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수상경변 강호에서 경험이 풍부한 상원건조차도 미처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떨어져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도 상대의 얼굴을 정확히 식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노인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상원건은 그에게서 동중산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아예 하지 도 않았을 것이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마음이 다급해졌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노인이 탄 배를 쫓아갈 방법이 없었다. 그 들이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노인은 얼굴에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배를 반대편 강변으로 움직 여가고 있었다. 그때 진산월이 갑자기 빙긋 웃으며 중인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되었다. 저자까지 갔으니 안심이구나.” 상원건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떠올랐다. 안심이라니… 도대체 진산월은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중인들은 멍하니 진산월을 바라보았으나, 진산월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그치지 않고 있었다. 낙일방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진산월을 향해 바짝 다가가며 물었다. “장문사형. 그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이제 안심이라니… 왜 그런 말씀을 하는 거죠?” 진산월은 나직하게 웃었다. “하하… 저자가 동중산을 데리고 떠난 이상 앞으로는 우리에게 별 탈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안 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낙일방은 어이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장문사형! 그걸 말이라고….” 그는 더 입을 열었다가는 자신의 입에서 무슨 험악한 소리가 나올지 몰라 아예 입을 굳게 다물어 버 렸다. 하나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짙은 경악의 빛이 서려 있었다. 놀라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원건은 동중산이 귀찮은 존재이기는 했지만 설마 진산월이 이렇듯 노골적으로 말하리라고는 미처 생 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란 와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 자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군. 그런데 이 자는 왜 이런 말을 굳이 입 밖에 내는 것일 까?’ 동중산이 종남파에 들어오겠다고 할 때 중인들의 탐탁지 않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뜻 받아들 인 사람은 진산월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동중산이 떠나갔다고 기뻐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진산월을 지켜보았던 상원건으로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진산월은 계속 입가에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낙일방은 그런 진산월이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다가 무심코 강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빛이 떠올랐다. “어? 저 자는 왜 아직 가지 않았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중인들의 얼굴에도 일제히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이미 반대쪽 강변에 도착해 있을 줄 알았던 배가 그들에게서 불과 칠 팔장 떨어진 거리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배 위에는 예의 노인이 우뚝 선 채 형형한 안광으로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했는데도 노인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진산월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자네가 한 말은 무슨 뜻인가?” 진산월은 그가 다시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짐짓 눈을 크게 떴다. “아니…아직도 떠나지 않았단 말이오?” 노인은 그의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신광(神光)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 눈빛이 부담스러운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노인의 눈에 괴이쩍은 빛이 번뜩거리며 지나갔다. “당당한 일파(一派)의 장문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실망이로군.” 진산월은 시큰둥한 어조로 대꾸했다.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오.” 노인은 그의 속마음을 궤뚫어 보려는 듯 여전히 시선을 그의 얼굴에 고정시켰다. 하나 진산월의 얼굴에는 조금 귀찮아 하는 빛만 떠올라 있을 뿐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노인은 한차례 머뭇거리더니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판 위에 쓰러져 있는 동중산에게로 다가갔다. 이어 재빠른 손길로 그의 품속을 뒤지는 것이었다. 곧 노인은 동중산의 품속에서 하나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 물체를 손에 든 노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동중산의 품에서 나온 물건은 다름아닌 평범한 돌멩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돌멩이를 만져보다가 다시 동중산의 품속을 뒤졌다. 