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노천명-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둥글레 산에 올라 무룻을 캐고
점중화 싱아 뻐꾹새 장구채 범부채
마주재 기룩이 도라지 체니 곰방대
곰취 참두릅 홋잎나물을
뜯는 소녀들은
말끝마다 꽈 소리를 찾고
개암쌀을 까며 소녀들은
금방망이 은방망이 놓고 간
도깨비 애기를 즐겼다.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언제든 가리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메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곳
나뭇집에 함박꽃을 꺾어오던 총각들
서울구경이 원이더니
차를 타보지 못한 채 마을을 지키겠네.
꿈이면 보는 낮익은 동리
우거진 덤불에서
찔레순을 꺾다 나면 꿈이었다.
-고향 친구라 불리는 사나이/서효인-
언제고 네가 불퉁한 배를 세상에 내밀고 오줌을 휙휙 갈기는 모습을 봤다. 대로변이었고, 늦은 밤이었고,
네온사인은 미친놈처럼 밝았어. 미치지 않은 건 너뿐이었다. 네가 보험을 팔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너는 뒤가 없는 황소처럼 씩씩거리며 살았으니까. 그 후로 우리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는 너의 분노와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닿고 싶지 않았다. 잘 아는 고향 친구가 보험을 들라 권한다. 점심은 무엇을
먹었을까. 갑자기 설렁탕이 먹고 싶었다. 너는 땅콩버터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 너와 나는 소똥처럼 거
리 이곳저곳에 나앉아 있다. 이런 일로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 벌거벗은 너에게 나는 말했다. 언
제고 내 배는 세상에 두들겨 맞아 퍼렇다. 대로변이고, 늦은 밤이고, 미친놈이다. 당면처럼 너는 이곳을 빠
져나가고 미끄러운 바람이 분다. 점심은 먹었을까. 물어보지 못했다. 요의가 문을 두드린다. 주위를 두리
번거린다. 소똥들이 한가득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고향 이야기-지리산/허영자-
지리산은
오늘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토벌대원이 죽은 오늘.
지리산은
한 달 전에도 울었다
마지막
늙은 빨지산이 죽은 그날.
차마
마주보질 못하던 두 얼굴
형과 아우
칼빈총과 따발총
주의도 사상도 벗어놓은
늙은 곰배팔이와 절뚝발이
품에 품고 지리산은
그날도 오늘도 젖도록 울었다.
-마음의 고향.6-初雪/이시영-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참새떼 왁자히 내려앉는 대숲마을의
노오란 초가을의 초가지붕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토란 잎에 후두둑 빗방울 스치고 가는
여름날의 고요 적막한 뒤란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쿵쿵 울리며 가는
서늘한 뜨거운 기적소리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빈 들길을 걸어 걸어 흰옷자락 날리며
서울로 가는 순이 누나의 파르라한 옷고름에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고향은 이제
아늑한 상큼한 짚벼늘에 파묻혀
나를 부르는 소리도 잊어버린 채
까닭 모를 굵은 눈물 흘리던 그 어린 저녁 무렵에도 있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마음의 고향은
싸락눈 홀로 이마에 받으며
내가 그 어둑한 신작로 길로 나섰을 때 끝났다
눈 위로 막 얼어붙기 시작한
작디작은 수레바퀴 자국을 뒤에 남기며
-고향/곽재구-
흐린 새벽
감나무골 오막돌집 몇 잎
치자꽃 등불 켜고 산자락에 모이고
