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Hercegovina)
흔히 보스니아라고도 불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역시 과거 유고연방(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구성하던 6개 공화국 중의
하나였으며 1992년 3월 분리·독립한 신생 공화국이다.
이 나라는 북부의 보스니아 지방과 남부의 헤르체고비나 지방으로 이루어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의
'스르프스카(Republika Srpska:RS) 공화국' 등 3개의 독립국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민족으로 보면 보스니악(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계, 그리고 세르비아계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이다.
이 나라의 종교적 분포는 보스니악이 이슬람교(40%), 크로아티아계가 가톨릭(17%), 세르비아계는 동방정교(31%)를 믿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분포는 이 나라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1992년 4월부터 1995년 12월까지 3년 반 이상 계속된 보스니아 내전의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면적은 51,209㎢로 남한의 55% 정도이고 인구는 약 400만 명의 작은 나라이며, GNP는 4,278달러이다.
보스니아는 약 500년 동안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비잔틴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으며, 12세기에는 보스니아 왕국으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지만
1463년 오스만 터키 제국에 점령되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남부지역인 헤르체고비나는 1482년 역시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었는데,
이 때 오스만 제국이 헤르체코비나를 보스니아에 통합시킴으로써 지금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만들어진 것이다.
보스니아인은 7세기경부터 정착하기 시작한 슬라브인들이 조상으로 정교회를 믿고 있었지만 터키의 지배가 4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안
많은 보스니아 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거나 이슬람 문화에 동화되면서 보스니악이 탄생하였다.
1878년 오스만 터키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이 땅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기간에 수도인 사라예보에서는 1941년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암살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 된
'사라예보 사건'으로 인해 ‘유럽의 화약고’라는 달갑지 않은 이름을 얻게 되었다.
보스니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티토(Tito:1892-1980)가 주도한 유고연방(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6개 공화국 중의 하나가 되었다.
티토가 사망한 후에 유고연방이 붕괴되자, 세르비아계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1991년 10월 보스니악과 크로아티아계는 힘을 합쳐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2년 3월 세르비아계가 강하게 거부하였지만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99.4%의 찬성으로 통과시키자, 종족 간의 분쟁인 보스니아 내전(1992. 4~1995. 12월)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세르비아계를 지원한 세르비아 군대에 의해 '인종청소'라 불린 잔혹한 학살행위들이 보스니아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 보스니아 내전
1991년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등이 세르비아 주도의 유고 연방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데 이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이
같은 해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92년 4월 6일 유럽연합(EU)이 이를 승인하였다. 그러자 구 유고연방을 주도해온 세르비아 공화국의 연방군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를 침공하여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내전이 시작되었다.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며 이 끔찍한 사건의 중심에는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있었다.
*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 사건
보스니아 내전 중에 일어난 스레브레니차 집단 학살사건은 1995년 7월 보스니아의 사라예보 동북부에 위치한 스레브레니차의 이슬람교도를 제거하기 위해서
보스니아에 주둔하던 세르비아 군에 의해 8,500여명의 사망자를 낸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스레브레니차 지역에 살고 있던 25,000~30,000명의 보스니아인들은 세르비아계의 스르프스카 공화국 군대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다. 인종청소라 불린 이 학살사건에는 스르프스카 공화국 군인 외에도 세르비아의 군사조직도 깊이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UN은 스레브레니차에 400명의 UN 평화군을 파견하고 있었음에도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학살사건을 막지 못했다.
유엔군은 민간인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군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의 말을 믿고 있었으나 믈라디치는 이 지역의 무슬림(이슬람교도)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믈라디치軍은 당시 시체를 불도저로 밀어 처리했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고 한다.
살해당한 이들은 대부분 성인 남자와 10대 소년들이었으나, 65세 이상의 남자도 있었으며, 어린 아이까지 살해당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보스니아 실종자 관련 연방위원회가 보고한 실종 및 살해된 사람들의 리스트에는 8,372명의 이름이 실려 있다.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어난 이슬람교도 학살 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자행된 가장 잔인한 만행으로 간주되고 있다.
내전이 치열해지자 미국과 유럽연합이 개입하여 1995년 12월 데이튼(Dayton)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민족 구성에 따라 2개의 공화국의 정치체제를 갖게 되었다.
즉, 보스니악(Bosniak, 인구비율 48%)과 크로아티아계 주민(인구비율 14.3%)들 중심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에서는 2명의 대통령을 선출하고,
세르비아계(인구비율 37.1%) 중심인 '스르프스카 공화국'에서는 1명의 대통령을 선출하여 3개 민족을 대표하는 3인의 대통령이 2년 동안 8개월씩
윤번제로 대통령직을 맡아보는 보기 드문 형태의 연방국이 되었다.
이로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데이튼 평화협정에 깊이 개입했던 미국과 유럽연합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형식적인 연방국가일 뿐 사실은 두 개의 국가인 셈이다.
그러나 보스니아 내의 크로아티아계 주민들은 독립을 주장하고 있어 또 다른 분쟁을 내포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은 20세기 인류사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기록된다. 430만 인구 중 27만 명이 사망했고, 23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57개 도시가 파괴되고 500개 마을이 불탔다.
내전의 희생자 중 상당수는 인종청소에 의해 집단학살을 당하였고, 많은 부녀자들은 세르비아 무장세력의 성폭행 희생자가 되었다.