하나 동중산의 품속에는 돌멩이 외에 다 른 물건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노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았다. “어디에 있나?” 진산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엇이 말이오?” “조금 전에 동중산에게서 받은 물건이 어디에 있느냔 말일세.” 진산월의 손가락이 노인의 손에 쥐어져 있는 돌멩이로 향했다. “지금 귀하가 들고 있지 않소?” 노인의 표정이 한층 더 냉엄하게 굳어졌다. “지금 노부를 놀리는 건가?” “나는 노인장을 처음 보는데 어찌 놀릴 수 있겠소? 동중산이 내게 준 것은 그 돌맹이었고, 나는 그 것을 동중산에게 보관하라고 다시 건네준 것 뿐이오.” 노인의 표정이 다시 한차례 변했다. 갑자기 그의 신형이 희끗거린다 싶은 순간, 그의 몸은 어느 새 십 장을 날아 모래밭 위에 내려섰다. 그런데도 그가 탔던 배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실로 경인(驚人)할 신법(身法)이 아닐 수 없었다. 노인은 다시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삽시간에 진산월에게서 불과 사 오장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당도해 있었다. “다시 묻겠네. 동중산이 동굴에서 꺼내 자네에게 건네준 진짜 물건은 어디에 있는가?”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괴이한 기운이 담겨 있어 듣는 이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고 있었다. 종남파의 고수들은 바짝 긴장하여 황급히 진산월의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하나 진산월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한 후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용문에 온 기념으로 동중산에게 모양이 괜찮은 돌멩이 하나를 구해오라 고 했던 거요. 그래서 동중산이 돌멩이를 구해 왔고, 나는 그것을 동중산에게 다시 건네 주었는데 왜 내 말을 믿지 않는단 말이오?” 노인의 눈빛은 독사(毒蛇)의 그것처럼 끈적끈적한 살기를 품은 채 진산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우두둑…. 노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돌멩이가 가루로 변해 바닥에 부수수 떨어졌다. 손바닥에 돌멩이를 쥐고 가 루로 만드는 것은 공력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지금처럼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런 일을 한다는 것은 노인의 내공이 절정에 이르러 있다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감탄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심후한 내공이오.” 그 말을 듣자 노인의 눈살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살짝 찌푸려졌다. 겉으로는 감탄했다는 표정 을 짓고 있지만 진산월이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해 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 속 에 문득 의구심이 떠올랐다. ‘내가 이 놈의 의병지계(疑兵之計)에 당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욱 짙어졌다. 원래 노인은 애초에 동중산이 품속에 문제의 물건을 가 지고 있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중산이 비록 용문을 내려오면서 몇가지 기이한 행동을 하기 는 했으나 평소 동중산의 성격으로 보아 그토록 중요한 물건을 몸에 지니고 있을리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동중산을 납치해서 끌고 가는데도 펄펄 뛰어야 할 진산월이 오히려 무거운 짐 을 벗은 듯 웃고 있는 것을 보자 갑자기 불쑥 의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일부러 강의 반대편으로 배를 모는 척 하며 사실은 공력을 잔뜩 끌어올려 진산월의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 진산월의 입에서 동중산이 없어져 안심했다는 말이 나오자 솟구쳐 오르는 의구심과 불안감을 참지 못하고 다시 배를 몰아온 것이다. 그가 선뜻 배에서 뭍으로 뛰어내려 온 것도 물건이 이미 진산월의 수중에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 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자신의 행동이 성급했다는 후회감이 밀려 들었다. 하나 그렇다면 동중산의 품에서 나온 돌멩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런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미리 그런 수작을 부린 것이란 말인가?’ 노인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깨닫고 진산월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하나 진산월의 얼굴은 차분하 게 가라앉아 있어 도무지 그 속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대로 물러섰다가 만에 하나 진산월이 진짜 물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을 속인 것이라면 낭패스 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그를 윽박질러도 그가 정말로 물건의 행방을 모르고 있다면 자신은 헛수고를 하는 격이 아닌가? 더구나 조금 전에 보여준 진산월과 종남파 고수들의 무공으로 보아 자신이 쉽사리 그들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진산월과 임 영옥의 무공은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니었다. 하나 노인의 망설임은 짧았다. 노인은 이내 별빛처럼 차갑고 냉정한 눈으로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자네의 심기(心機)는 제법 대단하군. 오늘은 내가 한 수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진산월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눈빛을 받았다. “심기를 쓴 건 내가 아니라 귀하요. 내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동중산에게 돌멩이를 맡긴 것밖에는 없소.”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자네는 나에게 다른 용무가 있나?” 