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七章 태동(胎動)
1
취영은 느닷없이 찾아온 손님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망설였
다.
동생 비건을 찾아온 사내 두 명.
선자불래(善者不來)요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하지만 두 사
람은 악의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우선 동생을 찾는 모습이 무척 정중했다.
비건이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윗사람의 성함을 입에 담는 것
이 못내 죄송하다는 듯 극히 공경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이상했다.
해남도 사람들은 동생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오빠는 청천
수라 부르고, 동생은 적엽명이라 부른다. 동생이 종이나 다름
없는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해남도 사람들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다면 대륙에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이 분명한데……
동생은 대륙에서 무슨 일을 했기에 사람을 죽이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찾아온단 말인가.
* * *
적엽명은 상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아니다. 상술을 말하기 이전에 말에 대한 관찰력이 뛰어나다
는 부분을 먼저 말해야 한다.
말의 안색만 살피고도 무슨 병에 걸렸는지 집어냈고, 말이
달리는 모습만 보고도 어떤 혈통(血統)을 이어받았는지 알아내
는 재주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적엽명으로 하여금 천여 필에 이르는 말들을 총감(摠
監)하는 위치에 서게 만들었다. 종으로 부려먹었지만, 사생아
라고 멸시했지만 재능이 워낙 탁월하니.
그런 면에서 비가주 비사는 타고난 목부였다.
상술 또한 뛰어나다는 것은 장성하여 턱밑에 거뭇거뭇한 수
염이 나기 시작할 무렵에야 알려졌다.
"그 놈이 과하마(果下馬)를 수송한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알아봐!"
취영은 홍두깨처럼 느닷없이 들려온 풍문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런 모양이에요. 가주께서 먼저 말씀하셨대요."
어느 날 아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비가보 전체가 지진이라도 만난 듯 들썩이는 것 같았다. 목
부는 목부들대로, 시비들은 시비들대로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
는 어디나 한결같이 비건이 뇌주반도로 말을 수송한다는 소리
뿐이었다.
말을 수송하는 것은 중차대한 일이다.
해남도에서 대륙을 오가는 교통수단은 배밖에 없으니 뱃길
수송이야 당연하지만 그게 여간 어렵지 않다.
말은 신경이 예민해서 험한 파도에 놀라 소동을 일으키기가
일쑤이고, 소동을 일으켰다 하면 배가 뒤집히는 것은 여반장
(如反掌).
문제는 말의 숫자다.
한 번 배를 띄우는데 보통 백오십 필에서 이백 필을 수송한
다.
말의 숫자만 가지고 따질 때는 비가보가 소유한 전체 말의
이 할에 가깝다.
그렇게 많은 말이 혹여 풍랑이라도 만나 수장(水葬)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관부에 제공하는 말이라면 사정이 더욱 나빠진다.
조정에서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칙령(勅令)을
선포한 바 있다.
말 일강(一綱:말 오십 필)을 운송할 경우 이 할에 해당되는
아홉 필이 분실되면 상을 준다. 열 필이 분실되면 상도 벌도
없고, 열 한 필이 분실되면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
다.
뭍으로 말을 수송하면서 단 한 필도 손실 없이 넘겨준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게 중차대한 일을 이제 열여섯 밖에 되지 않은 풋내기,
종, 사생아인 비건에게 일임한 것이다.
비건은 배 세 척에 일강씩 모두 삼강을 싣고 떠났다.
배를 띄우는 날도, 말에게 먹일 건초도 모두 비건이 혼자 해
냈다.
그것이 비가보의 관습이다. 뇌주반도로 말을 수송해갈 총감
이 결정되면, 총감은 보주를 제쳐놓고 수송해 갈 말에 대해 전
권을 행사한다. 위임받은 날부터 말을 건네줄 때까지.
"세 척을 썼다고?"
"그렇다네 그려.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허어! 말을 잘 안다고 추켜줬더니만 아예 안하무인이네. 삼
강이면 적어도 대여섯 척은 필요할 텐데."
"세 척에 오십 필씩 나눠 실은 모양인데 미쳐도 단단히 미쳤
지. 말이 바다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
나?"
