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그린비∣ 2005
인간의 눈은 항상 무엇인가를 바라본다. 우리는 ‘본다’라는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사전적 해석으로는 망막에 비치는 상을 알아차리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각자 길들여진 시각으로 대상의 이미지를 지각하는 일이다. 그러면 자신이 눈으로 인식한 것이 사실일까. 다시 말해서 자명하다고 믿고 있는 진리가 참이라는 확신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저자 이진경(본명 박태호)은 그 유명한 ‘굴뚝 청소부 이야기’로써 문제를 설정한다.(57쪽) ―우리는 이미 조세희의 <난쏘공>을 통해 그들을 만났다.― 두 명의 굴뚝 청소부가 각각 청소를 하고 난 뒤, 한 사람은 얼굴이 깨끗하고 다른 사람은 시꺼멓게 얼룩졌다. 누가 세수를 하겠는가. 잘 알려진 답은 흰 얼굴의 청소부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서 자신도 그러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과연 그 대답은 맞는가. 굴뚝 청소 후 더러워지지 않는 얼굴이 있을까. 증명해 줄 제삼자도 없이 둘만의 판단으로 얼굴 상태를 확인할 길이 없다. 이로써 근대철학이 주체와 대상을 통한 진리 찾기에서 출발한 것이 딜레마였다는 저자의 의도를 엿보게 된다.
다른 예로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그림을 살펴보기로 한다.(258쪽) 캔버스에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쓰여 있다. 분명히 파이프를 그려 놓았는데 파이프가 아니라니 참으로 당혹스럽다. 누군가의 “아무리 봐도 이 그림은 파이프인데요?”라는 질문에 “그러면 저 파이프로 연초를 한번 피워보시겠어요?” 했다는 르네의 답에서 의문은 풀린다. 결국 그림이란 파이프의 이미지에 불과하니, 화가가 아무리 사실적으로 묘사했더라도 그것은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역설이다.
인간은 많은 것을 착각하며 고정된 시선을 가지고 살아간다. 당연한 것이 가장 위험하다. ‘실재’를 분리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 진짜라고 믿는다. “바큇살들이 모여 한 개의 바퀴통을 만들지만 수레를 움직이는 것은 가운데의 빈 구멍이며,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지만 쓸모 있게 하는 것은 그릇 속의 빈 곳”이라는 ≪도덕경≫의 인용처럼 진정한 쓰임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이 훨씬 현실적이지 않은가. 허상을 깨고 관습을 뒤집을 때 스스로 고립되지 않으며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침묵도 음악이 되고 여백도 그림이 되며 행간마저 문학적 의미가 되는 것이다.
철학의 본질은 누구의 사유가 더 합리적인가라는 판단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질문과 의문의 향연에 있을지 모른다. 철학 입문서로 불리는 이 책에서 ‘주체’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진리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다층적이다. 언제나 ‘알고자 하는 인간’의 물음에 끊임없이 질문과 대답을 하는 자가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 신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세철학 그늘에서 벗어나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된 데카르트부터 스피노자, 로크, 흄, 칸트, 헤겔, 맑스, 프로이트, 니체, 소쉬르, 비트겐슈타인, 라캉, 알튀세르, 푸코를 지나 포스트구조주의의 대표 학자인 들뢰즈와 가타리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철학의 문제설정 변화와 해체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한다.
철학자들은 많아도 단 하나의 철학은 없으며, 다양한 해석은 있을지언정 온전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이 인간의 삶과 상관없다고 오인하거나 플라톤과 로크와 흄 등을 과거의 인물로만 단정하는 것도 매우 위험한 일이다. 철학이란 삶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수많은 사상가의 논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아직도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을 ‘영원한 현재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 점은 푸코의 사상에서 더욱 신뢰를 얻게 된다.
‘광인’이란 무엇인가? 혹은 ‘정신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상인과 어떻게 다르며, 양자를 가르는 결정적인 구획선은 어디 있는가?
이런 질문은 영화를 볼 때면 종종 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예컨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란 영화는 정신병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떤 ‘환자’는 자기가 ‘환자’일 거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해 병원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주인공 맥 머피로 분장한 배우 잭 니콜슨은 미친 사람인지 아닌지 병원에서도 오락가락하며 잘 판단하지 못합니다. …… 도대체 이들 가운데 누가 ‘정말’ 환자고 누가 ‘가짜’ 환자인 걸까요? (369∼371쪽)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푸코식 답변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다. 푸코에게 경계선이란 힘과 권력이다. 의사가 판단하는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구분을 지움으로써 가려졌던 침묵의 진실과 외면했던 문제를 사고하도록 만드는 일이 푸코의 방식이다.
그러면 작가는 왜 철학책을 읽어야 하는가. 대체 진리는 무엇이며, 진리 판단의 정확한 잣대는 무엇인가. 대상이 개입되지 않는 지각과 인식이 가능한가.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더 혼란스러워지는 것이 철학자들의 언술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무조건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적 사유 없이 글이 탄탄해질 수 없는 까닭이다. 철학이 세상의 암호를 푸는 작업이듯 작가 또한 경계를 너머 그 이상의 의미를 찾아내는 자이다. 고착된 영토에서 벗어나 보이는 것을 다시 보는 것이 작가의 의무이다.
편협한 인식론적 경계선을 지우고 음악과 미술과 영화, 건축과 과학과 역사 등 다양한 영토를 횡단하는 자만이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다. 외부의 허구와 내부의 진실을 찾아낼 때 비로소 자동차의 백미러에 새겨진 글자처럼 진리가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을지 모를 테니까. 그것이 저자 이진경이 생각하는 사유의 “주름”을 펼치는 일이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위기 극복을 주창한 ‘노마디즘’이라는 유목적 방식이다. (*)
- 김정화 리뷰에세이 ≪말 이상의 말, 글 이상의 글≫에서
첫댓글 철학은 역시 어렵습니다. 존재와 본질에 대한 궁금증이 들 때마다 찾아보는 철학책이 있습니다. 저자가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소설 형식을 빌려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그런데도 제겐 쉽지 않더군요. 그러나 한 가지 터득한 사실은 소개하신 책 제목처럼 철학은 끝없는 질문과 대답이라는 것입니다. 사유가 깊은 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개개인의 진리 판단의 잣대가 다르듯이 존재와 본질에 대한 철학자들의 다양한 사유와 이론은 늘 흥미롭습니다^^
1.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림의 떡' 이 바로 이미지의 배반이 아닐까 생각했었네요.
2. 문장 말미에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정리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위기 극복을 주창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이 부분은 개인에 따라 생각해 볼 만한 문제로 보입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 '유목'은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적 형태와의 '관계'를 말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거든요. 그에 반해 이진경은 국가적 형태가 아닌, '유목'이 지닌 '이동'이라는 특성에 방점을 두었고요.
오호~~ '그림의 떡', 이미지의 배반에 적합한 예시군요. 그리고 노마디즘은 다각의 해석이 있으나, 제 글에서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노마드는 그 자체에서 벗어나는 일'이라는 주창에 초점을 두어 기존에 얽매이지 않는, 재구성과 재배치, 탈주 등의 의미로써 고정관념의 전복 등을 말하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