진산월은 슬쩍 노인이 타고 왔던 배를 쳐다보다가 이내 빙긋 웃었다. “귀하의 배에 본문의 제자 한 사람이 신세를 지고 있는 모양인데 이왕 신세 지는 김에 우리도 함께 신세를 졌으면 좋겠소.” 노인은 한 차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자네 마음대로 하게.” 이어 그는 두 눈에 괴이한 신광(神光)을 뿜어내며 한동안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별 일이 없으면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그가 막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진산월이 그를 불렀다. “잠깐.” 노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가?” 진산월이 품 속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비단주머니 하나를 꺼내 노인에게 던져 주었다. 노인은 영문을 몰라 무심결에 비단주머니를 받았다. “이게 무언가?” 진산월은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배삯이니 받아 두시오.” 노인의 얼굴에 한 차례 붉은 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노인은 비수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을 쏘아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군.” 이어 그는 휑하니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 었다. 진산월은 묵묵히 멀어져가는 그의 몸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한 사람에게로 시 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녹의 미소녀가 서 있었다. 녹의 미소녀는 멍하니 노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진산월의 시선을 느꼈는지 움찔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흔들리는 두 갈래로 땋은 머리와 유난히 반짝거리는 두 눈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 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가 불쑥 물었다. “낭자는 천봉궁에서 왔소?” 그가 불쑥 묻자 녹의 미소녀의 어깨가 다시 한 차례 움찔거렸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도 발적인 자세로 양 손을 가느다란 허리춤에 척 올려놓았다. “그래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았죠?” “낭자와 심옥당과의 대화로 짐작해 보았을 뿐이오.” 그녀는 여전히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눈치가 빠르군요. 그런데 본 낭자에게 무슨 볼 일이 있나요?”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에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낙일방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우리가 너를 찾아왔냐? 네가 우리를 찾아왔지.’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빙긋 웃었다. “나는 물론 낭자에게 볼 일이 없소. 낭자도 우리에게 별다른 용건이 없을테니 우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소.” 녹의 미소녀는 그가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 안색이 가볍게 변했다. “용건이 없다니…. 누가 그런 말을 해요?” “그럼 낭자는 우리에게 다른 용건이 있단 말이오?” 그녀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게 무엇이오?” “그건…” 갑자기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천봉팔선자 중의 막내로, 옥봉(玉鳳) 누산산(婁珊珊)이라 했다. 그녀는 평소에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남봉 엄쌍쌍과 특히 친했는데, 얼마전에 엄쌍쌍에게 모종의 부탁을 받고 진산월 일행의 뒤 를 따라왔던 것이다. 하나 그 부탁이 무엇인지는 그녀의 입으로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엄쌍쌍이 비밀을 지키라고 신신당 부했기 때문이다. 누산산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일행 중 제일 뒤에 서 있는 낙일방에게로 향했다. 낙일방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고 있다가 그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어리둥절한 얼굴 로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산산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생긴 건 멀쩡한데 멍청하기 짝이 없군. 산언니는 저런 멍청이가 뭐가 좋다고….’ 그녀는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갑자기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뭐긴 뭐예요? 동중산인가 뭔가 하는 작자가 훔쳐간 물건 때문이지.” 진산월은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럼 낭자도 그 물건을 노리고 왔단 말이오?” 누산산은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성난 표정을 지었다. “물건을 노리다니…. 그건 원래 본궁(本宮)의 물건이란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사실 그들 중 동중산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그것이 무림의 많은 고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것으로 보아 절학(絶學)을 얻을 수 있는 무림의 기보(奇寶)가 아닐까 하고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런데 그것이 천봉궁의 물건이라니…. 중인들로서는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진산월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누산산은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설마 당당한 명문세가라는 종남파에서 남의 물건을 슬쩍할 생각은 아니겠죠?” 