깜장 구들 몇 장 서리 내린
송지댁네 외양간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콩대를 다둑이며 쇠죽을 쑤고
약수골 신새벽 꿈길을 출렁이며
송지덕 항아리에 물 붓는 소리
에헤라 나는 보지 못했네
에헤라 나는 듣지 못했네
손시려 송지택 구들 곁에 쭈그린 동안
선머슴 십 년 착한 바깥양반
생솔 부지깽이 아내에게 넘겨주고
쓱싹쓱싹 함지박이 쌀 씻는 모습
쪼륵쪼륵 양은냄비에 뜨물 받는 소리
에헤라 대학 나온 광주 양반에게서도
에헤라 유학 마친 서울 양반에게서도
나는 보지 못하였네
듣지 못하였네
-고향, 산/김진학-
날마다 골짜기 가득
싣고 오는 물소리 있고
오래 살아도 그리운 사람들의
추억 있는 산을 만난다
양지바른 곳에
햇님 다가와 화롯불 피우던
옛날 이야기 있는 산마을
속이 텅빈
나이가 몇인지 알 수 없는
마을 어귀 느티나무의 아픈 마음을
무심히 보고 가는
겨울새
또 누가 왔나 보다
고향에 오면 울고 가는
느티나무 닮은 사람
바람부는
고향 산 아래
종일토록 서성이다
돌아서서
울고 가는 사람
-고향우물/한성례-
피를 모으느라 여자들은 몸이 들쑤신다
흙은 온몸으로 지하수를 돌게 하고
길을 내며 모여든 피의 열기로
늘 자궁은 뜨겁다
한 달에 한번 물을 바꿔 넣으려고
여자들은 우물가로 모이고
집중되는 시선이 두려운
고향마을 천수답 한가운데
하늘 향해 뻥 뚫린
내 어릴 적 우물
여자들은 달구어진 몸이 뜨거워
물을 퍼내고 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감추어둔 죄
속절없이 솟구치던 뜨거움
한여름에도 뼈 속까지 차가운 물
바가지로 푹푹 퍼서 끼얹던 고향우물
그 우물가로
전생에 죄진 생들이
스믈스믈 모여들고
실뱀으로 구렁이로 꽃뱀으로
매달리거나 물구나무 서 있다
생전에 열기 식힌 우물가
물기 있는 몸이라 어쩔 수도 없던
황홀한 죄 따라 돌아오고
문둥병 걸려 소록도* 떠난 남편 자리
시동생으로 대신하다 태어난 아이
우물에 던져 넣은 여자
청상과부로
젊어서 혼자된 시아버지
물기 적신 여자, 여자들
내 기억의 우물가에는
꿈에서조차 소문이 범람하고 있다
-내 고향 옥려봉/구경숙-
내 고향에 가면 옥려봉이 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뛰어 놀며 전쟁놀이를 하던
나만의 반공호가 있는 곳
진달래, 현호색, 처녀치마 향기 뿜는 봄날이면
씀바귀, 잔대, 우산나물, 삽주싹 뜯어
최고의 영향을 공급하던 어머니의 마음
아름드리 나무숲 칡꽃향기 어우러진 칠월이면
몸도 마음도 지친 아픈 땀방울을
이슬 산소 공급하여 전인치료 하던 곳
그림 같은 단풍잎들 사이 헤집고 달려보면
도토리, 알밤 톡톡 뛰어 나와
천국 같은 풍성한 배부른 가을을 선물하던 곳
아버지의 손을 잡고 겨울 산을 오르면
아픈 사람 고쳐주는 상황버섯, 천삼, 만병초가
웃어주는 옥려봉이 있다.
-고향/조말선-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고향 가서/조남익-
쌀이 하하 웃으면
보리는 허허 웃었다
더구나 밀은 흐흐 웃었다
모처럼 고향 가서
논과 밭에 가득 피었을 옛 웃음들을
따라 웃지 못하고
난데없는 농촌의 적막에 놀라
어쩌겠나 털 없는
허수아비 하나 심어놓고 왔다
비어 있는 땅
고조선의 노인이 내려와 논다.
-오월에 들른 고향/이기철-
오월에 들른 고향은
아카샤꽃이 피고 있었고
한 잎 두 잎 지다 남은 복숭아꽃이 지고 있었다
비둘기 울음이
뚜깔잎의 저녁 이슬을 떨고 있었고
서풍이 풀잎의 이른 잠을 깨우며
아랫마을에서 윗마을로
고개를 저으며 올라가고 있었다
멀리 석양의 붉은 그늘 아래서
천 년 전에 들었던
청동기가 깨지는 소리로
개가 짖고 있었고
마을 앞에는
포플라만이 키 큰 서양 사람처럼
활짝 만개하고 있었다
오월에 들른 고향
거기엔 서툰 걸음마가 쓰러지기 잘하던
내 아이 적의 고통과
비 오면 자주 끊어지던
학교 길의 도랑이 걸레처럼 구겨져
흐르고 있었다
-내 고향/박인걸-
솔 잎 향이 숲에서 날아들고
갈잎 헹군 바람이 언덕을 내려오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던
때 묻지 않은 고향에 가고 싶다.
산에는 산꽃이 들에는 들꽃이
사시사철 줄지어 피어나는
무릉도원보다 더 아름다운
그리운 고향에 가고 싶다.