말해주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설사 앞이 환히 내다보이는 일을 저지른다 해도 총감이 결정
된 이상 모든 일은 총감의 뜻에 따랐다. 부정적인 말이나 싸
움, 언쟁 같은 것을 일절 금했다. 부정을 타면 안 되니까.
놀라운 일은 이틀 후에 벌어졌다.
뇌주반도에서 날아온 전서구에 의하면 단 한 마리도 손실 없
이 삼강 모두를 고스란히 넘겨줬단다.
믿을 수 없었다. 기가 막혔다.
비가보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대경사였다.
"마가(馬價)로 육백(六百) 정(錠:은덩어리)에 상(償)으로 사
십 정을 더 받아 왔습니다."
열 마리 값!
대단한 이문(利文)이었다. 이문은 그것뿐이 아니다. 보통은
배 다섯 척, 조금 불안하면 여섯 척에 분승하여 싣던 것에 비
하면 두세 척을 덜 썼으니 그것만 해도 백 정은 남아돈다.
"휴우! 사람을 놀라게 하는구나. 삼강이나 되는 말을 고스란
히 넘겨줄 수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건초에 쥐오줌 풀을 섞여 먹였습니다."
"쥐오줌풀……?"
"건초에 쥐오줌풀을 섞여 먹이면 격랑(激浪) 속에서도 말들
이 놀라지 않습니다. 모두 순한 강아지처럼 말을 잘 듣죠."
비가(蜚家)의 망나니, 비건은 불가능한 일을 해냈으면서도
얼굴빛은 우울했다.
적엽명촌경(赤葉明村逕)이란 말은 그 때부터 생겼다.
상인, 혹은 관부와 직접 거래하는 일까지 도맡은 다음부터
비건은 적엽명이라고 불렸다.
"보주가 비가보를 누구에게 물려줄까?"
"당연히 청천수지. 적엽명은 사생아잖아."
"하기는 팔삭둥이는 들어봤어도 육삭둥이는 못 들어봤으니
까. 거참, 머리를 쓰려면 빨리 쓸 것이지. 두 달만 먼저 안겼
어도 비가보를 물려받았을 텐데."
"저러다 마는 거야. 죽을 때까지 뼛골 빠지게 일만 하는 거지
뭐."
적엽명은 세인들이 뭐라고 말하던 일절 신경 쓰지 않고 말만
보살폈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박해(迫害)가 당연하다는 듯이.
이름이 널리 알려진다는 것은 좋은 것인가.
해남도 사람이라면 적엽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런 결과는 적엽명에게 한 가지의 복(福)과 한 가지의 시련
을 안겨 주었다.
복은 여인을 만난 것이다.
유소청.
그녀는 법도가 엄격하기로 소문난 유가의 외동딸이었다.
청천수의 혼인식에 유가주와 함께 방문한 유소청은 적엽명을
처음 본 순간부터 친오빠처럼 따랐다.
앳되고 귀여웠다.
여인이라고 할 수는 없었고, 철부지 소녀에 불과했다.
적엽명도 유소청을 만남으로서 편안한 안식처를 찾은 듯 했
다.
"오빠는 왜 그런 옷만 입고 다녀?"
"편안하니까."
적엽명은 볼품 없었다. 치렁한 머리는 다듬지 않아 봉두난발
(蓬頭亂髮)이고, 거지도 입지 않을 만큼 헤어진 마의(麻衣)는
검은 색에 가까웠다. 거기에다 고약한 냄새까지 풍겼다. 비가
를 이어받아야 할 막내로써 남의 눈도 있을 텐데 적엽명은 편
안하다는 이유로 한사코 다 떨어진 마의만 고집했다.
"말을 돌본다는 것이 생각 외로 힘든가봐. 그래?"
"아니, 전혀 힘들지 않아. 말이란 놈은 워낙 겁이 많은 놈이
거든."
"말이 겁 많아? 전혀 몰랐네."
"자신을 끔찍이 아끼는 놈이야. 말이 한참 달릴 때 그 앞에
벌렁 드러누우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아?"
"몰라. 어떻게 하는데?"