낙일방은 아까부터 그녀의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에 기분이 언짢아 있다가 이 말을 듣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게 천봉궁의 물건인지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누산산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뭐라고요? 이 불한당 같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낙일방은 그녀가 자신을 불한당이라고 하자 화가 치밀어 무어라고 대꾸하려다 그녀의 살기등등한 표정 을 보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제아무리 천하에 다시 없는 마두(魔頭)라 해도 두려워할 낙일방이 아니 었으나, 상대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버릇없고 깜찍한 소녀이고 보면 무작정 그녀와 말싸움을 할 생각 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 풀 기가 꺾인 음성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제길…. 내가 틀린 말을 했나? 그럼 아무나 그 물건이 자기 것이라고 달라고 하면 무조건 내줘야 한단 말인가?” 누산산의 얼굴이 푸르뎅뎅하게 변했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이 기생 오라비 같은 작자가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그녀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다 하마터면 ‘엄언니만 아니었으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거다’라는 말을 내뱉을 뻔했다. 낙일방은 누산산이 금세 날카로운 손톱을 앞세우며 달려들 것 같아 더 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슬쩍 정해의 뒤로 물러났다. 낙일방이 세상에서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이 바로 누산산 같은 버릇 없고 사나운 여자와 싸우는 일이었다. 낙일방은 천하에서 사매인 방취아보다 더 상대하기 어려운 여 자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다. 누산산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표정이 불그락푸르락하게 변한 채 암팡진 눈으로 계속 낙일 방을 노려보았다. “내가 할 일 없어서 야밤에 이 먼 곳까지 와서 거짓말을 하는 줄 알아요? 대체 천봉팔선자를 어떻게 보고 그따위 소리를….” 낙일방은 더 대꾸할 생각이 없는지 그냥 한 차례 어깨만 으쓱거렸다. 한데 그녀는 그런 모습에 더욱 약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불만이 있으면 뒤로 숨지 말고 어디 한 번 덤벼보시지.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하게 혓바닥을 뽑아버 릴테니….” 남에게 이런 말을 듣고도 참는다면 낙일방이 아닐 것이다. 아무리 상대가 여자라고 해도 말이다. 과연 낙일방의 준수한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며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금시라도 그녀를 향해 뛰쳐나 갈 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때 때마침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물건이 정말 천봉궁의 것이오?” 막 몸을 날리려던 낙일방의 몸이 주춤거렸다. 누산산은 낙일방이 달려들면 본때를 보여주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가 진산월이 불쑥 입을 여는 바람에 낙일방이 달려들지 않자 심통이 났는지 싸늘하게 코 웃음을 쳤다. “흥! 정말 당신네 종남파 사람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남의 말은 지독히도 안믿는군요. 당신은 그 물건 이 무언지 알기나 해요?” 아마도 코웃음을 치는 것은 그녀의 오래된 습관인 모양이었다. 진산월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누산산은 진산월이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줄은 미처 몰랐는지 코를 움찔거리다가 다시 붉은 입술을 빠르게 나불거렸다. “그럼 당신들은 동중산이 가진 물건이 뭔지도 모르면서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단 말이에요?” “문하제자를 지키기 위한 것이니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소.” 그녀는 진산월의 태연한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대단한 장문인이로군요. 당신은 정말 동중산이 종남파가 좋아서 가입한줄 아세요?” “그가 본파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오.” “그럼 뭐가 중요한 거죠?”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스스로의 의사로 본파에 들어왔으며 본파에서는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거요. 누가 뭐라든 그는 본파의 제자이니 장문인인 나로서는 그를 지켜주는 게 당연한 일이오.” 누산산은 일시지간 말문이 막힌 듯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 있다가 코끝을 귀엽게 찡긋거렸다. “말은 제법 그럴 듯하군요. 하지만 당신들은 언제고 동중산 때문에 큰 코 다칠 일이 있을 거예요.”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런 일이 없기만을 바라야지.” “흥. 아무튼 본 낭자가 분명히 말하건데 그 봉황금시(鳳凰金翅)는 누가 뭐래도 본 궁의 물건이에요. 그러니 순순히 그것을 내놓으세요.” “봉황금시? 그게 그 물건의 이름이오?” 누산산은 여전히 허리에 손을 올려놓은 채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래요. 이름만 봐도 본 궁의 물건인지 알 수 있잖아요.” “이름에 ‘봉(鳳)’자가 들었다고 무조건 천봉궁의 물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소?” 누산산은 발을 탕 굴렸다. “아무튼 그건 원래 본 궁의 물건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니 당신은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어서 물건을 내게 넘겨요.” “그게 천봉궁의 물건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알려주면 동중산을 타일러서 물건을 내놓도록 하겠소.” 