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정약용 선생과 '장흥(長興)'지방
정약용은 널리 알려진대로 '강진'에서 오랜 유배생활을 했다.
'장흥'은 그 강진에 연접된 이웃 고을이다.
강진의 서쪽이 '해남'이요, 동쪽이 '장흥'이다.
정약용은 '장흥사람,장흥지방'에 관련한 여러 詩文을 남겨놓앗다.
우선, '다신계18제자'인 장흥출신의 '영광 정씨, 정수칠(丁修七)'에게 여러 글을 주었다.
'與반산정수칠書,又爲정수칠贈言,爲반산정수칠贈言'등이 있다.
장흥 장동면 반산의 '영광정씨 집안기록'에 제발(題跋)을 쓰기도 하였다.
'반산정씨세고序, 題반곡정공난중일기' 등이 있다.
(영광 정씨와 나주 정씨는 크게 보아 '같은 압해도에서 연원한 정씨 집안'으로 받아들여지는데,
다만 上代 계보 내역을 놓고 그 견해가 엇갈린다)
정약용 선생은 1803년(42세) 봄에는 '천관산'을 소재로 "충식송(蟲食松)"이란 비판시를 읊었다.
또 "관산 영회정 팔경시"도 남기고 있다.
1806년(45세)8월 중순경 이후 시점으로 추정된다.
('영호정 팔경'에 나오는 '관악'이 바로 '천관산'이다)
한편 정약용이 젊은 날에 존경했던 스님이 '연담 유일(1720~1799)'인데,
그가 오랫동안 주석으로 머무르다 입적한 곳이 '장흥 보림사'이다.
정약용이 유배오기 전에 타계하였는데, 유일 스님의 제자가 바로 '혜장 스님'이다.
'장흥 보림사'는 '청태전'이나 '떡차'로 유명한 곳이다.
(이유원이 쓴 '임하필기'에는 호남의 명차 산지, '강진 보(普)림사'로 소개된다)
정약용이 '구증구포'의 제다 비법을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또 정약용이 쓴 "소경한테 팔려간 젊은 여자(道康瞽家婦詞)"라는 이야기에도
'장흥 보림사'가 등장한다.
장흥 쪽의 지리적 실정이 매우 사실성있게 전개되고 있다.
강진에 살던 그 소경의 젊은 아내가 처음에는 '장흥 보림사'까지 도망갔다가 잡혔는데,
다음에는 그곳을 지나 '화순 개천사'까지 더 도망갔지만 다시 붙잡히고 만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801년,신유사옥'으로 전라도 땅으로 정약용과 함께 유배를 당한 유배객,
'척족(戚族), 이관기'가 바로 장흥 땅에 와 있었다.
두 유배객은 삼십리 거리를 두고 서로간에 문안 편지를 주고 받았다.
정약용은 '장흥 예양(汭陽)강'의 명칭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때 장흥에 머물고 있는 그 유배객을 "예여,汭旅"라고 그 편지에서 지칭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 하나.
정약용 선생은 과연 '장흥 지방'을 직접 실제로 방문했을까?
직접 '천관산'에도 가 보았을까?
질문을 드려보니, '다산 연구가 박석무 선생님'은 부정적이셨다.
유배지 강진 군계를 절대로 벗어나지 아니했다는 것이다.
검토해본다.
그 부분을 직접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발견된 바 없기 때문에 '부정설'이 일응 수긍된다.
('부정설'쪽 정황은 그렇게 설명된다.
정약용은 평생 모범생으로 살았기에 그 유배기간 중에도 유배규칙을 잘 지켰을 것이다.
흑산도 형님과도 그 바다 가운데서 조우 한번 해볼 수 있으련만 전혀 그렇지 못했다.
더구나 장흥부사가 근무하는 장흥읍성 쪽을 대놓고 지나다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강진(병영),장흥 경계의 '수인산성'에 관한 '수인산축성議'라는 정약용 선생의 글이 남아있어도
선생께서 '장흥' '보림사' 등에 다녀갔음을 인정할 만한 어떤 기록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약간의 의문은 남는다.
정약용 선생이 서쪽 군계를 넘어 '해남 외갓집'이나 '대둔사,월출산'에 오간 것을 보면,
워낙 호기심 크신 선생인지라 강진만 바다길을 내려와 '강진,장흥 군계'를 넘어
혹 장흥 남쪽에 오신 가능성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널리 알려진대로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살이 초기는 아주 어려웠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고나면서, 또한 대계도 정지되면서 안정적으로 정착하였으며
그 나름 자유롭게 인근 지역의 이곳저곳을 유람,답사,확인..을 하러 다니셨다.
그렇다면 혹 '장흥 남쪽' 방향이라면 그 사정이 다를 수 있는 것 아닐까,
아랫쪽 강진만을 수차 건너 다녔기에 장흥 천관산쪽으로 더 갔을지는 모르겠다.
