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장 떼고 온 프랑스 장군 몽클라르, 한국전쟁 전환점 만들었죠”
(서울대 총동창신문 제555호 내용에서 옮김)
양평 지평리서 중공군 대파 영웅
국내 전기 발간하고 추모전 열어
이미 ‘별이 셋’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초급장교로 활약하고, 2차대전에서 자유 프랑스군으로 종군했던 육군 중장.
당시 나이 58세, 갓 예편해 안락한 여생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국의 전쟁터로 향했다.
유엔군 대대급 지휘관은 중령만 가능하다기에 스스로 계급까지 낮췄다.
만류하는 만삭의 아내는 “곧 태어날 아이에게 아버지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설득했다.
한국전쟁의 영웅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 장군 얘기다.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보가 한 나라를 살렸다. 1951년 2월 13~15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서울·양평·홍천·횡성·여주를 연결하는 중부전선 요충지인 이곳에서 기세등등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과 수세에 몰린 아군이 맞붙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대대와 미군 23연대로 구성된 유엔군 5000여 명은 3일간 근접전투와 백병전 끝에 중공군 3개 사단 3만명의 파상 공세를 격퇴했다.
처음 중공군에 승리한 유엔군은 단번에 자신감을 회복해 북진할 수 있었다.
전세 역전이란 점에서 또 다른 인천상륙작전에 비견할 만했고,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군’의 활약은 후세의 가슴을 울렸다.
15년간 지평리 전투와 몽클라르 장군을 알려온 김성수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 대표를 5월 28일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양평이 고향이신가 했는데…” “전혀 관계 없습니다.” 사시(8회) 합격 후 국제거래·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김 동문이 지평리 전투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2004년 운영하던 변호사 사무실 자료를 정리해 양평 용문의 한 건물 서고에 보관했다. “우연히 마을을 걷다 전적비를 봤어요.
6·25때 격전이 있었다는데 동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거예요.
육사 출신 친구가 일본에서 나온 6·25 전쟁사 책을 구해주기에 읽어보니 굉장히 중요한 전투더군요.
미국에서도 ‘Coldest winter’ 등의 책에서 비중 있게 다뤘는데 우리만 잘 모르고 있던 거예요.
3일이란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데다, 국군은 지휘관 없이 카투사만 참여해서 그랬나 싶었죠.”
몽클라르 장군부부와 자녀
지인 10명과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을 꾸려 지평리 전투 관련 자료를 찾고 미국에 있는 전투 생존자를 수소문했다.
곧 군인, 기업인, 언론인 등이 가세해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모두 양평에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이다.
전투에 참여한 이들 중 유독 몽클라르 장군이 누군가와 겹쳐보였다. “전쟁 영웅의 3가지 코드가 있어요.
목숨을 거는 자세, 맡은 업무에 대한 철저함, 공포를 극복하는 용기.
몽클라르 장군이 갖춘 이 덕목을 바로 이순신 장군이 갖고 계셨죠.
계급과 무관하게 백의종군한 것, 부하를 아끼고 소통하려 하는 모습도 유사했고요.
이 얘길 했더니 한 언론에서 ‘푸른 눈의 이순신’이라고 칭하더군요.”
몽클라르 장군은 ‘뼛속까지 군인이면서도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지휘관을 지낼 때 새로운 대원이 들어오면 미리 그 사람의 나라에 대해 공부하고 그 나라 말로 대화를 시작했답니다.
자신도 헝가리에서 프랑스로 온 이민자 집안이라 그 마음을 알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 오기 전 전국을 돌며 직접 모병했는데 외인부대 출신만 800여 명이 모였죠.
전장에선 멀리서 망원경을 들고 지시하는 대신 총탄이 쏟아지는 참호에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고,
중공군의 야간 피리에 위축되지 않게 수동 사이렌을 울리게 했어요.”
사기 충천한 프랑스 대원들은 지평리 전투의 전초전인 쌍굴 전투부터 ‘총검 돌격’을 감행하는 용맹함으로 보답했고,
계속된 패퇴로 침체됐던 미군까지 고무시켰다.
2010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안느 여사와 연락이 닿아 한국에 초청했다.
참전을 결심했을 때 부인의 태중에 있던 그 아이다.
‘아버지의 전기를 썼는데 발간할 곳이 없다’는 말에 번역 작업을 거쳐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먼저 펴냈다.
사진과 유품 등을 제공받아 추모전도 열었다.
“프랑스에서도 옛 영웅으로 잊혀져 가던 차에 한국의 관심이 너무 감사하다고 하셨죠.
따님은 3년 전 타계하고 남편 듀포 대령과 지금도 교분이 있습니다.
장군의 모교인 상시르 육군사관학교에 갔더니 교장이 자신도 ‘몽클라르 반’에서 공부했다며 장군이 쓰던 군모 복제품을 선물하더군요.
하나는 양평에 기증하고, 하난 강연할 때 들고 다녀요.
마치 장군이 옆에 있는 듯 든든해요.”
묵묵히 펼쳐온 지평사모의 활동에 드디어 응답이 왔다.
지난해 지평리 남한강변 자전거 도로의 3421m 구간을 국가보훈부가 ‘몽클라르의 길’로 지정했다.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군이 딱 3421명.
기존의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보다 더 심도 있게 지평리 전투를 다룰 양평역사박물관 건립도 추진된다.
그는 “지자체가 지평리 전투를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 같아 뿌듯하고, 지평사모의 활동을 잘 계승해주면 좋겠다”며 “양평 특산품 ‘지평막걸리’가 처음 생산된 지평양조장이 바로 지평리 전투 때 프랑스 대대본부로 몽클라르가 지휘한 장소였다.
이 인연을 살려 콘텐츠로 발전시키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다.
지평리 전투의 또다른 주역인 미군 23연대장 프리먼 대령에 대한 책도 준비 중이다.
귀국 후 군인 재활병원 원장을 지냈던 몽클라르 장군은 무공훈장을 받고 1964년 나폴레옹이 묻힌 파리 앵발리드의 지하 묘역에 잠들었다.
몇 해 전 김 동문은 그곳을 찾아 ‘한국을 도와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파리에 가실 때 한 번쯤 들러 장군에게 인사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개선문에도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찾아보세요.
지평리 전투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