'발칸 반도의 도살자'라는 비난을 받았던 전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2001년 4월 세르비아 경찰에 체포되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던 중 2006년 3월 11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전 스르프스카 공화국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는 2008년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있으며, 그 후에 체포된 믈라디치도 헤이그의 전범재판소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있다. 이로써 보스니아 내전의 3대 특급전범으로 분류됐던 3명은 모두 붙잡혔다.
세르비아는 그동안 EU가입을 간절히 원했지만 EU측은 믈라디치가 세르비아에 숨어 있다고 보고 ‘전범을 숨겨주는 나라의 가입은 불허한다’며 거절해 왔다.
따라서 UN가입 등 국제활동이 제약을 받자 세르비아는 믈라디치 체포를 위해 노력해 왔다. 이로써 세르비아의 EU가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16년간의 도피 끝에 2011.5월 세르비아에서 체포된 라트코 믈라디치 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반군 사령관이 헤이그의 유엔 전범 재판소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는 판사들을 향해 자신이
중병에 걸렸으며, 자신에 대한 혐의는 어처구니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회색 줄무늬 양복을 입고 법정에 나타난 믈라디치는 판사들이 인종대학살 혐의를 낭독하는 것을 묵묵히 듣고남 후
자신에 대한 인종대학살 혐의는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면서 발생한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군사령관이었던 믈라디치는 스레브레니차에서 이슬람 주민 8천명을 대량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믈라디치의 2차 법정 출두는 오는 다음달 4일로 정해졌으며, 그는 모든 혐의가 인정되면 종신형에 처해진다.
라트코 믈라디치(1942년 3월 12일 ~)는 유고슬라비아 및 스르프스카 공화국의 군인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했을 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일방적인 분리를 선언하고 보스니아 내전이 계속된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스르프스카 공화국 군의 참모총장을 지냈다.
믈라디치는 1992년부터 1995년까지 계속된사라예보에 대한 포위 공격과 1995년 7월 11일에 스레브레니차에서 8,300명 이상의 보스니아인이 살해된 스레브레니차 학살과 관련해
집단 학살, 전쟁 범죄 등의 용의로 헤이그의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되어 있다.
미국은 믈라디치와 라도반 카라지치의 체포에 50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고 세르비아 정부는 2007년 10월 11일에 믈라디치의 체포에 연결되는 정보에 대해 100만 유로의 현상금을 건다고 발표하였다.
다른 전범인 라도반 카라지치는 2008년 7월에 체포돼 헤이그에 보내졌지만, 믈라디치의 행방은 이후에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2011년 5월 26일, 세르비아의 보리스 타디치 대통령의 발표에 따라 체포가 확인되었다.
발칸 반도의 이슬람 도시 : 사라예보(Sarajevo)
사라예보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로 1461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세워졌으며, 디나르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해발 500m의 계곡에 위치하고 있다.
1914년 6월 28일에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을 암살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1984년에는 14회 동계 올림픽이 사라예보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의 문화권이 접하는 곳에 위치하여 시민의 절반이 이슬람교도인 사라예보에는 그리스도교의 성당과 이슬람교의 모스크가 뒤섞인
진기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고, 옛 터키식 장터인 바자르 등이 있어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이다.
유고연방이 해체되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분리 독립하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세르비아 군이 사라예보를 포위하여 공격하면서
보스니아 내전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점령당했던 44개월간, 1만명이 사망하였다.
지금도 이 도시의 아파트와 건물 외벽에는 지금도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보스니아 내전의 참상을 엿볼 수 있다.
첫댓글 중국갔다 언제 왔냐 ?
번개다 번개...
월요일 새벽에 갔다가 목요일 저녁에 도착했어.
사라예보에서 열렸던 1973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애리사와 정현숙이 참피온 먹었지.
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고.. 인종청소를 당한 현장이기도 한걸보면..
사라예보는 터가 별로 안좋은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분위기도 좀 어둡구나.
1차대전의 시발점이 된 라틴다리도 소개하겠지만, 사라예보는 솔직히 안좋은 분위기를 느끼며 도착했는데,
가서 보니 총탄자국이 있는 건물들도 남아 있고 했지만, 거리는 조용해 보였다.
동구권이 민주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희생된 나라가 바로 이 나라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인데,
다음에 들르게 되는 모스타르라는 도시도 끔찍한 비극을 간직한 도시이다.
역시 꼼꼼하게 잘 설명하고 있구나, 갈수록 프로 여행 작가 같다...
설명이 한이 없겠지만, 어떻게 요점만 찾아서 정리하는가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두서가 안맞을텐데 읽어줘서 고맙구나.
우리나라의 30-40년 전 같기도 하고 미아리 삼선교 같기도 하고, 유럽 같기도 하고.....
경우가 거리의 모습을 보고 나서 정확히 비유해 줬구나.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서도 느끼지만,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그러한 모습이지?
그래도 동계올림픽도 열렸던 도시인데 내전의 상처가 깊어 과거 몇십년간 정체했나보다.
간판도 주로 외국 상표몇개만 달랑.. 경제에 활력이 없다는 증거겠지.
저런 도시에 사는거.. 참 고달프겠다라는 느낌이다.
지도자를 잘 선택해야지...국민들이 수십년을 계속 살육의 독안에서 살아왔으니..어휴~
용환이는 이 많은 방대한 분량을 다 혼자서 했을테니...존경스럽다, 용환아!
그러다 보면 공부도 많이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