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왼쪽 눈과 콧대 사이에 작은 혈관종이 생겼다. 처음에는 아주 작더니 몇년 사이에 커져서
유튜브 영상을 촬영해보면 눈 옆에 점이 찍혀나올 정도가 되었다. 사진이야 보정이라도 하면 되지만 영상은 보정도 어려워 거슬렸다.
체리점이라고도 하는 혈관종은 모세혈관에 상처가 나서 피가 고여 생긴 점인데, 고춧가루나 빨간 볼펜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인의 소개로 가까운 피부과를 찾았다. 지인은 "남자 원장 선생님에게 예약하라"고 두세번 강조했다.
하지만 음악을 들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병원에 도착하자 남자 원장에게 의뢰하라는 내용은 까맣게 잊고 그냥 접수해버렸다.
여자 원장에게 안내되어 상담을 받았다. 기억 속에 무언가가 반항적으로 꿈틀대고 있었으나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자 원장은 무색무취의 수녀처럼 생긴 분이었는데, 상담해주는 화법도 그랬다.
"선생님, 붉은 점은 레이저로 지진다고 하던데 맞나요?'
"아, 혈관종이네요. 마침 저희 병원에 엑셀브이가 있으니 레이저로 혈관을 지지면 돼요."
"한번 시술하면 되나요?"
"3번을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계속 받으시면 됩니다."
"될때까지 하라고요? 시술비용이 얼만데요?"
"그건 밖에서 안내 받으시면 됩니다."
시종일관 수녀 내지 보살 같은 미소를 짓고는 있는데 영혼 없이 알고리즘에 의한 멘트를 날리는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유형이다.
비용을 안내 받으러 나오면서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는 본능적인 불편감이 생겼다. 그러면 환자는 말이 많아진다.
"될때까지 레이저라니 이 점이 그렇게 처치가 어려운 거에요?"
"(안내)그건 아니지만 환자마다 차이가 다 있어서요. "
"아니 그래도 대략 이 정도 점을 처치할때 몇번 정도면 된다는 데이터가 있을거 아닙니까"
"음.. 그건 저희도 장담을..."
"알았어요."
짜증이 솟았지만 일단 레이저를 받았다. 녹색 불빛 레이저가 망막까지 뚫고 들어오는듯 번쩍 하고 한번 쏜 뒤 시술이 끝났다. 의사가 둥근 거울을 가져오더니 "보세요, 점이 조금 톤다운 됐죠?" 했다.
"아뇨?" 하고 싶었다. 톤다운은 무슨.. 그런데 하도 한두번으로는 안된다고 세뇌를 받아서인지 톤다운이라는 말에 별 반응없이 그냥 비용을 치르고 3주후에 다시 오라길래 예약을 해놓고 돌아왔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톤다운 됐는지 살폈다. 크기라도 조금 줄어드나 그래도 레이저 엑셀브이 시술을 받았는데 변화가 있으려니 살폈다. 그렇게 3주가 흐르는 동안 정말로 될 때까지 레이저를 받아야 하는건가 싶은 좌절이 밀려오도록 아무 변화가 없었다.
역시 사람은 절박해야 지혜로워진다. 예약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오는데 아무 변화없이 돈만 쓰게 생기자 지인이 쥐어줬던 절대반지가 떠오른 것이다.
'아! 남자 원장!'
수녀인지 보살인지 소금없이 먹는 삶은 계란같은 여자 원장의 '톤다운' 은 다시 듣고 싶지 않았다.
병원으로 출발 전에 전화를 넣어 예약을 확인하고 남자원장으로 교체해달라고 했다. 데스크에서는
진료에 시간이 좀 걸려도 괜찮으냐고 물었다. 당연하다. 환자 예약이 많다는건 실력자라는 뜻이 아닌가.
도착하고도 40분이 지나서야 남자 원장을 만났다.
시원한 말투로 "오래 기다리셨죠?" 하는 원장을 보는 순간, 고향에 온 듯 평안이 밀려왔다. 이거야.
"바쁘시다고 소문이 나서.." 하자 그가 마스크로도 감출 수 없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원장은 앞서 받은 레이저 시술 차트를 살피더니 내 눈가를 흘긋 보았다. 차도가 있냐 없냐도 묻지 않았다. 보면 아는걸 뭐.
여기서부터 실력자는 내담자의 문제에 대해 진단하고 해법을 제시하는 태도, 가치, 능력의 삼위일체가 관료적 영혼과 확연히 다른 것을 보여준다.
"눈 옆이라서 레이저를 편하게 쏘지도 못하는 위치에요. 그냥 태워버립시다."
"오. 혈관종인데도 그냥 태울 수 있나요?"
"상관없어요. 다만 약간의 미세한 자국은 남을 거에요. 레이저로 하면 좋기는 한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과도 장담을 못하니까."
" 선생님. 태운다고 해서 부작용이 남고 그런건 아니죠?"
" (자신있는 미소)그런거 전혀 없어요."
이런 미친. 앞의 그 여자 원장은 왜 이런 상담을 해주지 않은 건가. 내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온 레이저 시술을 앵무새처럼 받아서 "마침 엑셀 브이가 있어요" 하고는 환자 말대로 해주면서, 시간 대비 효과 면에서 레이저는 느리고, 환부도 레이저를 확실하게 주입하기 어려운 부위라는 말도 없이 될 때까지 계속 받으라니.
남자 원장은 "제가 비용은 좀 더 받는데 괜찮으세요?" 라고 물었다. 노 프라블럼. 살이 타는 냄새를 기분좋게 맡고 일어서서 거울을 보니 혈관종이 있던 자리에 옅은 물집이 생겨있고 육안으로도 점이 사라진게 보였다.
실력을 가진 사람은 다르다. 기존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역발상이 가능하다. 자유자재로 도구와 기술을 적시적소에 사용하고 응용한다.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발언을 할 수 있다. 이런 실력이 없는 사람은 우연에 맡기며, 될 때까지 시술을 받으라고 말하는 수 밖에 없다.
시술이 끝나고 다음 환자를 보러 급히 나가면서 한달 뒤에 다시 보자는 남자 원장 뒤에서 나는 둥근 거울을 보며, 별로 잘 쓰지도 않는 애교스러운 말투로 "넹" 하고 대답하며 웃었다.
2020. 6. 12 주의검을보내사
첫댓글 아.. 눈앞에 그려지는것 같은 저 구체적이고도
센스넘치는 글이란.....ㅋㅋㅋ
그 남자 원장님 저도 소개 받고싶군요 ^^
ㅎㅎ
정확하게 듣는것이 이렇게나 중요한 겁니다. 후유증 없이 치료 되시길.... ㅎㅎ
이분 최소 살 타는 냄새를 기분좋게 맡는 분
이래서 의사나 병원은 여러군데 다녀봐야 하는 거군요
실력없는 의사들 조심해야겠어요
또한 영적으로 꽝이면서 목사노릇하는 사람들도요 ㅎㅎ
될때까지 레이저는 진짜 무책임하네ㅋㅋㅋ
혈관종이구나,, 저는 목에 자꾸 이런것이 나타나서 때수건을 너무 쎄게밀어 그런가 생각했드니,, ㅍㅎㅎ
주검보님요~~ 점 떨어지고 나중사진도 올려보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