"훌쩍 뛰어넘어."
"영리하네."
"영리해서 아냐. 제 발목이 다칠까봐 겁이 나서야. 만약 뒤
에 누우면 어떻게 하는지 알아? 뒤에 있으니까 다칠 염려가 없
잖아. 어김없이 뒷발질을 해대. 그래서 말 뒤에 있으면 항상
조심해야 돼."
"그렇구나."
적엽명은 말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신이 나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시련은 조금 늦게 찾아왔다.
그 동안 비가보에서만 쉬쉬하고 감춰두었던 비사(秘事)가 어
느 틈엔가 해남도 전역으로 퍼진 것이다.
"적엽명이 사생아라며?"
"우리와 같은 여족이래. 참 대단한 여자야. 비가보를 꿀꺽하
려고 했으니."
"육삭둥이가 정말 있을지도 모르는데……"
"에끼! 이 사람아! 자네 여편네가 육삭둥이를 낳았다면 자넨
가만있을 텐가?"
"그걸 가만 내버려 둬? 초주검을 만들어놓지. 아냐. 그 날로
저 죽고 나 죽는 날이지 뭐."
"저는 그러면서 말은 쉽게 하지."
"남 이야기니까 그렇지."
유소청은 적엽명이 마의만 입는 이유를 알았다.
그녀는 근 한 달 동안이나 적엽명을 만나주지 않았다. 시비
의 몸을 빌려서 태어났다는 정도만 되어도 그렇게까지 야박하
지는 않았을 게다. 하지만 여족인의 피가 섞였고, 아버지가 누
군지도 모른다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유가에서는 적엽명과 유소청의 만남을 단절시켰다.
단절된 것은 또 있다.
십이 세가를 이어받아야 할 막내들만의 회합(會合)인 십이용
봉회(十二龍鳳會)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아니, 소문이 나돌고
난 다음부터 십이용봉회는 자연스럽게 깨져버렸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어?"
"……"
적엽명(赤葉明)은 언제나처럼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소청은 새삼스럽게 적엽명을 쳐다보았다.
그가 새롭게 보였다. 언제나 그렇다. 적엽명은 만날 때마다
새로웠다. 때로는 좋은 의미로, 때로는 나쁜 의미로.
'삼강이나 되는 말을 수송하는데 배 세 척 밖에 안 썼다.'
'광동으로 황담색마 한 마리를 파는데 물경 은 육십 정이나 받
았다.'하는 말들은 좋은 의미였고, 누구에게 맞았는지 전신이
피범벅이 되어 봉창(封窓)을 두들기는 일이라거나 또는 한 달
전처럼 잔뜩 만취(滿醉)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일 같
은 것은 나쁜 의미였다.
화각(花閣)은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강성오가의 한 자리를 지탱하게끔 한 절정무인들이 득실거리
는 곳이 유가다.
그런데 적엽명은 그들의 눈길을 피해 화각까지 들어섰다.
"세상에는 말야.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거야. 어느 곳
이나 반드시 허점은 있기 마련이지. 나는 허점을 파악해 내는
데 소질이 다분하거든."
말버릇인지는 몰라도 적엽명의 말투는 늘 자학(自虐)에 가까
웠다. 그리고 그런 말투를 듣다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연민(憐愍)이 솟구치고는 했다.
"사귀라는 인간 말종들과 어울린다며?"
인간 말종들이라는 사귀와 어울린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
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
다. 사람들은 대부분 여족의 피가 섞였으니 제 부족을 찾아간
것이 뭐 어떠냐고 비웃었다.
"그보다는…… 보고 싶었다."
"안 돼. 이제 찾아오지마. 어서 가. 아버지에게 들키면 큰
일 나."
"후후! 죽기밖에 더하겠어?"
"죽으려면 나가서 죽으란 말야. 꼭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해
야 직성이 풀려."
"이것…… 돌려줄게."
적엽명은 정성스럽게 싼 붉은 색 보자기를 내밀었다.
"뭐야?"
"책."
"책?"
"네가 빌려준 것."
"내가 언제?"
"후후! 한 달 전에."
