 참봉(參奉)이라는 직책을 임명하고 있다. 참봉은 오늘날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소수자로 자임하며 전릉의 수호는 물론 유교적 제례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참봉을 중심으로 하는 종족 집단의 제례 활동은 이에 참가한 종족 구성원들에게 행동적 내부성과 함께 감정적 내부성(內部性)을 심어 주면서 장소를 매개로 하는 종족 집단의 소속감과 일체감을 강화시키고 있다. 또한 정기적인 수련회를 통해 종족 아이덴티티는 다음 세대로 전승되고 재생산되며, 이러한 아이덴티티의 재생산은 또한 전릉과 같은 종족 고유의 장소를 보호해야겠다는 의식의 강화로 이어진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채택하고 종교적이고 교화적인 수단으로 유교적 제례를 강조하였다. 조선왕조는 역대 왕조의 도읍지에 시조왕의 탄강지를 비롯한 전묘(殿廟)를 설치할 때 그 건물은 유교적 양식으로 짓고 내부 공간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구성하였다. 현재의 경주시에 신라의 시조왕 혁거세를 위한 전묘로 숭덕전(崇德殿)을 창건한 것은 세종 11년(1429)이었다. 조선시대 경주부는 전국사부(全國四府)의 하나로 고려시대를 거쳐 임란 이후 경상감영이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로 이전될 때까지 명실상부한 경상도의 행정중심지였다. 또한 현재의 경주시 일대는 고려시대까지 신라시대의 유적과 함께 불교 사찰이 밀집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왕조는 구 신라의 왕도 관내에 신라의 시조 왕이자 박씨의 시조인 혁거세에 유교적 제례를 지내는 숭덕전(崇德殿)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 종족 집단의 주도로 숭덕전(1602-1620)이 중건되고 숭혜전(崇惠殿)과 숭신전(崇信殿)이 창건되었다. 밀양 박씨 주도 하에 진행된 숭덕전의 중건은 경주 김씨를 비롯한 다른 종족 집단들에게 자신들 시조의 신위를 봉안하는 전묘를 건립하려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신라는 단일 성씨의 왕조가 아니라 박씨, 석씨, 김씨의 순서로 왕위가 승계된 왕국이었다. 그러므로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경주 김씨에게 밀양 박씨를 위한 숭덕전만 건립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은 처사로 여겨졌다. 경주 김씨는 역대 신라의 왕을 가장 많이 배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가 멸망한 이후 경주시 일대를 세거지로 하는 인구가 가장 많은 종족 집단이었다. 숭혜전의 건립에는 본관지인 경주시 일대에 거주하는 경주 김씨는 물론이고 관직에 진출하여 수도 한양에 거주하는 경주 김씨가 대거 참여하였다. 숭혜전 건립에 대한 조선왕조의 허락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수도(首都) 한양(漢陽)에 거주하는 경주 김씨들은 관직이라는 지위를 기반으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초기 숭덕전 창건과 같이 특정한 지점이나 장소를 기념하는 행위는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애초 숭덕전은 혁거세의 능묘로 전해 내려오는 오릉보다는 탄강지인 나정에 인접한 지점에 건립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숭덕전의 중건, 그리고 숭혜전으로의 승격 과정에는 종족 집단의 주도하에 해당 전각을 시조왕의 능묘에 인접한 위치로 이전하는 과정이 수반되었다. 이는 그 만큼 능묘라는 요소가 종족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강화하는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는 반증이다. 능묘에 인접한 전각에서 거행하는 제례는 성리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전파보다는 오히려 종족 집단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韓國人의 場所와 正體性: 韓國學을 위한 試論(대한지리학회지 제47권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