정약용 선생이 현 대구면 청자도요지에 가까운 절, '정수사'를 다녀가신 것 만큼은 확인된다.
거기서 장흥사람, 존재 위백규 선생이 쓴 '정수사 상량기'를 보았을 수도 있다.
또한 1805년 9월경에는 그 '정수사'에서 '천태산 송대'에 오르셨는데,
거기서 얼마간 더 가면 '천관산'에 당도할 수 있다.
(가지 않더라도 아마 천관산은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현재의 다산초당 천일각에서도 '장흥 천관산'이 멀리 바라보인다)
1803년경에 정약용 선생은 벌써 '장흥 천관산'을 소재로 사회고발詩 "충식송(蟲食松)"을 썼다.
선생께서는 그 산을 직접 가까이 보지도 않으시고 그저 민둥산이란 소문만 듣고 썼던 것일까?
여전히 약간의 의문이 남는 대목이다.
(한편, '충식송'은 그 주제의식이 강한 관념적 내용의 사회고발시에 해당한다.
꼭 그 현장을 보지 않고서라도 그 나름 작시(作詩)가 가능하다 할 것이다.
또한 '강진만,고금도' 등 남쪽 바다길을 오가면서 멀리서 바라볼 수도 있었겠다)
여기서는 "영호정 팔경"을 소개한다.
(출처 ㅡ <한국고전번역원 DB>에 수록된 자료이다.
서울, 중앙에서 활동한 외지 시인이더라도 '한국고전번역원 DB'를 통해 검색 가능하다.
'장흥(관산,회주)'을 읊어놓은 웬만한 한시문은 그 원문 또는 국역문 제공을 받을 수 있다,
"영호정 팔경"은 1806년(45세) 8월경 무렵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영호정'은 지금의 관산읍내 동편, 천관산의 북편 아래에 있다.
그 詩 제목에 나오는 '장흥 정씨'라 함은 '장흥(관산)에 사는 영광 정씨'를 뜻한다.
(현재 장흥 관산에서 활동하고있는 '정길태,정우태 씨' 집안이다)
'관악(천관산),죽천(대내),송령(솔치재),방촌마을뒤 상잠산성' 등이 나온다.
'영호정'은 나중에 개축되었으며, 지금은 마을 노인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영호정 노인당에 직접 가보니, 정약용 선생 내방에 관한 구전전승 사정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설령 정약용 선생이 장흥에 와보았더라도 팔경시를 바로 쓰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
그 '영호정 팔경'에 관한 주변사정을 아주 자세히 알고있다는 것 역시 부자연스럽게 보인데서
'장흥사람이 먼저 쓴 초벌 글을 선생이 다시 손질 보완했을지 모른다'는 일부 의견도 있다)
그런데, 마침 '선시계(宣始啓:1742∼1826)'의 <지오재유고>에는 또다른 "영호정 팔경"이 있다.
거기 수록된 "정지립(丁志立), 영호정 팔경" 중에 '6경-관악,상잠,학포,죽천,송령..등'이
"정약용, 영호정 팔경"의 그것과 같은 소제목이다. 그 시문내용은 서로 다르긴 하다.
ㅡ영호정 팔경. '장흥정씨'를 위해 짓다
[映湖亭八景 爲長興丁氏作]
험준한 뿔바위가 하늘 높이 줄을 섰고 / 嵯峨石角列天庭
비 지나간 낭떠러지 씻겨 더 푸르다네 / 雨過雙厓洗更靑
해질 무렵 한 줄기 가로놓인 푸른 자취 / 薄晩翠痕橫一抹
선녀가 구슬봉에 숨어 살아 그렇는가 / 卻疑仙女隱瑤峯
ㅡ이상은 관악(冠岳,천관산)의 개인 이내
대숲에 밤이 짙어 등잔불을 마주하면 / 篁林瞑色對孤檠
교교한 밤을 쟁글쟁글 작은 시내가 울다가 / 靜夜玎玲小澗鳴
갑자기 하얀 빛이 실내를 비치는데 / 忽見白毫光射室
갈고리 같은 조각달이 동영에 떠서라네 / 一鉤殘月上東榮
ㅡ이상은 상잠(觴岑)의 새벽달
앞 시내에 물이 잦고 흙모래가 나타나면 / 前溪水落見泥沙
아이들이 떼로 모여 조개를 주워담다가 / 隊隊兒童拾蚌蠃
저물녘에 밀물 밀려 둥그렇게 거울 되면 / 向晩潮來圓一鑑
바람이 솔솔 불어 백구물결 일군다네 / 細風吹作白鷗波
ㅡ이상은 학포(鶴浦)의 저녁 조수
중류에 섬 하나 작기가 주먹만한데 / 中流一島小如拳
천경의 잔물결이 새벽 하늘에 일렁이면 / 千頃靴紋向曙天
괴상한 붉은 놀이 힘겹게 떠오르니 / 怪有紫霞騰贔贔
부상을 몇 가지나 태우기에 그러는 걸까 / 扶桑燒得幾枝燃
ㅡ이상은 마도(馬島)의 아침 놀
시냇가 분죽밭에 '조거'를 숨겨두고 / 細竹沿溪隱釣車
낚여진 고기 따내 버들가지에 꿰둔다네 / 綠楊穿取上鉤魚