"한 달 전……? 아!"
유소청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한 달 전, 만취가 되어 찾아왔을 때 간곡히 타이른 적이 있
다. 현실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치라고. 그러려면 우선
배우라고. 무공도 다시 익히고, 학문(學文)도 배우고.
적엽명은 희미하게 웃었다.
자학(自虐), 자조(自嘲), 자괴(自愧)……
그런 모습이 속상해 책 몇 권을 집어던졌다. 그 안에 든 내
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은 다음에나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적엽명의 자신의 말대로 책을 읽었다
는 것이 중요하다. 정작 자신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그걸 다 읽었어?"
"몇 권이나 집어던진 줄 알아?"
유소청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속이 상해 집어던진 것이라 무슨 서적인지, 몇 권이나 되는
지 알 턱이 없었다.
"모두 일곱 권이야. 그 중에 네 권은 이미 읽었던 거고……"
"잘했어. 정말 잘했어."
이제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반가운 사람을 만났고, 아주 좋은 소식을 들었으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
유소청은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다.
적엽명은 결국 발각되었고, 죽지 않을 만큼 흠씬 두들겨 맞
은 다음 개처럼 질질 끌려나갔다. 그가 끌려간 자리에는 붉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때부터다.
그 때부터 적엽명은 본격적으로 사귀와 어울리기 시작했고,
성질 한 번 제대로 부리지 않던 바보 같은 성격에서 건드리기
만 하면 툭 터지고 마는 폭발적인 성격으로 변했다.
그리고 결국은…… 무신년 사건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적엽명은 종.
하지만 적엽명이란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두 사내는 비건이라고 불렀다.
해남파는 중원 팔파일방과 암묵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해남도에서 죄를 짓고 도망간 죄인이 뭍에 올랐다는 전서(傳
書) 한 장만 보내면, 그가 설사 해남도를 무사히 빠져나갔다
할지라도 팔파일방의 손아귀까지 벗어날 수는 없다.
비건이란 이름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가는 팔 년은 고
사하고 며칠도 못 넘겨 압송되는 신세가 되었으리라.
그러면 이들은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동생의 본명(本名)을 알고 있단 말인가.
생김생김이 기이한 것도 선뜻 집안으로 들여놓지 못하는 이
유 중 하나였다.
취영은 두 사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음쇠가 떨어져 덜컹거리는 문짝을 잡고 선 사내는 키가 칠
척(七尺)에 이르는 거한(巨漢)이다. 그는 우람한 몸으로 대문
을 턱하니 가로막고 섰는데, 팔뚝 하나가 웬만한 장정 허벅지
만 했고, 손등, 팔목 할 것 없이 검게 드러난 털은 남만(南蠻)
에 산다는 대성성(大猩猩:고릴라)을 연상시킨다.
덩치만 우람한 것이 아니다.
퉁방울만 하게 부릅뜬 눈을 보다 보면 목줄을 움켜잡고 어떤
짓이라도 벌일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또 한 사내는 거한과 모든 면에서 다르다.
거한은 오관이 큼직큼직한 반면 옆 사내는 오밀조밀했다.
뱁새눈처럼 작은 실눈이었고 뾰족한 코, 얄팍한 입술……
그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무명옷을 입은 거한과는 달
리 깨끗한 유삼(儒衫)을 입었는데 그 모습이 썩 잘 어울렸다.
거한이 사람을 죽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독기(毒
氣)를 피어내는데 반해, 유삼을 입은 사람은 조심성 많고 치밀
한 성격인 듯 했으며 글줄은 읽었을지언정 주먹다툼과는 거리
가 먼 학자(學者)처럼 비쳐진다.
키는 오척 팔촌 정도? 보통사람보다는 큰 듯 한데 거한과 같
이 서있으니 흡사 난쟁이처럼 작아 보인다.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다 오십 줄을 바라보는 나이고, 웬만
한 일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은 냉정한 독기(毒
氣)가 눈빛에 섞여 있다는 점이다.
적엽명! 동생을 처음 봤을 때의 눈빛도 바로 저랬다.
