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18. 9. 16(주일) - 성령강림절 후 열일곱 번째 주일 - (2018년 37주)
제목;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성경; 막 8:27-38(p. 67) (시 19:7-8, 449<377>, 341<367>, 3)
<예배의 부름> (시 19:7-8)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숙과 결실의 달’ 9월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정말 날씨가 참 좋습니다. 지난 금요일 심야기도회를 마치고 화장실을 갔는데, 귀뚜라미가 목소리를 높여 청아하게 울고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가을이구나 하는 생각 들었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 좋은 계절에 말씀 묵상하고 찬송하며 주님과 함께 교제하고, 내 신앙도 더욱 성숙해지고 더욱 단단해진 알곡이 되어 천국 창고에 들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만물이 결실하는 계절에 우리도 생명의 열매를 주님께 올려드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8개월 동안 복(福)에 관한 말씀을 나누고 금년도 교회력에 따른 말씀으로 돌아와서 처음 나눈 말씀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통하여,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약 2:14-7)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1),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참된 믿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믿음입니다(1-9). 사람을 대할 때 외모를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돈이나 사회적 지위 등 물질적인 소유나 외적인 조건을 잣대로 사람을 재면 안됩니다. 교회는 모든 차별이 철폐되는 곳입니다. 2. 참된 믿음은 말씀과 실제적인 삶이 연결되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목사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나는 나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인 이론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삶과 연결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3. 참된 믿음은 구체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 안에 실천의 능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그 안에 삶의 실천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8). 참된 믿음은 자기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이웃까지 구원합니다(17). 그 믿음이 살아있는 참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모든 차별을 철폐하고, 구체적으로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는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행함이 있는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므로, 교회의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죽어가는 우리의 이웃들을 살리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아름다운 성도, 아름다운 우리 교회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고백(27-29),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30-31), 거기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항변과 예수님의 책망(32-33), 그리고 그 뒤에 결정적으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34-38)이 따라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본문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새롭게 던져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질문을 왜 하셨는가? 이 질문을 굳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과 그때 비로소 첫 번째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 사이에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바르게 고백해놓고도 수난 예고에 항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실 때 그를 “사단아!”라고까지 부르신 것은 지나치신 것 아닌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벳새다 맹인 치유의 기적은 이 본문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
이런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본문에서 그 답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이 과정에서 오늘 본문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1. 예수님의 자기 정체에 관한 질문과 베드로의 신앙 고백(27-29)
1)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질문을 왜 하셨는가?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면서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 하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왜, 하필이면 이때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이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갈릴리 사역과 유대 사역으로 나눕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중 약 2/3를 나사렛, 가버나움, 벳새다 등이 있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12제자들을 부르시고, 첫 번째 이적인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부터 오병이어, 칠병이어를 비롯하여, 소경을 눈을 뜨게 해주고, 나병환자와 중풍병자,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와 12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쳐주시고,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등 엄청난 이적과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놀라운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고 공생애 마지막 사역을 위하여 유대로 향하는 길에 가이샤라 빌립보를 지나가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제자들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보통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28),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메시아가 아니라 과거에 그들에게 와서 수많은 이적을 행하고 예언의 말씀을 주었던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 역시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보통 사람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 하고 물으신 후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이 질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점은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왜 하필이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하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가이사랴’(Caesarea)는 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가이사’(Caesar)와 라틴어로 땅을 의미하는 ‘이아’(ia)의 합성어로, 로마 황제의 직할 지역으로 로마 군대가 주둔하며, 로마에 파견된 총독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총독 빌라도도 여기에 있었으며, 나중에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체포되어 총독 베스도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심문 받은 곳도 바로 가이사랴입니다. (☞ 사진)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묻고 있는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북쪽, 헤르몬 산 남쪽에 위치한 도시로 헤롯 빌립이 그리스 식으로 이 도시를 건설한 뒤 로마 황제 카이사르 필립푸스를 기념하여 이름을 붙인 도시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지역에는 이방인이 많이 살고 있었고, 판(Pan)이나 제우스 등 이방 신들의 숭배도 활발했습니다.
예수님이 굳이 이방인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이방신 숭배가 횡행했던 이방적 색채가 강한 지역에서 자신의 정체에 대해 물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이 아니라 온갖 다른 신이 숭배되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주님이라고 당당히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요? 오늘 본문의 뒷부분에 나오는 마가복음 10:38이 이런 짐작에 힘을 실어주는 듯합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8).