'서봉의 성자'가 그 시절에 불던 피리 / 西峯聖者當時笛
동해로 밀려와 늙은 어부에게 주어졌다네 / 流落東溟付老漁
ㅡ이상은 죽천(竹川)의 어부 피릿소리
잿마루에 솔 푸르러 그늘이 살짝 지고 / 嶺頭松翠帶輕陰
낙조는 바람 안고 대숲을 건너오네 / 殘照含風度竹林
초부 노래는 절주가 없다고 말을 말게 / 莫道樵歌無節族
남쪽 방언에 거문고는 구성지게 어울린다네 / 南腔端合和枯琴
ㅡ이상은 송령(松嶺)의 초부 노래
산들산들 산들바람 술집 기가 펄럭이고 / 獵獵輕風颭酒旗
강오리는 물을 부니 푸른 물결 일렁이네 / 鷿鷈吹作翠漣猗
한 쌍의 저 돛대는 어디메서 오는 걸까 / 一雙蒲幔來何郡
잠깐 사이 수사를 지나가네 / 彈指聲中過水祠
ㅡ이상은 동차(東汊)로 돌아가는 배
절벽 가에 줄 서 있는 거꾸로 자란 소나무들 / 側壁斜連倒掛松
반공을 날아 흘러 푸른 못에 절구질하네 / 半空飛作碧湫舂
인간에 비오건 말건 산중과는 관계 없지만 / 山中不管人間雨
못 속에 누운 게으른 용을 그래도 차서 깨운다네 / 猶蹴潭心懶臥龍
ㅡ이상은 서암(西巖)에 내리꽂는 폭포
첫댓글 "정약용 선생과 장흥지방"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는 장흥 용산면 인암리에 태어난 丁聖泰라고 합니다.
"다산께서 장흥지방을 방문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해...
우리집엔 다산께서 관산집에 오신 일화가 전해 내려옵니다.
아버지는 지금 용산에 살고 계시지만 윗대에는 관산에 살았습니다.
저 부터 6대조 丁道三 할아버지께서는 과거시험 진사시에 합격해
지방에서는 글께나 읽는 어른이셨는데
다산께서 관산 집에오셔서 "너는 포로시 무식은 면했구나" 하셨다는
얘기를 아버지께 전해 들었습니다.
우리집안에 전해내려온 얘기라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다산께서 오셨다는 것에 무게를 둡니다.
ㅡ아, 반갑습니다,..그 부분 이야기를 6대조 할아버님 생존연대를 좀 정리하셔셔 구체적으로 저에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겟습니다..저는 이 문제 때문에 장동의 영광정씨 반산마을에도 가보고, 관산 영호정에도 가보앗지만, 그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엇습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다산연구가인 박석무 선생님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엇는데, 그 분은 아주 부정적인 답변이엇습니다.
ㅡ다산 선생을 보면, 그 분은 <나주(압해)정씨>지만, 웃대 친형제간에 분파된 영광 정씨를 "같은 정씨 집안"으로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장흥 장동의 영광 정씨 집안이 강진 다산선생에게 쌀을 대준적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도 있습니다.
...
ㅡ그리고 한가지 더 부탁드립니다....영광 정씨 족보에서 <정지립,丁志立>이란 분과 <逵典, 규전>이란
'자,호'를 쓰신 선조분을 찾을 수는 없겟는지요? 저는 장동 반산마을에 직접 가서 정약용의 제자,<정수칠>분의 해당부분만을 그 족보에서 확인해 보앗을 뿐이고, 여타 장흥의 영광 정씨 족보를 아직 체계적으로 살펴보지는 못 했습니다.
ㅡ아, 정말 <정성태 님의 이야기>가 객관적 정황으로 확인되엇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 이 일로 고향의 아버지께 전화를 했습니다. 족보를 찾아보시고 정리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저의 전화번호 입니다. 010-5271-9396
ㅡ감사합니다!
ㅡ더 찾아보니.....정약용 선생이 1805년 9월경에 '대구면 정수사'에 오셧다가
기왕에 ...'천태산 송대'까지 오르신 것은 확인이 되는군요....그곳 송대에서는 천관산이 그 나름 보엿을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