"비…… 건님께서 안에 계시지 않다면 여기서 기다려도 좋을
지……"
거한이 어울리지 않게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다. 그것은 거한 혼자 생각일 뿐이다. 거한이 부드럽게
말한다고 내뱉은 음성은 천둥이 치는 듯 우렁차서 취영은 얼굴
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그, 그러세요."
취영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밖에서 기다리기에는 날씨가 너무 궂었다.
하늘은 빗방울을 사흘 내리 쏟아붓고도 모자랐는지 전혀 그
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우의(雨衣)조차
입지 않아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다.
거한과 실눈의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대문 옆에 쭈그리고 앉
았다.
"쌍! 비 한 번 더럽게 퍼붓네."
거한이 생각 없이 본색을 드러낸 듯 중얼거렸다. 아니, 외쳤
다.
"아직 멀었어. 이건 새끼 장마야. 본격적으로 쏟아지면 웬만
한 들판은 강으로 변할걸?"
"괜히 겁주지 말어! 빌어먹을! 내 이 놈의 새끼들을 잡기만
하면 모가지를 확 비틀어서. 왜 사람을 엄하게 고생시키는 거
야!"
취영은 거한이 금방이라도 목을 비틀어 버릴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손은 목을 움켜잡았다. 다행히
거한은 말만 요란할 뿐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휴우! 도대체 어디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이런 막돼
먹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해남도에서도 그랬다.
무슨 만천강의 수귀라나? 백석산의 황유귀? 사귀는 친구들이
란 것이 한결같이 천대받는 여족들 중에서도 망나니라고 소문
난 놈들뿐이었니. 세간의 평판이 나빠진 것을 탓할 수 없지 않
은가.
전에는 이런 자들이 대문 앞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있고, 오빠가 있었다.
가전무공인 일장검법은 막돼먹은 망나니들이 비가보 근처에
서 얼쩡거리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호랑이간을 삶아
먹은 인간도 없었지만.
오빠가 몸만 성했다면……
취영은 몰락한 가문, 척추가 부러져 목 위만 움직이는 오빠
를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눈물이 맺혔다.
그것도 말이라고 과하마 몇 마리에 매달려 잊고 있었던 가족.
적엽명이 돌아오고, 오빠가 상산암에서 내려오고, 이제부터
바깥일은 오빠와 자신이 할 테니 안살림만 맡으라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취영은 예전의 나약했던 여자로 돌아간 듯 했다.
하기는 그 동안 여자라는 생각조차 잊고 살았으니.
"그러나 저러나 망해도 폭삭 망했네. 해남도에서는 고개 빳
빳이 세우고 산다고 들었는데."
"입 조심 좀 해라. 내일 모레면 오십을 넘기는 사람이 그렇
게 입이 험악해서야…… 쯧쯧!"
"우라질! 너나 입조심하고 살아라. 아, 본대로 생각난 대로
말하는데 뭐가 잘못됐어!"
"알았다, 알았어. 잘못된 것 없으니까 마음껏 떠들어라."
몸집이나 성격상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
그들은 죽이 맞았다. 어깨를 마주하고 앉아서 농을 주고받는
폼이 예전부터 친근한 사이란 걸 알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내의 험악한 입담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두워지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가슴 조리는 취
영의 마음을 알았는지, 빗속을 뚫고 어스름한 그림자 두 개가
일직선으로 비가보를 향해 걸어왔다.
한 사람은 누군지 모르지만 키가 되게 작고, 또 한 사람은
분명히 동생 적엽명이다.
취영은 한 달음에 달려가 반기고 싶었다.
낯선 사내 두 사람으로 받은 압박감은 첩이 다른 사내와 간
통하여 낳은 자식이란 생각으로 무진 학대를 가했던 의붓동생
을 세상에서 제일 반가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보다 먼저
몸을 일으킨 두 사내가 나는 듯이 달려가 동생 앞에 한쪽 무릎
을 털썩 꿇으며 예(禮)를 취했으니까.
최대한 공경스런 자세로 예를 취하는 두 사내, 그것을 당연
한 듯 받아들이는 동생.
취영은 혼란스러웠다.
첫댓글 감사합니다.