여기서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라는 어구는 마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마가가 전한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인자가 올 때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곳은 모두 그 신앙에 동조하고 지지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음란과 죄악으로 가득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적대적인 곳입니다. 그런 곳일지라도 우리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러워해선 안됩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이방 지역에서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그 사실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왜 중요한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 하고 물으신 후에,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 하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 이 고백을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멋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유대인들은 ‘메시아’로 부르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아 성별된 자’, 곧 ‘인류 유일의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 선지자의 직분을 완벽하게 수행한 메시아이십니다. 따라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본질을 정확하게 드러낸 것으로, 기독교 신앙 고백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어떻게 믿어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기적 베푸는 능력자로 생각하며 따른 것은 아닌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동기가 그런 예수님의 능력에 편승해 세상적인 행복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은 신앙의 더 깊은 자리로 나아오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곳은 주님의 십자가 앞입니다. 우리의 뜻, 사람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뜻, 하나님의 일을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처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으며, 우리 모두와 인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2.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 예고와 베드로의 항변 그리고 예수님의 책망(30-33)
1) 예수님은 왜 베드로의 신앙 고백 후에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는가?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29)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은 후에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30-31)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정체가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와 같은 단순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곧 유대인들이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인하신 후에 비로소 자신이 이 세상에 온 이유인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계기로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그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메시아의 고난과 관련하여 쓰인 “인자”(人子, 톤 휘온 투 안드로푸)는 문자적으로 ‘사람의 아들’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①시편에서는 이 용어가 주로 단순히 문자 그대로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시 8:4, 80:17), ②에스겔서에서는 91번이나 언급되는데 주로 ‘선지자’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③장차 종말의 때에 오게 될 분으로서 다니엘 7:13-14에서 언급된 ‘인자 사상’, 곧 종말의 때에 땅 위에서 핍박받는 자들에게 하늘 나라를 가져다 줄 거룩한 분으로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실 신비한 그분이라는 것입니다(38, 13:2, 14:62). ④고난 받고 죽게 될 메시아적 인자 개념은 부활하여 다시 오실 인자와 결부되어 있습니다(9:9,12,31, 10:33,45, 14:21,41).
이와 같은 사실을 전제로 하여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 직후 제자들에게 ‘인자’가 고난 받다가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친 것은 예수님이 ‘인자’라는 말을 자신이 메시아임을 가르치기 위해서 선택된 칭호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31)라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이전에 이미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신 바 있지만(막 2: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는 암시적으로 밝힌 반면에 이제는 공개적으로(“드러내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32)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직에 대해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적인 수난 예고에는 항상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동반시킴으로써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전제된 바와 같이 승리적인 측면이 내포된 것이 주목할 만한 점입니다(막 9:31, 10:34).
2)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잘 한 후에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항변하다가 왜 꾸중을 들었는가?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점은 베드로가 그렇게 인상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나서 곧바로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항변하다가 꾸중을 들었다는 것입니다(33). 왜 주님을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잘 고백하고 “사단”이라는 말과 함께 심하게 꾸중을 들었을까요?
먼저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항변하며 대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32) 베드로에게 고난 받는 그리스도는 모순이었을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다른 두 번의 수난 예고에 대해 다른 제자들이 보인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수난 예고가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기들이 지금까지 경험했던 기적을 베푸시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어떻게든 높은 자리를 하나 얻고자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새롭게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시는 분일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셔야 할 그리스도이심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더 온전하고 또렷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하게 꾸중하시면서 바르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지만, 베드로의 예수님 고백은 불완전한 데가 있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마치 벳새다 맹인이 처음에 보기는 보았어도 또렷하게 보지 못하고 흐릿하게 보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님은 주로 귀신을 내어쫓고 병자를 고쳐주시는 분, 곧 이적을 베푸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베푸시는 능력에 기초해 그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가운데 한 명으로 고백한 것에 비하면 훨씬 뛰어난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에 이어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대해 보인 반응은 그 고백이 좀 더 완전해질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님의 책망이 너무 심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 항변하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그를 ‘사단’이라 부르시면서 ‘물러가라’고 꾸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을 대조해 보면, 누가복음에는 아예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한 내용이 없고,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셨다’라고 한 말이 없는, 마가복음만이 유일하게 ‘꾸짖으셨다’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의 예수님은 베드로의 항변에 더욱 단호하고 엄격하게 반응하신 듯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보면, 베드로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는 계획이었다면, 사람의 일은 예수님의 능력과 명성에 편성해 인간적인 덕을 보려는 계획이었다고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사단이 부추기고 바라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십자가의 수난 예고를 있을 수 없는 일로 거부하고 항변할 때 베드로는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었던 셈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도 언제든 사단이 기뻐하는 일에 종노릇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34-38)
-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부르면서 심하게 책망하신 뒤에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34)’ 제자도에 관한 중요한 말씀을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흔히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어려운 일이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뎌 나가는 것을 ‘십자가를 진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감당해야 할 몫이나 어려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뜻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는 뒤에야 처음으로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사실 복음의 정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핵심으로 나아가는 것은 조금씩 예수님을 알아가고, 비록 초보라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렇게 할 때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있고 나서야 더 큰 복음의 비밀이 공개된 것은 이런 신앙적 성장 과정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4. 벳새다 맹인 치유 기적과 오늘 본문과의 연관성 :
- 오늘 본문 앞뒤에 나오는 벳새다 맹인 치유의 기적과 여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치유 기적은 오늘 본문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는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그 뒤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항변,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제자도를 가르쳐주는 매우 중요한 오늘 본문이 주어진 위치와 상황에 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벳새다 맹인의 치유 기적(8:22-26)과 여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치유 기적(10:46-52)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변화산 사건(9:2-13), 그리고 그 사건에 이어지는 귀신 들릴 아이 치유 기적(9:14-29), 두 번째 수난 예고(9:30-32), 세 번째 수난 예고(10:33-34), 이어지는 여러 교훈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되어진 일들입니다.