종달새는 하늘을 날고
염소 떼가 풀을 뜯고
맹꽁이가 밤마다 노래하던
내 고향 보다 더 좋은 곳 있을까.
냇물은 온 종일 지줄 대고
구름도 힘들면 쉬어가고
사철 꽃비가 곱게 내리던
어머니 품 같은 내 고향이여
-고향/허수경-
시간의 물웅덩이에 잠자리가 잠깐 앉았다
시간의 가슴 깊이에서 동그라미가 생겨났다
아직 집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이 물웅덩이에 서서
가녀린 동그라미를 들여다보았다
고향에 어린아이가 태어났다
다들 아는 그 아이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방아 잎 냄새가 났다
천년고도의 몸 냄새였다 해골의 노래였으며
몸의 춤이었고 숨이었다
내가 생애 동안 해온 모든 배반의 시작이었고
거짓의 모태였고 그리고 아직도 내가 알 수 없는 먼 죽음의 시작이었다
이 천년의 지루한 탱고를 위하여
비 내리는 작은 오후를 영광처럼 바라노니
아, 고향에는 백석 풍으로 국 끓이는 호박 얼굴을 한 여자가 살고 있을 터이다
-고향/전영란-
무엇이 그리 바쁜가
어스름한 새벽
붉은 기운을 땅에 퍼뜨리며
솟는 해가 묻는다
바람도 쉬어가는
여기 산사락 바위틈에
그리움을 베고
드러눕고 싶은데
바람의 밧줄에 삶을 걸고
거대한 현실에 이끌려
언제나 쫒기듯 다녀가는 고향
시린 가슴 알고 있다는 듯
먼 산 능선에 내리는 안개
하늘과 땅에 경계가 지워지고
명치끝에 매달린
빨간 서러움 하나
세월의 구름 위 눈시울로 젖는다.
-내가 고향이다/전윤호-
추석에 집에 있기로 했다
친정이 없어진 아내와
서울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올 명절은
집에서 쉴 거라 했다
시장에서 송편을 사고
보름달 뜨면
옥상에서 구경하자고 했다
용돈을 받은 아이들은
신이 나서 컴퓨터 게임을 사고
인터넷으로 떠난다
괜히 적적한 척
서울에 있을 선배에게 전화해
그날 저녁 만나기로 했다
문을 닫고 돌아누운 어두운 거리에도
작은 수족관에 불을 켜고
물방울 같은 사람들을 기다리며
문 여는 술집이 있을 거라고
텅 빈 시내버스처럼
반겨줄 사람이 없는
성묘객이 끊어진 무덤처럼
내가 고향이다
-고향/김명수-
천지에 폭풍우 잦아들고
하늘에 천둥 번개 스러진 뒤
별을 바라보는 나무가 있다
나무를 바라보는 별이 있다
순결한 아이들의 숨결 같은
우리들의 고향은 거기 있으리!
-가을에 고향 산에 올라/박형준-
어머니, 나는 산에서 집을 봅니다. 이제 나는 집에 못 가나 봅니다. 어머니, 어렸을 땐 몰랐는데 고향 산이 너무 낮습니다.
높은 산을 고향으로 둔 이라면 여긴 언덕이라 부르겠어요. 당신이 봄에 돌아가시고 처음 올라온 고향 산, 그런데 이 언덕에
그나마 매달려 있는 단풍들이 흩어져 버립니다. 나는 뭐에 그리 힘들게 매달려 살았던 걸까요. 그래도 한 번의 바람에 허공
에서 빨갛게 바스라지는 단풍들은 곱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이 산을 저녁에 한달음에 올라갔지요. 산에서 언제나 저녁밥 짓
는 연기를 보았지요. 밥물이 무쇠솥을 들썩이는 부엌의 문을 열고 당신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요. 그렇게도 집과
가까운 고향 산에서 손에 잡힐 듯 부드럽게 허공에 멍드는 그 손길과 밥 냄새를 떠올립니다. 밥 짓는 연기 속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히 들리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나는 지금 무엇이 부끄러워 집으로 못 가고 샛길로 올라와 산에서 집
을 바라보는 걸까요. 이제는 당신이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내 마음에 부를 이름이 연기를 흩트리는 바람 속에서 산 아래를
향해 단풍으로 날아가고 있나 봅니다.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