누산산의 아미가 하늘끝까지 치켜올라갔다. “증거라니…. 내가 말했잖아요? 당신은 설마 내 말을 못믿는단 말인가요?” 그녀의 말은 무례하기조차 했으나 진산월은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빙긋 웃기만 했다. “내가 낭자의 말을 믿고 못믿는다는 문제가 아니오. 동중산이 납득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더 문제 지.” “흥! 그 두더지 같은 작자가 납득을 하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죠?” “그 물건이 원래 누구 것이었든 지금의 소유자는 동중산이오. 그러니 그가 순순히 납득을 하고 물건 을 내놓지 않는다면 나로서도 그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일이오.” 누산산은 마치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안색이 새파랗게 변하며 벌컥 성을 냈다. “당신이 정말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인 줄 몰랐어요. 왜 자꾸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는 거 예요?” 종남파 고수들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도대체 누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진산월도 이번에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기만 했 다. 누산산은 그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숨결이 거칠어지며 두 눈에서 표독스러운 빛이 흘러 나왔다. “좋아요. 정 물건을 내놓지 않겠다면 내가 실력으로 빼앗아 가겠어요.” 그녀는 금시라도 진산월을 향해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선가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산매. 또 쓸데없는 일을 벌이려 하는구나.” 누산산은 막 양 손에 공력을 주입시킨 채 진산월을 향해 몸을 날리려다 그 음성을 듣자 반색을 하며 몸을 휙 돌렸다. 휙! 중인들의 눈앞에 무언가 희끗한 인영이 어른거리는 순간 장내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황의를 입은 훤칠 한 키의 미녀가 우뚝 서 있었다. 황의 미녀는 피부가 백옥같이 희고 고왔고, 눈빛이 영롱하기 그지없어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것 같았 다. 그녀를 보자 누산산은 언제 화를 냈느냐는 듯 얼굴이 활짝 펴지며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것이 었다. “셋째 언니.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누산산이 금시라도 자신의 품속으로 뛰어들 듯한 기세로 다가오자 황의 미녀는 슬쩍 손을 내밀어 그 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육매에게서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누산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요?” “왜긴. 네가 무슨 엉뚱한 짓을 벌일지 몰라 걱정스러워서 그랬지.” 누산산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엉뚱한 짓을 벌이긴요? 내가 무슨 사고뭉치인 줄 아세요?” 황의 미녀는 나직하게 웃으며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호호… 그거야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니?” 누산산이 바짝 약이 올라 무어라고 볼멘소리를 하려 하자 황의 미녀는 재빨리 진산월 일행에게로 시선 을 돌렸다. 진산월은 그녀가 일전에 보았던 천봉팔선자 중의 셋째인 영봉 금교교임을 알아보고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소?” 금교교는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를 했다. “또 만나게 되었군요. 그동안 별 일 없으셨어요?” 무심코 묻고 나서 금교교는 아차 싶어 속으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별 일 없을 리 있겠는가? 지금 그녀가 보기에도 종남파 일행들 중에는 부상당한 채 아직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사람도 있었고, 안색이 핼쓱한 자도 있어서 별로 좋은 상태가 아님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강호의 물은 제법 차갑지만 그럭저럭 견딜만 하오. 그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금교교는 검게 빛나는 보석처럼 영롱한 눈을 반짝였다. “말씀하세요.” 진산월은 금교교의 옆에 서 있는 누산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분 소저의 말로는 봉황금시가 천봉궁의 물건이라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오?” 금교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확실히 봉황금시는 본궁의 물건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구료.” 금교교는 잠시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붉은 입술을 열었다. “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봉황금시는 본궁의 궁주(宮主)님의 신물(信物)과도 같은 것이었어요. 그러다 궁주님께서 당시 어느 분에게 그것을 선물하셨고, 그 후로 봉황금시는 더 이상 본궁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어요.”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다시 물었다. “천봉궁주께서 봉황금시를 선물했다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겠소?” 금교교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궁주님의 허락없이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습니다.”“그럼 그 물건이 어떻게 해서 다시 강호 (江湖)로 나오게 된 거요?”“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군요. 아무튼 그 물건이 본궁과 밀접한 관계가 있 다는 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