이런 본문의 위치와 문맥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본문(8:27-38) 바로 앞에는 벳새다 맹인 치유 기적(8:22-26) 이야기가 보도되고 있는데,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마가의 고유 기사입니다. 이 기적 보도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맹인을 한 번에 치유하신 것이 아니라 두 번에 걸쳐 점진적으로 치유하셨다는 점입니다. 또한 10장에 나오는 여리고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치유 기적(10:46-52)과 수미상관을 이룹니다. 그리하여 두 맹인의 치유 기적은 마가복음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문학 단위를 이루게 됩니다. 게다가 이 두 가지 맹인의 치유 기적 보도를 시작과 끝으로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 커다란 문학 단위 안에는 세 번에 걸친 수난과 부활 예고가 들어 있음도 인상적입니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 곧이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수난과 부활 예고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태도를 보인 이야기가 따라 나온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를 들었음에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왕이 되시면 우상과 좌상을 하겠다고 다투고 있습니다(10:35-46).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가는 그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지금 자신의 사명인 인류 구원을 위한 마지막 여정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물어보고 십자가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수난 예고를 직설적으로 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는 제자도를 가르쳐 주시고 계시는데, 전혀 분위가 파악도 하지 못하고, 내 자리, 내 욕망, 내 필요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힘주어 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섬김의 제자의 삶의 살아갑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9:34-37)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5. 결론 : 이 모든 일들과 교훈이 “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이 모든 일들이 ‘길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전체의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 제자들의 이해를 알아보려고 하신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이라는 점에 대해 그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 인상적인 점은 예수님이 그 지역에서 나가 “길에서”(27) 이 질문을 하셨다는 것입니다(“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 이 점에 주목한 것은 마가가 유일합니다. 병행되는 공관복음에서는 “길에서”란 말이 없습니다(마 8:27, 마 16:13, 눅 9:18). 이런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을 전하는 이 단락의 마지막 이야기인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치유 기적’(10:46-52)입니다. 이 전체 단락의 시작 부분에 위치한 ‘벳새다 맹인의 치유 기적’(9:22-26) 보도와 비교할 때 바디매오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은 예수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뒤에 보인 바디매오의 반응이 마지막에 따라 나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10:52).
고침 받은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길에서” 따랐습니다. 이 길은 어떤 길입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10:1,17,32,46).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곳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에 엉뚱한 반응을 보였던 제자들과 달리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이라고 합니다. 순례자라는 것은 오늘도 길을 걸어가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어떤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이제 우리도 내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셨던 길, 십자가의 길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34)
III.
수년 전에 독일 신학자 한 분이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제자”라는 책을 내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은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 수난과 죽음을 통한 인류 구원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데, 제자들은 전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이 되실 터이니 우상, 좌상 자리다툼하는 제자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날 밤 자신의 처참한 죽음을 생각하며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쿨쿨 자고 있습니다. 더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도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 잡으러 가는 제자들을 묘사하며, 분위기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 믿으면 팔자 고친다고 생각하며 그저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출세하는 것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뒤 곧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에 대해 강하게 항변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 때문에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야 할 상황이 오면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항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본 본문에서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결국 베드로는 주님의 책망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여 더 깊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과 같이 죽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고하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때 ‘아멘’으로 응답하고 내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